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22
22
소문이란 참 이상한 것이어서, 거짓이 진실인 양, 혹은 진실이 거짓인 듯 둔갑해서 돌아다니기도 하며, 어떤 소문은 진실로 시작해서 거짓으로, 또는 거짓으로 시작해서 진실로 끝맺기도 한다. 요 근래 쇠락한 청룡파의 잔당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소문도 그런 류의 하나로, 거짓이 진실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되었다.
시작은 한 예쁘장한 계집이 실은 청룡파 두목의 숨겨놓은 애첩이었다는 허무맹랑한 지점에서 출발했다. 뿌리 없는 소문은 민들레 홀씨마냥 여기저기로 가볍게 퍼지며 점차 살을 더하다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환이 계집을 데리고 도망친 건, 아버지의 애첩을 몰래 사모했기 때문이라는 불효자 설이 첫 번째 갈래요, 그것이 아니라 애첩을 빼앗아간 상대편 오야에게서 계집을 되찾아 오려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효자 설이 두 번째 갈래였다.
뭐가 되었건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사실이라, 저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한 명이 총대를 메기로 했다. 환이 아버지를 위해 계집을 빼돌렸다는 입장으로,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상대편의 따까리를 자처한 것이다. 따까리를 모방한 이 충신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잔뜩 놀라 본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품에 안고.
‘숨겨둔 애첩이 아니라 딸이라는데.’
‘딸이면 환이랑은 이복남매인가?’
‘그것이 이복도 아닌 모양이다.’
‘그게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씨 같고 밭 다르면 이복이지.’
‘그것이 씨도 틀린 모양이더라.’
‘뭣이? 그럼 누가 누구 씨여?’
‘쉿!’
또 소문의 묘한 점 중의 하나는 당사자의 귀에는 가장 늦게 들어가는 것이라, 이렇게 점점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동안, 어떻게 하면 이정후라는 난적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에만 골몰한 청룡파의 주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날 전까지는.
그날이라 함은, 살을 에는 칼바람을 맞아 온몸이 얼어붙은 환이 심장은 칼바람보다도 날이 서서 집으로 돌아온 날이기도 했고, 똘마니 중 누군가가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는 모르지만 친자 확인서의 사본을 청룡파 내부로 들여온 날이기도 했다.
아내와 심복의 간음 증거인 하얀 종이를 먼저 발견한 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환의 서류상 아버지, 바로 쇠락한 청룡파의 주인이었다. 백발이 쭈뼛 서고 주름진 입술이 노성 섞인 신음을 흘리는 동안 환은 승필과 독대 중이었다.“앞으로 차가 필요할 땐 말해. 바로 빌려줄 테니.”
“…….”
막상 앞에 서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당신이 내 생부가 맞는지, 그렇다면 내 어머니와는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그런 사이인지, 이 사실을 지금껏 아버지라 불러왔던 그 사람도 아는지. 묻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아버지.”
앞으로는 차를 훔치지 말라며 타이르고, ‘일단 몸부터 녹이자.’며 태연하게 물을 끓이러 뒤돌아선 등을 향해 나직이 불렀다. 커피포트를 기울이던 손이 허공에 그대로 굳었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굳이 친자 확인서 따위를 보지 않아도, 승수가 한 얘기들은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이제 어쩌지.’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바뀌었다. 이십 년을 이고 살던 하늘이 한순간에 변했는데 저를 둘러싼 현실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저 사내에겐 그대로일 모양이었다.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여 포트의 스위치를 올리고, 머그컵에 믹스 커피를 부었으며, 마침내 물이 끓자 컵에 따른 후, 티스푼을 꽂아 내밀었다.
“…….”
“…….”
내민 자와 받아 쥔 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붙어 오래도록 떨어질 줄을 몰랐다. 환이 무용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가 학원비를 일부러 대주지 않을 때, 재즈용 슈즈를 새로 장만할 때가 되었을 때, 으레 이곳에 찾아와서 지금처럼 커피를 얻어 마시며 투정하곤 했다. 인스턴트커피를 타는 것처럼 익숙했던 이 풍경이 오늘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이렇게 된 이상, 아무렇지 않게 마주 앉아 차를 홀짝이는 일은 앞으로 없지 않을까.
끼아아아아악!
환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마!’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뛰어나갔다. 침실 바닥에 머리채를 가득 휘어잡은 채 누군가를 깔고 앉은 백발 남자가 먼저 보이고 바닥에 얼굴이 짓이겨 붉은 립스틱이 광대뼈까지 번진 처참한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어째서 제 입에선 저번처럼 ‘아버지! 위험해요!’란 말이 먼저 나오지 않는 것일까. 아니, 아버지란 단어를 아예 발음할 수 없다. 이런 저를 직감했는지, 광기에 사로잡힌 백발이 쇳소리를 내며 악다구니를 질러댔다.
“오오냐, 너부터 죽여주마!”
반쯤 들려 있던 머리채를 흔들어 바닥이 울릴 정도로 연달아 찧어 누르던 백발이, 잽싸게 일어서 번들거리는 눈으로 달려들었다. 손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얼음송곳이 뽑힌 머리카락과 뒤엉켜있었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마치 살아있는 듯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뒈져버려!”
송곳의 끝이 정확히 환의 이마 정중앙을 향한 순간, 커다란 무언가가 뒷덜미를 확 낚아채 그를 뒤로 내동댕이쳤다. 나동그라졌다가 간신히 일어난 환의 눈앞에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산발이 된 여성의 목덜미에 손잡이까지 깊숙이 박히는 송곳을 확인한 백발이 입꼬리를 히죽 올리며 다시 송곳을 뽑았다.
솟구친 피가 사방에 분수처럼 튀었다. 송곳의 끝이 표적을 바꾸어 칼자국을 향했다. 높이 치켜든 송곳은, 그러나 내려꽂기 전에 복부에 가해진 린치로 힘을 잃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무기를 잃은 백발이 창문을 넘어 도주했다. 어느덧 주위를 붉게 물들이던 핏줄기가 멎었다. 그 앞에 무릎 꿇은 칼자국이 가만히 여인의 눈을 감겼다.* * *파 드 부레-
들려오는 첼로 소리에 맞춰 발끝을 세워 꼿꼿이 섰다가 무릎을 굽혔다가 하면서 미세한 종종걸음으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스텝을 계속 바꿔가며 무대를 가로질렀다. 빈사의 백조. 몇 번이나 날개를 펴보려 퍼덕이다 결국엔 고개를 꺾고 마는 애처로움의 상징.
“잘했어! 훌륭해!”
안나 파블로바의 독무 영상을 닳도록 돌려 보며 연습하다가 마침내 선생님께 칭찬을 들은 어느 오후. 기분이 좋아져 장난스럽게 한 바퀴 턴을 도는데, 언제 왔는지 홀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는 이정후가 보였다. 입가에 걸린 잔잔한 미소와 함께.
“어?”
한달음에 달려가자 한 손으론 허리를 꼭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론 소매를 당겨 이마의 땀을 조심스레 닦아준다.
“셔츠 더러워져요.”
“상관없어.”
“에이, 그래도요. 빨리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네?”
잠깐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쉬운지 짧게 끄덕이는 고개에 망설임이 묻어났다. 서둘러 갈아입고 함께 본가로 돌아가는 차 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럼 왜요? 저 연습하는 거 보러 온 건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나도.”
흠흠. 어디로 봐도 억지 헛기침이었다. 더욱 의아해 빤히 바라보자 이정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음 말엔 윤희도 덩달아 얼굴에 열이 올랐지만.
“나도 연습하는 것 보고 싶었어.”
“…….”
“그동안 늘.”
이렇게 달달한 말이 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좀처럼 속내를 비추지 않는 이정후 아닌가. 분명 쉽지 않았을 고백에 고작 뱉느니 투정이다.
“몰라. 미워요.”
“나도 마찬가지야.”
“치.”
“귀걸이 또 잃어버리기만 해. 그땐 정말 미워할 테니.”
협박 같지 않은 협박 끝에 이정후가 지금 막 생각 난 사람처럼 품속에서 작은 보석함을 꺼냈다. 흰색 공단 위에서 한 쌍의 귀걸이가 은은한 복숭앗빛을 냈다.
“와, 색깔 예쁘다. 크리스탈인가?”
“…….”
연한 핑크색이 특이해 묻자, 이정후가 진심으로 마음 상한 표정을 지었다.
“로즈 다이아. 전 세계에 몇 없는 희귀한 다이아야.”
“다이아라고요? 와, 이런 색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내가 너한텐 늘 최고만 해주는 걸 잊었어?”
투덜대지만 귀걸이를 끼우는 손길은 다정하다.
“저쪽.”
얼굴을 돌리는 척하면서 뺨에 살짝 뽀뽀하자 이정후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주인을 만난 귀걸이가 경쾌하게 달랑거렸다.
“예뻐요?”
“아니. 엄청 미워. 말로 다 못할 정도로.”
잠자코 앞만 보며 운전하던 석우가 도저히 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석우는 모를 것이다. 이정후가 ‘서로 이렇게 미워하면서 살자.’고 말한 순간, 둘 사이에선 미움이라는 단어가 세상과는 다른 뜻을 품게 되었음을. 그래서 밉다 하면 할수록 서로를 향한 마음이 더욱 깊어지는 밀어인 것을.
‘하지만, 언젠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홍등이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진 꿈을 꾸었던 새벽, 잠에서 깬 윤희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걱정스레 지키고 있는 두 눈과 마주쳤었다.
“아까…….”
“…….”
“왜 고맙다고 했어요?”
분명히 그랬었다. 칼을 겨눴을 때, 윤희의 손을 잡고 직접 급소로 옮겨주면서 ‘고마워’라고.
“…….”
“정말 찔렀으면 어쩌려고 했어요.”
“네가 주는 건,”
“…….”
“뭐든 달게 받지.”
끝내 고맙다고 한 이유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죄책감 때문이 아닐까 막연히 짐작했다. 불구대천 원수의 딸인 자기를 볼 때마다, 끔찍한 아버지의 시체가 떠오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혹은 그런 자신을 마음에 두고 결국 복수를 포기한 채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음이 더 달가웠던 게 아닐까 하고.
뭐가 되었건 그 밤, 윤희를 바라보는 눈빛은 포근했고, 연신 다독이던 손은 따뜻했다. 초경 하던 날 배에 손을 얹어주던 순간처럼. 한동안 멀리했던 자신을 다시 안아 데려갈 때처럼, 그렇게.
환의 말이 맞았다. 의도가 어쨌든 한겨울 온몸이 부르트도록 배를 곯아가며 일만 하던 저를 주워 이만큼 돌봐준 건 이 사람이라고. 해서 윤희도 속삭였다. 고맙다고. 그러자 토닥이던 손이 멈추고 대신 조심스레 입술이 다가왔었다. 한참을 망설이는 더운 숨결을, 윤희가 먼저 머금었던 밤. 그 느낌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입술을 살짝 물었다 뗐다.
“아직 찾고 있어.”
“네?”
“그 셋.”
“아…….”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고 오해했나 보다. 청룡파의 참극은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단순한 치정사건으로 알고 있다. 믿고 의지하던 자신의 심복과 내통한 부인을 살해하고 도주한 남편. 흔하디흔한 그저 그런 이야기.
용의자가 전직 조폭이라는 데서 잠깐 세간의 관심을 끌었지만, 모든 사건이 그렇듯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자세한 내막을 아는 이쪽에선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사람을 풀어 최환, 칼자국, 백발 이렇게 세 사람의 자취를 쫓고 있지만 그다지 소득이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네?”
“유학 갈래?”
“유학……이요?”
“좀 더 넓은 물에서 발레 하고 싶지 않아?”
“그럴 실력이…….”
“그동안 붙여준 코치들 통하면 입단도 얼마든지 가능할 거야.”
그런 걸 연줄이라고 하지. 쿡쿡 웃는 모습에 조금은 안심이 되어 같이 따라 웃자, 다시 진지하게 눈을 맞춰왔다.
“그리고 넌 최고니까.”
이 뜬금없는 제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착착 진행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이 결정됐다. 정말 뒤에서 이정후가 어떤 수를 쓴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세계 유수 발레단들에 오디션을 위해 보낸 데모 영상이 무난히 통과해, 6군데 중 5군데에서 입단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받은 것이 그 증거였다.
“지젤의 고향은 프랑스니까.”
언젠가 눈을 반짝이며 지젤이 되고 싶다던 저를 기억했는지, 이정후는 당연하게 프랑스를 꼽았다.* * *“석우, 다녀올게.”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입니다.”
출국을 일주일 앞둔 주말 저녁, 때마침 공연이 시작된 지젤을 보기로 했다. 한국에선 마지막으로 즐기는 공연이었다. 한창 프랑스어를 배우느라 바쁜 석우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떨치지 못하고 다짐을 받았다.
“그럼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앞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괜찮대도. 사람 많은 곳이야. 별일 없어.”
“사람이 많아서 더 걱정된다는 겁니다. 그런 곳이 몸을 숨기기엔 딱 좋으니.”
“정 그러면 알았어. 끝나고 연락할게.”
“네! 그럼!”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이는지, 석우는 불어 선생과 함께 이동했다. 근처 커피숍에서 레슨 받을 모양이었다.
“늦겠다. 얼른 가자.”
평범한 연인처럼 데이트해 보기로 한 날, 길가로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태워준다던 석우의 말을 들을 걸 후회했다. 빈 택시 잡기는 해변의 바늘 찾기 마냥 어려웠으며, 가까스로 잡은 택시는 주말 저녁이라 그런지 도로가 정체돼, 기가 막힐 정도로 느렸다.
결국 공연장에는 30분이나 늦어버렸다. 시간이 꽤 지난 지라 복도가 썰렁했다. 좌석을 확인한 후, 숨을 가다듬고 들어가려는데, 저쪽에서 이쪽을 향해 누군가 뛰어왔다. 익숙한 실루엣에 확인하니 최환이었다.
“최환?”
“피해!”
피하라니, 뭘? 그런데 최환이 여기 갑자기 왜?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사이 시야 오른쪽에 뭔가 번쩍이는 것이 잡혔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광기에 사로잡혀 달려드는 백발의 남자가 눈에 띄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누구지? 아……!’
Ange noir에서 윤희를 보고 탐냈던 남자다. 청룡파 두목. 그 사실을 떠올림과 동시에 백발의 손에 움켜쥔 폴딩 나이프가 번득였다. 순식간이었다. 폴딩 나이프가 윤희의 가슴을 향한 건. 정면으로 내리꽂는 날카로운 은색 호선을 본 순간, 직감했다.
‘이제 끝이구나.’
찰나의 순간에도 믿을 수 없이 침착해졌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장면이어서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눈을 감으려던 그 때, 활짝 펼친 검은 날개가 눈앞을 가렸다.
“무슨, 무슨…….”
정신을 차리고 나자 날개라고 생각했던 건, 저를 감싸 안은 이정후의 검은 슈트였다. 날개처럼 펼쳐진 상의에 적지 않은 양의 붉은 혈액이 진득하게 번지고 있었다.
“안 돼!”
윤희의 비명에 이정후의 상태를 확인한 최환이 다급하게 소리 지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달아나는 백발의 뒤에는 키 큰 그림자가 따라붙었으나 누구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런 것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옆으로 길게 누워 숨을 몰아쉬는 이정후만이 윤희에게는 전부였으니.
“하, 한 때는…….”
“아, 안돼요, 안돼요, 제발…….”
등에 박힌 차가운 금속 조각 때문일까, 이정후의 목소리에 마치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섞여 났다.
“네가 날 죽을 때까지 잊지 않길…… 바랐어.”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아무 말도, 네?”
“설령 그게 증오라 해도.”
“제발, 아무 말도.”
마주 잡은 손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윤희의 가슴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왜 마지막인 것처럼 굴어요? 왜.
“이제 다 잊어. 다 잊고…….”
잊으라니. 내가, 당신을?
“넌 최고야…….”
“아니야, 아니니까, 그런 거 아니어도 되니까……!”
“최고로 만들어 줬으니……최고로 행복하게 살아.”
할 말을 다 마친 이정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감은 두 눈이 너무나도 편안해 보여서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착각이 들었다.
“안돼요, 제발…….”
그러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이정후의 고개가 기운을 잃고 옆으로 툭, 꺾였다.
“아…… 아, 안 돼, 안, 아, 아아아아아악!”
제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직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했는데. 이제부터 시작인데. 제발, 제발 나만 두고 가지 말아요. 우리 아직 더 미워해야 하잖아요. 이렇게 가면, 정말 죽도록 미워할 거예요. 진짜로, 진짜로 많이 미워할 거니까, 그러니까,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