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7
07
햇볕이 따가웠다. 여러 명이 북적거리는 교실 안은 틀어놓은 에어컨이 무색하게 덥고 습했다. 등줄기로 기분 나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찌뿌듯한 기운을 털어내려 부러 기지개를 켜자, 흐릿한 환의 시야 사이로 윤희의 흰 목덜미가 들어왔다. 곧은 자세로 앉아 책에 집중하고 있는 뒷모습에 어쩔 수 없이 두근거리고 만다. 겨우 뒷모습일 뿐인데도.
‘곧 있으면 여름방학인데…….’
한 달 가까이 윤희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초조해졌다. 승수가 좋아한다고 하니 선뜻 다가서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마음을 억누르기만 하자니 간간히 저 밑바닥의 뜨거운 열기가 방심한 틈을 타서 솟구치곤 했다. 지금처럼.
‘왜?’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돌아보며 묻는 입 모양에 그만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져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주체할 수 없이 두근대는 가슴에 열이 올라 손부채질을 하게 되는, 바로 지금처럼.
“끝나고 교문 앞에서 봐.”
“응.”
특활이 다른 권승수를 뒤로하고 반걸음 정도 강윤희의 뒤에 떨어져서 체육관으로 향하는 길, 자연스레 아까처럼 목덜미에 시선이 가닿았다. 가녀린 어깨, 보드라운 잔머리, 창백한 피부와 대조적으로 약간 상기된 뺨. 만지고 싶은 충동에 절로 들린 팔을 간신히 참고 내리기를 수차례. 문득 좋은 꾀가 났다.
“강윤희.”
부러 손가락을 볼 가까이 대고 있다가 부르자, 윤희가 응? 하고 이쪽을 돌아봤다. 그 바람에 그토록 만지고 싶었던 볼이 손가락 끝에 말랑하게 눌렸다.
“뭐야.”
간지러운 듯 고개를 모로 꼬면서 웃는 모습에 또다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뛰기 시작해, 닿은 손가락을 뗄 생각도 못 한 채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강윤희.”
“응? 왜? 말해.”
“윤희야, 강윤희.”
“왜 자꾸 불러. 너 아까부터 할 말 있었지?”
“어? 어떻게 알았어?”
“계속 쳐다보니까.”
재촉하는데도 쉽사리 입에서 나가지 않는 그 말. 묻고 싶었다. 너는 권승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너도 마음이 있느냐고. 만약 아니라면 나한테 기회를 달라고 해도 되겠느냐고.
‘그래, 물어보자.’
단단히 결심했다. 마침 승수도 자리에 없고 둘 뿐이지 않은가. 해서 잔뜩 주먹에 힘을 쥐고 입을 열었다.
“방학 때 뭐해?”
등신. 그걸 물으려 했던 게 아니잖아.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질문에 그만 주먹의 힘이 스르륵 풀렸다.
“뭐야, 그 말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어? 방학 때 뭐할지는 잘 모르겠어.”
당연히도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이정후가 하라는 대로만 해왔기 때문에, 또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그냥 학교에 입학하기 전과 비슷하지 않을까, 막연히 예상만 할 뿐.
“그렇구나. 그냥, 궁금해서.”
“싱겁기는.”
후후 웃으면서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특활이라 해도 대부분은 호기심으로 신청한 애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무용을 해온 건 환과 윤희 둘뿐이라 자연스레 짝이 됐다.
천천히 목부터 스트레칭 하다가 다리를 좌우로 길게 뻗는 사이드 스트레칭에 이르러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좌우로 다리 사이를 넓히기 시작했다. 한쪽은 발로 허벅지 안쪽을 버텨주고 다른 한쪽은 점점 자세를 낮춰 바닥에 밀착해 가는 동작으로, 굳이 환이 지지해주지 않아도 윤희의 허리선은 늘 그렇듯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바닥과 평행을 이뤘다.
‘아름답다.’
바닥에 엎드린 채 반동을 주느라 강윤희가 제 시선을 못 느끼는 동안 마음껏 내려다보며 눈으로 샅샅이 탐했다. 왼쪽 어깨에 난 작은 점부터, 오목하게 패인 꼬리뼈 위쪽까지.
“환아.”
“…….”
“최환!”
“……어? 어. 왜?”
“왜는 뭐가 왜야, 이제 너도 해야지.”
“그러네. 그래, 하자. 할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얼른 잡고 있던 손목을 풀어주자 바로 상체를 세운 윤희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며 정돈했다. 홀린 듯 바라보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이 웃는 모습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제 너 하자, 내가 잡아줄게.”
“아, 응.”
그렇게 잡힌 제 두 손목의 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려 바닥을 향해 납작 엎드렸다.
“그렇게 빨리하다가 삐끗하면 어떻게 해.”
살짝 건네는 핀잔에 답할 여유가 없다. 여전히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홧홧하다. 스스로의 열기를 참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아버렸다.
‘나는 너를,’
한 달이나 참아낼 수 있을까?* * *계집이 이제 방학이란다. 테이블 뒤에 서서 정후와 윤희의 대화를 듣던 석우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한 학기 다녀본 소감이 어때?”
“재밌었어요.”
정후가 몇 마디 물어주자 윤희가 항상 그렇듯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이 길어질수록 발그레해지는 볼에 석우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저 계집은 오야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뒤에 서서 둘의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석우는 다시 한 번 자기 생각을 확신했다. 하지만 오야는? 입매는 줄곧 미소 짓고 있지만, 재잘거리는 계집을 바라보는 눈빛은 날카롭다. 매일 보는 풍경이건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고작 고등학생의 별 것 없는 시시한 이야기들을 저렇게 주의 깊게 듣는 이유를.
“갑자기 불러서 돌아봤더니, 볼을 찌르더라구요. 하루 종일 쳐다보기에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냥 방학 때 뭐 하는지 궁금했대요. 참 싱겁죠?”
“그러게.”
“네. 스트레칭도 엉망으로 하고. 요즘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봐요.”
“그랬구나.”
할 얘기가 떨어졌는지 말을 마친 윤희가 괜히 포크로 고기완자를 쿡쿡 찍어대며 정후의 눈치를 살폈다. 몇 번을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놓더니 차마 이정후 쪽은 보지도 못한 채 묻는다.
“재미……없죠?”
그건 석우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시시콜콜한 저 이야기들의 어느 부분이 그의 흥미를 끄는 거냐고.
“아니, 아주 재미있는데.”
“…….”
“윤희 네 일이라면 다 알고 싶어.”
오야의 말에 계집의 얼굴이 한층 붉어지더니 급기야는 목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확실히, 이 계집은 오야를 좋아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석우는 문득 윤희가 불쌍해졌다. 마냥 좋아하는 마음에 빠져서 앞뒤 분간 못하고 달려드는 게 꼭 불에 달려드는 부나비 모양이다.
“윤희야, 방학 때는 발레수업을 늘리려고 해.”
“네?”
“학교 다니느라 연습 많이 못 했잖아. 수업을 더 늘리자. 선생님한텐 이미 말해 뒀어.”
“네.”
이번엔 석우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발레 수업을 더 늘린다니, 귀찮은 일이 늘었군.’
다른 홈 스쿨 과목과는 달리 발레는 늘 교습소에 가서 배운다. 교습소만큼 넓은 방이 본가에 없는 것도 아니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 한 벽면에 거울을 박아 연습실로 꾸밀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 이유는 뭘까. 가끔가다 이정후가 들러서 윤희가 연습하는 모습을 둘러 볼 때마다 은근히 추파를 던지는 발레 선생을 보면, 본가에서 해주십사 부탁해도 거절할 것 같진 않은데. 아니 오히려 그런 제안을 반기지 않을까.
학기 중이면 몰라도 방학에 윤희를 데리고 오가는 건 석우의 몫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이 오갔다. 윤희를 먼저 올려 보낸 정후가 맞은편 자리를 턱짓했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
“그 발레 선생이 특히 잘 가르치나요?”
“갑자기 왜.”
“굳이 그것만 꼭 그 교습소에서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귀찮아?”
“아, 아닙니다. 그저.”
“그저?”
“다른 과목은 선생도 자주 바뀌는데 이 선생은 오래가는 것 같아서.”
“내 마음이야.”
“네?”
“못 알아들어?”
“아, 아닙니다. 알아들었습니다.”
민망함에 뒤통수를 긁적였다. 자신이 질문하는 의도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부러 면박 주는 게 느껴져서 더욱 당황했다. 정후는 그런 석우를 보며 가볍게 웃고 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만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잠시 잊고 있었다. 계집하고 관련된 일이면 사람이 묘하게 바뀐다는 걸.
어쩔 줄 모르는 석우를 빙글거리며 바라보던 정후가 자리를 정리했다.
“이만 일어나지.”
“네, 쉬십시오.”
깍듯이 허리를 굽히는 석우를 뒤로 한 정후는 윤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문 안쪽은 기척이 없다.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데 벌써 잠든 모양이다. 예상대로 숨소리가 고르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어깨에 끌리듯이 가까이 갔다. 이제 막 소녀티를 벗기 시작한 가냘픈 목선, 투명하다 못해 창백한 피부, 대조적으로 붉은 입술로 차례차례 시선이 옮겨갔다.
‘최상품.’
거리낌 없이 찾아와서 돈으로 자기 가치를 매김 받는 여자들을 너무 많이 봐서인지, 습관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소유한 Ange noir의 어느 지점에 내놓아도 이미 최고로 인정받겠지만, 겨우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녀를 이제껏 데리고 있던 건 아니었다.
“으응…….”
뒤척이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가렸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귀 뒤로 넘겨주는 정후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름답다.’
불현듯 떠오른 네 글자에 그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손을 떼고 황급히 뒤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하다. 완전히 강윤희가 잠들어있는 침실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평소답지 않은 짓을 했다는 걸 떠올렸다. 가령 덮어주지 않은 이불 같은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