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9
09
“소식 없어?”
“거절당했습니다.”
“무슨 수작이야, 대체! 같이 죽어보자는 거야?”
“차라리 애들 좀 심어서 동태를 살펴볼까요?”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얼굴인데 긴 칼자국이 꿈틀거리니 분위기가 더욱 흉흉해졌다.
“위험해. 정치권도 끼고 있는 것 같던데.”
실제로 같이 경쟁하던 캐피탈 업체에서 시비를 걸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적인 감사를 받고 결국 구속되었지 않은가. 뜬금없는 조사였기에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잘못 건드렸다간 배로 앙갚음당한다는 것을. 겉으로는 합법적인 업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뒤로는 불법 일수놀이로 더 많은 돈을 챙기는 이쪽에선 약점 잡힐 일이 많아, 섣불리 나서기도 힘든 상황이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떨어졌나.’
헛웃음이 나왔다. 몇 년 전까지 누렸던 영화는 어디 가고. 지금은 이율의 소수점에 전전긍긍하는 한낱 일수쟁이로 전락했다.
처음엔 모든 게 순조로웠다. 고황파의 구역에 한꺼번에 밀고 들어가 창녀들의 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을 때도, 그 일로 인해 대대적으로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던 상대편 우두머리를 몰래 쫓아가 처치했을 때에도. 일을 벌일 때면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 비구니가 되어버린 제 마누라를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주인이 없어진 고황파는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는 듯 보였고, 실제로도 하루하루 쇠락해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구세대의 낡아빠진 인테리어하며, 청룡파 패거리들이 남긴 흉터 때문에 몸에 새긴 채 이쪽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함부로 몸을 굴리던 윤락녀들도 주위의 비웃음을 샀다. 어디, 어디까지 몰락하나 두고 보자 했더니 결국 큰불이 뒤덮어 모든 걸 다 쓸어버렸다. 하나도 남김없이.
분소(焚燒).
과연, 진창을 뒹굴던 것들에게 어울리는 최후라고 생각했다. 제 핏줄이 그 속에 있었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도 같지만, 제가 세상에 뿌린 씨앗이 한 둘이랴. 오히려 죽어 잘 됐다고 마음 편히 생각했다. 후계자는 하나로도 족하다.
“아버지, 아직이에요? 오늘 고해성사하시려면 서둘러야 할 텐데.”
“곧 가마.”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걸까. 성매매단속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대대적으로 투자한 리모델링한 것? 후에 나림동 개발이 정부 정책으로 잠시 막혀 헐값에 부지를 팔아버린 시점에서? 캐피탈 사업에 뛰어들어 상대와 이자 경쟁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알 수 없다. 어차피 이미 쏟아진 물, 흘러버린 시간이었다. 다 차지하고서라도, 어디선가 자금줄을 시원하게 터줬으면 좋으련만.
“아버지.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어요. 어서요.”
“그래 가자, 환아.”
아까부터 재촉하는 최환과 함께 무거운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 *“석우는 종교가 뭐지.”
“무교입니다.”
“대부분은 다 종교를 갖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이정후의 말이 맞았다. 깡패. 폭력을 쓰면서 행패를 부리고 못된 짓을 일삼는 무리. 그 깡패들로 이루어진 조직폭력배면서, 못된 짓을 하고도 어딘가에 켕기는 구석이 다들 있는지 절이든, 교회든, 성당이든 다들 한 가지씩 저마다의 종교는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신앙이라기보다는 제 몸의 안위를 걱정하는 데서 나온 일종의 부적이랄까. 자기들끼리는 우스갯소리로 보험 들었다 하기도 했다.
석우로 말할 것 같으면 신보다는 자신을 믿었다. 잔병치레 한 번 없는 튼튼한 제 몸이 곧 종교였다.
“밥 먹듯이 하는 일이라곤 나쁜 짓밖에 없는 놈이 종교는 가져 뭣합니까. 회개할 것도 아닌데.”
부러 불퉁하게 말을 받았다. 요컨대 왜 자신에게까지 세례를 강요하는가, 불만이 깔려있는 나름의 반발이었다. 윤희는 진작부터 세례를 받은 후, 최근 성당을 옮겼는데 거기서 제 반 친구를 만났다고 얼핏 대화 나누는 걸 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 참 웃겨. 그럼 세례명은 유다로 할까.”
“세례명에 있는 유다는 예수를 배반한 그 유다가 아닙니다.”
“나도 알아. 중의적 표현 몰라? 그나저나 싫다고 하더니 교리 공부 열심히 했나 봐?”
“시키시니 하고는 있습니다만…….”
밤에는 업소 관리하랴, 낮에는 캐피탈 관리하랴, 그렇지 않아도 바쁜 석우에게 없는 시간을 쪼개내어 주기도문을 외우게 시켜놓고, 정작 이정후 본인은 신자가 될 마음은 없는 듯 나 몰라라 빙글거리며 놀리기 바쁘다.
‘그나저나 많이 바뀌었네.’
예전에는 정말 이 인간만큼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지금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건 매한가지지만 가끔은 이렇게 석우에게 농을 치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진 표정을 짓기도 했다. 석우는 그것이 영 싫지만은 않았다. 조금은 돌아가신 전 오야를 닮아가는 모양이라고,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미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다가왔다.”
귀를 기울인 것도 잠시, 절로 졸음이 쏟아졌다. 몸을 쓰는 석우에게 가만히 앉아서 강론을 듣거나, 때때로 일어나 지극히 거룩한, 그래서 도저히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찬송가를 부르는 건 고역이었다.
‘이래서는 세례고 뭐고 다 틀렸다.’
잠결에도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옆구리를 찌르는 이정후의 손길에 얼른 눈을 뜨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렇다만 눈꺼풀이 무거운 건 여전해, 잠이나 깨자 싶어 앞에 놓인 주보를 이리저리 뒤적였다.
석우의 마음에 든 페이지는 숫자와 이름이 가득한 주보의 맨 뒷면이었다. 지루한 성경 말씀보단 누가 얼마나 헌금 했는가 구경하는 게 훨씬 재미있다.
‘어딜 가나 돈 굴러다니는 건 다 똑같구만.’
빙긋이 웃으며 아는 이름도 없는 페이지를 심심풀이 삼아 눈여겨보기 시작했는데, 오늘자 주보엔 생각도 못한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강석우 (감사 기부) 100,000,000]‘일 억?’
자기는 이런 돈을 낸 적이 없는데. 동명이인이겠지. 설마.
‘설마…….’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눈길이 옆으로 가는 건 어째서 일까.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친 정후가 싱긋이 웃더니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석우, 돈 좀 썼네.’* * *오늘도 승수의 옆구리에 최환이 바짝 붙어 섰다.
“강윤희 생일 얼마 안 남았어. 뭐 갖고 싶은지 물어봐주라.”
“…….”
어느덧 계절이 두 차례 바뀌었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따가운 여름 해가 어느 때고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한풀 꺾였다.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요즈음엔 하교 때부터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강윤희와 함께했는데 여전히 화재 사건에 대해 알아낸 것은 하나도 없다. 알아내기는커녕 때때로 석우에게 시시콜콜 제가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최환에 관한 내용은 최대한 누락해서 말하려고 얼마나 제가 노력하고 있는지.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최환은 강윤희가 뭘 갖고 싶은지나 알아다 달라고 매일 같이 조르고 있다.
“최환이 네 생일 챙겨주고 싶어 해.”
“으응.”
윤희가 대강 얼버무렸다. 자신이 최환이나 권승수에게 말해줬던 생일이 진짜 생일이 아니란 것을, 단순히 호적상에 기재된 것일 뿐임을 알고 있다. 그녀를 데려온 계절이 겨울이어서 그렇다는 것도. 때문에 생일을 맞이한다는 것도, 겨울이 다가온다는 것도 윤희에겐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생일을 떠올리면 애써 꼭꼭 눌러 놓았던 기억들이 터져 나오곤 했으므로.
‘제 어미 잡아먹은 재수 없는 년.’
‘내 시계 내놔, 이 도둑년아!’
‘지금 아가리에 밥 처넣을 정신이 있어?’
‘굼뜨기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버러지 같은 년.’
시린 기억과 함께 손등이 쩍쩍 갈라지던 차디찬 그 겨울의 어느 날이 불시에 눈앞에 펼쳐졌다. 진창에 처박혀 매질을 당하고 있을 때 다가와 손 내밀던 그의 모습도. 모질었던 포주도, 따스했던 춘재 삼촌도, 천사 같던 은하 언니도, 모두 선명하게. 지금 그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저를 기억이나 할까.
“갖고 싶은 거 있어?”
“……나림동.”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승수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뭐?”
“아,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옛날 생각, 어떤 거?”
승수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윤희에게 은근 어린 시절 이야기나 지난 이야기를 물을 때면 항상 에둘러 말하거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실망스런 답변뿐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나림동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수년 전 화재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강윤희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림동……가볼래?”
“어?”
어딘지 모르게 잠겨있는 승수의 목소리가 낯설다. 말없이 평소 걷던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도. 여전히 기억속의 포주는 무섭지만, 그래도 혹시나 은하 언니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감으로 윤희도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여기가 나림동이야.”
기억 속 나림동은 붉은 조명이 즐비하던 곳인데. 대형 쇼핑몰과 상가, 올려다보기 힘들만큼 높은 건물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내가 말한 나림동은 여기가 아니야. 지명이 같은 곳인가봐. 데려와 준 건 고맙지만…….”
말끝을 흐리는 강윤희 앞에 승수가 나림동을 떠올릴 만한 단어들을 차근히 늘어놓았다.
“사창가.”
“……어?”
“포주. 붉은 등. 긴 거리 양쪽으로 늘어선 창녀들.”
“…….”
“맞지? 네가 기억하는 풍경.”
“응, 맞아. 그런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큰 화재가 났었어.”
강윤희 너에 대한 소문이 돌 때쯤이란 말은 애써 삼켰다. 윤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불?”
“다 죽었어. 이쪽에 있던 사람들은.”
승수가 팔을 뻗어 쇼핑몰과 건물 하나를 둥글게 묶어 보였다. 그 위에 붉은 등으로 가득했던 골목이 겹쳐졌다. 빌딩 숲 사이로 어린 날 양동이를 들고 동동거리는 제 모습과 함께. 동시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 그럼, 대빵……대빵 이모는? 은하 이모는? 춘재 삼촌도?”
춘재.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가슴속에 삼키기만 했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울컥, 승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