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14
연록흔 – 114화
인화전 뜰에는 하화가 지천했다. 짙푸른 잎들 새로 석류꽃이 주홍으로 탐스러웠다. 살랑 부는 바람에 꽃이 부스대자, 율이 동그란 눈으로 보았다. 록흔은 더 잘 뵈도록 아기를 고쳐 안고 조그만 귓가에 속삭였다.
“율아…… 저 꽃이 지면 열매 맺어 가을이면 석류가 짙붉게 열린단다.”
율이 맑진 눈으로 보더니 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석류나무보다 야틈하게 수국이 흐드러지게 핀 참, 록흔은 아기를 안고 꽃무리 쪽으로 다가갔다. 자줏빛, 푸른빛, 연홍빛으로 꽃송이들은 함박웃음인 양 벌여 있었다.
“바깥에 둘러진 고운 꽃은 씨를 만들 수 없단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정하다 여기지. 그리고 저건…….”
보석인 양 조롱조롱 맺힌 하얀 꽃더미 앞에서 록흔은 고개를 사분히 들었다. 나무 그늘인 양 선 이, 그녀의 소천이었다. 개환례 전에 잠시 들른 듯 갑주 입은 그대로였다.
“…….”
“윤…… 인가?”
“예. 이제는 율이어요.”
저 눈에 차고 넘치는 것을 뉘라서 알까? 록흔은 대답하고 입술을 감물었다. 부모가 어떤 심정이든 아기 율은 통통하고 연한 입술로 저만 알아들을 소리를 했다.
“안으면 바숴…… 지겠다.”
“달수를 못 채워서 좀 작아요. 율아, 아버님이시다.”
록흔이 강보채로 내밀자 율이 또 옹알거렸다. 아기는 야물야물 생겨서 초롱초롱 맑았다. 안아 달라 그러는지 반갑다 그러는지 가륜을 향해 작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
가슴이 하벼지는 듯해 가륜은 미동 없이 바라만 보았다. 아내가 목숨 걸어 낳은 아기, 자신의 첫아이였다. 록흔이 가랑가랑 눈물 맺힌 눈으로 보아 가슴이 더 묵직했다.
“아앙.”
“가율.”
가륜이 부르자, 율이 방긋 웃었다. 반달이 된 맑진 눈이 함박 벌어진 작은 입술이 그의 가슴을 팠다. 그는 딸아이를 그러안았다. 어린것은 연약하고 말랑했다.
“오오옹.”
율이 하는 옹알이에 가륜은 눈을 지르감았다.
“아버지께서, 폐하를 많이 닮았다고…….”
록흔이 함박 젖은 눈으로 가륜을 올려 보았다.
“제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아요.”
“록흔…….”
깊게 갈앉은 음성이었다. 그 안에 슬픔이 밴 듯했다.
“고맙다, 진정…….”
록흔은 가슴이 무너졌다. 그녀는 대답 대신 발돋움해 가륜을 안았다. 비록 그 어깨에도 닿지 못하나, 저보다 커다라나, 오롯이 감싸고만 싶었다.
“……다행이다.”
가륜이 나직이 뱉으며 록흔의 허리를 안았다. 그에 철엽이 찰락대자 율이 눈을 드맑게 부풀렸다. 소리 좇아 고개를 돌리니 보얀 뺨에 볼우물이 움푹 팼다.
“아응.”
율은 작고 여려 가륜의 팔뚝 하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제 막 목을 가누는 참, 눈 마주치면 아기는 햇살처럼 웃었다.
“오늘이 난 지…….”
백일이었다. 아내를 잃었던 그날로부터 가륜은 단 하루도 잊지 않았다.
“예, 그래서 부모님께서 오셨어요.”
“빙장께 받은 것이 많군.”
공이 연 공간으로 나와 주남의 여러 격전지를 지나는 동안, 록흔은 아버지와 함께였었다. 뒤 서 있는 게 너를 위해 해 줄 일이라 하시더니 딸이 죽었다 되산 후부터는 생각을 고치신 듯했다. 아버지는 지안에서부터 예까지 묵묵히 그녀 곁에 계셔 주셨다.
“봉작도 마다하시고, 마음이 좋잖다.”
“율이 보러 잠깐 오신걸요.”
제 이름 불렸다고 율이 눈을 맑지게 부풀렸다. 록흔이 도닥이자, 아기는 또 방긋 웃었다. 그녀가 깊다랗게 미소 지어 그 딸 또한 볼우물이 쏙 팼다.
“개환례에 가셔야지요?”
“음, 그래야지.”
“곤하시지요?”
“아니, 전혀.”
가륜이 입귀를 실긋 비틀자, 록흔이 고개를 저었다. 그 갑주 벗겨드리고프다 말하는 듯해, 그는 아내의 보얀 뺨을 가만 어루만졌다. 봄이 되돌아왔으매 검남빛 눈이 그예 무름하게 얼녹았다.
“아앙.”
율이 손을 바동대며 뻗었다. 가륜이 감싸 쥐니 아기 역시 제법 세게 그러잡았다.
“록흔, 봄이 늘었다.”
“폐하…….”
수국이 바람타고 휘늘어져, 화향이 그윽이 퍼졌다. 자운이 보드레하니 연빛 눈이 더 옅게 바래고, 검남빛 눈은 더 짙게 갈앉았다.
***
정위국 큰문 앞이 유례없이 소요했다. 희대미문의 역모에 흉당이라 그 끝을 보러 온 이들이 하많은 참, 층층이 올린 방청석에 곡령대수부터 보드란 대수삼 자락까지 겹겹이 휘늘어져 있었다. 백관들은 품계에 따라 앞쪽에, 황친 이하 제후들은 그들보다 좀 더 높직하게 앉았다.
“폐하께서는…….”
“곧 납신답니다.”
정위국은 황룡의 최고사법기관이었다. 각 주 도독부에서 심판한 건들이 형부의 재심사를 거친 후에 바로 이곳으로 올려지는 바, 장관인 정위와 휘하 상의관 여섯이 심의하여 황제의 비준을 받았다. 심사하고 토의하는 것이 주되므로 개정은 극히 드문지라, 작금에 이 눈도 저 눈도 모두 꼿꼿했다. 대역무도의 역적들이 그들 아래로 줄줄이 꿇어앉아 있었다.
두웅!
해태고가 울리고 해치관을 쓴 무리들이 나졌다. 그리고 그들 위로 황제가 올라섰다.
“굴신.”
장인태감이 엄숙히 하는 말에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낮췄다. 황제는 정위보다 높은 곳, 바로 용좌에 앉았다. 봉안이 도신 듯 날캄해 예서제서 들썩이던 것이 일시에 사라졌다. 만세 소리 드높인 후 제각각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정위 차우현이 바로 개정을 알려 이목은 그 즉시 역도에게 몰렸다.
“흉당의 괴수 가조는…….”
차우현은 판관답게 그 눈에 잔금이 없었다. 그가 차분한 음성으로 흉당 수괴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자, 난간에 앉은 이들은 눈을 지릅뜨고 들었다.
“마상여를 사주하여 동시로써 황제 폐하를 시살하려 했으며, 극존이라 사칭해 여인 열넷을 지속적으로 겁간하였다. 또한 흉당을 규합한 후에 타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국토를 유린하였으니, 그 죄가 측량불가하다. 더불어…….”
모반(謀反, 군주의 전복을 꾀함), 모반(謀叛, 자국을 배반하고 타국을 좇음), 모대역(궁궐을 범함), 파렴치죄(살인, 강간, 방화죄), 그 외에 중첩된 죄들이 무거워 고개가 처질 만도 한데 가조는 두 눈을 반듯이 들고 뒷목도 뻣뻣하게 세웠다. 뉘우치는 빛은 일호도 없고 되레 원망만 그득해 용좌를 향해 칩뜬 눈이 몹시 불경스러웠다.
“은소현은 내명부 정이품 빈으로서 도당을 이끌어 황성을 더럽히고, 사술을 행해 황후 폐하를 시해코자 혈고를 키웠다. 대불경한 죄 그악스럽고 강상의 도리 또한 어겼으니 사람으로 할 도리가 아니다.”
혈고란 말이 낯설어 이이나 저이나 수군댔다. 뉜가 머릿속을 파고드는 벌레라며 아는 체를 하자, 비난하는 소리가 예서제서 날카롭게 터졌다. 그러나 아름다운 미랑은 눈 하나 깜빡 않고 저 위를 올려 보았다. 그 표독스러움에 어떤 이는 이를 갈고 어떤 이는 눈귀를 일그러뜨렸다.
“……더불어 장월한은 종범이나 그 극악함이 은소현 못지않다.”
늘 새뜻하게 검던 너울은 이제 없어 월한은 창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역당 중에 고개를 숙인 이는 오직 그녀 하나, 맞닿은 눈시울에 회한이 짙었다. 동맹들이야 어떤 빛이든 적어도 제 잘못은 아는 듯했다.
“묵비, 마상여는 일찍이 혹세하여 민초들에게 끼친 해가 크다.”
차우현이 끊어 말하자, 방청석의 시선이 일시에 적의에게로 떨어졌다. 겉은 그럴싸하게 준수하나 그 이마에 도드라진 글자가 역해, 혀 차는 소리가 흐리마리하게 돋았다.
“몽림에서 동시를 부려 황제 폐하 시륙을 꾀했으며, 흉당의 주축으로 황충의 난을 일으켰다. 또한 방술로써 교룡을 부리기도 하였다. 동남동녀를 숱하게 해쳐 그 수 헤아리기 어렵고…….”
리갈 건에서 화혼 건까지 이어지자,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죄상첨죄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차우현이 두루마리를 둘둘 말며 읽는데, 갑자기 재판정이 소요해졌다. 적색 도의를 입은 도사들이 일군 들이닥쳐 용좌를 향해 납작하게 엎드렸다.
“무슨 일인가?”
용음이 묵직하게 퍼지자, 무리 중에 가장 땅딸막한 이가 앞서 나왔다. 홍안에 한 말들이 배라 그 인상이 남달랐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마령도사 아닌가?”
진여장은 천령에서 공 세운 후에 홀연히 자취를 감췄었다. 황명으로 수색령이 내려진 차, 가륜은 실긋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았다.
“폐하를 배알코자 이리 무례를 무릅쓰고 왔사옵니다.”
“한번 들르랬잖나. 찾기 어렵더군.”
“송괴하옵니다, 폐하.”
가륜이 상량하게 보매, 진여장이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청하려는 바, 저건가?”
“예, 폐하.”
긴 말 오가지 않았으나 서로 뜻이 통했다. 가륜이 보는 것도 진여장이 보는 것도 같으니, 호부로 칠갑을 한 마상여였다. 묵술을 행하므로 막아둔 것인데 그 곁에 앉은 묘매 또한 몰골이 비슷했다. 진여장이 좨치듯 보아도 마상여는 눈이 사납기 그지없었다. 다만 묘매는 고개를 조금 수그렸다.
“연유나 듣지.”
“폐하, 아뢰옵니다. 마상여는 도가에서 파문당한 지 오래되었나이다. 하오나 최근 상림도사가…….”
“신천산 상림진인 말인가?”
상림이라면 가륜도 그 명성을 익히 알았다. 고강하고 올곧은 선인이라 장성에서도 그 이름이 아름다운 바, 이 세상에서 종적이 없어진 후로 교도들은 그 도사가 시해(육신을 버리고 신선이 됨)했다 믿고 있었다.
“예, 폐하. 마상여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진여장의 말에 방청석이 술렁였다. 도교 신자들이 많으므로 동요는 더욱 커졌다.
“어찌 그리됐나?”
“본디 저자는 상림도사의 문하였습니다. 행실이 좋잖고 마음이 악하여 파륜의 인이 찍혀 내처졌으나, 상림 스스로 스승의 연은 끊지 못한 모양입니다. 하여 저자 일망 후에 초혼제를 지내주었는데…….”
정위국은 괴괴히 갈앉아 숨소리도 거의 없었다. 역모의 전말이 드러날수록 사람들은 눈이 데꾼해졌다. 사람 사는 세상에 저런 일도 가한가 싶으니 혀도 차지지 않았다.
“그때 되살아 스승을 삼켰군.”
“예, 폐하. 그리 패악스러운 자이옵니다. 전례 있어 또 뉘에게 기생할지 모르오니, 저희에게 넘겨주십사 감히 청하옵나이다.”
진여장이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그에 커다란 배가 출렁출렁했다.
“그 죄 분명 잔독하나.”
가륜이 냉량하게 치자, 오악관 수십이 일시에 들렸다.
“민초들에게 행한 바가 더욱 크다. 아직 판결 전이니 그 후에 나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폐하, 저희가 우둔하여 좁게만 보았습니다.”
진여장이 바로 나서 말하자, 가륜이 입귀를 치올렸다. 냉량한 미소나 그리 야멸치지는 않았다.
“스승은 부모이어니 그 죄행이야 악역과 진배없다. 짐이 충분히 납득한 터, 게서 잠시 지켜봄이 어떤가?”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리하겠사옵니다.”
방청석 좌편으로 도의 무리들이 늘어앉았다. 그에 차우현이 곧바로 다시 나섰다. 서슬 퍼런 기세라 해치관에 돋은 해태의 뿔이 다르르 떨렸다.
“남대균은 사리사욕을 좇아 황친의 신분을 망각했으며……, 문창은 재물로써 모반을 도와…….”
죄상을 열거하니 종이쪽이 부족할 지경이라 심문하는 와중에 동녘의 해는 중천을 향해 높이 올랐다. 정위 이하 상의관이 잠시 물러난 새, 가륜은 아래를 날캄하게 훑었다. 하나같이 추악한 얼굴들이라 그 눈이 가느스름했다.
두웅!
해태고가 묵직이 되울렸다. 판관들이 의논한 바를 건네자, 장인태감이 용좌 아래로 바로 다가갔다. 그가 용반 올리고 황상께 몇 마디 사뢴 끝에 하명이 나직이 떨어졌다. 아래쪽 난함(난간)에 앉은 이들에게까지는 닿지 않는 소리라 그들 모두 숨죽여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차우현이 입을 열었다.
“태후 남대균은 모반 및 대불경한 죄가 크므로 효수한다. 더불어 전 재산을 몰수하고, 가솔 중에 연경 열여섯 이상 사내는 교형(교수형)에 처한다. 또한 처첩 및 아녀는 관에 귀속시킨다.”
황룡의 법으로 대역죄는 연좌하여 구족을 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차우현이 판결문을 읽자, 남대균이 머리를 툭 떨궜다. 기함을 한 듯 그 기름진 턱이 겹겹이 접혔다.
“문창은 사한을 대역으로 풀었으니 요참(허리를 벰)하여 저자에 내걸어 본을 삼는다.”
문창은 줄기줄기 울기만 했다. 변안록을 노려 뛰어든 터, 그저 딸애 걱정뿐이었다.
“가조는 그 죄가 십악대죄에 걸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반, 모대역…….”
차우현이 말 맺지 않았는데, 가조가 불 눈을 칩뜨고 용좌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혀 물어 자결할까 재갈을 물린 차, 가륜이 턱짓하자 그 입이 바로 풀렸다.
“명세제, 너!”
가조가 거품을 허옇게 물며 외치자, 가륜이 눈귀를 실긋 비틀었다. 사느랗고 올곧은 시선이라 되레 난함에 깃든 이들이 바짝 굳었다.
“내 비록 금차에는 실패하였으나 결코 접지 않을 것이다.”
패자는 어차피 구차한 법이라 가조가 뭐라 하든지 사람들에게는 낮게 뵀다. 모반, 모대역, 모반, 부도, 대불경, 불의, 강음, 하많은 죄상에도 불구하고 극존께 무례하니, 그게 거슬려 저마다 흰 눈이었다.
“차회를 바란다?”
가륜이 입귀를 비긋이 틀자, 가조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저 빛접음이 제 것일 수도 있었으매 가조로서는 피눈물이 났다.
“계속 읽으라.”
“예, 폐하.”
차우현이 야멸친 눈으로 가조를 치어다보더니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그중 모반과 강음을 물어 궁형(거세하는 형벌) 후에 효이한다.”
참수하고 거열(찢어 죽임)하며 그 족을 멸하는 것, 극형 중의 극형이었다. 가조가 막 입아귀를 찢는데, 차우현이 나머지 두루마리를 폈다.
“기시(저자에서 죽여 대중에게 보이는 것)하여 그 본을 보이…….”
“용좌에 오를 나다. 명세제, 네놈이 감히! 언이라도 그리 모멸하…… 크헉!”
모든 게 순간이라 사람들은 눈을 지릅떴다. 봉안이 가늘어졌나 싶더니 날파란 기가 목전을 긁었다. 그리고 가조가 피를 토하며 엎어졌다. 선혈이 쿨럭쿨럭 꿰져 바닥은 질척했다.
“궁도 광장에서 치러야겠군.”
말마디마다 야멸치고 봉안에 어린 빛이 표표했다.
“나 천자이어니…… 이대로 무너지지 않을…….”
가조가 더듬대 잇새로 피가 죽죽 흘렀다.
“죽어 악귀가 되어서라도…… 내 너를 곱게는 두지…….”
파악!
집금위 하나가 대도로 가조의 뒷머리를 후려쳤다. 그대로 질질 끄셔져 형틀에 묶이고 다시 재갈이 물려졌다. 소란이 갈앉자마자, 차우현이 소현을 응시했다.
“은소현은 무고죄가 극악하니 간부(간악한 여자)의 본을 삼도록 기시한다.”
“폐하!”
소현이 가륜을 올려 보았다. 그 눈에 담긴 것은 원망이었다. 뭇사람들이 보도록 저자에서 죽으라는 말이라 고운 눈귀가 표독스레 찢어졌다.
“제게 이리하실 수는 없습니다. 폐하의 첫 번째 빈으로서 은을 낳았고…….”
곁 없는 시선이라 소현은 말끝을 사렸다. 황상께서 안어로 좨치시니 ‘네 애가 내 애던가?’라 물으시는 듯했다. ‘예서 더 잃을 건 없나?’란 빛인 듯도 싶었다. 그녀는 어언간 입을 벌렸다. 꼭 무언가 제가 모르는 게 있는 것만 같았다.
“사약을 바랐나?”
“아니오.”
꿈에서도 그리지 않았나니, 이런 날은 결코 바라지 않았다. 소현은 그동안 형옥에서 초췌해진 얼굴을 반듯이 들었다. 차고 습한 곳도 그 미를 깎지는 못해 그녀는 몹시 아름다웠다.
“제가 바란 것은 폐하의 사랑이었습니다.”
더럼 탔으나 곱다운 그 얼굴에는 비굴함도 죄책감도 없었다. 제가 한 일이 곧고 옳을 뿐, 소현은 이런 지경에도 천하제일미라 불릴 만했다.
“갖고자 부순다면 어린애와 진배없다.”
“아니어요, 오롯이 그리고 사모하여…….”
“하여 은사군이 궁을 지었군.”
삭작하여 왕으로 앉히려 했었다. 저만 바라보시라 궁성 또한 멋들어지게 지어 올렸다. 소현은 더는 반박 못하고 시푸른 눈으로 용좌를 응시했다. 물기 많아 반드르르하나 눈물 한 방울도 돋지 않았다.
“폐하, 저는…….”
가륜이 눈귀를 얄풋이 찢었다.
“어느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다시 시간을 돌이켜도 그리했을 것이고, 제가 한 사랑 또한 부끄럽지 않으니…….”
미희는 애참해하나, 뉘도 납득하지 않고 뉘도 동정하지 않았다. 저에게나 사랑이었을 터, 집착이고 애염이라 다랍기만 했다. 비뚤어진 그 마음에 저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장월한, 악행이 은소현에 버금가나 종범임을 고려하여 태 오백 대를 친다. 이후 무도(무인도)로 내쳐, 섬을 빠져나올 시에는 참수한다.”
월한은 고개만 우그렸다. 황상을 우러를 낯도 없으니 눈만 지르감았다. 미운 마음일랑 여전히 가시로 남았으나, 임을 상해한 죄 크니 구차히 할 말도 없었다. 흰 목이 크게 꺾여 기다란 머리칼이 바닥을 쓸어 덮었다.
“…….”
구석 자리에서 진과가 이를 윽물고 돌아섰다. 부친께서 공덕 쌓으셔 저것으로 그쳤으나 애참하고 또 애참했다. 저걸 어찌할 거나? 그저 어린 누이인 채로였더라면……. 참담함은 말로 비어지지 않았다. 남해의 고도에서 어찌 견디랴? 그는 눈귀를 입귀를 일그러뜨렸다.
“구명이다.”
무진이 진과의 어깨를 다독였다. 창동 역시 짙디짙어 왜청에 가까웠다.
“마상여는…….”
차우현이 호명하고 높다란 곳으로 눈을 들었다. 그에 가륜이 눈짓을 짧게 했다.
“마령도사.”
“예, 폐하.”
진여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형이 혼백에도 가한가?”
육형이라 함은 사지를 베고 살갗에 새겨 영원히 지울 수 없게 하는 혹형이었다.
“아뢰옵니다. 가하옵니다만…….”
진여장이 꼬리를 끄셔 하는 말에 사람들은 벙해졌다. 육신 없는 넋을 자르고 그에 새긴다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 황상께서 하문하신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입만 크게 벌렸다.
“백의 령은 형체에 부합되는 것이옵고, 혼의 신은 기에 부합되는 것이온데……. 폐하, 그 둘에 무엇을 새기려 하심입니까?”
“둘 다 형기에서 생겨난 것, 알다시피.”
가륜이 차게 뱉으며 칼빛 시선으로 마상여를 내려 보았다. 금줄이 입까지 둘러진 참, 이마의 글자는 흉히 볼가져 있었다.
“겉피는 하상효란 자의 것이고, 그 안에 든 혈도 제 것은 아니지. 빨아들인 목숨이 숱해 저 육신을 발길 수는 없다. 하여 짐은 마상여의 혼백에 육형을 가하고자 한다.”
“허면 폐하, 자자로 파륜을 박아 넣겠나이다.”
“음.”
진여장이 공손히 읍하자마자, 따로 앉았던 도사 여섯이 일어섰다. 그들 외에 나머지가 마상여 주위로 원을 커다랗게 그어 신성한 구역이 드맑게 솟았다. 원의 안팎에 좁다라나 결코 좁지 않은 간극이 생겼다.
샤앙!
진여장이 손을 펼쳐 칭칭 감긴 금줄이 풀리고 호부들이 팔락팔락 날렸다.
“저리 꺼지지 못해, 어딜!”
마상여가 입 뚫리자마자 악을 내질렀다. 그러나 도사 일곱은 얇은 눈매로 담담히 보았다.
“무슨 잔재주를 펼칠 터냐? 난 이미 명부를 겪은 몸, 몇 번을 죽여도 되산다! 개수작부리지…….”
일갈은 대차나, 그 낯은 그러지 못했다. 공포로 일그러지고 뭉개져 해끔한 얼굴이 점점 추악해졌다.
“명세제, 뉘가 무엇이관데!”
마상여가 눈을 번득였다. 먼젓번처럼 자진하려는 듯, 진여장이 걸걸하게 외쳤다.
“서두릅시다.”
도의 자락들이 붉게 휘날렸다.
차락, 착, 착!
칠성검이 청량히 울었다. 적의들이 칼을 들어 틈 없이 드밀고 옥죄자, 마상여가 막힌 숨을 토했다.
샥!
칠성검 날에 정수리가 트여 불그데데한 것이 조금 솟았다. 피는 바이 아니니, 투명하면서도 혼탁했다.
“그만둬! 으허억!”
마상여가 듣그럽게 비명을 올려도 도사들은 눈썹 끝도 떨지 않았다. 근행할 뿐, 엄숙한 그 입술마다 성스러운 경이 묻어 있었다. 원 밖의 이는 살쩍이 날리나, 원 안에 든 이들은 소매가 날리고 관 전체가 휘날렸다.
“으으으…….”
하상효란 옷을 벗어, 마상여는 조금씩 제 본 모습을 보였다. 누에가 번데기에서 우화하듯, 뱀이 옹색하게 허물 벗듯, 시푸르고 거무께한 혼백이 입아귀를 찢으며 기어 나왔다.
“저, 저런!”
“……!”
여인 몇이 혼절하고 사내들은 졸린 소리만 냈다. 혼백이 육을 떨치는 모습이란 정제된 공포였다. 살비늘이 올올이 돋쳐 등줄기가 선득하게 당겨, 그들 모두 잔독하게 짓눌렸다.
“이대…… 로 죽…… 지 않는다, 명세제!”
돌확에 유리 문대는 양, 막자로 사금파리 가는 양, 마상여는 뾰족하고 쀼죽하게 울부짖었다. 그때 진여장이 두터운 눈썹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짙붉은 입술을 커다랗게 늘였다.
“나의 뇌신이시여! 저를 오행의 장령, 육갑의 군사로 부리셔서 이 사악한 영혼을 물리칠 수 있게 도우소서. 급급여율령!”
뇌편 일어, 우레가 따랐다.
콰콰쾅!
불칼은 마상여의 머리 꼭대기를 수직으로 뚫었다. 오롯이 하나를 목적한 것인지라 정위국의 천장도 그 곁에 선 도사들도 아무런 해가 없었다.
“주…… 욱…… 이인…….”
도사 일곱이 칠성으로 화해 우보를 행했다. 하상효를 온전히 벗고, 마상여는 혼백인 채 괴로워했다. 찢겨지는 듯 발겨지는 듯 령은 원 안에서 몸부림을 크게 쳤다.
“육형으로써 단죄할지니!”
칠성검 일곱 자루가 파르라니 번득였다. 바람 베는 소리 끝에 검망의 별 일곱이 현란하게 발광했다. 악령을 베어 죽이나니 칼날에서 선기가 무극으로 뻗어 나왔다.
시익!
허리가 베여 혼백은 두 동강이 났다.
슥, 슥, 슥, 스윽!
팔 둘, 다리 둘이 잘렸다.
시으윽!
목과 머리가 떨어졌다.
사악!
머리가 둘로 쪼개졌다.
“쿠어억!”
파릇한 입이 찢겼다.
“제발 그만둬, 그마아안……!”
한풍이 살천스레 일었다. 검첨마다 새기는 것은 파륜, 깊이 도려지고 깊이 에여져 혼백은 그 글자를 여럿 품었다.
“구금령!”
도사들이 제각각 허리에 찼던 호로를 꺼내 들었다. 마개가 풀리자마자, 일곱으로 잘린 넋 조각이 쑥 빨려 들어갔다. 자자하고 토막 냈으니 혼백의 육형, 범인으로서는 다시 볼 일이 못 되었다.
“너도 함께 가거라!”
진여장이 묘야의 정수리를 움켜쥐고 크게 휘둘렀다.
“크아아양!”
묘매는 창졸간에 넋을 앗겨, 푸르께한 것이 또 다른 호리병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뻐억!
병은 닫히고 아무 일도 없던 듯 사위는 고요해졌다. 묘매는 늙은 고양이로 남고, 묵비였던 것은 하상효로 남았다. 준미하게 누운 시신에 사람들이 고개를 수그렸다. 섧으나 저 몸은 이제 육친에게 돌아갈 터였다.
“폐하, 이대로 봉하여 염왕 전에 보내겠습니다. 다시 되살거나 발호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수고 많았소.”
가륜이 서늘히 웃자, 그 빛접음이 도드라졌다.
“아니옵니다. 폐하께 이런 모습 봬드려 송구할 따름이지요.”
“별말씀을. 어떤가, 마령도사? 잘 익은 술이 지천한데.”
“기꺼이 받잡겠나이다.”
진여장이 벙긋 웃자, 뒤 서 있던 도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황후가 반가워할 터.”
“저도 뵙기 앙망하옵니다.”
“폐정한 후에.”
“예, 폐하.”
진여장 이하 도사들이 몸을 사려 앉고, 차우현이 다시 나섰다. 은사군부터 시작해서 크고 작게 연루된 이들이 형을 선고받고 차례로 끌려 나갔다. 그로부터 정위국이 비기까지 반시진이 더 걸렸다.
***
율이 맑진 눈을 이쪽으로 저쪽으로 굴렸다. 사내 일곱이 낯설 법도 한데 울지도 않고 또랑또랑 보았다. 커다란 창해부터 검은 기리단까지 그 동공에 가득 들어찬 참, 사강과 눈이 마주치자 아기는 볼우물이 패도록 방긋 웃었다.
“남호위님이 제일 마음에 드시나 봐요.”
신상궁이 보드라이 말하자마자, 사강이 조금 앞서 나왔다. 그에 율이 눈으로 좇으며 보았다.
“공주마마.”
사강이 부르자 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통통한 뺨에 보조개 또 한 번, 아기에게서는 귀염이 뚝뚝 떨어졌다.
“어디가나 사강 저놈이 제일이냐?”
창해가 와랑대며 말하나 그 어투가 다른 날과는 달랐다. 왠지 모르게 촉촉해 그답잖게 무름했다. 여느 아기도 아니고 접두의 따님인지라 왕방울만 한 눈이 몹시 찰람거렸다.
“아앙!”
호류무가 들어서자, 율이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아기는 인호를 향해 손을 바동대며 꽃잎 같은 입술로 옹알댔다.
“어, 저런…….”
유장이 외마디 소리를 냈다. 사강도 조금은 머쓱해져 호류무를 돌아보았다. 율은 인호를 알아보는 듯싶었다. 빵긋빵긋 웃으며 안아 달라 칭얼댔다.
“공주마마.”
호류무가 부르자 율이 눈을 반작 열었다. 그리고 장밋빛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여 제 나름의 이야기를 했다. 금발이 찬란하게 휘늘어져 금안이 미소로 부드러워져, 어느 순간 아기는 인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저 가까운 게 아니라 혈육이라도 되는 양, 둘은 그렇게 남달랐다. 참으로 보기 좋은 그림이라 부접들은 잔금 없이 보았다.
“먼저 와 있었군, 이거 늦어서…….”
차분하고 맑은 음성에 모두 문 쪽을 향해 돌아섰다. 들이치는 햇발 아래서 록흔이 맑지게 미소 지어, 저마다 눈이 연하게 갈앉았다. 율 역시 눈이 반드레했다. 호류무도 이젠 별 볼 일 없는 듯 아기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율아, 외숙을 뵈었느냐? 일곱이나 되니 좋지?”
록흔이 보드랍게 묻자, 아기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칼을 잡았다. 그 둘이 눈을 마주치며 해사하게 웃는데, 부접들은 가슴이 턱 막혔다.
“접…… 폐하.”
“그리 과히 불러 주시면…….”
창해가 제일 먼저 울먹였다. 유장이 반들반들한 눈으로 말꼬리를 흐리자, 나머지도 습한 눈으로 록흔을 우러렀다.
“오라비라 부르긴 뭐하다만, 혈육이라 여기는데. 왜, 싫은가?”
록흔이 연삽하게 묻자, 율이 그 음성을 좇아 별인 양 맑진 눈을 굴렸다.
“예 계셔 주셔서, 다시 뵙는 것으로도…….”
창해가 소맷자락으로 눈께를 훔쳤다.
“폐하, 꿈이 아니지요?”
사강이 묵직이 그늘 진 눈으로 록흔을 품으며 물었다.
“심려 끼친 곳이 숱해, 마음 빚이 많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 모두 새로 태어난 듯이 기쁩니다.”
하균이 그답잖게 길게 말하자, 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도 기리단도 눈시울이 붉었다. 하준 역시 상기된 얼굴로 눈물을 꾹 참고 있었다.
“간만에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었으면 하고…… 신상궁.”
“예, 폐하.”
“술은 넉넉히 챙겼지? 창해가 말술이거든.”
“넉넉히 준비…….”
신상궁이 상냥히 사뢰는데 창해가 기어이 크게 울었다. 상관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 그 마음에 팬 자국이 깊었었다. 거한은 목울대를 실룩대며 두 눈을 가렸다. 이리 곁에 계셔서 술 잘 든다 챙겨 주실 날, 다시 오리라 생각이나 했던가? 그는 어린애처럼 두 뺨이 젖도록 엉엉 울어 버렸다.
“으애애앵!”
창졸간, 율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껏 어여쁜 입 벌려 사랑스레 웃더니만 창해와 함께 얼굴이 발개지도록 울어젖혔다.
“우지 외숙이로구나, 율아.”
록흔이 호류무에게서 받아 안아 어르자, 율이 젖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맑은 물 대롱대롱 고인 눈귀에 붉은 입술이 닿자, 아이가 잔 울음이 남은 입을 오물거렸다.
“창해, 이거 근육이 아니고 눈물보지?”
기리단이 해죽 웃으며 창해의 팔을 툭툭 쳤다. 밉지 않은 소리라 아진도 사강도 하하 웃었다.
“접두께서 예 이리 계셔서 이놈 술을 챙겨 주시니, 그동안에 억장이 무너져서…….”
저 놀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지 창해가 계속해서 훌쩍였다. 커다란 어깨가 들썩이는데 볼썽사납기보다는 짠했다. 록흔은 율을 안은 채로 그 곁으로 다가갔다.
“율아, 우지 외숙 울지 마요 하렴?”
록흔이 고개 숙여 하는 말에 율이 귀엽게 옹알댔다. 정말 시키는 대로 하는 듯해 부접들은 반달눈으로 보았다.
“아이고, 폐하 제가 주책을…….”
“울지 마세요, 우지 외숙.”
“아오옹…….”
어언간 창해는 아기를 받아 안고 말았다. 조카 녀석도 안아 본 적 없는 터라 무작스레 큰 손이 발발 떨렸다. 맑진 눈 마주치자마자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찌 이리 어여쁘신지 모를 일, 거한은 저도 몰래 빙그레 웃고 말았다.
“울다가 웃다가 다양도 하다. 창해, 구란에 배창 자리 하나 알아봐 주랴?”
아진이 외눈을 찡긋하며 농을 치자, 사내 여섯이 걸게 웃었다. 그에 율이 저도 끼련다는 듯 방긋대는 통에 창해 역시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제법 잘 어울린다.”
록흔이 상그레 웃자, 호류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교위께서 저는 잘 못 드셨던 것 같습니다만.”
“뭐? 너 그거 어찌!”
창해가 입을 쩍 벌리고 호류무를 쳐다보았다. 네놈들이 말했지 하는 빛으로 봐도 부접 모두 고개만 살살 저었다. 금안에 싱긋이 담긴 미소가 미어인 양 알쏭달쏭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지요?”
“아니, 뉘 미움 받으라 그런 소릴 했을까?”
율이 까만 눈으로 제 어머니를 외숙이라 묶인 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호류무의 금안이 사강의 은안이 좋은지, 그 둘에 머무르는 시선이 길었다.
“사강, 너냐?”
창해가 무작스레 외치자, 사강이 픽 웃었다. 저 또한 아니란 소리, 거한은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갸울었다.
“무아야, 그럼 어찌 아냐?”
“그저 기억하는 겁니다.”
“아깃적인데?”
“예.”
호류무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은 록흔이었다. 주려서 죽어갈 무렵에 따스한 손 내밀어 주던, 품에 안아 주던……. 주군은 인호에게 빛과도 같았다.
“폐하, 화원 쪽으로 듭셔요. 준비가 다 되었사온데.”
“그래, 다들 가자.”
록흔이 앞서고 창해가 율을 안고 따랐다. 깨지랴 떨어지랴 거한은 조심조심하는데 아기는 그 품에서 해님처럼 웃었다. 사강이 들여다봐도 방긋, 하균이 웃어 줘도 방긋, 그리 사람을 좋아했다.
주륵.
탁.
“폐하께서도 한 잔…….”
유장이 흔연스레 권하다 잠시 손을 접었다. 그 곁에서 창해는 율을 챙기느라 술동이는 쳐다보지도 못했다.
“주다 말면, 아깝단 거지?”
“예에? 아닙니다.”
록흔이 깊게 웃어 연빛 눈이 우련했다. 유장이 눈언저리를 붉히며 술을 따라, 그녀는 한 잔 그득 받았다.
“정위국 쪽은?”
“이제 거의 마무리됐을 겁니다.”
“으음.”
술이 닿아 록흔은 입술이 붉었다. 건너편에서 창해가 하동대는 게 귀애스러워 그녀는 눈귀를 우그렸다. 좋아하는 건 손도 못 대고 율을 보느라 두억시니 같은 이는 곰살궂기도 했다.
“신상궁.”
“예, 폐하.”
록흔이 눈짓하자 신상궁이 바로 율을 안아 들었다.
“동이는 많으니까, 어서 들어라.”
“예, 폐하.”
록흔은 율을 안고서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하준은 호분위를 이끌고 유장을 비롯한 부접들은 소천을 보필했다. 아름드리 사람숲에서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천금을 준들 만금을 준들, 다시없을 이들이라 마음이 그득 찼다.
“무아, 많이 들어라.”
“기특하고 어여쁘다.”
하균이 점잖게 하는 말에 하준이 한 마디 더 보탰다. 겉은 청년이래도 부접들에게는 마냥 어린것이라 마굴에서 상관을 보필한 것이 몹시 대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