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6
연록흔 – 16화
“단섬공은 어떻게 된 걸까요?”
수상한 눈치는 될 수 있으면 보이지 않으려고 입때껏 묻지 않았다. 그러나 때는 무르익어 록흔은 묻어 둔 것을 꺼냈다. 탐문한 바에 의하면 단용조의 실종과 휘영빈주 사이엔 커다란 상관관계가 있었다. 통감인 사황이니 아는 것도 많을 터. 그는 그저 호기심인 양 무심히 흘려 말했다.
“글쎄……, 주인어른과 좀 자주 부딪혔지만, 좋은 사람이었어. 기술도 훌륭하고 사내답게 듬직하니. 보윤이가 이야기 안 하던가?”
록흔은 고개만 끄덕였다. 빈장 주인과의 불화라……. 확실히 다른 이에게 듣는 것과 정보의 질이 달랐다.
“하긴 녀석이 말이 많진 않지. 반년 전에 예쁜 아내를 얻었는데, 그다음부터 사람이 달라졌지. 더 넉넉해졌다고 해야 할까? 달공달공 잘 살더니, 신접살림 차리고 서너 달 되어서 오간데없이 사라졌지 뭔가…….”
“단섬공 부인이 그렇게 미인이었나요?”
누구나 하는 말이 같았다. 그런 미희는 처음이었다나? 록흔은 사람들의 말을 떠올렸다.
“음, 굉장했지! 빈장에서 두어 번 봤는데 그니 있는 곳은 눈이 부셔 바로 볼 수가 없을 지경이야. 눈빛은 달빛 같고 미소는 물빛 같지. 점잖은 여대인께서도 정녕 곱다 칭찬을 하셨으니…….”
점입가경이로군. 남의 아내에게 눈탐을 냈다? 록흔은 제 혼자 그린 그림에 어느 정도 무게를 실어 버렸다. 더 높은 자로서 행할 비리는 얼마든지 많았다.
“꽃인 듯 어여쁜 처가 실적(흔적이 아주 없어짐)하고 나서……, 시술장 일도 내박치더니 별 간격 없이 사라졌지.”
“입마다 어여쁘다 칭송하니 저도 한번 보고 싶군요.”
록흔이 슬쩍 운을 떼자 사황이 신이 나서 가진 어휘를 총동원해 묘사를 시작했다.
“눈동자는 달빛을 모은 것 같으이, 검다 못해 푸른 머리칼은 어찌 부드러운지 물결이 흐르는 듯하지. 살결은 연한 조갯살마냥 부드럽고 백옥 같아서 바라보는 것으로도 그 감촉이 상상이 되고, 음성은 노래하는 파도를 닮아서…….”
“혹, 형님.”
“응?”
흥에 겨워 주절대던 입이 딱 멈췄다.
“그니가 혹 무게 없는 이처럼 걷지는 않는지요?”
“그랬지! 그걸 어찌 아는가?”
일치하는 것이 많다. 록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류미인이라니 짐작해 본 겁니다.”
“맞아, 그 말이 딱일세.”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건 나귀는 절름절름 제 갈 길을 갔다. 어느덧 마전장, 탁 트인 공간은 그지없이 훤했다. 사각으로 열 맞춰 늘어선 것은 나무로 짜 만든 통이었다. 커다랗고 야틈한 것마다 보얀 빛이 어룽거렸다. 그 안에 수북하게 들어찬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진주였다. 일하던 이들이 통감을 보고 인사를 크게 닦았다.
“전처리한 것들을 표백하는 곳일세.”
록흔도 이젠 반은 진주 박사였다. 어떤 소리를 들으면 대뜸은 아니어도 곧 이해가 갔다. 어제 하루 종일 주정(에탄올)과 씨름한 바, 그 다음 과정이 무엇인지도 이미 알았다.
“자연마전이로군요.”
“그렇지. 약품에 절이는 것보다 시일은 오래 걸리나 진주에는 손상이 거의 없지.”
진주는 보통 전처리, 표백, 착색, 연마의 과정을 거쳐 가공하는데 모든 공정에 손이 세세히 갔다. 전처리란 순수한 주정에 진주를 담그는 것, 알싸한 액에 흰자질이 녹아 황색이 점차 엷어지고 동시에 광택이 더욱 탁월해졌다. 그다음이 바로 당금의 마전, 닷새 정도 물에 담가 강한 햇살을 쐐주면 천연으로 산화표백이 되어 보얘졌다. 금일, 록흔의 작업은 바로 진주들이 고루 바래도록 넓게 널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형님께선 그리 신임 받으시는 자리에 계시면서, 어째서 탄부용엔 들지 못하십니까?”
록흔은 사슴 가죽을 입힌 나무 삽을 하나 골라잡았다. 무심코 하는 질문인 듯, 악의 없는 듯……. 그는 요령 좋게 물었다.
“여대인께선 조심하시는 것이 많으시네.”
충복다운 답이나 어딘지 어둠이 묻어 있었다. 사황도 삽을 하나 들고서 물에 잠긴 진주를 이리저리 뒤섞기 시작했다.
다락다락.
사륵사륵.
물빛이 맑게 퍼지면 진주알이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모난 곳 없이 둥글리고 보드란 피복까지 입힌 삽이나 행여 상처라도 입힐까 손길마다 조심스럽기만 했다.
“저 안이 궁금하진 않으세요?”
어린아이처럼 록흔은 눈마저 깜빡이며 물었다.
“뭐 그렇긴 하…….”
갑자기 없던 그림자가 보태졌다. 록흔은 삽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덜 바랜 빈주들이 목곽 모서리로 도르르 굴렀다.
“대인, 나오셨습니까?”
사황이 몸 둘 바를 모르고 허리를 깊게 꺾었다. 그늘의 정체는 휘영빈주의 주인 여수민이었다. 생각보다 젊고 의외로 반듯하게 생긴 이, 록흔은 보지 않는 척하며 그를 챙겨 보았다.
“반통감, 누군가?”
귀 깊은 눈이 록흔을 향해 찢겼다.
“아, 예. 제 벗의 아웁니다. 잠시 빈장 일을 거드는데 손이 참 야물지요. 록이, 인사 드려. 여대인이시네.”
록흔은 벙어리마냥 고개만 꾸벅 숙였다. 그저 우직스럽게 삽만 부여잡고 아무것도 모르는 체했다. 한낱 품팔인데 무슨 말을 더 하랴 싶었다.
“이런 일 하게 안 생겼군.”
“생김만 그렇지요. 여러 몫도 썩 잘합니다.”
“그런가?”
음성이 탁했다. 록흔은 가만 서서 깊이 들어 발현되지 않은 곳까지 들여다보았다. 여수민에게 가득한 것은 절망이었다. 어둡고 깊은 나락……. 낯빛도 겉은 맑으나 그 아랜 칙칙했다.
“이스펠에서 주상(진주 상인)들이 당도했네.”
“예, 곧 견본을 준비하겠습니다.”
벽안의 진주 상인들이라……. 록흔은 묵묵히 삽질만 했다. 여수민이 오래도록 보는 것을 알면서도 여섯 자 평방 남짓한 곽의 진주를 다 뒤섞었다. 보록보록, 물빛과 진주의 광휘가 은은히 섭슬려 들어갔다.
“록이라 했나? 이걸 원련장에 전하게.”
사황은 의심 많은 주인이 무슨 일인가 했다. 첫 대면부터 중한 일을 시키는 게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록흔은 록흔대로 말없이 받잡고 고개 한 번 숙이는 게 다였다.
“급한 것이니 서두르도록.”
“그래, 마전 일은 이따 이어 하고, 어서 다녀와.”
입 붙은 이마냥, 록흔은 나귀 매어 둔 곳으로 걸어갔다. 다시 방울이 달랑거렸다. 축축한 땅이 짐승의 발굽대로 부드럽게 패였다. 사황은 입귀 늘리고 멀어지는 이를 바라보았다.
“곱게도 생겼군.”
“예?”
사황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아닐세. 어서, 서두르게. 곧 들이닥칠 테니.”
저 입에서 사적인 소릴 들은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단섬공의 부인을 칭찬하는 소리, 이번엔 록흔……. 사황은 왠지 마뜩찮아 얼굴을 찌푸렸다.
기욱기욱!
멀리서 물새가 울었다. 여수민의 입귀에 바다 것만큼 비린 미소가 어렸다.
투륵!
투르륵!
질퍽한 무언가가 되게 엉겼다 떨어졌다.
‘지독하군.’
어스름의 희미한 햇발 아래, 록흔은 벌겋게 까진 살들을 묻고 또 덮었다. 진주조개의 무덤, 패각 잃은 살덩이는 이미 썩고 물크러져 악취가 심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삽을 놀렸다.
[록아,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소중하단다.] [스님, 무엇이든지요?] [그럼.] [이 풀꽃도, 저 딱정벌레도요?] [그렇단다.]낮에 여수민의 전서를 가지고 원련장에 다녀오다, 록흔은 참혹한 것을 보고 말았다. 진주 키울 때는 고이 모시듯 하던 것들이 패각이 깨진 채로 체액 질펀하게 흘리며 쟁여 있었던 것이다. 일꾼들 말로는 모패는 무한정 많으니 진주를 조심스레 꺼내 조개를 살리는 것보다 그저 돌로 깨부수는 것이 훨씬 수지가 맞는다 했다. 그런 이유로 빈장 한구석엔 딱지 뜯긴 것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구더기가 바글바글 끓었다.
‘살았던 것들인데…….’
짠한 마음이 가득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녁도 마다하고 놈들을 묻어 주는 참. 록흔은 이를 지그시 물고 한 삽 크게 떴다.
“무얼 하는가, 너…….”
바람인가 했다. 록흔은 흐리마리한 소리는 무시하고 다시 삽을 엎었다.
“그것들은 어이해서 묻나?”
응? 누가 있나? 록흔은 잠시 허리를 펴고 섰다. 석양 아래, 붉은 인영이 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왜 그런 수고로움을 감내하는가?”
이제 소리가 확실히 들렸다.
“그저 고기라 여기지 않고…….”
일치했다. 록흔은 또 한 번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 단섬공의 안사람도 바로 앞에 선 자도……. 그가 아는 어느 것과 딱 맞아떨어졌다. 어인 일일까? 하얀 볼웃음이 옅게 패였다.
“대저 산 것은 정동, 과소, 고하를 떠나 모두 중하니……. 이 또한 같지 않을까 합니다만.”
물 같은 대답에 듣는 이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뜻 높은 분이거늘.”
해가 스러지자 그림자의 형상이 점차 뚜렷해졌다. 그것은 은빛, 아니 물빛……. 머리칼도 피부색도 모두 투명했다. 오직 두 눈만 푸르게 반짝여 바닷물을 그대로 굳힌 것만 같았다.
“아닙니다. 그저 약한 구석 하나쯤 지녔을 뿐이지요.”
록흔은 짧게 부인하고 다시 삽을 들어 조개의 썩은 살을 흙과 버무렸다.
터억, 투욱!
흉하게 내박쳐진 것들이 이제 거의 가려졌다. 구더기가 끓어도 저 안에서 끓을 터, 자연의 눈으로 보자면 인간이란 동물은 참으로 잔악했다.
“원(願, 소원)이 커져 원(怨, 원망)이 되었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말, 그러나 영 뜬금없지는 않았다. 록흔은 귀만 열어둔 채로 마지막 삽을 크게 떴다.
“나의 넋이 저 안에 있으니…….”
푸른 눈이 가리키는 것은 탄부용이었다. 물빛 손가락은 그중 가장 높은 장미석영 봉오리를 향해 뻗었다.
“부디 구해 주십시오.”
록흔은 부탁하는 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독특한 투명함이었다. 몹시도 맑으나 속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다. 호람해의 빛을 닮은 눈은 밤바다인 양 일렁였다.
“사람이 물을 마시면 물이 사람을 마시고, 사람이 나무를 베면 나무가 사람을 벤다 하였습니다. 누구나 기울임 없이 소중하니…… 돕지요.”
패묘 앞, 무게감 없이 가벼운 이가 물빛 머리칼을 날리며 서 있었다.
“허나 이 살이 아픈 만큼 저 살이 아팠고, 그 살이 아린 만큼 이 살 또한 앓았으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의연한 물음에 수초빛 입술이 보드랍게 늘어졌다.
“사람은 모두 같은 줄만 알았으니 제 견식이 짧았군요. 선인께서 도와주시면 제 몫은 분명 갚겠습니다.”
록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산 것은 경중이 없다 했으니 그 수치를 따져 물을 처지도 못 되었다. 부처의 저울로 재자면 어쩌면 이쪽이 훨씬 가벼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납득은 완전하지 않았다.
“저 빛발은 수이 건널 수 없습니다. 하여 청하오니…….”
속살거리는 말은 분명 머리에서 머리로 전해졌다. 음파 없이 닿는 것, 록흔은 일러 주는 대로 깊이 새겼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말을 마치고 푸른 눈은 너울너울 사라졌다. 바람인 듯 물결인 듯 유하고 부드러워 거슬릴 것도 없고 막힘도 없었다. 록흔은 석양 속에 파묻히는 그림자를 오래도록 보았다. 마음이 무거워 입귀가 절로 처졌다. 모든 것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 깨뜨리려는 것과 더 가지려는 것이 있어 불안과 불화가 도드라진다. 그는 스승이 그리하듯 먼 하늘을 향해 게송을 읊었다. 조개의 썩은 살 위로 저녁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해미라…….”
록흔은 비로소 미희의 이름을 알았다. 조각조각 떨어진 것들이 한 살로 들러붙었으니 이젠 확인만이 남았다.
***
“그만해. 당신, 이러다 죽어!”
“하지만 이리하지 않으면……. 당신이 죽는걸요.”
“괜찮아, 난. 이대로 곪아터져도 좋으니 제발 그만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해미는 고개를 저었다. 바다 안개라는 이름 뜻처럼 어렴풋하고 아련한 눈동자가 사랑하는 이를 가득 품고 반짝였다. 어머니 품 같은 바다를 떠나 처음 만난 인간이 용조였다. 첫정 준 사람을 어찌 모른 체하겠는가? 침이 말라도 체액이 모두 고갈돼 죽더라도 보듬을 수밖에.
“해미,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당신을 놓아줄 거야.”
갇힌 몸이 할 수 있는 장담이 아니건만 용조는 꼭 그렇게 할 터였다. 아름다운 아내,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정인. 죽더라도 다시 바다에 보내야 한다. 원래 해미가 있던 곳으로.
“괜찮아. 그렇게 슬픈 얼굴 하지 마. 당신 두고 먼저 죽진 않을 테니까.”
안개 품은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달빛이 응고되어 만들어졌다는 빛돌, 월장석. 해미의 눈은 꼭 그 보석과 닮았다. 청백색 빛줄기가 달을 닮은 동공 안에서 반짝였다.
“용조,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게 나 같아서…….”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교인의 눈물은 진주가 된다고 했던가? 용조는 아름다운 이를 바라보았다. 누이 잃은 밤, 호람해에서 만난 이 역시 그런 눈물을 흘렸다. 방울방울 곱게 울면 고대로 굳어 영롱한 보주가 되었다. 지금도 해미의 눈은 물에 젖은 달빛 돌이었다.
도옥, 독!
보얀 구체가 빛 뿌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만해.”
무호의 가장 부유한 이, 여수민. 그자의 집, 탄부용. 모두 아름답다 칭송하나 해미에겐 감옥이었다. 꽁꽁 가두고 마음 얻고자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그는 진저리나게 뺏으려만 들었다.
“용조, 어떻게 이걸 견디는 거죠? 참혹해서 닿기만 해도 아린 것을…….”
“당신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참을 수 있어.”
눈물 자국, 멍 자국, 탈략당한 눈빛……. 아름다운 얼굴은 시들고 그 눈엔 어둠이 깊었다. 용조는 바짝 사윈 아내 때문에 다친 몸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해미…….”
말하던 입이 막혔다. 따뜻하고 가냘픈 혀가 용조를 어루만졌다. 상냥한 입술은 상처투성이의 눈가를 문지르고 깊은 자상이 곳곳에 난 뺨을 달랬다. 고통이 점점 엷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다음에 태어나면…….”
“응…….”
혀로 핥아주면 상처는 금방 딱딱한 껍질을 둘러 입었다. 젖빛 윤기가 흐르는 딱지……. 그녀의 눈물처럼 용조의 상처는 보배롭게 아물었다.
뚝!
막 생긴 진주 한 알이 용조의 뺨에서 떨어져 내렸다.
“해미, 당신과 같은 곳에서 태어날 거야. 새여도 좋고 물고기여도 좋아.”
“그래요, 나도 당신을 찾을 거야. 어디에 있든…….”
뭍은 무섭고 무조건 싫은 곳이지만 이 남자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해미는 눈물 그렁한 눈으로 이리저리 크게 해진 남편을 응시했다.
“그가 그만 이랬으면…….”
“내가 갖은 걸 탐내는 자야. 이렇게 하면서 내내 노리는 건 당신이지.”
해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조그맣게 패인 곳. 질척하게 피 흐르는 곳. 퍼렇게 멍든 곳……. 어느 한 군데 놓치지 않으려고 정성껏 닦아냈다. 그녀의 타액은 용조에게 서늘하게 달라붙었다.
“하지 마. 난 죽어도 좋으니까.”
용조는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하지만 묶인 몸이라 그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곧 가는 팔이 그의 목에 감겼다. 나름대로 야무지게 흔드나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누가! 당신 없으면 난 어쩌라고!”
마음 순한 이가 울었다. 서럽고 서글퍼서 듣는 가슴에선 생피가 돋았다.
‘어쩌면 좋은가? 우리는…….’
용조는 이를 악물었다.
“용조…….”
껴안아 줄 팔조차 없었다. 용조는 해미의 얼굴에 뺨만 디밀었다. 마음이 긁혀 껍질이 벗겨지고 그 안에 들은 것이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짓무른 눈가에 피눈물이 번져 나왔다.
“울지 마, 해미.”
“하지만 이렇게, 당신…….”
“약속했잖나, 평생 아끼겠노라 은애하겠노라……. 단지…….”
용조는 뼈저리게 알았다. 해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잃은 것이 무엇인지……. 골수에서 격심한 분노가 뒤끓었다. 여수민이 앗은 것이 너무 많아 피눈물만 더욱 진해졌다.
“나, 죽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살아 줘요.”
해미의 마음이 그대로 닿았다. 용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린 몸이 무엇을 참고 있는지 알았다. 놈을 죽이기 전까진 절대 죽을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은 분명했다. 놈의 냄새가 밴 아내, 그의 심장은 갈가리 찢겼다.
“죽이고 싶나?”
해미의 보드란 머리칼 새, 놈의 목소리가 닿았다.
“아니면 죽고 싶나?”
언제 이곳에 들었을까? 햇빛 아래, 여수민이 있었다. 좁디좁은 방에 창구멍이라곤 천장에 박힌 손바닥만 한 유리알이 전부, 어둑한 곳이라 음험한 눈은 더욱 또렷하게 돋았다.
“그만둬요. 용조는 더 이상……, 아악!”
애원은 짧되 비명은 길었다. 수민은 검남빛 머리칼을 한 손 가득 그러쥐고 힘껏 당겼다. 몸피 가냘픈 이라 속수무책으로 딸려 들어갔다. 용조는 그 모든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년이 그랬군, 맞나?”
“아, 안 돼…….”
바삭바삭, 어디선가 유리질이 깨졌다.
“감히 놈을 보듬어?”
자근자근, 연한 살이 씹혔다.
“해미!”
수민은 용조 앞에서 해미를 능욕했다. 입술을 겹치고 혀를 빼앗고 걸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옷을 잡아 찢었다.
“시, 시……, 으읍!”
달빛 눈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리고 붉은 진주가 쉼 없이 떨어졌다. 차가운 바닥에 뜨거운 알갱이가 서럽게 부딪쳤다.
“여수민, 이 악귀만도…….”
용조는 이를 갈았다. 이의 뿌리가 흔들릴 만큼, 그는 저주에 저주를 거듭했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해미는 여수민의 수중에 있었다. 눈빛만 우글부글 뒤끓을 뿐, 힘은 일호도 존재하지 않았다.
“악귀든 무엇이든 너보다 가진 것이 많다. 어떠냐, 단용조? 분에 넘친 걸 지녔다 뺏기니.”
겁략이 깊어질수록 해미는 축 늘어졌다. 어여쁜 눈귀는 눅눅해져 들러붙은 듯 열리지 않았다.
“여보, 해미!”
외침은 부질없었다. 어여쁜 아내는 이미 정신이 바랬고, 무력한 남편은 피 끓는 울음만 토했다. 모든 걸 가진 자는 그저 서늘한 눈으로 그런 그들을 내려 보았다.
***
사내 열댓이 걸게 둘러앉아 탁주를 주고받았다. 커다란 화톳불 위에서 돼지 넓적다리가 번지르르하게 익어 갔다. 볼따구니가 허용하는 한도 내 밥술도 커졌다. 풍성한 두리기상이라 서두를 일은 없건만, 모두 시장한 판이라 씹는 속도도 넘기도 속도도 너나 할 것 없이 빨랐다.
“왜? 벌써 다 먹은 거야?”
사황은 눈을 조프리고 록흔을 보았다. 쓸데없이 일하느라 저녁도 늦게 들더니 뜨는 둥 마는 둥하고 얼른 일어서는 참. 배곯는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에 그는 묻고부터 보았다.
“예, 형님. 그만저만 양 차게 먹었습니다.”
“그 험한 일을 왜 하고?”
다정한 것도 좋으나 속이 상했다. 구더기가 왁실덕실한 기패장에서 그 역할 것들을 묻었다니, 태저가 알면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사황은 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 통감님도. 록이 이 사람이 속이 비단이라 그렇지요. 낮에 묻고 가더니만 기어이 덮어 주고 오더만요. 우린 하냥 지나쳐도 생각조차 못했는데 말입죠.”
일꾼 하나가 울걱질을 하며 말했다. 입안 가득 든 음식이 척척한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구르는 게 훤히 보였다.
“아닙니다. 형님, 몸도 곤하고 하니……. 오늘은 좀 일찍 잤으면 하는데요.”
“아, 그래야지. 어서 가서 쉬게.”
사황은 태저를 떠올렸다. 아우가 얼굴이라도 상한 것 같으면 치도곤을 내겠다던가? 순한 벗이나 꽤나 을러댔었다.
“통감님, 솔직히 말씀하시죠.”
“뭘?”
“록이 말입니다. 보윤 섬공님 짝으로 생각하고 계신 거죠?”
“뭐? 그거야…….”
시치미를 떼려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사황은 이미 귀에 걸린 입을 주체하지 못하고 배시시 웃어 버렸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였다. 그 대신 빈 잔이 입을 벙긋 벌렸다.
탁!
조로록!
타닥타닥!
밤이 깊으니 술도 익고, 술이 익으니 장작은 더욱 벌겋게 타들어 갔다. 록흔은 무리에서 멀어져 빈장 깊숙이 숨어들었다. 이 안에서 머문 날이 꽤 되어 이젠 지리도, 지키는 이들도 익숙했다. 그는 아무 저항 없이 다가가 탄부용 바로 밑에 섰다.
‘음과 양은 조화롭고, 양과 양은 서로 경계하며, 음과 음은 곱지 않으니…….’
진주의 발은 참으로 오묘했다. 아래의 것은 사람의 머리통만치나 굵고 저 위의 것은 자두알만큼 잘았다. 결 고운 것들이 사선으로 내리 뻗어 빛은 무리 없이 통과하나 사람이란 몸피를 가진 것은 어린애라 해도 지날 수 없었다. 듣자니 구슬을 잘못 다루면 극히 가느나 탄성과 강도는 무한히 큰 실에 살이 죄듯 꿰뚫리듯 감기듯 하여 죽는다 했다.
‘어디 보자.’
록흔은 가장 낮게 깔린 구슬 하나에 손을 대 보았다. 산 것의 온기가 닿자 구슬이 더욱 보얘졌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글씨가 돋았다. 방금 전까진 없던 것, 경(鯨)이란 문자가 새뜻하게 불거졌다.
‘수컷고래, 그리고…….’
합이 맞는 것이 있을 터. 록흔은 이리저리 눈을 돌려보았다. 그리고 다른 것들에도 손을 댔다.
‘환(鰥), 홀아비라……. 거(䱟), 민어의 암컷.’
경과 환이 닿았다. 일순 강한 저항이 손바닥을 치대고 올라왔다. 가만두면 화우(꽃 지붕)까지 타고 올라갈 만큼 진동은 컸다. 록흔은 이 지그시 물고 나대는 극사를 움켜잡았다.
지익!
백문불여일견. 얇은 살갗에 포가 떠졌다. 이것이 양끼리의 경계로군. 록흔은 피 배어 나오는 자리를 혀로 슥 핥았다. 비릿한 선이 혀에 그대로 남아 쇳내를 풍겼다.
‘그렇다면.’
초극사의 신축성은 좋으나 좋지 않았다. 구슬끼리 닿을 만큼은 늘어나나 사람 하나가 온전히 들어갈 만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설령 벌어진다 해도 또 다른 자리에 매달린 다른 진주와 부딪힐 터. 그야말로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록흔은 경과 거를 닿게 했다.
사르륵!
말 그대로 음과 양은 조화를 이뤘다. 저들끼리 닿자마자 팽팽히 당겨진 실이 노곤히 늘어났다. 이렇듯 음과 양이 조밀하게 몰린 곳, 바로 록흔이 목적하는 바였다.
다악!
몇 번 다뤄보아 요령이 생겨 글씨를 돋게 하는 것은 이제 어렵지 않았다. 록흔이 진주 가까이에 손을 대면 맑은 기가 소르르 흘러나왔다. 그 힘에 반응해 숨은 글씨는 새긴 듯 또렷해졌다.
“물여우(鰅, 날도랫과 곤충의 애벌레)와 물호랑이(鯱, 범고래).”
티릭!
상극이었다. 록흔은 미친 듯 떨어대기 전에 구슬 둘을 얼른 떼어 놓았다. 낮은 곳을 뱅뱅 돌아보았으나 역시 결계의 입구는 없었다. 이렇듯 낮은 곳에 손쉽게 뚫지는 않았을 터. 그는 입귀를 실긋 비틀었다.
디잉!
다아악!
마침 아름드리 솟은 나무가 곁에 있어, 록흔은 그것에 의지해 몸을 조금씩 높였다. 그가 지나면 진주는 빛을 머금고 은은히 반짝였다. 엷은 홍색, 부연 젖빛, 순한 황금빛, 푸르스름한 풀빛……. 구슬의 색이 다양한 것처럼 글씨마다 본연의 빛이 달랐다. 그는 꼼꼼히 훑으며 탄부용의 중심을 향해 올랐다.
암코래(鯢), 무소의 암컷(兕)……. 이것이 닿으면 어찌 되는가? 록흔은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불그스름하고 푸르스름한 진주 두 개가 청량한 소리를 내며 접했다.
촤르륵!
오슥오슥!
실 두 가닥이 억세게 엉켰다. 그리고 마구 번식해 서로를 칭칭 감았다. 마치 강샘하는 여인인 양 모질게도 서로를 그러쥐었다. 그 중간의 틈이란 손가락 하나 들어갈 여지없이 좁았다. 록흔은 고개를 갸울다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느 곳인가?’
분명 입구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