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22
연록흔 – 22화
“아직도 연회의 여흥이 가시지 않은 건가요, 연중랑장?”
큰 것만 눈에 들어와 세부는 살피지 못했는지, 이제야 미랑 은소현도 보였다. 록흔은 창백한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연회라…….’
아름다운 미랑은 뭐라도 아는 것처럼 그 밤의 일을 들먹거리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열이 올라서였다고……. 그밖에는 다른 변명거리를 댈 수 없는 그 밤을 마치 훔쳐보기라도 한 듯.
‘바래지 않는다.’
나흘이 지났건만 록흔에게는 모든 것이 생생했다. 털어 내려 했건만 그 밤의 사내는 절대 잊히지 않았다. 하여 곧게 바라보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나 종신 고용된 이상, 목숨을 담보로 하여 맺은 거래인만큼…… 피할 길 바이없이 부딪쳐야 했다. 그녀는 턱을 단정히 들었다.
“설마 지금까지 남아 있겠습니까?”
샤랑.
록흔이 공손하게 읍하자, 보얀 귓가에서 신월이 금빛으로 달랑거렸다.
‘연비…….’
달을 닮은 타니(귀걸이)는 날캄한 눈에 그늘을 만들었다. 심장에 박힌 달의 날이 새삼 아프게 다가와 가륜은 이를 사리물었다.
‘같지 않으니…….’
록흔은 다지고 또 다졌다. 호분중랑장 연록흔과 궁녀 연은 엄연히 달랐다. 그 밤 초승달처럼 곱게 그린 눈썹도, 보얀 분칠도, 사랑스럽게 붉은 잇꽃의 연지도 지금은 없다. 그저 사내라 무사로서의 책임감, 날카로움, 의젓함, 매서움만을 가졌을 뿐이다.
‘약해 빠진 소리 할 것도 없고.’
몇 가지 색칠과 늘어뜨린 머리카락, 하늘하늘한 비단옷……. 얍삽한 장난질로 만든 연은 꿈속에서나 존재했다. 이제 운기변검을 둘러 입었으니 호분위의 총두, 호분중랑장일 터. 현재 록흔이 지닌 이름은 오직 하나였다.
“안색이 파리하다.”
예상 밖의 말이었다. 애달파 눈망울은 커다랗게 부풀고, 애써 누른 멍울은 심장에서 불거져 나왔다. 그러나 록흔은 곧은 시선으로 가륜을 응시했다.
“날이 차니 좀 언 것이겠지요, 폐하.”
소현이 재빨리 쏘아붙였다. 황제답지 않은 언행이 못마땅해 고운 얼굴에 실금이 그려졌다.
“아마도, 마굴과 이곳의 생활이 달라서 적응을 못한 탓일 겁니다, 폐하.”
진과가 서둘러 록흔을 감쌌다. 그에 소현의 제비꼬리같이 잘빠진 눈썹이 불뚝 치켜 올라갔다.
“그래……. 그런가, 연중랑장?”
하문에 록흔은 그저 공손하게 읍했다. 떨어지는 시선이 창검과 같아서 아프기도 하건만, 그녀는 쉬이 움츠려들지 않았다.
“폐하…….”
소현이 재촉하여 불렀다. 소매만 끌지 않았다 뿐, 황제를 잡아당기고 싶은 빛이 미안에 역력했다.
“무리 마라. 이끄는 이가 무르면 따르는 이들이 무너진다.”
호분위를 일컬어 하는 말이 분명한데, 다른 의미로도 들렸다. 그러나 록흔은 부질없는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혼자만의 마음 놀이가 되기 전에 야무지게 잘라 버렸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가륜은 스치는 눈으로 록흔을 바라보았다. 고개 숙인 이의 해쓱한 뺨이 유난스레 도드라졌다.
휘이이잉!
삭풍이 불었다. 각양각색의 옷자락이 매운바람에 부대꼈다.
‘환향인가?’
풀꽃 향기, 초록빛 푸르른 내……. 동장군이 지닐 색이 아니건만 봄의 유록이 강무관에 떠돌았다. 가륜은 왠지 그리운 마음에 시선을 멀리 돌렸다. 저 너머에서 인녕전의 자색 지붕이 아스라이 보였다.
“폐하, 설빙화가 곱습니다.”
나무마다 내려앉은 은백색 꽃이 소담했다. 누가 일부러 다져 쌓아도 저리 곱지는 않을 터. 소현이 마냥 좋아하며 미소 지었다. 그녀다운 독기는 파르족족한 눈귀 어딘가로 이미 감춰 버렸다. 그러나 볼 사람은 이미 다 본 뒤였다.
“날도 찬데.”
가륜 역시 인녕전에 가득 핀 설빙화로 눈을 돌렸다. 말마따나 투명하게 빛나는 눈꽃, 얼음꽃이 곱기는 했다. 하지만 흰빛을 보자니 반갑지 않게도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서늘하게 식은 미희, 연약해서 함부로 만지면 부서질 것 같던……. 그는 입귀를 틀었다.
“걷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이리 따라나서는 건, 무슨 바람이 불어선가?”
심화가 차올라 가륜은 더욱 차게 말했다. 그러나 소현은 마냥 설레는지 볼이 곱다시 붉었다.
“폐하께서도…….”
가륜은 연(가마)을 타기보다는 걷는 것을 좋아했다. 웬만한 곳은 걸어 다니는 터라, 항시 편히 움직이려는 소현이 곱지 않았다. 그는 조그만 비단신을 마뜩찮은 눈으로 훑었다. 얇고 맵시 있기만 한 것이라 땅을 밟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폐하 계신 곳, 소첩이 마다한 적 있사옵니까? 늘 따르고 싶지만 틈을 안 주시어서…….”
말마디마다 는실난실 교태가 잘잘 흘렀다. 가륜은 소현을 흘끗 쳐다보았다. 평정심이 없어진 터라, 여자이려니 하고 넘기던 것들이 다 거슬렸다. 특히 칭얼대는 소리가 몹시도 역했다.
“소현, 너 하나만 바라보란 말은 아니겠지?”
가륜은 말한 이 무색하게 받아치고 등을 돌렸다.
‘어쩌면, 폐하께서는…….’
하도 냉랭히 대하니 한기가 절로 들었다. 소현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항시 뒷모습만 보여주시는지…….’
소현은 입술을 깨물며 가륜의 넓은 등을 보았다. 그녀는 평생 정 같은 것은 주지 않을 사람인데도 그 마음을 얻지 못해 안달인 자신이 처량했다.
“마마, 가마를 부를까요?”
시중을 드는 용상궁이 묻자 소현은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폐하께서도 타지 않으시는데……. 괜히 미움만 살걸.”
벌써 가륜은 저만치 멀어져 버렸다. 소현은 앵돌아진 입술로 우물거리다 다시 걸었다. 차가운 눈이 얇은 비단신에 스며 뼛속까지 닿는 듯했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어 그녀는 보랏빛 대수삼에 가려진 팔을 휘적거리며 부지런히 쫓아갔다.
사박사박.
보득보득.
맑은 차향이 인녕전에 가득했다. 가륜은 조금은 엷어진 눈으로 푸른 찻물을 응시했다. 살빛 하얀 다기를 이리저리 돌리니 불편한 심기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황상, 이 할미는 무슨 일로 찾으셨나요? 참으로 알맞게 오시었소, 할미가 황상의 용안을 잊기 전이니 말입니다.”
농을 하는 얼굴이 너무나 포근했다. 자애로운 서조모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박스런 마음이 옅어졌다. 가륜은 빙긋 웃으며 태후에게 장단을 맞췄다.
“안 그래도 할머님 모습이 가물가물하여 부랴사랴 찾았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럼요. 이 늙은이 먹고 자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있어야지요.”
배 아파 아이 낳아 본 적 없는 여인이라, 인혜태후에게 가륜은 각별했다. 황상이기에 앞서 살뜰히 여기는 손자였다.
“그런데 은미랑, 무슨 일로 귀한 얼굴 내비친 게요?”
대놓고 하는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두 사람 다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소현을 황상 옆에 붙어 앉은 여우라 생각하는 태후나, 태후가 너구리 열댓 마리는 품고 있다 여기는 소현이나 꺼리는 마음은 같았다.
“폐하께서 오신다기에 태후마마도 뵐 겸 해서 따라나섰습니다.”
소현은 대수삼 아래 말아 쥔 주먹에 힘을 잔뜩 실었다.
“황상께서 이 늙은이 처소에 자주 오셔야 은미랑 얼굴도 잊지 않고 보겠군요. 그런데 미랑, 요즘도 봉밀만 드시오? 그런 부실한 몸으로 황손을 포태할 수 있겠소?”
날아가던 새도 은미랑을 보면 날개를 접는다는 말이 있었다. 꽃보다 고운 미희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인데도 배설하는 것을 몹시 경멸했다. 그래서 영양이 풍부한 꿀만을 먹으면서 뒤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태후는 선녀인 체하는 소현의 태도를 항시 못마땅해 했다.
‘그건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 후사가 없는 건 똑같지 않은가? 황손이라고! 음양이 만나야 태기가 있을진대 나 혼자 가당키나 한 일인가, 늙은이?’
소현은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내명부의 제일 웃전인 태후에게 대놓고 들이댈 수 없는 노릇이라 아래만 보았다.
‘예쁜 머리로 온갖 험한 말은 다하누나.’
내리떴다 하나 그 눈에 떠도는 생각쯤은 쉽게 읽혔다. 태후는 그걸 짐짓 모르는 체하며 가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상, 이 할미가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돋친 가시는 소현에게 다 박혀서 남은 건 오로지 인자한 할미의 음성이었다.
“말씀하시지요.”
가륜은 두 여인이 아옹다옹하는 것을 관조하다 건조하게 물었다. 만나기만 하면 황손 이야기를 하는 서조모가 할 부탁이란 듣지 않아도 뻔했다.
“황룡국의 안주인은 언제 들이실 겁니까? 설마 황상께서 미랑만 바라보고 계신 건 아니지요?”
“그럴 리가요.”
가륜은 고개를 저었다. 늘품 있는 입매가 실긋하게 틀어졌다.
‘폐하…….’
단박에 잘라 부정하는 말이 야속할 법도 한데, 지금 소현에게는 싸하게 웃는 얼굴만 보였다. 그녀의 임은 어찌 저리 잘났는지 볼 때마다 가슴이 선득했다.
“언제쯤 이 할미가 황손을 안아 볼까요?”
“글쎄요.”
가륜은 지금껏 자식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스물다섯 해, 건조하고 급박했다. 스스로 지키고 싸워야 했던 인생이라 후계까지 생각할 여력 따윈 없었다.
“황상께선 이 황룡의 가장 큰 가군이십니다. 일개 범부가 그러하듯, 후세를 도모한다는 것은…….”
인혜태후는 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따스한 것인지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는 이는 다른 생각을 했다.
‘연, 네가 낳을 아인…….’
그저 하룻밤의 인연으로 치부하는 게 되지 않았다. 가륜은 눈을 얇게 떴다. 심장을 뚫고 뿌리 내려 온전히 자라기 시작한 마음이라 거둘 수도 없었다. 눈빛 파랗게 맑은 연, 그 눈동자를 닮은 작은 아이……. 분노가 잠시 사그라졌다. 한아한 미소가 입술에 배였다.
“황상, 그리 얼버무리실 생각은 마세요. 혹 마음에 두신 비빈들은 없으신가요?”
황상이 정히 황후를 맞고 싶지 않다면 참한 후궁들 중에서 가려 뽑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태후였다.
“할머님, 차가 식습니다. 향이 무척 좋군요. 어서 드시지요.”
가륜은 상념을 떨며 말을 돌렸다. 그에 태후도 더는 채근하지 않았다.
“그래요, 푸릇하고 깊지요.”
가륜은 이래서 태후를 좋아했다. 적당히 치고 들어가야 할 때를 알고, 또 물러설 줄도 아는 성정이 편했다.
“저번 연두쌍일에 파류 공주가 익주에서 질 좋은 찻잎이 들어왔다며 가지고 온 거랍니다. 입속에 남는 잔향이 참 좋아요.”
가륜은 차향을 음미했다. 푸릇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지니 마저 지우지 못한 그림자가 또 머리를 들었다.
‘너, 어디에 있는가?’
누군가를 반려로 맞는다면, 황후를 얻는다면……. 가륜은 연을 그렸다. 싸늘한 눈빛이 다스해졌다.
‘사람의 마음이 이리 쉽게 동화되는 것인가?’
하룻밤의 연이나, 가슴 먹먹하게 그리웠다. 가륜은 제 약한 살갗이 몹시 설어 쓰게 웃었다.
“황상, 하여…….”
태후는 계속 이야기를 하고 가륜은 고개 끄덕이며 들었다. 소현은 내리뜬 눈 새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 조그만 것이 다리를 물려고 들기에…….”
황제의 미소는 그 의미를 알듯 말듯 미묘했다. 소현은 가륜을 바라보며 한숨을 사리물었다. 황룡국의 주인이라는 대단한 허울 없어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내였다. 참으로 잘난 정인의 얼굴이라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고약한 놈이군요.”
“아니에요. 하도 작아서 물어도 아프지 않더이다. 살갗만 조금 벗겨졌어요.”
화제의 중심은 태후가 기르는 강아지였다. 소현으로서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할머님, 좀 여위신 것 같습니다.”
“원래 늙은이는 하루가 다르게 졸아드는 법이에요. 걱정 마세요, 황상. 내 황손 안고 어를 때까진 끄떡없을 테니.”
태후가 요령 좋게 혼사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러자 가륜이 가타부타 말없이 빙긋 웃었다. 소현은 제몫이 아닌 얘기라 그림처럼 앉아 있기만 했다.
달각달각.
자기 부딪치는 소리가 맑았다.
“황상, 이 할미가 말입니다. 요전 날에는…….”
인혜의 얘기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록흔, 폐하께서 부르신다.”
“무슨 일입니까?”
“모르겠다. 뭐, 가 보면 알겠지. 그나저나 사흘 전보단 안색이 많이 나아졌는데, 시체처럼 푸르뎅뎅하더니…….”
격의 없는 진과의 농담에 록흔은 빙긋 웃었다.
“지금 무세전에 계신다 들었으니 그리로 가 봐. 너무 졸아붙지는 말고.”
“네, 그러죠.”
록흔은 해사했다. 호분위의 백색 제복을 받쳐 입은 모습이 어여쁘기까지 했다.
“정말 괜찮은 거냐?”
“예.”
진과는 고개를 갸울였다. 유약한 인상은 결코 아닌데 지금은 잔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며칠 새 반쪽이 되어 버린 얼굴 탓인지도 몰랐다. 그는 혼자 결론내리고 고개를 까닥거렸다. 일부러 묻지 않았으나 혼자 많이 앓은 것이 분명했다. 강단지게 굴어도 꼬마는 꼬마일 뿐. 그는 아우 다루듯 록흔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어서 가 봐라. 폐하께선 기다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별다른 대꾸 없이 록흔은 강무관을 나왔다.
도옥, 독!
샤락샤락.
머리 위로 가는 눈발이 하나씩 날렸다. 올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았다. 제법 굵어진 눈송이들이 핼쑥해진 뺨에 내려앉았다. 차가운 감촉이 좋아서 록흔은 한참 서 있었다.
챵!
채앵!
시위들은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창검 겨루는 소리가 첨예했다. 연병장엔 눈 쌓일 틈도 없었다.
“장령.”
무술 대련 중이던 호분위들이 록흔을 보고 허리를 숙였다. 깍듯하나 상관이라 마지못해 갖추는 예였다. 꺼리는 마음이 여러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어디, 가십니까?”
부중랑장 고하준이 한발 나서서 물었다.
“음, 무세전에.”
록흔은 무표정한 얼굴로 직속 하관을 대했다.
“장령, 한 시진 후에 연병식이 있습니다만.”
호분위 모두 연두쌍일에 있었던 황제와 호분중랑장 사이의 일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들은 실력의 유무를 떠나 새로운 대장을 미덥게 여기지 않았다. 선이 가는 게 영락없는 서생인 데다 연배도 아래라니 우러르는 마음이 생길 리 없었다.
“혹 용무가 길어지시면…….”
이 일로 걱정이 많은 이는 좌중랑장 장진과였다. 그에겐 호분위들이 은근히 항명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록흔 본인은 그러든지 말든지 별생각이 없었다.
“자네는 호분중랑장 대리잖나?”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니 록흔 역시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호분위의 버금 자리다. 일일이 묻지 말고 그런 것쯤은 알아서 처리해라.”
형식적으로 묻는 말에 열의 가지고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록흔은 사늘한 시선으로 하준을 응시했다.
“예, 장령! 그럼 다녀오십시오.”
하준을 필두로 모두 고개를 숙였다. 마음 없는 예라 대부분 뒤통수가 뻣뻣했다.
“수고해라.”
록흔은 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허리 반듯이 세우고 목적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보득!
보드득!
눈이 가볍게 눌렸다. 록흔이 지난 자리에 얄팍한 발자국이 생겼다. 그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심장이 뛰는 속도를 조절해야 했다. 그러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보드득, 보드득!
보득보득!
보득!
황제가 개인 집무를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궁전 무세전, 그중 극히 내밀한 일을 위해 존재하는 집무실 청방.
록흔은 내관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손대지 않아도 열리는 문이 여러 개, 끝이 없어 뵈는 기다란 복도……. 그는 마침내 커다란 방에 닿았다.
“왔나?”
뚝 떨어진 것은 아름답고 준엄한 목소리였다, 다름 아닌 황제. 록흔은 몸을 낮춰 극진한 예를 표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눈 하나 가득 가륜이 들어찼다.
“찾으셨습니까, 폐하?”
가륜은 서궤 앞에 앉아 있었다. 문득 시선이 마주쳤나 싶었다. 갑자기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봉안에서 날카로운 금이 빛났다.
“얼굴이 왜 그러한 거냐?”
“별것 아닙니다.”
마음 숨기려 록흔은 외려 딱딱하게 말했다.
“무리하는군.”
그저 단정이었다.
“살살 해라, 초장부터 지친다.”
록흔은 눈 내리깔고 그나마 있지도 않은 표정을 숨겼다.
“넌 내게 평생의 빚이 있지 않느냐?”
걱정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었다. 록흔은 부아가 치밀어 혀끝을 깨물었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응?’
록흔은 고개를 휙 돌렸다.
‘닮았군.’
없던 사내가 갑자기 솟았다. 휘장 안에 숨어 있었던 모양. 황제와 같은 부류인지 싱긋이 웃는데도 인상이 차가웠다.
“우중랑장, 인사해라. 호분중랑장 연록흔이다.”
사내는 황제의 오른쪽에 있어서 록흔과 눈높이가 달랐다. 올려다보는 것이 못마땅해 그는 눈을 가늘게 찢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다.”
탁, 탁, 탁!
사내가 단에서 내려왔다. 그는 록흔 곁에 와서 우뚝 섰다. 비로소 밟고 선 곳이 동등해졌다.
“대신들을 까무러치게 만든 자가 바로 너로군. 아무튼 반갑다.”
갑작스레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녹안의 사내는 빗금 하나 없는 눈으로 록흔을 꿰뚫었다.
“절 언제 보셨습니까?”
록흔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일순, 사내가 내민 손이 공중에서 어정쩡하게 멈춰 버렸다.
“뭐라고?”
“하대하시는 걸 보니 초면이 아닌 듯해 여쭌 말입니다. 하지만 전 뵌 적 없는 분이군요.”
시간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얼음인 듯 차게 굳었다.
“하하하하!”
사내가 갑자기 파안대소를 했다. 커다랗게 웃는 통에 실팍하게 넓은 어깨가 한참 동안 들썩거렸다.
“폐하, 하신 말씀 그대롭니다. 보기 드문 자로군요.”
사내의 눈에서 녹옥이 춤을 추었다. 눈시울 새, 선명한 신록이 반짝이며 일렁였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다. 난 설무진이다. 좌중랑장 장진과와는 갑장(같은 나이)이니 그에게 하듯 스스럼없이 대해도 좋다.”
“그것은 우중랑장의 사람됨을 겪어 본 후에 제가 정할 바입니다. 장중랑장과는 사정이 같지 않습니다.”
어린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무진은 입술을 굳혔다. 녹색 눈동자가 차게 번득였다.
“그야 지내보면 알겠지. 연중랑장, 잘 부탁한다. 싫든 좋든 폐하의 명으로 함께 일하게 되었으니.”
록흔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지만 우선 내키지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퍽이나 건방진 사내였다. 선입견부터 가지는 것은 좋지 못하나, 일단 박힌 것이라 쉽게 빠지지 않을 듯했다. 록흔은 입맛이 썼다.
타악.
가륜이 둘을 내려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둔중한 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그리고 그림인 양 가구인 양 시립하고 있던 하신이 움직였다.
주르륵.
하신이 벽면의 휘장을 걷자 커다란 괘도가 나타났다. 그것은 황룡위성도, 황룡국과 그 주변 나라들을 그린 지도였다.
“지금껏 우중랑장 설무진은 집금위 외에 나라 전체를 살펴 내게 알리는 임무를 맡아 왔다.”
록흔의 눈동자는 한 사람만을 따랐다. 가륜은 이제 지도 앞에 있었다.
“그러나 일이 갈수록 방대해져 무진의 동창만으로는 효율적이지 못하다. 해서…….”
빛 맑은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팍.
지도 한가운데, 모양 좋은 검지가 꽂혔다.
“금수하 이남은 우중랑장 설무진이 맡고.”
가륜은 황룡국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거대한 강 금수하를 가리켰다.
“북쪽은 록흔, 네가 맡는다.”
올곧은 시선이 떨어졌다.
“미력하나 노력하겠습니다.”
올곧은 대답이 올려졌다.
“겸손 떨 것 없다. 무호의 일을 봐서도 네가 적임이니.”
흰 제복 입은 날부터 선택은 없고 필수뿐이다. 록흔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하라면 할 수밖에.’
가륜이 철패를 내밀었다. 차갑게 반짝이는 금속판 위에 글씨가 돋아 앉았다. 록흔은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쇠 특유의 냉기가 선득하게 다가왔다.
“부접.”
붉은 보석이 촘촘히 박힌 부접(不接)이라는 두 글자. 록흔은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그것은 ‘닿지 못할 곳이 없다’라는 의미였다.
“부접두는 너다, 연록흔.”
“예, 폐하.”
말로 부리니 말로서 살아야 할 터. 장기짝 주제에 복잡한 마음을 품을 이유는 하등 없었다. 마(馬) 자 새기고 해(日)를 향해 전진하는 놈들처럼 록흔 역시 황룡의 태양이 부리는 대로 움직이면 그만일 터였다.
“네 수하의 부접들은 따로 불렀다. 잠시 후에 만나 보도록.”
록흔은 철패를 소매부리 안으로 갈무리했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무진, 그만 가도 좋다.”
“예, 폐하.”
어딘지 모르게 둘 사이의 주종이 남달랐다. 록흔은 곁눈으로 황제와 우중랑장을 살폈다.
“연록흔, 만나서 반가웠다. 앞으로 종종 보자.”
무진은 남의 심사는 개의치 않고 싱글거렸다. 그 얼굴은 잘났으나 유들거리는 미소가 거슬렸다. 록흔은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차라도 한잔할 테냐, 록흔?”
하신도 무진과 함께 물러나갔다. 이제 청방에 남은 건 두 사람뿐이었다.
“괜찮습니다, 폐하.”
록흔은 딱 잘라 말했다. 예의 바르나 곁을 두는 어조였다.
“그럼 술은 어떠하냐?”
“그것도…….”
대답하다 록흔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 놀리는 어조였다. 그는 고개를 발딱 들었다.
“폐하.”
가륜은 록흔 바로 앞에 있었다. 언제 단을 내려왔는지 숨결 잡아챌 만큼 가까웠다.
“왜 이리 굳었나? 뒷목이 뻣뻣한 것이 장작개비 같구나.”
록흔은 뒤로 무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대신 무심한 듯 눈만 차분히 들었다.
“무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아니면 너무 부린다고 성을 내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께 진 빚을 헤아릴 수가 없는 저입니다.”
일순, 심장이 경련했다. 불수의근이라 제멋대로 굴었다. 펄떡대며 뛰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불가한 일이나 그리 느꼈다. 갑작스레 더해진 체온에 록흔은 굳어 버렸다.
“그리 잘 아는데, 왜 이리 함부로 하는가?”
뺨에 닿은 손, 누구의 것인가? 록흔은 화석이었다. 살과 피는 순식간에 증발하고 뼈만 남았다.
“폐하…….”
록흔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밤, 그 감촉……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호분위들이 힘들게 하나? 마도굴에서 살아나온 너라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닐 텐데.”
손은 이미 멀어졌는데 평정심이 돌아오지 않았다. 록흔은 턱에 힘을 주었다.
“조심하겠습니다.”
목을 쥐어짜서 겨우 한마디 하고 록흔은 입을 다물었다. 빳빳한 혀도 문제거니와 통제 어려운 심장도 버거워서 두 말 하는 것은 피해야 했다.
“록흔, 아느냐?”
깊은 눈이다. 록흔은 막연히 생각했다.
“요즘 내가 부쩍 화가 늘었다. 심장에 체증이 있는 듯해. 무엇 때문일까?”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결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록흔은 고개를 저었다.
“따로 심려하시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껍데기에 걸맞게 덤덤하고 초연했다. 록흔은 그저 중랑장으로서 물었다.
“잔잔한 수면에 돌 하나 던지면.”
가륜의 목소리가 물처럼 퍼졌다.
“그 파문이 일파만파가 되는 걸 아나, 록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록흔은 가륜을 망연히 올려다봤다.
‘그럴 리 없다.’
그와 같은 위치의 사내가 널리고 널린 꽃 하나 때문에 마음 흩트릴 일은 없을 터. 하룻밤 꺾은 꽃은 벌써 시들었다. 록흔은 설마 하는 자신의 마음을 비웃었다.
“애먼 소리만 했군.”
일체 회귀, 가륜은 오로지 황제였다.
“부접들이 별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가려 뽑은 자들이니 한번 가서 봐라. 나름대로 난 자들이라 쉽진 않겠지만 네가 잘 다룰 거라 믿는다.”
가륜은 냉정한 얼굴로 돌아와 일에 대해 말했다.
‘별호대로군.’
남의 속은 마구 휘저어 놓고 다시 일 얘기로 돌아간다. 참으로 빙천자다웠다. 록흔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폐하,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가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의 단절, 더 이상 둘은 마주 보지 않았다. 일개 호분중랑장 따윈 안중에 없는 듯, 그는 눈꽃 절은 창을 향해 섰다. 록흔 역시 미련 없이 등 돌려 청방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