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25
연록흔 – 25화
‘전형적이군.’
록흔이 곁에서 들여다보니 뽀얀 목 주위에 깊은 피멍이 있었다. 여기저기 삭흔(새끼나 끈 따위에 묶인 자국)이 분분했다. 법의가 조심스럽게 살피다 얼굴을 찡그렸다.
“타살이군요.”
법의가 단정하자 록흔이 되물었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우선 자진해서 목을 맸다면 이런 삭흔이 여러 군데 생기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액사에서 으레 뵈는 혀의 잇자국도 없고, 흰자위 출혈도 없습니다. 그리고 열어 봐야 확실하나, 아마도 설골(혀뿌리 끝에 붙은 말굽 모양의 작은 뼈)이 부러졌을 겁니다. 자살인 경우 대체로 설골이 부러지지 않지요. 누군가 이미 죽은 사람을 자살로 보이게끔 매단 게 분명합니다.”
법의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갈우선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가 그랬단 겁니까? 소민에게…….”
록흔은 손을 들어 갈우선을 제지했다.
“그리고…… 확실한 건 검시를 해 봐야 알겠지만, 그 외에도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뭡니까, 그게?”
“그것이…….”
법의가 갈우선을 힐끗 보더니 록흔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록흔은 우선 강무관으로 돌아왔다. 갈우선이 검시는 절대 안 된다고 우기는 통에 시간이 꽤 걸렸다. 그가 방소민의 시신을 법의국에 넘겨주고 오자마자 설무진에게서 전서구가 도착했다. 예상대로 갈우가의 신부와 익주의 건은 정황이 같았다.
“접두, 그게 정말입니까?”
기리단이 물었다. 록흔과 그 주위에 둘러앉은 부접들 모두 질문하는 바를 알았다.
“검시 결과를 봐야 하지만 거의 확실하다. 익주의 건도 이와 같아 시신에 피가 한 방울도 없다더군.”
“흡혈귀 짓일까요?”
아진이 묻자 우레 같은 소리가 터졌다.
“야, 너 아직도 그런 걸 믿나?”
“그런 건 소싯적에 떼어 버렸어야지.”
록흔이 손짓하자 웃음소리가 일시에 그쳤다.
“글쎄, 사람 짓인지 귀신 짓인지 알아봐야겠지.”
드르륵.
단숨에 벽이 밀렸다. 거대한 지도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신부 시살은 갈우가까지 합하면, 스무 건이 넘는다.”
부접들은 미동 없이 록흔을 바라보았다.
“희생자는 모두 명문가 출신이다. 자살로 위장한 교묘한 타살, 한 방울도 남지 않은 혈액, 사건 발생 시각은 자시(밤 열한 시부터 오전 한 시) 무렵. 이 외에 초야에 벌어진 참극이란 공통점이 있다.”
록흔은 간단명료하게 사건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발생 지역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록흔은 지도를 짚어 나갔다. 말마따나 황룡전도 상에서 어떤 식으로 묶으려도 공통 인자가 바이없었다.
“미치광이 짓이 아닐까요, 접두?”
“장가 못 간 총각귀신 짓인지도 모르겠군.”
단지 반어법. 농하듯 말해도 부접 모두 심각했다.
“그 몽달귀가 분명 사내놈이라면 죽이는 대신 납치했겠지, 안 그런가?”
록흔 역시 가볍게 응수했다. 그러나 단정한 입매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아무래도 본건은 좀 길어질 것 같다. 금수하 이북의 관에 통고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혼사 있을 예정인 부호나 토호들을 조사해라.”
“종명!”
여섯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럼, 수고해라.”
록흔은 잠시 벗어둔 호분중랑장의 관모를 다시 썼다. 그리고 호분위국을 나섰다. 부접들도 각자의 일을 좇아 서둘러 흩어졌다. 강무관의 동익에서 인영 여섯이 매섭게 날아올랐다.
슥슥슥.
똑. 똑. 똑.
물 돋는 소리와 필기하는 소리만 있었다. 법의국은 고요했다. 죽은 자의 억울함을 듣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록흔을 보고 부의 몇이 고개만 숙였다.
석단 위에 방소민이 있었다. 살아생전 대부호의 금지옥엽이었으나 사후엔 모두 그러하듯 맨몸뿐이었다. 죽어 하얗게 누웠으나 몹시도 아름다웠다. 록흔은 잠시 눈을 감고 명복을 빌었다.
“오셨습니까?”
법의였다.
“역시 없던가요?”
“예.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들였더군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명료한 대답이 떨어졌다.
‘현장에도 없던 피, 갈우선도 보지 못한 피.’
록흔은 되뇌다 다시 물었다.
“상처가 있습니까?”
“보시죠, 특이한 상처가 있습니다.”
법의는 시신을 덮은 흰 무명을 걷어냈다.
“이건…….”
푸르뎅뎅한 왼쪽 젖가슴 위, 살을 짓뭉갠 듯 보이는 상흔이 있었다. 화상도 아닌데 피부가 눌어붙은 것이 괴이했다. 피와 살덩이가 함께 엉킨 걸 보면 얼마 되지 않은 상처였다.
“예. 저도 이런 경운 처음입니다. 아마도 살갗을 할퀴듯 크게 찢어…….”
법의는 친절히 동작까지 덧붙였다.
“분출하는 피를 다 빨아내고 다시 문대 놓은 것 같습니다.”
불가한 일이나 정말 상처는 밀랍이라도 늘여 놓은 것 같았다.
“반죽하듯 다뤘습니다. 뭉개고 다시 붙이고……. 이상한 소리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일상이라 그런지 법의는 그저 덤덤히 말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죽음치고는 썩 온화한 얼굴입니다.”
법의는 망자의 안면을 가리키며 기계처럼 서술했다.
“교사(목을 매어 죽음)는 일시적인 성적 쾌감을 동반합니다. 그래서인지도 모르지요.”
록흔은 입술을 얄긋하게 틀었다.
“그런 것쯤은 기본이니 일일이 읊지 않아도 됩니다.”
냉정한 질책에 법의의 무심한 눈이 조금 흐트러졌다.
“종합적인 소견은 어떻습니까?”
록흔이 사무적으로 묻자 법의가 문서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타살로 귀결했습니다.”
혈액 고갈, 시반 현상 전무, 심장 바로 위의 상흔, 직접적인 사인은 과다출혈, 자액(스스로 목을 매어 죽음)으로 위장한 교살……. 록흔은 검시 소견을 한눈에 쓱 훑었다.
“애쓰셨소.”
“시신은 어떻게 할까요? 갈우가에서 시신을 돌려 달라고 계속 요청하는 터라서…….”
“유족들에게 돌려주어도 무방합니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부의들이 달려들어 시신을 수습했다. 그들로선 갈우가의 일이라 늑장부릴 수만도 없을 터였다.
‘부디 다 잊고 가시길.’
록흔은 묵도 후 검시실을 나갔다.
관주 송현성, 자시. 신방의 불이 꺼졌다. 부접안 사하균은 그 위 지붕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대길일이라더니 금수하 이북에 혼사 있는 명문대가가 다섯이나 되었다. 하여 록흔과 유장만이 장성에 남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잠복 중이었다.
‘시간은 얼추 되어 가는데.’
종합해 보면 일은 합방 직전에 일어났다. 준수한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실기(시기를 놓침)하면 생목숨이 또 하나 없어질 터,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쓰는 건 붉은 너울…….”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바람 소리 같던 것이 점점 또렷해졌다.
“눈처럼 차갑고 흰 너울은 망자의 너울…….”
속이 울렁거렸다. 스스로 담대하다 자부했건만 귀기 서린 노랫소리에 하균은 속이 뒤집혔다. 원초적인 공포가 그를 감쌌다.
“……새색시가 입는 건 붉은 치마, 눈처럼 차갑고 흰 치마는 망자의 수의……. 피보다 더 붉게 물들이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저항이 거세나 하균은 눈을 부릅뜨고 견뎠다.
‘응?’
드디어 나타났다. 하균의 동공 안, 아름다운 여인이 비쳐 보였다.
‘저건…….’
여인은 신부 차림이었다. 그러나 혼례복도 너울도 눈처럼 창백했다. 꽃다운 붉음이 아니라 귀기 서린 순백이었다. 일순, 하균의 팔뚝에 살비늘이 올올히 일어섰다.
‘설마……?’
여인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러나 범인의 몸놀림과는 달라 무릎관절의 굴신(몸의 굽힘이나 폄) 없이 바닥을 긁듯이 걸었다. 걸음새가 저렇다면 둘 중에 하나였다.
‘무공이 대단하거나, 사람이 아니거나…….’
갑자기 하균에게 후자의 가설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팔뚝이 더욱 오돌토돌해졌다.
“허억!”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접두께서 이걸 주신 건…… 이미 알고 계셨단 건가?’
하균은 팔에 걸린 염주를 어루만졌다. 록흔이 직접 걸어 준 것으로 굵은 알마다 불경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우습게 알지 말고 반드시 몸에 지녀라. 최악의 상황이란 게 있기 마련이니까.]록흔이 다섯으로 갈린 부접들에게 다짐받듯 한 말이었다. 복륭사 고승이 축수한 것이라 했던가? 하균으로선 그저 감격하여 받은 것인데 상황이 이렇고 보니 몹시도 든든했다.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니 물러서라.”
여인이 경고했다. 아름답지만 귀기 서린 목소리라 듣는 이는 머리칼이 섰다.
“요녀야,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느냐?”
하균은 염주와 정의의 힘을 믿고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동시에 대부(커다란 도끼)를 여인에게 들이댔다.
“미련하다, 그런 걸로 날 어쩌려고?”
푸른 입술이 부자연스럽게 벌어질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새어 나왔다.
“너 죽은 자냐?”
갑자기 모든 게 확실해졌다. 답이 필요 없는 물음인지 요녀가 시퍼렇게 웃었다.
“어찌 사자가?”
귀면의 미소는 서늘했다. 심장이 선득한가 싶더니 등골 위로 차가운 기가 흘러내렸다.
“사내야, 너는 구경이나 하렴.”
휘익!
여인이 손을 들어 바람을 일으켰다. ‘어’ 할 새도 없이 하균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탁!
투웅!
티디딩!
하균은 까만 밤하늘로 솟구쳤다가 지붕 위로 떨어졌다. 마치 유랑극단의 괴뢰가 된 듯했다. 보이지 않는 실이 잡아매기라도 했는지 팔다리의 관절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요녀가 손끝을 놀리는 대로 그는 이곳에 부딪히고 저곳에 쓰러졌다.
“어리석구나.”
하균은 머리끝이 바짝 섰다. 소름 돋는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무언가 그를 찍어 눌렀다. 무겁지 않으나 무거웠다.
“뭐냐? 요녀!”
하균은 얼굴을 찡그리며 악을 썼다. 귀녀는 지금 그의 배 위에 있었다. 무게 없으나 무거워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하얗게 너풀대는 너울이 그의 뺨을 스쳤다.
“사람과 귀는 그릇이 다르다. 그만둬라, 사내야.”
요녀가 야멸치게 웃으며 하균의 가슴을 눌렀다.
“크윽!”
이대로라면 갈빗대가 바스라지고 심장이 터질 터. 요녀가 그악스레 찍어 누르는 걸, 하균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 아래서, 힘의 하중을 이기지 못해 지붕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트득트득!
기왓장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바숴졌다. 아스러진 조각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트드득!
결국 신방의 지붕은 완전히 내려앉았다. 하균도 그 잔해와 함께 떨어졌다.
“누구냐?”
낙하지점은 신혼부부의 침상 바로 옆. 신랑이 놀라 벌떡 일어섰다. 막 너울 벗기고 아리따운 입술에 합환주 대어 주던 참이었다. 신부 역시 소스라친 것은 마찬가지, 붉은 깁이 발치로 흘러내렸다.
“피해요, 어서!”
하균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요녀의 안중에 없었다.
“어여쁘다.”
귀녀는 오직 신부만 보았다. 그녀는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움직였다. 하얀 너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신부의 아리따운 동공에 흰옷자락이 도드라졌다.
“썩 비켜라, 요망한 것!”
신랑이 검을 빼 들고 신부 앞을 막아섰다. 검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되레 물러선 것은 신랑, 귀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노래를 불렀다.
“눈보다 차갑고 흰 망자의 너울을……, 피보다 더 붉게 물들이고 싶구나.”
신부의 동공이 풀렸다. 바들바들 떨던 팔도 힘없이 처졌다. 다리도 비척비척 비틀거렸다. 마침내 무릎이 접혔다.
슉!
신부가 맥없이 쓰러지기 직전, 침상의 붉은 휘장이 날았다. 그것은 요녀가 부리는 대로 움직였다.
“그만둬라, 요녀야!”
지금 하균이 할 수 있는 건 고함치는 것밖엔 없었다. 귀기가 옴쭉도 못하게 눌러 그는 바닥에 붙어 버렸다. 하많은 가솔들은 무얼 하는지 누구 하나 달려오지 않았다. 신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아내를 놓아줘!”
신랑이 울부짖어도 귀녀는 노래만 불렀다. 싸늘히 웃는 얼굴이 소름 끼치게 고왔다.
‘어째서 저리도…….’
소름은 심장에도 돋았다. 귀녀의 노래는 슬프고도 두려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하균은 입귀를 일그러뜨렸다.
“내가 쓴 너울은 왜 하얄까? 네 것은 저리 붉은데…….”
귀녀가 중얼거렸다. 비단이 점점 조여들어 신부의 어여쁜 목에 삭흔이 진하게 남았다.
“내 너울은 왜 이리 하얗지?”
광기 어린 속삭임이었다. 귀녀가 손을 휘돌리자 휘장이 억세게 당겨겼다.
“흐…… 어억…….”
신부의 입술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고개가 꺾일 것 같았다. 멀거니 지켜봐야 하는 입장이라 분노는 배가 됐다. 하균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스르륵.
귀녀가 손을 움직이자 신부의 혼례복이 천천히 벗겨졌다.
사락사락.
적막한 밤이라 비단천이 스치는 소리마저 또렷했다. 이내, 어깨가 동긋 드러나 등불 아래서 눈부시게 빛났다.
“제발 그만해라!”
신랑 역시 귀녀에게 제압당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눈동자만 불태울 뿐. 하균이나 그나 이미 없는 존재였다.
“곱구나.”
옷은 점점 더 아래로 흘러내렸다. 연홍의 유두는 공포를 먹고 담뿍 커진 채였다. 귀녀가 사랑스러운 젖가슴을 덥석 움켜쥐었다. 창백한 손아귀 안에서 신부의 심장이 팔딱댔다.
“네 피 또한 어여쁘겠지?”
물음이 아니라 단정이었다. 귀녀가 손에 힘을 주자 말랑말랑한 살덩이가 모양을 바꿨다. 그에 푸른 입술이 잔인하게 다물렸다.
쳐억!
살이 찢겼다. 참으로 순식간의 일. 하균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즈으윽!
하얗고 탐스럽던 가슴이 흉하게 벌어졌다. 흉강은 붉은 피를 게워냈다.
챠륵!
뜨거운 피가 진하게 분출했다.
“여보!”
신랑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바이없었다. 발악할수록 귀면의 미소는 깊어질 뿐. 귀녀가 하얀 눈자위를 파랗게 빛냈다.
“눈 크게 뜨고 잘 보아라. 그리고 무덤에 가기 전까지는 절대 잊지 말아라.”
귀녀가 차갑게 뇌까렸다. 딱히 신랑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으으…….”
목을 조인 휘장이 조금 느슨해진 모양, 신부가 가는 숨을 내쉬었다. 저대로 두면 출혈이 심해 죽거나 질식사할 터였다. 하균은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붉도다.”
귀녀가 신부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심장이 토한 피가 소복으로 옮겨갔다. 작은 얼룩, 커다란 반점, 소담한 혈화, 쟁반만 한 단원……. 결국 음산한 흰빛은 태양 닮은 붉음이 되었다. 귀녀의 혼례복은 신부의 피를 먹고 곱다시 붉어졌다.
‘저럴 수가?’
하균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희생자의 체내에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연유가 비로소 밝혀졌다.
“곱구나, 고와.”
요녀가 중얼거렸다. 신부가 느끼는 고통을 즐기는지, 붉어지는 혼례복이 기꺼운지…… 귀면은 내내 희미하게 웃었다.
“내 너울도 물들여 주렴.”
귀녀가 너울을 벗자 얼굴이 드러났다. 퍼런 귀기와 싸한 한기만 걷어내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빨갛게, 아주 빨갛게…….”
투명하고 얇은 너울에 붉은 물이 조금 번졌다.
“피보다 더 붉게 물들여야 해.”
신부의 피를 함빡 먹고 너울은 점점 붉어졌다. 본래의 하얀색보다 붉은 기가 더 많아지더니, 결국은 귀녀가 잡은 모서리만 하얗게 남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흰 점도 금세 사라져 깁은 새빨갛게 변했다.
“여보!”
신부는 가진 피를 다 빼앗겨 빈사 상태였다.
으드득!
휘장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 뒤에 신부의 목이 꺾였다. 반려의 절명에 신랑은 정신을 잃었다.
“예쁘다. 이젠 나도 신부다운 너울을 쓰는구나.”
귀녀가 붉게 물든 너울을 흡족하게 바라보다 머리에 둘러썼다.
‘저리도 고운…… 그럴 리가?’
짧은 순간, 귀면이 미소 지었다. 그저 고운 웃음이라 한도 없고 요기도 없었다. 마치 초례청에 선 신부만큼이나 아리따웠다. 하균은 경악했다.
“피보다 더 붉게 물들이고 싶구나.”
귀녀는 흥얼거리며 시신에 손을 뻗었다. 스악스악, 살덩이와 핏물이 엉겼다. 요귀가 버무리는 대로 흉하게 벌어진 가슴이 다물렸다.
‘그래, 그렇게 된 거군.’
하균은 중얼거렸다. 드디어 기묘한 상처까지 정체를 드러냈다.
‘……!’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지독히 고운 핏빛 너울 너머, 귀녀가 어여쁘게 웃었다. 하균은 알 수 없었다. 사악한 귀일진대 지극히 고왔다. 곱다란 미소에 심장에 전율이 일었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쓰는 건 붉은 너울…….”
얼굴 가득히 행복한 미소를 띠고 귀녀는 노랫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붉은 깁이 가물거렸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아스라해졌다. 비정상적으로 조밀한 음기에 하균은 그만 정신을 놓았다.
관주에서 전서구가 날아왔다. 다섯 곳 중에서 송현성이 걸린 모양. 록흔은 새의 발목에서 조그만 통을 잡아챘다. 돌돌 말린 전서가 풀릴수록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접두, 하균이 보냈습니까?”
시선은 여전히 전서에 둔 채, 록흔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 바람에 연한 귀밑머리가 몇 가닥 날렸다. 솜털 보송보송한 연홍의 귓불이 고와서 유장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거였군.”
록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에 퍼뜩 놀라 유장은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관주에 나타난 겁니까?”
“그렇군. 읽어 봐라.”
록흔은 전서를 넘겨주고 필묵을 들었다. 지시 사항을 재빨리 갈겨쓰고, 후 불어 내고……. 먹물이 마르자마자 그는 종이를 전통에 말아 넣고 전서구의 발목에 묶었다.
“먼 길 왔다만 다시 가야겠구나. 부탁한다.”
퍼득퍼득!
전서구는 허공으로 날아올라 까만 점이 되었다.
“어찌하실 겁니까?”
유장이 전서를 내밀며 물었다.
“어떤 것인지 파악했으니 손을 써야지. 유장, 오늘이나 내일 혼사가 있는 명문대가는 없나?”
“오늘은 없고…….”
유장은 책상 위에 한 가득 쌓인 서류더미를 뒤적였다.
“아, 여기 있군. 접두, 내일 혼사 있는 집이 있습니다. 가깝군요, 장성의 부호 육무근 댁입니다.”
육무근이라 하면 황룡국 전체에서 손꼽을 만한 부호였다. 멀리 서방까지 이름이 알려져 그의 집은 외국 상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했다.
“신부는 그 댁 따님인가?”
“딸은 아니고 손녀로군요. 육무근의 손녀가 내일 혼례를 올린답니다. 신랑은 주북 지방의 토호 안규인이군요.”
“유장!”
“예?”
“그 귀는 왜 신부들만 죽이는 걸까? 그것도 부잣집이나 명문대가의 여식들만…… 이유가 뭘까?”
“그런 사악한 귀녀에게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닥치는 대로 죽이는 거겠지요.”
“과연 그럴까? 스승님께선 모든 일에 인과율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하셨네.”
유장은 경애의 마음으로 상관의 말을 경청했다.
“사귀(요사스런 귀신)라 해도 본래 지닌 선함은 있을 터. 아무튼 난 육대인 댁에 다녀올 테니, 자넨 여기서 사건의 추이를 좀 더 살펴봐.”
“예, 다녀오세요.”
푸르륵!
푸들쩍!
구구구!
록흔이 호분위국을 나서고 얼마 되지 않아 전서구가 속속 날아들었다. 유장은 부접들이 보낸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모두 심상치 않은 것들뿐이었다.
타닥타닥.
타그닥타그닥.
록흔은 홍화가를 막 벗어났다. 말이 흔들흔들 움직이니 되반들거리는 머리칼도 낭창거렸다. 사실, 육무근의 저택에 다녀오는 길이라 그리 급할 것도 없었다.
‘쳇바퀴로군.’
거리는 진화절 준비가 한참이었다. 사람들은 매해 같은 날에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다각다각.
이월 아흐레, 진화절은 연두쌍일과 대만월절 다음으로 크게 치는 황룡의 명절이었다. 이날 사람들은 한 해 모든 재앙을 연에 실어 보내고 소망 담은 등을 밝혀 한바탕 신나게 놀았다. 지금 보니 길마다 거리축제와 제등행사 준비로 북적거렸다.
‘길일이라.’
세상 모든 잡귀가 활동할 수 없는 날이라 진화절엔 혼사가 유난히 많았다. 육가의 혼사도 그런 맥락이었다. 록흔은 축제의 장식과 각종 제등을 파는 거리의 상점을 바라보았다. 보얀 등에 겹쳐 육무근의 야드르르 살진 얼굴이 떠올랐다.
“호분중랑장께서 하신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혼사는 미룰 수 없습니다. 진화절 본래의 길운 이외에도 손녀 부부의 사주 상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아 정한 날입니다. 게다가 다른 사정도 있고……. 무엇보다 그 일이 우리 아이에게 생길 리 만무합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렸다. 육무근은 일의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
“허나 육대인, 위험이 너무 큽니다. 어제 관주 송현성에서도 신부 하나가 당했습니다. 대비하여 해될 일은 하나 없습니다.”
육무근이 뒤뚱거리며 탁자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록흔에게 내밀었다.
“이리 오셨으니 우리 집안의 경사에 모시고 싶군요. 호분중랑장께서 자리를 빛내 주시면 더할 나위 없는 광영이지요.”
여전히 남의 일, 육무근은 허허 웃었다.
“육대인,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육소저가 무사한 것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록흔이 무겁게 말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육무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호인답게 크게 웃었다.
“자, 이 차 좀 드셔 보세요. 남국에서 구해 온 겁니다. 흔히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야기는 차차 하셔도…….”
태평하게 차나 운운할 시간이 없었다. 예방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록흔은 결국 감추던 것까지 말하기로 했다.
“손녀따님께서 주북의 용주로 출가한다 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희생된 신부들은 신행길까진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초야의 신방, 그것도 신랑의 목전에서 절명한 경우가 대부분. 교액(목졸림)되고 흡혈당하여 시신마저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육무근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아마, 육대인 댁에선 아무 일 없을 것이나…….”
록흔은 부러 말끝을 사렸다. 그에 육무근이 펄쩍 뛰며 매달렸다.
“허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혼인을 미룬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한데 말이지요.”
육무근은 거의 울상이었다. 혼사의 연기가 어려운 것은 필시 다른 곡절이 있는 듯했다.
“정말 곤란하군요. 멀리 서방에서 이 혼사를 위해 오신 손들이 많습니다. 진화제 구경까지 겸하러 오신 분들이라……. 먼 길 오신 분들께 식이 연기되었다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 연중랑장께서 살펴 주시지요.”
같은 나라라 해도 지방색이 저마다 달라 혼인의 절차는 같지 않았다. 그러나 용주나 장성은 가례의 풍습이 비슷하여 혼례는 신랑의 본가에서 치르는 것이 상례였다.
“그렇다면 육대인, 혼사는 치르되 손녀따님은 신행 보내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다행히도 육가의 혼사는 그 역으로 치러진다 했다. 신부 집안이 더 세가 큰 탓, 더불어 외국의 손들에게 보인다는 핑계거리 또한 덧붙었을 터였다.
“예…….”
그럴듯한 이야기라 육무근은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야에 일이 벌어졌으니 육소저는 저희가 사건을 해결할 동안 이 댁에 머물게 하십시오. 신부 자리는 다른 이가 대신 메우게 하겠습니다.”
“다른 이라니, 어떤 아가씨를 대신 보내시려고요?”
“저희가 알아서 무공을 아는 이로 대체하겠습니다. 조속히 해결해야 하는 중한 일이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록흔이 공손하게 말하자 육무근은 커다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찍이 부지런한 성정과 뛰어난 장삿속으로 큰 부자가 되었으나 그는 바탕부터 겸손한 이였다.
“별말씀을요, 협조라니요? 저희 아이를 살펴 주시니 외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 합지요. 일이 무사히 끝나면 언제든 한번 이 육무근을 찾아주십시오. 연중랑장께 크게 보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