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26
연록흔 – 26화
굳은 약조 받고 돌아선 길이었다. 록흔은 가로수마다 매달린 제등을 올려 보았다. 여러 갈래로 뻗은 골목길 위에도 오색 빛이 달랑거렸다. 머리 위에 인 하늘 전체가 보석 천지 별밭이었다.
‘진화절이라, 그런 날에는 그 귀녀도 움직이지 못할까?’
록흔은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주위 풍광을 훑었다.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 진주로 된 주렴, 여러 문양을 아로새긴 유리등……. 집집마다 치장이 요란했다.
‘잘들 계시겠지?’
집 생각이 절로 났다. 어릴 적에 록흔도 할멈 따라 등 하나 정도는 매달고 아버지랑 같이 불붙인 연을 하늘 높이 띄우기도 했었다. 식구들의 얼굴이 번갈아 가며 눈에, 머리에 떠돌았다.
‘집이라, 먼 곳이다.’
록흔은 파란 하늘에 그리움이라는 등을 하나 띄워 놓고 유유히 말을 몰았다.
선명 7년, 진화절.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연을 날렸다. 그들은 한 해의 모든 재앙이 연에 실려 나가기를 바라면서 얼레를 감고 또 풀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다채로운 연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파랏파랏.
종이 비늘이 가닥가닥 선 커다란 잉어연, 긴 꼬리를 단 밋밋한 가오리연, 치마 푸른 연, 치마 붉은 연, 보라 꼭지연, 자주 꼭지연, 꽃잎마다 나풀대는 모란연, 날개 두 장 매서운 수리연…….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잡아타고 뒤뚱거리는 양이 꽤나 구성졌다.
시시잇!
용머리연은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싶었다. 부리는 이가 얼레를 좌우로 돌리면 여의주를 문 입아귀가 개폐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발갛게 튼 아이들은 신이 나서 고개를 크게 젖혔다. 조그만 머리통 위로 날개가 알록달록한 호접연들이 어여쁘게 날았다. 하늘은 이른 봄밭이었다.
파락파락!
연의 무리는 염원을 담고 하늘을 누볐다. 부자나 빈자나 바라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쪽 귀에 금니 입힌 값비싼 연도, 싸구려 참새연도 함께 어우러졌다.
펄럭펄럭!
검정 박쥐연이 뾰족하게 각진 날개로 하늘을 가렸다. 그에 질세라 백 사자연이 갈기 대신 부드러운 양털을 길게 붙이고 나울나울 춤을 추었다. 그 뒤를 방패연이 바짝 쫓았다. 방구멍 사이로 비쳐 보이는 하늘이 쪽빛 뚝뚝 돋을 것처럼 파랬다. 연날리기는 해질녘까지 장성을 비롯한 황룡의 전 지역에서 행해졌다.
“와아아아!”
가륜은 진덕루에 서서 백성들이 연 날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마다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거리로 나선 참, 그들에겐 근심 한 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마음속 깊이 박힌 아름다운 그림자 때문이었다.
“폐하, 벽사소연하소서.”
장인태감 이하신이 소연을 두 손 받쳐 올렸다. 사악함의 상징인 검은 오조룡은 금방이라도 하얀 비단에서 튀어나올 듯 생생했다.
지이이익!
가륜이 손을 맵차게 들었다. 흑룡소연은 오로지 그의 기로써 움직여, 어스레한 하늘을 수직으로 찢고 찬란한 은빛으로 날아올랐다.
“황제 폐하의 연이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백성들이 열광했다. 그 모습을 굽어보는 눈에 미소가 어렸다. 세상이 뭐라 불러도 가륜이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엔 논전의 여지가 바이없었다.
시이이익!
도로록, 도로록!
함성 소리가 높아졌다. 연은 끝없이 높이 올랐다. 얼레가 재빨리 돌았다. 자새가 회전을 거듭할수록 실은 바삐 풀렸다.
“끊어라.”
가륜의 명에 하신이 날이 선 단도로 연줄을 끊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끊기자, 연이 빙빙 돌았다. 끈 떨어진 것이라 창공을 제멋대로 배회했다.
“줄이 끊겼다. 황제 폐하의 연이 사라진다!”
누군가 크게 외쳤다. 말처럼 연은 그대로 사라지는 듯했다. 본시 진화절의 꽃인 벽사소연은 연의 소각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당금의 연은 제멋대로 풀려 하늘길만 어지럽혔다. 하많은 눈들이 흑룡소연의 행방을 좇았다.
“이리 달라.”
“예, 폐하.”
하신이 태강궁과 기름 먹인 화살 한 대를 즉시 올렸다. 가륜이 이를 받아들고 살을 매겼다. 곧 화살촉에 불이 붙었다.
끼이이익!
만궁이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크게 접었다 폈다.
토오옥!
불덩이 하나가 하늘로 올랐다. 꼬리를 밝게 사르며 오르는 모습이 마치 살별(혜성) 같았다. 일몰 직후, 푸르스름한 하늘에 지상에서 비롯된 별이 하나 떴다.
“오옷, 연에 맞았다! 불이 붙었어!”
“황제 폐하, 만세!”
만세 소리가 거듭 터졌다. 활활 타오르는 연은 신성과도 같았다. 동시에 가륜의 눈동자가 그 빛이 무색하게 번득였다. 곧 예서제서 화연이 오를 터. 으레 그렇듯 진화절의 소연의식은 하늘이 암묵이 되도록 계속해서 이어졌다.
파파박! 타다닥!
곳곳에서 폭죽이 터졌다.
펑! 퍼엉!
관에서 쏘아 올린 화포가 묵천에 꽃수를 놓았다. 파란 불꽃이 점점이 퍼져 나가 주홍으로 번지고 다시 보라가 되었다. 연홍빛 화화(불꽃)가 연잎처럼 널따랗게 퍼져 어둠을 먹어 들면, 또 다른 것이 금빛으로 작열해 주작의 꼬리인 양 길게 늘어져 온 하늘을 감쌌다.
“우아아아!”
환성이 높아질수록 대통에 화약을 넣는 이들은 더욱 바빠졌다.
치지직!
불꽃놀이가 신호탄이었다. 이 손도 저 손도 기름먹인 연줄에 불을 붙였다.
화륵!
삽시간에 불의 빗금이 하늘을 갈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염(불꽃)의 줄은 서로 합쳤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하늘은 불밭, 연은 활활 탔다.
피시시…….
피잇!
하늘을 밝힌 소연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그 대신 지상에 불꽃송이가 하나둘 피어올랐다. 바야흐로 이슥한 밤, 진화절의 제등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롱한 유리로 틀을 만들고 빛 고운 옥돌과 수정 따위로 한껏 멋을 낸 등, 저마다 제각각 부신 빛을 뿜었다.
탁!
타악!
여기저기서 불꽃이 봉오리를 터뜨렸다. 모든 제등이 일시에 불을 밝히니 도시 곳곳에 용암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가륜은 동산만 한 누각에 올라서 장성 전체를 한눈에 품었다.
‘저 등불 밝은 어느 곳, 연도 있는가?’
가륜은 한숨을 내쉬며 하신에게 태강궁을 건넸다. 그들의 하늘이 어떤 심정이든 백성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수런거리는 소리가 높은 누각에까지 닿았다.
“어머, 고와라!”
“저것 좀 봐!”
제등은 가지각색이었다. 금피에 각종 마노와 진주를 빼곡하게 단 것, 유리 등피 안에 옥으로 조각한 미인을 박아 넣은 것, 황수정과 자수정과 녹송석을 꿰어 주렴 닮게 만든 것, 비단으로 연화를 본뜬 것, 깃 화려한 새의 형상인 것……. 개중 가장 눈을 끄는 것은 말 탄 무관이 늠름하게 들어앉은 등이었다.
“돈다, 돌아!”
주인이 걸음을 옮기면 등 안에 든 무관이 빙빙 맴을 돌았다. 열의 성질을 고안하여 만든 것으로 인형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제등행렬은 태화성을 향해 움직였다.
둥! 당! 둥! 당!
당도로동!
진덕루 앞엔 야간축제를 위한 판이 화려하게 벌려졌다. 무대 전면에는 도교의 신들이 늘어섰고, 우측에는 문수보살이, 좌측에는 코끼리를 올라탄 보현보살이 있었다. 이 모두는 황룡의 가장 대중적인 신앙이었다.
둥! 둥! 둥!
잠시 후면 용춤이 걸게 벌어질 터였다. 무대 위, 진주와 벽옥과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광대 이십사 인이 벌써부터 뻑적지근하게 늘어섰다.
“대단하다!”
열광하는 사람들 무리에 백룡어복(황제가 서민의 옷을 입고 잠행을 다니는 것)한 가륜도 있었다. 진덕루를 벗어남과 동시에 따르는 이들을 떨치고 나선 참, 사방이 즐거운 이들 천지였다. 그래서인지 얼음장 같은 마음이 조금은 녹신해졌다.
피리리리…….
지이이잉…….
구슬픈 선율이 바람에 묻어왔다. 어느 집 처마 아래서 악사들이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호궁은 애달프고 향피리는 달금하며 비파는 서글펐다. 사람들이 몰리자 낯꽃 수려한 악사 하나가 노래를 시작했다. 고운 곡조라 은물처럼 아롱거렸다.
챙!
젊은 여인들이 미음(아름다운 소리)과 미모에 취해 은전을 아낌없이 던졌다. 그에 악사가 아름다운 눈썹 기울이며 더욱 애절히 노래했다. 통 안에 든 은 바스라기가 달빛만큼이나 맑게 빛났다.
“별님이로세!”
백의의 사내들이 섭슬려 다녔다. 그들은 긴 장대 끝에 등을 하나 매달고서 이리저리 까딱까딱 흔들어 댔다. 별무리가 땅으로 쏟아진 듯, 하늘의 별과 지상의 별은 한데 섞여 청랑하게 빛났다.
“호호호.”
별 중의 으뜸은 사람별. 달 아래 흰옷 입은 여인처럼 고운 것은 없었다. 삼단 같은 머리에 어여쁜 칠보 나비 앉히고, 손에는 조그만 꽃등 들고서, 그니들은 곱다시 흘러 다녔다.
“하하하하!”
꽃 곁엔 나비가 있기 마련. 불량배들이 어김없이 몰려들어 여인들을 희롱했다.
토독토독!
대추 속과 숯 조각을 뭉쳐 둥글린 것이 잘도 탔다. 사내가 불공을 던지면 여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놈이 깐죽거릴 때마다 등에 달린 종이 날개가 팔락였다. 꾸민 것이 부나비를 영락없이 닮아서 하는 짓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까아, 그만하라니깐!”
“허, 거참! 앙탈하는 것도 곱네.”
가륜은 달뜨고 소란스런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그는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미복잠행이란 그럴듯한 구실일 뿐,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고 선득해 방황이란 게 그저 하고팠다.
“우오오오오!”
갑자기 함성 소리가 높아졌다. 가륜은 소리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높은 무대 위에 있었다. 늘 굽어보는지라 당금 올려다보니 꽤 색달랐다.
둥! 다당! 두둥!
용무가 한참이었다. 청룡과 황룡이 똬리를 틀었다가 불끈 솟구쳤다. 놈들은 서로 머리를 겯고 몸을 꼬았다.
“잘한다!”
멀리서 보면 두 마리 다 영락없이 진짜였다. 낭창한 버드나무를 휘어 만든 뼈대는 용의 유연함을 닮았고, 겹겹이 돋친 비늘은 비린 몸피와 흡사했다. 놈들은 여의보주 하나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크아아악!
날고, 기고, 포효하고, 똬리를 틀고……. 어둠에 숨은 자들이 용을 생것처럼 부렸다. 용피 안에는 소등이 수없이 들어 있었다. 하여 용이 춤을 추면 비단 거죽을 뚫고 오색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퉁!
놓친 건지 부러 그런 건지 여의주가 하늘 높이 솟았다. 그리고 공중에서 반으로 쪼개졌다.
차라락!
깨진 구에서 깃발 하나가 나왔다. 거기엔 힘찬 필치로 선화여민동락이라고 쓰여 있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군중은 하나 되어 황제의 덕을 찬양했다. 이른바 진화절의 절정이었다.
샤앗!
흥분의 틈바구니에서 가륜은 무언가를 보았다. 일순, 봉안이 차게 사위었다.
“황제 폐하 만세!”
어떤 무리는 법석을 틈타 제 잇속을 챙겼다. 비녀, 목걸이, 팔찌, 노리개……. 구경하느라 저도 모르게 흘린 장신구가 제법 많았다. 여기저기 엎어져 주워대는 통에 가륜은 잠시 멈춰 섰다.
“확률이 높습니다! 경품도 푸짐하고요.”
뽑기 장사가 왜장쳤다. 좌판엔 머리빗, 값싼 팔찌, 완구류 따위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앞으로 우 몰린 머리들이 가륜의 시선을 교란시켰다.
‘그저 그런…….’
평범한 혼례 행렬이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눈이 갔다.
‘도대체 무엇이관데.’
가륜은 한 걸음 내디뎠다. 분명 신행길, 신랑이 앞서가고 무리의 후미엔 붉은 가마가 따랐다. 누구의 혼사가 그러하듯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차랑차랑…….
창에 달린 주렴이 한들거렸다. 바람이 훑어 구슬발이 잠시 성글어진 틈으로 신부가 언뜻 비쳐 보였다.
“광장에서 광대놀음이 벌어진다!”
구경꾼들이 우르르 내달았다. 그에 신행 행렬의 꼬리가 잘렸다. 그리고 저 건너에서 신부의 가마가 우뚝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은지 앞만 보던 신부가 고개를 돌렸다. 백옥 닮은 손이 혼례복 소매 아래로 살짝 뵈더니, 주렴이 맑게 걷혔다.
차라랑!
신부란 원래 그런 것. 붉은 너울 아래라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왜냐?’
분명 낯선 여인인데, 왠지 눈에 익었다. 날파란 눈동자에 실금이 갔다. 준수한 이마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앉아 있는 태만 해도 설지 않았다. 가륜은 큰 보폭으로, 땅을 밟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와와아!”
또 한 무리가 제등을 들고 지나쳐 갔다. 가륜도, 다시 움직이던 가마도 잠시 멈췄다.
“어서 가세!”
“꽃날이로구나.”
축제에 휩쓸린 사람들 새, 시간은 정체됐다. 그리고 근원 모를 설렘이 가륜을 덮었다.
사아아아!
모두의 머리 위로 삭풍이 매섭게 불었다. 동장군의 입김은 가마도 할퀴었다.
사라락.
진홍빛 너울이 날았다. 홍운(붉은 구름)처럼 비풍처럼 나울나울 나부꼈다. 붉은 깁은 가분가분 도망쳤다. 그에 신부가 소스라쳐 고개를 돌렸다.
팟!
가륜의 눈동자에 야만의 빛이 반들거렸다.
사락, 사라락!
너울은 바람을 잡아타고 사람의 산을 넘어 흘렀다.
타앗!
가륜은 진홍빛 깁을 감아쥐었다. 그리고 겹겹이 쳐진 사람사슬 너머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가깝지 않으나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운 입술이 벌어지는 것도, 조그맣게 들이쉬는 숨소리도, 놀라 부푼 영롱한 눈동자도……. 달빛 파란 밤에 안은 연,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타닷!
가륜은 한걸음에 날아올라 사람의 강을 건넜다.
탁!
록흔은 입술을 깨물었다. 신은 이다지도 잔인한 것인지, 가마를 붙든 이는 분명 황제였다. 잇꽃 연지 바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찰그랑!
구슬이 깨질 듯했다. 가륜이 주렴을 거칠게 젖혔다.
그에 가마꾼들의 눈이 호동그래졌다.
“네 것인가, 연?”
가륜이 너울을 들이대며 물었다. 벽사소연 의식이 끝난 지 한참, 태화성에 있어야 할 황제일진대……. 록흔은 혼란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곳에 계신 건가?’
생각할 시간도 잠시, 가륜이 록흔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리 보시면…….’
록흔은 하릴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한없이 차가운 눈동자라 꽂히는 시선이 선득했다.
‘아니…….’
단순한 분노라 생각했으나 그것보다 더 깊은 마음이었다. 절로 스미는 마음에 록흔은 애가 녹았다.
‘왜 괴로워하십니까?’
차마 더는 못 보겠어서 록흔은 눈을 감아 버렸다. 호분중랑장이 아니라 연으로 돌아갔기에.
“널 많이 그렸다.”
그리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그 마음이 같지는 않을 터. 항시 곁에 있어도 손 내밀지 못하는 마음은 온전히 록흔만의 것이었다.
‘절대 모르십니다, 당신은…….’
눈물이 흘렀다. 참을 생각도 없어 록흔은 그냥 내버려 뒀다. 보지 않아도 그의 표정이 느껴져 설움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하하핫!”
“우왓!”
시간의 휴지 속.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도 둘에겐 없었다. 인파 속에 묻혔어도 오로지 세상엔 둘뿐이었다.
“하지만 잡을 수 없다. 잘 가라, 연.”
서늘한 감촉이 얼굴 전체에서 느껴졌다.
사락락.
다시 돌아온 너울은 겨울의 냉기를 함빡 먹어 차가웠다. 록흔은 그 아래서 소리 없이 울었다.
사락.
다사한 것이 록흔의 입술에 닿았다. 한 겹 얇은 너울 위로 살풋 닿은 것은 그리운 온기였다.
사륵.
서글픈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 그 눈동자는 이글거리나 태도는 초연했다.
사르르.
가륜은 록흔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너울 아래, 가엽게 떠는 연한 입술을 한 번 어루만졌을 뿐.
창그랑창그랑…….
다시 행렬이 움직였다. 세상이 온통 붉었다. 얇은 깁이 그와 그녀를 멀리 갈라놓았다.
주북 용주, 안현성 승가장, 자시. 신랑 없는 가짜 신방이나 화촉은 밝았다. 방 이곳저곳에 긴장이 칼끝처럼 뾰족하게 돋아 있었다. 붉은 너울 아래, 소담히 앉은 그림자는 깎은 듯 정교했다.
‘홍랑, 붉은 새색시라…….’
록흔과 부접들이 사귀에게 붙인 이름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냥저냥 부른 것인데 피 좇는 귀녀의 행태와 썩 잘 어울렸다.
‘돌겠군.’
록흔은 이를 지그시 물었다. 임무 완수가 우선이니 쓰린 가슴 따윈 중요치 않다. 그리 곱씹고 되뇌어도 소용없었다. 황제가 떠올라서 맑아도 부족한 마음이 자꾸 흐려졌다.
‘왜 그런 눈으로…….’
록흔은 복륭사에 들렀을 때 혜덕 스님께서 당부한 것들을 되새기려 애썼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가진 마음이 복잡다단하여 시린 눈빛만 어른거렸다.
‘그만두자.’
잡념이 마음을 덮으면 사귀에게 먹힐 터, 록흔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쓰는 건…….”
분명 홍랑의 노래였다. 귀기 절은 선율 따라 한기가 몰아쳤다. 일순, 살갗이 오돌오돌 일어섰다.
“망자의 너울…….”
붉은 당혜에 하얀 치맛자락이 닿았다. 반투명한 천은 얼음 비늘처럼 얇고 차가웠다. 록흔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혈귀의 실체가 드러날 참, 가슴이 우뚝 멈춰 섰다.
“망자의 수의…….”
하얀 너울 밑, 요기 가득한 눈. 붉은 너울 밑, 선기 맑은 눈. 둘은 서로를 품었다.
“피보다 더 붉게 물들이고 싶구나, 내 너울을…….”
막상 들으니 끔찍하기보다는 가슴이 아팠다. 록흔이 보기에 여귀에게는 분명 가여운 사정이 있었다.
“그만둬라. 충분히 했을 텐데…….”
나직한 명령은 준엄했다. 귀녀가 우뚝 멈췄다.
“나는 네 피가 필요해.”
“일점의 혈도 불가하다.”
단아한 입매가 차게 굳었다.
“내 너울을 붉게…….”
“세세한 사정은 모르나, 어리석은 한풀이는 차고 넘친다.”
휙!
깁이 하르르 날았다. 록흔이 답답한 너울을 떨치고 일어서니, 흰 치맛자락이 조금 물러섰다. 예리한 손끝이 서릿발을 닮아, 붉은 혼례복을 입었어도 그녀는 강했다.
“누구냐, 너는?”
신부가 일호의 두려움이 없으니 귀녀조차 어리둥절해졌다. 찰나, 싸늘히 돋은 바람이 소복을 날렸다.
다아아악.
일찍이 무영랑이라 불린 이답게 날파랍고 날랬다. 사귀 주위에 돌풍이 휘돌았다. 보이지 않으나 분명 존재하는 원. 록흔은 담대하게 선을 내그었다.
두우우우…….
힘에 눌려 바닥이 깊게 패였다.
시윽!
완만하게 휘어진 곡선이 사귀를 감았다.
샤아앗!
원의 시작과 끝이 만난 순간, 그 선을 따라 무형의 벽이 불뚝 일어섰다.
“꺄까까가가악!”
낯빛 푸른 귀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혼령의 소리인지라 몹시도 끔찍했다. 그러나 록흔은 그저 실긋 웃었다. 해사한 얼굴이 곱고도 용맹했다.
드득드득!
득! 득!
원에 갇힌 귀녀는 손톱을 세워 그 벽을 긁어댔다. 록흔이 그린 것은 밀교의 만다라였다.
“날 꺼내 줘. 제발!”
한없이 많은 부처님이 계신 불부의 세계, 한없이 많은 보살님이 계신 보살부의 세계, 그리고 한없이 많은 신중들이 계시는 신장부의 세계……. 무한의 우주가 유한의 원 안에 있었다. 절대 성역에 갇힌 터라, 귀녀는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느꼈다.
“스봐바봐 슈다흐 살봐 달마흐!”
록흔이 정신(깨끗한 몸)을 위한 진언을 읊자 그 몸이 바로 법기가 되었다.
“아아, 제발 그만해. 숨을 쉴 수가 없다.”
귀녀가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록흔은 계속해서 소죄(죄를 부르다)의 진언(부처의 말)을 염송했다.
“옴 살봐 빠빠 깔사나 뷔쇼다나 봐즈라 사뜨봐 삼마야 훔 파뜨!”
붉은 입술에서 푸른 진언이 떨어졌다.
포스스스…….
귀녀의 죄업이 만다라 주위에서 피어올랐다. 그것은 흑운 또는 묵발……. 몽글몽글한 것이 어떤 형상으로 뭉쳤다. 온갖 귀신이 아가리를 험하게 벌려 으르렁대고 그르렁댔다.
“끄어어어어억! 쿠아약!”
검은 안개가 커질수록 귀녀는 기괴하게 신음했다. 뭉치 속엔 홍랑에게 희생된 영도 있는 듯했다.
“살려 줘, 살려 달라고! 받은 만큼 갚으려면 아직 멀었어. 그것들이 날 어떻게 했는데! 왜 난 안 된다는 거야? 억울해, 억울해!”
귀녀는 그 무엇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포한 가득해 잡히는 대로 할퀴었다.
‘미련한 것 같으니…….’
록흔의 눈동자에 새파란 금이 그어졌다. 수인 맺은 손에 힘이 실렸다.
[사귀라 할지라도 악의 시초는 분명이 있다. 그러니, 록아. 반드시 살펴 업장을 덜어 주거라. 깨달음이 있다면 그리 늦지 않으니……. 나무마하반야바라밀.]찰나, 잔인하게 번득이던 빛이 사라졌다.
“하아, 후우, 하…….”
록흔은 금강박의 수인을 풀었다. 갈고리마냥 구부린 손가락, 바늘인 양 뾰족이 세운 손가락……. 사귀를 아프게 하던 것이 사라지자 헐떡거림도 울부짖음도 잦아들었다.
“말해 봐라, 네 사연이나 듣자구나.”
귀녀가 록흔을 쏘아보았다. 호되게 당한 후라 파르란 독기는 줄었으나, 포한은 여전히 절절했다.
“그런 것을 말해서 무슨 소용이냐?”
록흔은 수인을 완전하게 풀었다.
“보이지 않느냐, 이 묵운이? 모두 너의 죄업이다.”
귀녀가 푸른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록흔은 만다라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생목숨 없애 보니 네 한이 덜어지던가? 괴로운 과거는? 잘 생각해라. 업을 멸하고 명부로 가는 길이 바이없는 것도 아니다.”
파르란 낯빛이 조금 엷어졌다. 귀녀의 눈동자가 불안스레 찰람거렸다.
“너는 모른다. 생매장당하는 고통도, 가진 자에게 모든 행복을 빼앗기는 아픔도…….”
홍랑이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하도 처연해 수십의 목을 꺾은 귀답지 않았다.
“생전의 이름은?”
세상천지, 가여운 이가 하많다. 록흔은 짠한 마음에 이름부터 물었다. 잠깐의 침묵 후에 귀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람소화, 하얗고 어여쁜 꽃 이름이란다.”
슬픈 삶이 록흔에게로 흘러 들어왔다. 만다라 안의 귀와 만다라 밖의 록흔……. 밤이 이슥해지도록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루 종일 찻잎을 땄었지…….”
익주 예허성. 예부터 이름난 차향이라 주민 대부분이 다업(차를 만들거나 파는 일)에 종사했다. 다른 이들처럼 소화도 그 어미도 어릴 적부터 찻잎을 땄다. 뜨거운 차밭에서 종일 치대도 주어지는 것은 고작 동전 몇 닢. 그래도 배곯지 않고 홀어미랑 웃으며 살았다.
“곱다란 계집아이였지…….”
연푸른 찻잎처럼 소화는 날이 갈수록 물이 올랐다. 못 먹고 못 입어도 타고난 바탕이 있어 뭇 사내들이 탐을 냈었다. 대지주의 아들, 마지륜 역시 그랬다.
“나 같은 게 넘볼 사람이 아니었지. 그게 화근이라면…….”
귀녀는 말끝을 흐렸다. 찻잎을 따고, 가마솥에 찌고, 손으로 비벼 말리고……. 일상은 그저 반복이었다.
어미가 사주단자 하나 받아오기 전까진 그럭저럭 나날이 평온했다.
“혼처 자리가 너무 높아 어리둥절했지. 지체 높은 집의 외아들에, 시집오기만 하면 한몫 거하게 떼어 주겠노라…….”
신랑은 망자였다. 이른바 명혼. 죽은 자끼리 치르는 혼사라 꺼림칙했지만 고생하는 어미 때문에 싫다고도 못했다.
“눈 한번 감으면 되는 일이라고 되뇌었다.”
저승 문 열린다는 날, 소화는 흰 너울 쓰고 눈빛 혼례복 입고서 명혼례를 올렸다.
위패 앞에서 거듭 절 올리고 은자 삼백……. 그리 단순히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백당혜가 마지막 놓인 곳은 아가리가 벌건 흙구덩이였다.
“살려 달라고 빌었다.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 들은 체도 하지 않더군. 게다가 그놈들은…….”
귀녀의 입술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지독한 한기가 새어 나왔다. 그다음 이야긴 록흔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곧 죽을 계집이나 몹시 아깝다며…… 돌아가며 짓밟았다. 그리고…… 짐승 욕심 채우더니 산 채로 파묻더군. 질긴 목숨이라 빨리 끊어지지 않았어. 땅속에서…….”
가여운 영혼. 하지만 무엇도 그 죄업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록흔은 눈빛만 무겁게 가라앉혔다.
“명혼 뒤에 숨은 자가 있었지. 사오련, 마지륜의 약혼녀…….”
흔한 얘기처럼 엇비슷한 집안들이 세 누리려 그럭저럭 엮은 혼사였다. 그러나 오련은 지륜을 깊이 사랑했다. 사랑은 때론 독, 그녀 역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