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33
연록흔 – 33화
[독 품은 건 유달리 곱단다.]마도굴에서도 떠올린 아버지의 말. 반야희도 그랬다. 극독을 품어 그 딸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새치름한 눈이 묘하게 색스러워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돌아볼 듯했다.
찌익!
손 빠른 반야희라 전광처럼 움직였다. 검끝 같은 손톱이 금세 목전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록흔은 그저 덤덤히 보았다. 목에서 피가 돋았으나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호호호, 놀라는구나. 내 낫살에 이리 젊고 어여쁘니 신기한 것이더냐?”
“하고픈 말, 챙겨서 다 해 주니 고맙군그래.”
“알려주랴? 신검 같은 사내와 살며, 정기를 야금야금 빨아 내면……. 항시 이리 곱단다.”
록흔이 본 게 맞았다. 반야희는 설검 때문에 망할 터였다.
“계획적인 접근인가, 오늘 같은 날 맞으려?”
호기심인 양 록흔은 경멸은 부러 싣지 않았다.
“이를테면, 신검보다 더 젊고 잘난 사내랑 살 섞고 살았을 터냐? 당연한 걸 묻는군. 보기 좋은 떡이라는데, 쭈그렁바가지가 좋을까?”
작금, 예리한 손톱이 록흔의 목을 조금 더 팠다. 허튼수작 따윈 용서 없단 기세였다.
“난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네가 나를 돕는다면, 네게도 영광된 이름 한 조각 떼어주련다. 어떠냐?”
록흔이 어깨에 멘 것을 천천히 풀었다. 이내, 붉은 비단보가 헤쳐져 휘 열셋이 박힌 칠현금이 드러났다.
“과연!”
반야희가 눈을 빛냈다. 그린 듯 붉은 입술에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저만의 황홀경을 헤매는 듯했다.
“어떤 것이 휘석이냐?”
그것도 잠시, 거짓말처럼 태도가 돌변했다. 반야희는 싸늘한 목소리로 야멸치게 물었다.
“어찌 묻나? 딸이 아는 것이니 그 어머님께서도 어련히 아실 것을…….”
죽기 직전, 신검은 어린 아내의 악덕을 알게 되었을까? 록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맑은 동공에 여귀가 하나 가득 찼다. 반야희는 칠현금에 박힌 휘석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확실하다. 여화는 아나, 반야희는 모른다.’
록흔은 그리 결론짓고 포석을 깔았다.
“붉은빛 감도는 백석이 휘석이다.”
“여기 이것 말인가? 모두 아홉 개로군.”
아귀의 눈이 재빨리 돌아갔다.
“물론 아홉 개지. 하지만 나머지가 더 있다.”
“뭣이라?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왕산청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텐데. 신검의 휘석처럼 귀한 물건을 한꺼번에 옮길 거라고 생각했나, 독랑?”
불신하는 소리 높으나 록흔은 동요하지 않았다. 외려 느긋하게 이기죽거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말해.”
금방이라도 목줄 딸 듯한 손톱, 표독스러운 외침. 그러나 록흔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받아칠 뿐.
“그냥 말할 수야 없지.”
록흔은 독의 위력을 잘 알았다. 무엇보다 직접 뼈저리게 당해도 봤다. 하여 지금의 것은 도박. 남은 것은 반야희가 미끼를 무느냐 물지 않느냐다.
“나머진 어디 있지?”
반야희는 음성조차 독이 올라 있었다.
“이것부터 치워야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나는 무엇보다 목숨이 중하다고. 돕겠다 하지 않았나?”
“영리한 계집이로군. 좋다. 하지만 너 같은 표사 정도, 얼마든지 없앨 수 있다는 걸 명심해라. 내 독에 중독되어 살아남은 이는 전무하다. 천하제일이라는 신검 또한 예외는 아니었으니 잘 알겠지.”
순간, 록흔은 자유로워졌다.
어이이이…….
바람 타고 온 희미한 소리가 있었다. 바로 검광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초혼이 시작된 모양, 사내 하나가 높다란 지붕 위에 올라서서 크게 외쳤다.
“익주 검광성, 신검 조양우 복!”
고인의 옷이 깃발처럼 날았다. 그리고 연거푸 외치는 복 소리가 있었다.
슉!
철권이 빛발처럼 뻗었다. 고운 뺨이 움푹 팼다.
즈즈즈즈즉!
조그만 발이 십 보 이상 뒤로 밀려났다. 그에 땅이 누렇게 파였다.
“이 계집이!”
반야희가 노성을 내질렀다. 제 비린내에 취해 눈이 뒤집힌 차. 모란 같은 입술에서 분꽃 같은 목덜미까지 피는 붉게 깨졌다.
“초혼 중이다, 신검께서 네게 오실지도 모르겠군.”
록흔은 두 손을 소매 안으로 갈무리했다.
“변변찮으니, 거머리마냥 정기를 빨았겠지.”
새뜻하게 하얀 얼굴은 사자와 같았다. 록흔이 내쏘는 서늘한 기에 천하의 반야희조차 흠칫 놀라버렸다. 한 발 내디딘 이, 한 발 물러선 이……. 둘은 서로 다른 빛을 품고 대치했다.
“용독술 아니면 너른 강호에 발이나 붙였을까?”
“흥! 수단이 무엇이면 어떠랴? 힘없는 자들이나 정도 운운하는 것이다.”
반야희는 소매로 입께를 가렸다. 그리고 쓱쓱 문댔다. 그러자 흉하게 깨진 살갗이 점차 맑아졌다.
푸악!
붉은 입술이 크게 열리니 검푸른 액이 거세게 분출했다.
티악!
치이익!
똑똑 돋는 독물에 나무마다 구멍이 깊게 뚫렸다. 록흔 역시 독랑이 그저 피를 닦겠거니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밀려오는 것을 소매바람으로 가볍게 내쳤다.
푸스스스…….
이번엔 또 다른 독무. 아까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름하야 무독산. 그것은 역설, 해독제도 없고 몹시도 극악하여 반야희 스스로 그리 불렀다. 맨손으로 다루면 천하의 독랑도 그저 죽어질 터. 무색 무향이라 가깝게 다가올 때까진 그 존재조차 모른다 했다. 무형의 독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미련한 계집! 영화를 나누려 했더니, 죽어라!”
반야희가 앙칼지게 외쳤다. 입가엔 하얀 침이 고이고, 눈은 시뻘겋게 뒤집혔다. 이성은 오간데없고 탐욕과 분노만 남아, 곱다 자랑한 얼굴은 일그러지고 물크러졌다. 진정 혼자 보기는 아까웠다. 록흔은 실긋 웃으며 손을 들었다.
“파환!”
몸 안, 피 알갱이들이 올올이 일어섰다.
수아악!
바람이 일었다. 록흔에게서 기인한 것이라 맑고도 파랬다. 머리카락도 옷자락도 함께 날았다.
스사사삭!
덤비던 것이 방향을 바꿨다. 무독산은 제 주인을 향해 날았다.
“으헉!”
치지지직.
반야희가 깜짝 놀라 옷소매를 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어 맹독의 아귀에 얼굴을 물렸다. 그것은 곰팡이처럼 벌레처럼 삽시간에 퍼졌다. 순식간의 일, 하얗게 빛나던 미안은 간데없고 꺼무죽죽한 고깃덩이만 남았다.
“아아아악! 내 얼굴!”
절규는 처절했다. 날카로운 파성에 숲속 깊이 잠긴 새들이 일시에 날아올랐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내가 얼마나 벼르던 것인데…….”
푸드덕, 푸드덕!
새깃이 켜켜이 내려앉아 반야희를 덮었다.
‘너를 그냥 둘 성싶으냐.’
녹아내린 얼굴엔 눈만 온전히 박혔다. 그러나 앙심 머금고 살기 어려 그것조차 악귀를 닮았다.
훅!
단말마. 반야희는 독침을 꺼내 거세게 불었다.
핑!
심장을 노린 것이나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수연도의 끝에 닿았다 그저 튕겼을 뿐.
“콜록콜록!”
침 닿은 자리에서 독연이 피어올랐다. 매캐하고 독해 목이 따끔거렸다. 기침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록흔은 꾹 참았다.
“너는 누구냐? 도대체 누구관데, 천하의 독랑을…….”
“아니다. 자승자박, 너는 네게 당했다.”
“누구냐, 너!”
“알려하지 마라. 그저 그림자이니.”
록흔은 서늘한 눈으로 반야희를 내려 보았다.
‘호분중랑장, 혹은 무영랑……. 연은 연록흔의 그림자일 뿐. 주인이 잠들면 한밤중에 나도는 영혼보다 못한 존재거늘. 그리운 꿈속에조차 반듯한 자리가 없나니.’
록흔은 칠현금을 다시 싸매 어깨에 짊어졌다.
“네 주검은 거둬주마.”
가르랑거리던 숨소리도 이제 잦아들어 없었다.
“반야희, 혹여 저승에서 신검을 뵙거든 사죄해라.”
퍼억!
록흔은 수연도로 땅거죽을 깊게 벗겨냈다. 그리고 한 날에 덮어 새카맣게 타들어간 시체를 매장했다.
‘아름다운 이름…… 반야희, 그거 하난 건졌구나.’
신검 조양우의 현숙하고 아름다운 아내 반야희. 가군을 따라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그리 기억할 것이다. 록흔은 덧없는 세상사에 아미를 찡그렸다.
‘어쨌거나, 가자.’
익주에서 장성은 반나절 거리, 록흔은 마음이 급했다.
***
‘젠장, 일이 어찌 이리…….’
록흔은 이를 악물었다. 서모의 피붙이라 껴든 일이 화근이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그녀는 표물(표국이 운송을 의뢰받은 물건)이 들은 칠현금이 갑작스레 무겁다 느껴졌다. 장성 저자의 한복판, 눈앞의 사내는 분명 명세제 가륜이었다. 잡힌 손목이 몹시 화끈거렸다.
‘미련타, 이런 날 올 줄 몰랐더니…….’
바짝 야윈 한숨이 그예 흘렀다. 작은 입술이 하르르 떨렸다. 그 즉시, 살피는 듯한 시선이 떨어졌다.
‘이제 어이할고?’
곱다란 얼굴이 입은 상복만큼 하얗게 바랬다.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 록흔은 그저 막막했다. 잔인한 조우, 그예 연으로서 만나지고 말았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조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록흔은 꿈에도 몰랐다. 장성의 기루에서 만나기로 한 이는 다름 아닌 산청이었으므로. 그러나 목전에 선 이는 가륜.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아!’
악력이 좀 헐거워졌나 싶은 것도 순간, 록흔은 단숨에 끌어당겨졌다. 가슴 가득히 밀려오는 넓은 품, 다슨 온기, 그리운 체취.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히이잉!
타앗!
가륜에게 갇힌 것도 순간. 지상에서의 괴리도 순간. 어느덧 록흔은 월영 위에 있었다. 바람만큼 빠르다는 명마는 둘을 태우고 달빛 속으로 사그라졌다. 진과도 월한도 넋 놓고 보기만 했다. 따라잡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강하다.’
그저 한 손이나 뿌리칠 수조차 없었다. 허리에 감긴 완력은 마치 쇠사슬과도 같았다. 당금, 록흔이 마굴에서 얻어 갈고 닦아 낸 것도 하등 소용없었다.
‘나는 왜…….’
저항해서 얻을 승산 따윈 문제가 아니었다. 더 무서운 건 저항 의지 자체가 없다는 것. 일별에 록흔은 그의 꽃이 되었다.
타그닥타그닥!
슉슉!
월영이 달리면 청량한 바람이 일었다. 말 잔등이 오르내리면 부드러운 머리채가 나풀거렸다.
사라락.
느슨히 묶은 것은 점차 풀어져 결국엔 고운 얼굴을 덮어 버렸다. 성깃한 장막 너머, 록흔에게 세상은 아슴아슴했다. 그러나 주위 모든 것이 한 덩이로 뭉쳐 희미해져도 결코 바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가륜. 온전히 덮인 온기도, 나지막한 웃음소리도…… 그녀 안으로 아프게 파고들어 왔다.
‘저리도 웃는구나. 얼음인 줄만 알았더니…….’
애참한 만큼, 애틋한 만큼…… 심장은 더운 피를 쏟았다.
‘그래, 운명아. 부정 않으마.’
처음부터 온전하진 않았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 안에서 열에 들떠 신음하던 그 밤에 그저 여리게 싹 틔웠을 뿐이다.
‘난 이 사람을 사랑한다.’
거부하지 않은 순간부터, 딱 그 순간부터. 미움이라 일관하며 모른 척했지만 하릴없었다. 조금씩 자라서 심장을 억눌렀으니.
‘보지 않고, 느끼지 않고, 생각지 않으면 덮어지려니…….’
록흔은 도리질을 쳤다. 붉게 닫힌 입술에서 연한 숨이 새어 나왔다. 약한 바람결에도 연심은 묻어 달금하기만 했다.
‘불가했다.’
얼굴을 쓰는 서늘한 손. 어느덧 걷힌 머리칼. 록흔은 가만 굳어 버렸다. 어느 순간, 준마가 섰는지 야색도 고요히 가라앉았다. 다만 가륜만이 홀로 움직여 그녀를 어루만졌다. 큼직한 손 안에 보드레한 머리칼이 한 움큼 갇히고, 기다란 손끝에 살쩍(귀밑머리)은 봄바람인 듯 감겼다.
“도망칠 텐가?”
가륜이 낮게 속삭였다. 언(言)은 귀를 파고들어 뇌수에 고스란히 박혔다. 록흔은 고개만 저었다. 신기루인 듯 아련한 것, 그러나 지금은 눈앞에 있으니 놓치고 싶지 않았다. 록흔 안의 연, 연 안의 록흔……. 의지의 주체가 누구이든 희구는 변함없었다.
“진정…… 머무르겠단 건가?”
록흔은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하여 그저 고갯짓만 했다.
“연.”
머리칼에 묻으면 이 붉음이 감춰질까? 록흔은 얼굴을 모로 비틀었다. 그에 순백의 목덜미가 꺾인 듯 드러났다.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하얀 빛.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럽히고 싶게 만드는 무결의 설원과도 같았다.
사악.
가륜은 향긋한 살갗에 얼굴을 묻었다. 이미 겪었으나 겪지 않은 것과 같았다. 매오로시 바란 순수……. 잔향까지 심으려는 듯,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너 없이 어찌 지냈을지, 생각조차 안 했겠지?”
가륜은 록흔을 더욱 세게 그러안았다. 이렇게 안고 있어도 사라질까 두려운 듯, 그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이리도 다슨데, 얼음이라고만 하는군요. 저조차 그랬거늘, 뉘라 알았을까요?’
귓불 뒤, 움푹 팬 곳. 머리의 하단, 잔발이 흩어진 곳. 소곳이 도드라진 목뼈. 스치는 곳마다 향이 배였다. 가륜은 입귀를 실긋 틀었다.
“이게 너였다. 꿈속에서도 생생한 체향…….”
음성은 살갗으로 스며 전율로 일었다.
“비로소 안았으니 놓지 않을 터.”
공하든, 협위든……. 말조차 족쇄처럼 록흔을 얽맸다. 그러나 그녀는 되지 않는 일임을 알았다.
‘당신께선 황제이시니, 세상 전부를 품으셨지요. 허나, 그 속에 저는 없습니다. 그저 아비 구명하던 어린 소년, 그 모습 그대로 뒤에서 곁에서 그림자로 지내렵니다.’
빛 고운 눈동자가 뜨겁게 일렁였다. 서러움은 그대로 열이 되고 물방울이 되었다.
‘절 얻으려 하지 마세요. 눈뜨면 흐릿한 꿈속의 연이라면 이 밤 온전히 취하시되, 영원은 언약하지 마시기를……. 저는 그저 이 연심으로 족합니다.’
뜨거운 입술이 서늘한 목덜미에 닿았다. 한껏 숙여 젖혀진 옷까지, 드러난 피부까지……. 다슨 촉감에 록흔은 가슴이 아렸다. 떳떳치 못한 자신이 미워 눈물이 났다.
찰람찰람.
다만 물소리가 들릴 뿐, 록흔은 여기가 어딘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슴아슴한 난향, 달금한 화향, 푸릇한 목향……. 여러 내가 섞여 코끝이 향긋했다. 청산의 티끌 정도, 지금 그녀는 그렇게 미미한 존재였다.
“바라는 건.”
이윽고 가륜이 입을 열었다. 귓전에서 들리는 음성은 부드럽고 그윽했다.
“약언이다.”
무엇을? 록흔은 고개를 틀었다. 즉시 맞닥뜨린 것은 심해 같은 눈동자. 그에 보얀 볼이 은은히 붉어졌다.
“다신 떠나지 않겠노라고…….”
강한 자가 내보이는 피살. 록흔은 가슴이 저몄다. 귓불을 정수리를 스치는 입김에 통증은 배가되었다.
“약조할 음성조차 없는가? 들은 것이라곤, 몹시 아파 겨우 내던 것뿐인데…….”
대답을 바라나 해 줄 수는 없었다. 록흔은 입술 끝만 물었다. 처음부터 둘 사이에서 진실이란 건 없었다.
‘모두 거짓뿐.’
남복으로 사내인 체했다. 그 밤, 제대로 된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다. 진화절, 붉은 너울로 사내의 마음을 찢었다. 지금, 벙어리 행세로 그 애를 태운다. 록흔이 한 일이란 그저 헤집어 발긴 것뿐. 번히 알면서 그렇게밖엔 못했다.
‘앞으로 연으로서 소리 내진 않을 테니.’
록흔은 물 머금은 눈으로 멀리 앞만 보았다.
‘이 밤은 그저 용서하세요.’
고인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내렸다.
“애달파 마라.”
축축한 금만큼 딱 그 선만큼, 가륜은 다습게 어루만졌다.
“네가 못하면 내가 하면 될 터.”
가륜은 록흔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빛 고운 눈동자를 곧게 들여다보았다.
“평생, 품에서 놓지 않으마. 눈빛 맑은 아이도 네게 줄 테니…….”
맹서의 말. 칼처럼 가슴을 찔렀다. 록흔은 힘없이 도리질만 쳤다.
‘하지 마세요. 그런 언약은…….’
절박한 마음만큼 록흔은 눈앞이 캄캄했다.
“섧게도 운다. 연비, 저번에도 그러더니……. 그예 또 우는가?”
가륜이 갈쌍한 눈가를 쓸었다. 손끝에 어여쁜 온기가 그대로 묻어났다.
“달빛 아씨.”
언제 내렸을까? 가륜이 록흔보다 조금 아래에 있었다. 그녀는 애참한 마음에 눈을 내리떴다. 똑, 아슬아슬 맺힌 물이 투명하게 돋아 소매 끝을 적셨다.
“새벽녘이 되어도 스러지지 말고, 항시 내 곁에.”
가륜은 록흔을 한 줌도 안 되게 쥐어 가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는 곱다란 몸피를 감싸 안아 버렸다.
“…….”
목에 녹이 슬었는지 록흔은 한숨조차 제대로 쏟을 수 없었다.
“잃은 목소리, 되찾아 주마.”
“…….”
목구멍은 더욱 졸아붙었다. 순간, 록흔은 숨이 막혔다.
‘사실을 말하면 난…….’
수많은 상념이 말간 눈에 떠다녔다.
‘그래도 연이라 불릴까요? 폐하…… 당신께선 그리 다스하게 불러 주실까요?’
록흔은 해양 같은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린 것 번히 알면서 예 있다 나서지 않았으니, 바라지도 말아야겠지요?’
정인의 향기는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당신께서 주신 것은 진심, 제가 드린 건 거짓. 폐하, 능멸의 죄를 어찌 다 갚을까요?’
등을 어루만지는 손이 있었다. 록흔은 이를 악물었다.
‘만정이 다 떨어져 다신 안 보신다 해도, 이 혀 깨물지언정……. 저는 그저 호분중랑장 연록흔. 연이란 계집, 희미한 밤 그림자거니 여기시고…….’
눈물은 가륜에게 그대로 스몄다. 그는 가슴의 물기만큼 좁다란 등을 힘껏 조여 안았다.
“나는 이만큼의 부피를 항시 기억했던 것 같다.”
당금, 록흔은 가륜에게 푹 잠겨 있었다. 그는 되살피려는 듯,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오만한 자라 사랑 같은 건 나와 관계없다 생각했지. 연, 너를 만나기 전까진……. 그리 어리석은 사내가 나였다.”
그런 사랑이라 되려 아팠다. 잘 드는 칼로 쓱쓱 저미듯, 살갗을 생으로 발라내듯……. 록흔은 마음의 아픔에 진저리를 쳤다.
돌돌돌.
또다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과오는 그것으로 족하다.”
가륜은 놓칠세라 록흔을 부여잡았다. 그들은 부드러운 꽃 잔디를 지르밟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차박차박.
이름 모를 앉은뱅이 꽃들이 곱다랗게 부서졌다. 아래부터 기인한 향기는 정원 가득히 퍼졌다.
스륵스륵.
흰 옷자락마다 물풀이 푸릇하게 배였다.
다악.
얼굴을 감싼 것은 목단의 향. 록흔은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고 발걸음을 조금 늦췄다. 그에 앞서가던 가륜이 돌아보았다. 일순, 서늘한 시선이 빛접게 떨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우뚝 서 버렸다.
사락사락.
자색 목단은 유달리 고왔다. 꽃잎이 밤바람에 이지러져 나부끼면 달큼한 향이 떨어졌다. 고운 잎이 슬치는 소리가 왜인지 이 밤엔 더욱 애틋했다. 여인은 꽃을 보고, 사내는 여인만 보았다.
‘차라리 얌전히 꺾이는 꽃이면 좋았을까, 저 목단처럼…….’
가륜이 한 송이를 뚝 꺾었다. 록흔은 목 부러진 꽃을 보며 부질없이 되뇄다. 그러다 약한 마음이 못내 경멸스러워 생각일랑 서둘러 지워 버렸다.
“너만큼이나 곱군.”
큼직한 손바닥 위, 향기 은은한 목단이 고개를 숙였다.
사륵.
자화는 보얀 귓가에 내려앉아 향긋하게 빛났다.
“아니, 네가 더 곱다. 곁에 두고 보니 훨씬 고와.”
록흔은 이륜(귓바퀴)에 핀 꽃보다 머리칼을 넘겨 주는 손가락이 더 좋았다. 작은 접촉이나 수줍음은 금세 돋았다. 가륜은 붉어진 볼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되돌리지 못했다.
‘연을 위한 봄바람. 나는 비겁하다.’
자괴감이 커서 차마 바로 볼 수 없었다. 록흔은 고개만 비틀었다.
“이 세상 어느 꽃보다…….”
따뜻하게 쏟아지는 음성, 턱을 잡은 온기. 록흔은 가륜이 돌려놓은 대로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웃는 꽃이 더 예쁘다, 울보 아씨.”
록흔은 갈쌍한 눈을 들어 올렸다. 비록 눈물 떨어졌으나 그의 말대로 애써 웃어 보았다.
“이슬 돋은 꽃이로군.”
록흔은 그리 말하는 남자를 그러안았다. 온 마음을 담아서……. 그예 눈물이 났다.
난처한 일이다. 그러나 황상을 찾아서는 안 된다. 본능이 진과에게 그리 속삭였다. 월영과 함께이니 사실 추적도 별 의미가 없었다. 한 걸음에 스무 보를 족히 가는 명마 아닌가? 전속력으로 달렸다면 벌써 문주성도 넘었을 것이다.
‘하기야 나라도…….’
진과는 싱긋 웃었다.
‘그런 미희라면 들어 안아 멀리 가고부터 볼 일. 황상께서 천하무적이시니 크게 걱정할 일도 없을 듯하다.’
외려 찾아 나서서 번거롭게 하는 것이 황상의 진노를 살지도 모른다. 진과는 그리 생각하다 월한을 돌아보았다. 누이는 안색이 파르족족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저 아이는 언제쯤이면 정신을 차리려나. 같은 부모에게서 나왔지만 저 쓸데없는 집착은 이해할 수가 없군그래.’
진과는 성마르게 혀를 찼다.
“오라버니, 계속 그러고 계실 참인가요? 폐하께서 시종 하나 없이 가셨는데 어서 찾아 나서야…….”
서방 뺏긴 계집이 저러할 듯, 지금 월한의 얼굴이 딱 그랬다.
“월아, 너도 참 딱하구나. 이 오라비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면 족할 터. 누구보다도 강하신 분 아니더냐? 외려 방해했다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진과는 안달복달하는 누이가 마뜩찮아서 일침을 놔주었다.
“그 여자, 폐하 곁에 두면 안 돼요. 절대!”
“폐하께서 무얼 하시든, 우리가 왈가왈부할 계제가 아니다. 더는 말하지 마라, 듣기 거북하니.”
황상께선 각 주마다 있는 밀궁에 가신 게 분명했다. 그런 미인 다시없으니, 온전히 취하기엔 딱 좋은 곳이리라. 진과는 사내로서 부러워 쓴 입맛만 다셨다.
“오라버니, 정말…….”
“네 태돈, 호위로서 넘친다. 가자, 누이.”
진과는 월한의 손을 움켜쥐었다. 파르르 떠는 것도 부러 모른 체하고 억지로 잡아끌었다. 장성의 저자는 여전히 번잡해 그 둘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삼켜 버렸다.
휘늘어진 꽃 덤불을 스쳐, 맑은 물이 흐르는 내를 건너……. 가륜이 이끌면 록흔은 따랐다. 깊이깊이 들어가도 끝이 없는 곳, 여느 별장이 아니라 황제의 밀궁인 듯싶었다. 이곳저곳 잘 다듬어진 것을 보면 분명 누군가의 손을 탄 것인데, 괴이쩍게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황성이 싫어질 때 찾는 곳이다. 사람이 역해 오는 길에 사람이 보여서야 쓰랴?”
록흔은 고개를 발딱 들었다. 내가 그리 읽히는가? 맑은 눈에 놀라움이 서렸다.
“그냥 스미는군.”
들리는 거리가 달랐다. 어언간, 록흔은 사분하게 안아 올려졌다. 눈 앞으로 시원스레 올라앉은 것은 삼 층의 전각. 그것은 한눈에 온전히 차지 않게 크고 높았다. 손수 오르는 것도 안쓰러웠을까? 가륜은 기별 없이 곱다란 몸피를 들어 옮겼다. 그녀가 소스쳐 바동거리니, 그가 옴쭉 못하게 감쌌다.
“어때, 볼 만한가?”
비로소 맨 위. 솟아오른 자리라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꽃은 이미 잠들어 봉오리를 다물고 등불은 아슴아슴 스러져 달빛만 은은했다. 그러나 색 없는 것도 고와 뛰놀던 심장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살랑살랑…….
이곳엔 시원한 바람도 맨 먼저 닿았다. 장엄하게 선 전각을 중심으로 건물 여러 채가 방사형으로 뻗어 있었다.
‘응, 저건…….’
그새 누가 다녀간 모양. 넓게 트인 공간의 한가운데, 문제의 칠현금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연, 너의 물건이지?”
가륜이 묻는 것과 동시에 록흔을 내려놓았다. 작은 움직임에도 체향은 은은히 퍼져 그녀는 무력해졌다.
“저걸 들고 바삐 가더군. 못 보고 스쳤으면…… 다시 만나지 못했을까?”
‘그랬겠지요. 아마도…….’
록흔은 소리 없이 대답했다.
“이미 임계를 넘어서, 어쭙잖은 명분 따윈 챙길 여력이 없다. 너를 놓아주어 내가 아팠으니…….”
아팠다는 말, 가륜이 할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가슴 한구석이 지르르 울렸다. 아픔은 전이되어 록흔을 그대로 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