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35
연록흔 – 35화
“……!”
또 다른 탈략(함부로 빼앗음)이 있어 깊이 들은 살갗이 잔약히 말렸다. 가륜은 록흔을 사뭇 거칠게 쓸었다. 하얀 허벅지가 커다란 손에 온전히 들어찼다. 손길이 거듭될수록 햇발에 무르녹은 얼음인 양, 바짝 굳은 근육도 점차 노곤해졌다.
“흐윽!”
원래 하나가 아닌 것, 하나인 듯 굴었다. 그것은 버겁고 뜨겁고 묵직했다. 부연 시야에 맺힌 것은 그리움, 록흔은 두 손 내밀어 그러안아 버렸다. 먹먹한 눈물을 삼키니 혀끝에서 비린 쇳내가 느껴졌다. 그녀는 높아진 체온만큼 그에게 섭슬려 녹았다.
찰강찰강…….
감은 눈의 안쪽, 록흔이 지닌 천공에서 빛이 터졌다. 보름달, 반달, 초승달, 월장석 부스러기……. 가륜이 다가올수록 월구는 산산이 부서져 은빛으로 발광했다. 그녀는 몹시도 벅차게 메워졌다. 강(强), 태(太), 극(極)……. 점차 사점(죽을 고비에 다다른 점)을 넘어서 아픔이 희미하게 바랬다. 의식도 옅어져 생각이란 것은 없고 그저 느끼는 것이란 하중과 숨소리, 열기뿐이었다.
사악사악…….
머리카락이 바닥에 슬쳤다.
“아악!”
그저 아파서라고 말할 수 없는 비명. 외마디 소리 토해 낸 후, 록흔이 호흡을 멈췄다. 보드란 손끝이 하얗게 말렸다. 그에 가륜이 가늠하기 어려운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의 휴지, 그리고 강건한 근육이 울뚝불뚝 불거졌다. 그는 극감(충분히 감당함)하며 해방을 스스로 미뤘다. 가느다란 눈결에 곱다시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일순, 몸놀림이 더욱 힘차졌다.
“흑…….”
신음은 막혀 바이 갈 곳이 없었다. 록흔은 하초에 퍼지는 열기에 진동에 숨 쉬는 것도 잊고 말았다. 티끌만큼 졸아들었다, 우주처럼 커졌다. 이제 그녀에게 시간의 흐름 따윈 남지 않았다.
“하아하아…….”
흉강이 들썩이다 점차 잔잔해졌다. 거친 숨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록흔은 눈을 간신히 들었다. 그러나 빛이 보인 것은 순간, 가륜이 즉시 덮어 버렸다. 눈귀의 간기, 혀끝의 쇳기, 볼의 핏기…… 모두 그가 취했다.
“하아…….”
지금껏 듣지 못한 소리가 비로소 들렸다. 록흔은 가륜의 가슴에 뺨을 바짝 대 보았다. 뛰고 있었다, 몹시도 강하게. 세상 어떤 소리보다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기에 그랬다.
‘그런 미소…….’
록흔은 보지 않아도 알았다. 혼마저 닿은 사람이라 지금쯤 무엇을 하는지 그냥 느껴졌다. 서늘히 빛나던 것은 따뜻하게 풀렸다. 온기의 발로, 그녀로 인한 것이었다. 그걸 알기에 눈이 더욱 습해졌다. 가륜은 하늘을 향해, 그녀는 그를 향해 누웠다. 그들은 원래 한 겹인 듯 빈틈없이 맞닿아 있었다.
“반드시…….”
침묵은 고즈넉이 깨졌다. 가륜이 조용히 운을 떼자 그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네 음성을 되돌려서.”
가륜이 록흔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고 중얼거렸다.
“네가 말하는 사랑도, 내 이름도 모두 들어야겠다. 열에 가엾게 마른 것밖엔 알지 못하니, 기필코 그리할 터.”
머리칼 한 올마다 가륜이 스며 올랐다. 록흔은 그의 어깨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보얀 가슴이 눈부시게 출렁댔다. 검푸른 장막이 그녀에게서 쏟아져 그의 가슴을 쓸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널 안은 것으로 족해야겠지.”
무수한 입맞춤으로 발갛게 부푼 입술. 안쓰럽고 탐스러워 어루만지니 조금 열렸다. 무엇인가? 연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가륜은 눈을 조프렸다. 그리고 보드라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는…….’
가륜이 소리 내어 그 입술을 읽어 내렸다.
“저는.”
분명 주제넘은 욕심, 터무니도 없다. 하지만 하늘님……. 록흔은 심장으로 읊조렸다.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테니 눈감아 주세요. 스러질 때 스러지더라도, 말하고 싶어요. 애 끓는 만큼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사랑해요, 륜.’
가륜은 진홍으로 부푼 입술을 덧그렸다.
“사랑해요, 륜.”
독순. 가륜은 모양대로 따라 말했다. 수줍은 고백에 심장이 저릿해진 것도 찰나, 그의 눈이 날카롭게 찢겼다. 실로 처음, 달금한 입술이 먼저 와 닿았다. 부풀어 아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록흔이 다스하게 파고들었다.
“연…….”
부드럽고 낮은 음성이었다. 록흔은 부르는 소리에 입술로써 답했다. 그녀는 절박함만치 서슴없이 나섰다. 그리고 가륜은 입술 새로 스미는 사랑을 남김없이 받아 마셨다. 어느덧 뺏던 자가 빼앗기고, 빼앗긴 자는 빼앗았다.
“사랑한다.”
쩍. 위태롭게 금간 것이 돌이킬 수 없게 깨졌다. 록흔은 연한 눈으로 가륜을 보았다.
‘이제 곧…….’
록흔은 가륜을 안았다. 저보다 크고 가진 것도 많은 사람이나 아낌없이 주고만 싶었다. 하얀 젖무덤 가득, 그의 숨결이 닿았다. 그녀는 흑단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손끝은 애틋하고 입매는 애참했다. 마지막이란 말은 몹시도 서러웠다.
‘하늘이 붉어져요.’
가륜은 보드라이 잠겨 눈을 감았다. 체향이 이리 가까우니 그간의 허전함은 자취를 감추고 사랑만 부듯이 찼다. 자신을 보듬어 안은 잔약한 팔마저 온전히 아끼고픈 밤이었다.
‘주무세요, 저 따윈 잊으시고.’
이마를 쓸어주는 입술,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손길……. 가륜은 눈을 감았다. 이제 연은 오롯이 자신의 것. 안도하는 마음이 커서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향긋하고 곱다운 이에게 몸을 맡길 뿐. 보드레하게 닿은 살에 그는 노긋해졌다.
살랑살랑.
달은 기울고 밤은 이슥하고 여심은 애참했다. 영원 같은 시간은 조용히 흘러 지났다. 아청빛 하늘의 끝자락, 마침내 달은 자취를 감추고 파르란 여명이 홍조 어린 얼굴을 내밀었다.
***
손이래야 단둘, 문 닫을 시간은 이미 지났다. 그러나 산각루의 등은 꺼지지 않았다.
까닥까닥.
이미 진 달 대신 높은 처마에서 노란 등이 대롱거렸다. 빛은 영락없이 같으나 새벽 찬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만큼은 확연히 달랐다. 그때, 날렵한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기루를 올랐다. 창졸간, 기루를 지키던 사내 하나가 까무룩 졸다 깨었다.
“이쪽입니다.”
점원은 서둘러 손이 찾는 곳을 안내하고 얼른 비켜 나갔다.
“왔나?”
보지 않아도 단박에 알았다. 앞에 선 이는 록흔이었다. 이른 바람내, 희미한 물내, 그리고 또 무엇……. 산청은 후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러나 싸늘한 그것뿐, 다른 것은 불명료했다.
‘부러 지운 건가?’
산청은 고개를 들었다. 과연 록흔은 젖어 있었다. 옷도 습하고 머리칼도 축축했다. 파랗게 언 얼굴을 대하니 심장이 저릿했다. 분명 일이 있었다. 그는 재빨리 훑었다. 뺨에 목덜미에 등에 달라붙은 머리칼에서 여전히 물이 돋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무감한 얼굴로 칠현금만 내밀었다. 푸릇한 입술은 꾹 다문 채였다.
타악!
산청은 술잔 대신 록흔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하늘의 달이 그렇듯 차갑게도 따뜻하게도 보이는, 그의 심장 중 가장 큰 부분을 잠식한 여인……. 그는 손끝에 더욱 힘을 실었다. 가는 손목에 한 점 온기도 없었다. 나무 그늘만큼이나 서늘했다.
“외숙께서 술과 벗하셨군요.”
“아무 일도 없었나?”
막상 쏟아낸 건 걱정의 말이었다. 밤새 술잔을 부수며 마음에 품은 생각, 머리에 채운 말……. 그중 어느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산청은 그저 무사하니 다행이라 여겼다. 그때, 반 시진 전까지 무한이 앉았던 자리에 록흔이 앉았다.
차르륵.
록흔이 잔 하나를 추켜들자 산청이 술을 따랐다. 한 잔 꺾자마자, 푸른 입술에 불긋한 색이 돌아왔다.
“그다지 큰일은 없었습니다. 제가 좀 늦었군요.”
“표물도 안전하고…….”
너도 안전하니 됐다. 산청은 나머지 말은 술잔에 담아 버렸다. 그대신 술이 피운 꽃을 바라보았다. 파랗게 얼었더니 금세 연홍이 되어갔다.
“신륜사까진 외숙께서 직접 가십니까?”
“그렇게 입으니 곱구나.”
동문서답. 록흔은 아무 말 없이 빈 잔만 내밀었다. 즉시 싸한 액체가 술병의 주둥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고운 상복이라……. 종이꽃도 곱다 하시겠군요.”
챙!
탁자 위, 잔이 깨뜨린 소리가 경쾌했다. 이미 빈 잔, 록흔은 미련 없이 외면했다. 이젠 연에서 연록흔으로 돌아가야 할 때, 사흘의 유예는 길고도 짧았다.
“외숙, 곤륜산까지 무사히 가십시오. 마무리를 지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억지로 잡지 않겠다. 인연이 있으니 다시 만나지겠지.”
산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새 술잔을 기울인 이답지 않게 꼿꼿하고 곧기만 했다. 그는 칠현금부터 어깨에 둘렀다. 어찌 됐건 창해표국 총표두로서의 소임이 먼저였다.
“연록흔, 종이꽃엔 향기가 없다.”
벌써 저만치 가던 이는 뻣뻣이 굳었다.
“나는 네 향에 이미 매료되었으니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건 오늘뿐이다. 잘 가거라.”
황성으로 향하는 록흔, 곤륜산으로 향하는 산청. 그들의 머리 위로 붉게 달군 무쇠 쟁반이 떠올랐다. 간밤은 누구에겐 너무 길고 누구에겐 너무 짧았다. 어쨌든 먹빛은 커다란 불덩이에 밀려 바래 담청이 되었다.
‘지금쯤 일어나셨겠지…….’
온 길을 되짚다, 록흔은 멈칫 서 버렸다. 눈귀에 물이 고였다. 행여 밝아진 세상에 비칠세라 그녀는 서둘러 소매를 들었다.
***
사락, 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에 유난히 날이 섰다. 하신은 근심 어린 빛으로 황상을 보았다. 무슨 일인지 전에 없이 심기가 사나우신 듯했다. 아니, 탄일연 직후와 상황이 비슷한 것도 같았다.
“많기도 하군. 황후 후보들이 이리 많은가?”
“예, 폐하. 태후마마께서 명망 있는 가문의 따님들을 손수 고르셨습니다.”
“할머님께서 욕심이 과하시군.”
가륜이 종이 더미를 한쪽으로 밀쳐냈다. 찬바람 일 정도로 매서운 기세라 보는 이는 그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젯밤 잠행 이후, 단지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진노하시는가?’
하얗게 바랜 눈썹 아래, 신중한 눈동자가 들렸다. 하신은 조심스레 황상의 용안을 살폈다.
‘어쩌면 그 여인 때문이신 건지도…….’
하신은 초상화 속의 여인을 떠올렸다. 아무리 잘 그린 것이라 해도 사람보다 아름다운 그림은 없다 했다. 그렇다면 그 미희는 어느 정도의 절색인가?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호분중랑장은 돌아왔나?”
“네, 새벽녘에 돌아왔다고 하더이다.”
“좌중랑장과 함께 들라 하라.”
“예, 폐하.”
가륜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잔향이 떠도는데, 부드러움조차 살갗에 남아 있는데……. 그녀는 흔적도 없었다. 도망치는 걸 거듭하진 않겠지, 눈을 뜨면 곁에 있겠지…… 그리 믿었다.
‘반드시 찾아낼 터.’
날캄한 눈이 빛접게 번득였다. 연이기에 믿었으나, 연이기에 속았다. 눈시울이 맞닿을 정도로 봉안이 가늘어졌다. 찾아내면 황궁 안 가장 깊은 방에 가두리라. 가륜은 자신의 손을 내려 보았다. 연은 어디든 스며 있었다. 감촉으로 고스란히 남아 그를 괴롭게 했다.
저벅저벅!
두 사람 몫의 발자국 소리에 가륜은 고개를 들었다. 찾아 부른 이들이 넓은 보폭으로 무세전을 가로지르는 중. 그는 야멸친 눈으로 그들을 내려 보았다.
‘폐하, 다시 그 빛이군요. 그리 부드럽게 웃으시더니…….’
아홉 단 높은 곳의 용상, 아홉 단 낮은 곳의 바닥. 록흔은 현실의 거리를 실감했다. 폭풍 이는 바다처럼 황량하고 어두운 눈동자가 바로 와서 꽂혔다. 가슴에 납덩이 하나 올린 것 같아 그는 시선을 내렸다.
“부르셨습니까?”
진과는 간밤의 일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물을 자격도 물론 없거니와 용안을 보건대 그저 입 다무는 것이 좋을 성싶었다. 록흔 역시 눈치 빠른 녀석이라 그린 듯 서 있기만 했다.
“그동안 여인 하나를 찾고 있었다.”
낭랑한 음성이 떨어졌다. 진과는 하명을 기다리며 즉시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록흔은 무거운 고개라 쳐들지 못했다. 그저 간기 배도록 입술만 물었다.
“비밀리에 색출했으나 수확이 없었다. 하여 명하니, 이 여인을 반드시 찾아라.”
가륜은 책상에 놓인 두루마리 하나를 진과에게 던졌다.
타라락…….
둘둘 말린 것이 허공에서 잽싸게 풀렸다. 진과에게 닿기 전, 족자는 활짝 열려 그들을 마주 보았다.
“그 여인은 말을 하지 못한다. 생김은 대충 그러하고…….”
내가 저러한가? 록흔은 그림 속의 자신을 열없이 보았다. 하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저 흘려 들렸다. 묵선만큼 그의 마음도 연하게 풀렸다.
“연중랑장.”
“예, 폐하.”
조금은 허둥대는 답이라 진과는 슬쩍 곁눈질을 했다. 무언가 확실히 달랐다. 마도굴에서 나온 후, 표정이란 게 일절 없던 놈이 얼굴까지 붉히고 있었다. 희미하긴 해도 분명 홍조였다. 그는 갸웃거리다 시선을 돌렸다. 그림 안의 침어낙안(아름다운 여인의 용모를 이르는 말)은 작야에 보았던 여인이 분명했다. 황상께서 날파랍게 채어 안은, 그의 가슴이 서늘토록 곱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기한은 열흘, 부접과 함께 움직여라.”
찾으려 든다면……. 록흔은 입귀를 늘렸다. 폐하, 지금 당장이라도……. 그는 고개를 들어 가륜을 마주 보았다.
“지엄하신 명 받들겠습니다.”
대답하는 입귀가 조금 떨렸다. 이제 열흘 후면 황룡 전역에서 황후 후보들이 상경할 터. 어디 가서 찾으랴? 뻔히 아는 여인이나 록흔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충실한 수하로서 수명(타고난 운명에 따름)을 맹세했다. 자조의 미소만 눈귀에 깊게 걸렸다.
“좌중랑장은 어전시위들을 풀어 장성 주변을 탐색토록 하라.”
“존명!”
진과는 또 한 번 고개를 갸울었다. 왜일까? 여인이 낯설지 않았다. 어젯밤 얼핏 보아서 눈에 익은 것인가? 아니면……. 그는 록흔을 돌아보았다. 언제 봐도 만년 꼬마, 무슨 일인지 맑은 눈에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둘에게만 닿는 소리로 말을 붙였다.
“어이, 괜찮으냐?”
“예.”
“집에서 쉬고 온다더니 얼굴이 더 상했잖냐.”
“그렇습니까?”
풀기 없이 웃는 얼굴이 오늘따라 애참했다. 무인 연록흔과 가인 연……. 찾을 사람이 곁에 있으나 진과 역시 일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 둘이 같으면서도 몹시 달랐기에.
[연, 가지 않겠다 다짐해라.]진과 몫의 하명이 더 있는 듯, 가륜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짧은 틈새, 록흔은 눈 얕게 뜨고 어젯밤 가득히 안았던 이를 훔쳐보았다. 늘품 있는 입매를 보니 새벽녘에 들은 말이 다시 돋았다. 절대 떠나지 않겠노라, 그는 벙어리 입술로 저 입술에 허언했었다.
“폐하, 그만 물러가옵니다.”
진과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제 다시 황제인 사람, 스스로 떠났으니 어떠한 권리도 없었다. 록흔은 시위답게 허리를 정중히 꺾었다.
“호분중랑장!”
록흔은 이미 무형의 갑주로 얼굴을 단단히 가렸다.
“예, 폐하.”
“최선을 다하라.”
거짓된 입이라 더 답하기도 면구했다. 대답 대신 한 팔을 가슴에 두르고 허리를 숙일 뿐. 록흔은 진과와 함께 무세전을 물러 나왔다. 얼음 조각이라도 박혔는지 가슴이 선득선득했다.
“꼬마, 간밤에 말이다.”
남의 속은 모르고 진과는 지난 일을 신이 나서 떠벌렸다.
“그리 고운 여인은 내 생전처음…….”
“예.”
록흔은 눈시울을 좁히고 고개를 숙였다.
“천상천녀라…….”
진과가 먼 눈으로 웃었다.
“그렇군요.”
“가슴이 뛰는 미색이란 그런 것일 테지.”
“예에.”
발자국 소리, 조금은 격양된 묘사, 어설프게 치는 맞장구……. 그리고 문이 닫혔다.
사륵.
가륜은 소매에서 천 하나를 꺼냈다.
[예, 가지 않아요.]침상의 기둥에 묶였던 것, 연의 옷자락이었다. 그리운 향이 스며 차마 버리지도 발기지도 못했다. 흰 비단 위, 정갈하게 올라앉은 것은 이별의 글이었다.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
가륜은 이를 악물었다.
파락.
열어젖힌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보드레한 천이 하르르 말렸다.
류에게 물으니,
곧 해가 돋는대요.
얼마나 머물겠느냐
눈물바람 하였더니,
달이 그린 그림은
염정이 태워
먹빛 어둠 치우듯
걷어 버린다고 해서
입술 끝만 물었지요.
사련 아는 류인지라
한숨 높이 내쉬니
흐린 구름 몰려와
해를 가려 주네요.
잠드신 임 모습에
눈물 떨쳐 보지만
달 그림자였으니
저 일광 아래서는
존재할 수 없네요.
쿵!
금빛 찬란한 용이 똬리를 튼 거대한 기둥, 금강의 주먹에 된서리를 맞았다.
다르르!
무세전 전체가 거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폐하!”
하신이 놀라 들어왔다.
“…….”
황제는 태산인 듯 버티고 서서 늙은 내관 따위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곁으로 뵈는 그 눈이 서릿발처럼 찼다.
***
부접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이런 미인을 황상께 바치느니 그대로 안아 예하든지 남연이든지 가야 한다, 실물은 더 곱지 않겠나, 눈빛이 애운도 하다, 저런 이가 정녕 사람꽃이다……. 록흔은 가타부타 말없이 듣기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 유장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접두…… 이 여인, 눈에 많이 익지 않습니까?”
‘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급히 올라온 숨이 목구멍을 콱 막았다. 록흔은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농지거리냐! 유장, 네놈이 이런 미인 구경이나 해 본 적 있겠냐?”
일촉즉발, 창해가 호쾌하게 웃었다. 록흔은 불투명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새 족자는 둘둘 말렸다.
“접두, 여기 있습니다. 이러다 놈들이 침이라도 떨어뜨릴 기세니…….”
“이건 황명이다. 부접제군, 해이가 지나치군.”
록흔은 사늘한 눈빛으로 수하들을 제압했다. 그가 두루마리를 무작스레 쥐니, 손목에 핏줄이 푸릇하게 일어섰다. 잡소리는 단칼에 끊겼다. 사내 여섯은 입매를 팽팽히 굳히고 모시는 이를 우러렀다.
“주어진 시간은 열흘. 사안이 급한 만큼 개별로 움직인다. 연락은 마영을 통해서 하도록.”
“존명.”
긴 휘파람 소리가 천공을 갈랐다. 먹장구름 낀 하늘 너머, 커다란 날개 한 쌍이 갑자기 솟았다. 그리고 놈이 그린 호만큼 흑운이 찢겼다. 다시금 짧은 휘파람이 터지자 비금이 날개를 접었다. 놈의 급강하에 된바람이 일었다.
“마영!”
매는 주인의 팔뚝에 사분히 내려앉았다. 날이 선 발톱이나 나름 얌전하여 가죽토시 없이도 받아 낼 수 있었다. 맹금이 분명한데 록흔 앞에선 양순한 비둘기와 같았다. 그가 머리를 쓸어 주니 놈이 날카로운 부리로 깜냥의 아양을 떨었다.
“하는 짓이 꼭 병아리 같습니다, 접두.”
기리단이 싱긋 웃었다.
끼우윽!
맞장구를 치는 건지 매는 더 크게 울었다. 록흔은 그저 어여뻐서 부리를 톡톡 쳐 주었다. 그러자 놈이 벌건 속이 보이도록 주둥이를 한껏 벌렸다.
“그럼 여기서 해산한다. 모두 몸조심하고, 열흘 후에 보자.”
“예, 접두.”
강무관의 넓은 뜰, 일곱 두의 혈루마가 걸게 벌여 있었다. 해사한 유장에서 가무잡잡한 창해까지……. 록흔은 수하들을 다습게 훑어보았다. 돈독한 주종이라 마주 오는 시선들도 따습긴 마찬가지였다.
“호분중랑장님! 큰일 났습니다. 어서 가 보셔야 하겠기에…….”
막 말에 오른 참, 갑작스레 들려오는 외침에 부접 모두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어전시위 하나가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록흔은 사색이 된 시위를 굽어보았다.
“마상여가 정평부(황룡국 수도 장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관청)의 옥에서 나왔답니다. 벌써 수십을 해하고, 당금은 황제 폐하 계신 곳으로 가고 있다 하여…….”
“정평부의 관속들은 무얼 하고?”
록흔은 짜증이 치밀었다. 당치도 않은 열에 머리가 익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자를 잡아 가둔 것도, 놈이 저지른 사악한 죄상도……. 마상여가 정평부에 있었던가? 그는 고운 아미를 일그러뜨렸다. 그걸 질책이라 여겼는지 시위가 고개를 다급하게 저었다.
“그간 옥에서 무엇을 했는지, 독이 퍼렇게 오른 손으로 간수장을 죽이고 문을 부수고 나왔다 합니다. 정평부에서 해친 목숨이 숱하고 탈주 도중에도 닥치는 대로 살상하여…….”
록흔은 어금니를 물었다. 결 고운 눈썹이 하늘을 향해 올랐다.
“나 이외 누구한테 알렸나?”
어전시위는 고개만 저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으로 보아 즉시 이곳으로 달려온 게 분명했다.
“게다가 마상여는 황제 폐하께……, 시살을 언급했다 합니다. 정평부가 쑥대밭이 된 모양이라, 지금 몽림으로 향하는 중이라고요.”
시살(임금을 죽임)! 단어 하나가 도드라져 록흔은 안면이 크게 굳었다.
“알았다. 자넨 우중랑장께 알려서 집금위의 도움을 받도록 해라. 나도 곧 뒤따를 터이니.”
명세제 가륜, 세인들은 천하무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한낱 인간일 뿐, 뉘라서 일체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랴? 록흔은 마음이 급했다. 그는 말고삐를 바투 쥐고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먼저 가 있으란 말씀일랑 마십시오. 저희도 접두 따라가렵니다.”
아진이 불뚝 내뱉었다. 입 무거운 이가 의외롭게도 제일 먼저 나섰다.
“아니다, 아진. 폐하의 명부터 좇아라. 항명은 나 하나로 족하니.”
“하지만 접두!”
유장도 거들었다. 그는 길게 말하는 대신 록흔의 말머리를 가로막았다.
“더 이상의 발언은 불허한다. 달리 부접인가? 공공연하게 드러내선 안 된다.”
정인이기에 앞서 주군인 사람. 록흔은 가륜을 그런 마음으로 받들었다. 황제의 직속이니 부리는 대로 움직일 뿐, 생각도 행동도 스스로 챙길 몫은 없었다. 그것은 부접들도 같았다.
“내 수하에 항명하는 자는 없다. 출발해라.”
록흔은 맵게 쳐내고 돌아섰다.
“마영, 가라!”
맹금이 날카로운 일갈을 내지르며 천공으로 솟았다.
“하앗!”
록흔은 혈루마를 재촉했다. 시퍼런 서슬에 말이 발을 크게 구르니, 강무관 돌바닥에 잔금이 쩍 갔다.
“접두!”
말릴 새도 없었다. 부접들은 허탈한 눈으로 상관의 뒷모습을 좇았다. 된바람 일고, 고운 인영은 사라졌다. 푸릇한 기가 높게 솟은 문을 거쳐 대로를 훑고 지났다.
“이봐, 접두께서 정말 황제 폐하를 충심으로 받드시지 않나?”
“낯빛이 허예지시는 게, 내가 더 안타깝더군.”
“영 마음이 안 놓이는데…….”
부접들에게 상관은 늘 챙겨 주어야 하는 귀한 아우 같은 존재였다. 못미더운 구석은 일호도 없으나 본연의 정으로 그리들 생각했다. 하지만 대쪽 같은 분이니 명을 어길 수도 없었다. 그들 모두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왜 저리 위태한 것이냐?”
사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들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접두 연록흔은 이들 중 누구보다 고강했다. 그러나 당금, 모두 그에게 마음이 쓰였다.
“가자, 미적거리다 접두께 혼날라.”
창해가 혈루마 위에 훌쩍 뛰어올랐다. 먹장구름이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비 돋기 전에 가야 할 터. 사내 여섯은 날파랍게 말을 달렸다.
점차 황성이 멀어지고 장성이 뒤에 놓였다. 지축이 둔중하게 울리자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하늘을 긁듯 지나는 이들이라 스치는 이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