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38
연록흔 – 38화
“자, 다 왔습니다.”
“여기는…….”
은녕건당. 사 층 거택은 산원까지 딸린 모윤에선 가장 큰 의원이었다. 이설이 영문을 모르겠단 듯 말간 눈을 들었다. 호듯호듯 내리쬐는 햇볕이 미안에서 눈부시게 부서졌다.
“이리 혼자가 아니면 인 듯 얹은 듯 소중히 여겨질 터인데. 미안합니다, 바빴단 핑계밖엔 댈 게 없어요.”
간접적인 언급이나 이설은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보호자도 없고 지아비도 없는 임부니 더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록흔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이리 무탈하니 의원에 갈 일은 없어요. 연호위님, 전 정말 괜찮아요.”
“제 새…… 어머니께서도 아우 가지셨을 때 보약도 드시고 의원에도 드물게나마 가시던걸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니, 도망친 김에 한 가지라도 보람된 일이 있어야죠.”
산해는 오롯이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새’라는 말이 덧붙곤 했다. 록흔은 항시 기억조차 없는 품이 퍽 그리웠다. 어쩌면 그래서 이설이 더 애틋한지도 몰랐다.
“아니어요, 정말 이러면…….”
“진맥 없이 대강 지어다 줄 순 없잖습니까? 들어가요, 어서.”
짐짓 엄한 목소리에 이설은 의원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거리는 한만하나 은녕건당은 꽤나 욱적거렸다. 앓는 사람이 제법 많아 대기하는 방이고 복도고 빡빡했다.
“어서 오세요. 어느 분이 불편하신가요?”
건당의 사환은 록흔과 이설을 번갈아 보았다. 한 사람은 팔을 싸맸고 한 사람은 배가 불렀고……. 청년은 사근사근하게 웃는 얼굴로 답을 기다렸다.
“부인과 진맥을 받으러 왔습니다. 이곳에 고명한 여의께서 계신다기에.”
“예, 그러시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록흔은 회당까지 늘어선 줄을 보며 이설의 손을 잡았다.
“저편만 유독 번잡합니다.”
유별난 장사진이라 묻는 말이 절로 나왔다.
“예? 아, 오늘 곽의원께서 진료하시는 날이라 그렇지요.”
“명의신가 봅니다.”
“그럼요. 모든 요치에 능하시지만 특히 인후 계통 질환에 탁월하시죠. 장성의 진신건당에 계신 분인데 일주일에 이틀만 저희 의원 일을 봐주십니다.”
대단한 영광이라도 된다는 듯, 사환은 조금은 격앙된 어조로 설명했다.
“인후라…… 가령 그 탁월함의 정도라면?”
청년이 대답 대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실로 갑작스런 행동이었다. 록흔은 등 뒤의 낯선 기에 눈귀를 가늘게 찢었다. 일부런 멈춰 선 자의 것, 그저 지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자의 입을 열어 준 적이 있습니다.”
몹시도 청량한 목소리였다. 벙어리에게 소리를 찾아주었다? 그렇다면 화타가 울고 갈 일. 록흔은 의심쩍어하며 천천히 돌아섰다.
“곽아밀입니다.”
머리를 깊게 숙이고 주먹은 감싸 쥐고……. 사내가 정중히 예를 갖췄다. 저런 통성명이고 보니 록흔도 가만있을 순 없었다.
“연록흔입니다.”
록흔이 마주 예를 갖추는데 팔을 감싼 붕대가 조금 풀렸다. 어젯밤 이설이 갈아준 것인데 움직이는 통에 헐거워진 듯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하얀 깁의 끝을 물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눌러 단단히 잡아챘다.
“제가 살펴 드리고 싶군요.”
이제 됐다 싶어 고개를 든 참, 록흔은 아밀에게 손목을 잡혔다. 얼결이라 내치지도 못했다. 유난히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잽싸게 움직였다.
“……!”
아밀은 상처 난 곳을 정확히 찾아 짚었다. 힘껏 눌러대는 통에 록흔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저런, 아직도 혈에 독이 남아 있습니다.”
세사가 지난 자리는 약솜을 채워 막았다. 파상이 덧나지 않도록 약탕을 흠뻑 적셔 넣었지만, 말대로 피는 아직 검었다. 아밀이 사정없이 누르니 사혈이 찌덕찌덕 나왔다.
“의원님, 부디…….”
이설이 갈쌍한 눈으로 부탁하자 아밀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장섰다. 그래서 록흔은 사양도 못하고 어영부영 진료실까지 딸려갔다. 저리 기다리는 이들이 많은데 미안하게도 순서를 제친 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닫힌 문 뒤에서 원성이 솟았다.
“신경 쓰지 마세요. 환자분보다 급한 이는 없으니까요.”
아밀은 이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환부를 펼쳤다. 실뱀이 뚫은 구멍은 썩 굵진 않아도 예사로 볼 크기도 아니었다. 그가 방금 전에 쥐어짜듯 건드려 끈끈한 체액이 느른하게 흘렀다.
“그래도 처음에 제독을 잘해서 잔류양이 많진 않지만…….”
한쪽 벽을 빼곡하게 채운 조그만 서랍들, 그중 하나가 비덕거리며 빠졌다. 그러나 록흔은 독혈을 빨아 주던 사람만 생각했다. 그래서 아밀이 길게 말하는 뒤는 당연히 들리지 않았다.
“오래 두면 위험하지요. 다른 조직의 괴사도 염려되고 말입니다.”
제 살이나 아픈 듯이 이설의 눈이 불투명해졌다. 괜한 걱정을 시키는 것 같았다. 여길 가나 저길 가나 의원들이 보태는 말은 반이 협박조였다. 록흔은 서늘한 눈으로 아밀을 보았다.
“아마도, 맹독을 가진 뱀이었을 테죠. 사미는 몸의 삼할 가까이, 실처럼 가늘고 머리통은 몹시 잔독하게 생긴…….”
이 사내 뭔가? 록흔은 등골이 섬뜩했다. 아밀은 마치 그때 몽림에 있었던 것처럼 세세하게 읊었다. 록흔은 팔을 확 잡아 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곽아밀은 대할수록 수상한 자였다.
“이런 상처 흔치 않을 텐데, 다뤄 본 경험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 몇 번 정도는요.”
아밀이 빙긋 웃었다. 그에겐 의원 특유의 예바름과 차가움이 있었다. 그래서 분명 매끈하고 수려하겐 생겼으나 유리 조각 같기만 했다. 문득문득 한기가 들어 록흔은 콧등을 찡그렸다.
“제 손이 좀 차지요? 갖바치는 맨발로 다니고 직녀는 비단옷 한번 못 걸친다더니……. 의원된 자로 섭생을 허술히 하여 이렇습니다. 이해하시길.”
이상도 하다. 록흔은 혼자 찬찬히 생각했다. 곽아밀에겐 진정한 표정이 없었다. 마치 한 겹 종이 아래의 얼굴 같다 할까? 가려져 불투명한 것. 맞다, 꼭 그랬다.
“보십시오, 여지라고 합니다. 독을 걸러내지요.”
새뜻하게 파르란 종이였다. 아밀은 그 정방형의 끝을 환부에 댔다. 그러자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직각의 귀부터 거무스름하게 변했다. 록흔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저희 곽문에 전해 오는 비방입니다. 조부께서 독에 조예가 깊으셨지요.”
록흔은 환부에서 스며 나온 독기를 바라보았다. 아밀이 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파상의 심각성은 알고도 남았다. 여지는 점점 밤빛처럼 검어졌다.
“몹시 아립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
고통은 즉시 찾아왔다.
지익.
록흔이 어떻든 아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굵게 말은 종이를 뚫린 구멍에 그대로 박아 버렸다.
구욱!
피살이 깎이는 아픔에 록흔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야멸친 손이라 사정도 두지 않았다. 아밀은 부듯하게 차도록 넣고 또 넣었다.
“저는 내일도 은녕에 있습니다. 정 여의치 않으시면 내주 이날에 오셔도 좋고요.”
아밀이 환부에 약물 절은 헝겊을 대고 또 댔다. 그러고 나서 능숙한 솜씨로 부드럽고 성긴 외올 무명베를 거듭 감았다.
“다음에 또 뵙지요.”
록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물 닿는 것도 금물이고요.”
“예, 고맙습니다.”
딱딱한 인사치레에 아밀이 빙긋 웃었다. 가면 하나 둘러쓴 것 같은 얼굴엔 딱히 집어낼 수 없는 표정이 가득했다. 록흔은 이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관상을 좀 보는데…….”
등을 돌리고 걷던 차, 록흔은 뜬금없는 말에 멈칫 서 버렸다. 이설 역시 무슨 말인가 하고 아밀을 보았다.
“환자분 같은 경운 처음이군요. 안개에 싸인 듯, 창호지 한 겹 바른 듯……. 아, 그렇군요. 마치 다른 면피를 쓰고 있는 것 같다 해야 할까요? 쉽게 읽혀지지가 않습니다.”
뭐라고 지껄이는가? 록흔은 이를 으득 물었다. 그러나 그는 속에 들은 것을 그대로 까발릴 애송이가 아니었다.
“선생께 받은 인상과 흡사하군요. 저야말로 관상을 조금 볼 줄 알아서 말입니다.”
받아치는 대답에 아밀의 얼굴이 굳었다. 찰나의 변화나 록흔은 잡아채서 보았다. 분명 놈은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새, 언제 그랬냐는 듯 백면의 의원은 준수하게 웃었다.
“하하, 시간이 되면 깊은 얘기를 나눔직도 하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당금도 저리 많은 환자들이 애타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록흔은 이설을 데리고 진료실을 나왔다. 반짝 웃는 빛이 뒤에서 느껴졌다. 바로 앞에선 사람들이 웅성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송허에서 왔습니다.”
“완주 송허 말입니까?”
“예.”
“멀리서도 오시었소.”
“먼 것이 대수겠습니까? 우리 딸 입만 트이게 된다면 어딘들 못 가려고요.”
록흔은 장사진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들리는 소리마다 예사로이 흘리지 않았다.
“요새 부쩍 목 아픈 환자가 늘었단 말이지.”
“정말요?”
“응. 멀쩡히 잘 나오던 목이 하루아침에 녹슬 듯이 먹통이 되어 버린다잖아. 아, 저기 젊은 처녀도 증세가 그러하고, 저쪽도…….”
참으로 희한한 일. 그런 병도 있었던가? 록흔은 가다 말고 돌아서서 닫힌 문을 보았다. 왜인가? 좀처럼 미심쩍은 마음이 씻기지 않았다. 수상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연호위님……?”
“아니에요, 별거 아닙니다. 그나저나 주객이 전도됐군요. 약 한 제 지어 주려 했건만, 되려 고생만 시키는 것 같습니다.”
록흔이 조금은 툴툴대자 이설이 밝게 웃었다.
“전 괜찮아요.”
“부른 배만큼 피로도 쉬이 오던걸요. 착한 이설, 힘들 땐 티도 내주고 그래야 합니다.”
사람들의 끝, 좀 전의 사환이 기다리고 있었다. 록흔은 머릿속의 수상함은 잠시 접고 이설을 돌아보았다.
“여의라고 하니 안심하고.”
“예.”
“그럼 갈까요?”
이설이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록흔은 하얀 손목 부여잡고 긴 회랑을 걸었다.
***
“칠고랑님! 칠고랑님!”
규방 한가운데, 꽃다운 처녀 예닐곱 명이 모여 있었다. 까만 어둠 속, 여러 쌍의 눈이 곱게 도드라졌다.
“저희들의 간구를 들어주세요.”
그니들은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향해서 머리를 숙이고 또 숙였다.
“칠고랑님…….”
향이란 놈, 꽁무니는 빨갛고 숨은 희부옜다. 매캐한 내가 동그랗게 말린 사람의 원을 휘돌고 지나갔다.
“부디 칠고랑님의 영험을 드러내시어 안주 자현성에 사는 진애주의 신랑감을 보여 주세요.”
고만고만한 무리 속, 한 처녀가 붉은 너울을 쓰고 있었다. 고운 깁은 새색시의 것이었다.
“칠고랑님, 칠고랑님! 저희들의 간구를 들어주세요.”
향을 사르고, 기도를 올리고, 절을 하고……. 동무들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동안, 애주는 붉은 너울 아래서 두 손만 곱게 모으고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재미 반 장난 반으로 시작한 일인데 기도 소리가 높아질수록 그녀 또한 진지해졌다.
“칠고랑님…….”
옥황의 서녀(여러 딸 중의 하나) 칠고랑은 처녀들에겐 인기 많은 신이었다. 정성스런 간구와 미래 남편감의 예시,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 혼기가 가까워진 처녀들은 곧잘 이런 의식을 비밀스럽게 치르곤 했다.
“칠고랑님, 진애주의 신랑감을 보여 주세요.”
“칠고랑님…….”
‘응?’
친구들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하게 들렸다. 잠이 든 건 아닌데 눈앞이 흐릿하고 의식이 몽롱했다. 매운 향 연기 때문에 그런지도……. 애주는 무거운 눈을 잠시 감았다.
‘저건…… 뭐지?’
내리덮인 눈꺼풀 새, 수많은 그림들이 날쌔게 지나갔다. 노란색 기와로 지붕을 인 커다란 집, 사람 머리통만 한 진주를 문 황금용, 문마다 금칠을 한 커다란 전각, 수많은 사람들……. 스치는 장면마다 장엄하고 화려했다.
‘당신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사내였다.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애주는 더 잘 보려 안간힘을 썼다.
“하아!”
눈이 번쩍 떠졌다.
“하아, 하아…….”
막 얼굴이 보이려는 찰나, 모든 게 끊겼다. 칠고랑이 영험을 거뒀는지, 단지 그것뿐이었다.
“얘, 애주야! 왜 그래?”
친구 소명이 애주를 흔들었다.
“으……, 응?”
애주는 흐릿한 눈으로 동무들을 올려다보았다.
“보았니? 정말 보이디?”
“누구야? 잘생겼어?”
하나둘 급하게 물어왔다. 하지만 애주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자신이 본 게 맞는 건지 어쩐 건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얘 좀 봐. 식은땀을 흘린다. 정말 뭘 보긴 봤나 보다, 그치?”
또 다른 동무 지련이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녀는 붉은 너울을 걷고 애주의 차가운 얼굴을 어루만졌다.
“야, 애주야. 어서 이야기해 봐. 궁금해서 미치겠다. 네가 본 게 맞으면 우리도 한 번씩 해보고 싶거든.”
“칠고랑님의 영험이 허명이 아니었다 보다.”
재잘대는 처녀들은 이제 막 열여덟을 넘겼다. 작은 일에도 까르르 웃고 호기심도 많은 나이……. 무엇보다 장래의 남편이 가장 궁금했다. 박꽃처럼 하얀 얼굴들이 그 푸릇한 젊음 때문에 더욱 고왔다.
“그래, 보긴 보았는데……. 내가 맞게 본 걸까?”
애주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나머지 친구들은 조급함으로 자지러졌다.
“얘, 우리 숨넘어가면 이야기해 줄래? 어서 다 털어놔 봐. 칠고랑님께서 무얼 보여주셨어?”
소명의 재촉에 애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금으로 만든 기둥이 여러 개, 사람 머리보다 큰 진주가 군데군데 박힌 천장, 노란색 유약을 바른 기와가 덮여 있는 지붕……. 그런 것들을 보았단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살고 있었어. 그리고 그 사람은…….”
이야기는 느릿하게 시작되어 점점 빨라졌다. 애주가 쏟아 내는 말에 모두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니들의 동무, 진애주는 대단한 것을 본 것이다.
“그 사람, 얼굴은 보지 못했는데……. 황금빛 옷을 입고 있었어. 커다란 용이 그려진…….”
황룡국 전체에서, 아니 이 세계 전부를 통틀어서 그런 옷을 입을 수 있는 자는 단 하나였다. 모두들 망연한 얼굴로 애주만을 보았다.
“왜들 그래?”
“애주야, 너 그러니까…… 혹…….”
소명은 너무 어마어마한 말이라 함부로 내뱉지도 못했다.
“뭐야, 소명아?”
“네가 본 사람이 혹 황제 폐하가 아니냔 말이지.”
뭐든 딱 부러지는 지련이라 제일 먼저 나서서 사태를 수습했다. 그녀의 말에 모두들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런 걸까?”
애주는 넋 나간 이마냥, 멍하게 중얼거렸다.
“얘…….”
“애주야, 너…….”
여기저기서 부러운 한숨이 터졌다. 장래의 남편이 황룡국의 황제라니……. 말은 못해도 강샘이 절로 새어 나왔다.
***
“예, 알았습니다.”
“꼬마, 괜찮으냐?”
“그럼요.”
록흔은 무딘 표정으로 진과를 마주 보았다.
“정말? 뺨이 푸릇한데.”
주북에서 돌아온 게, 어젯밤. 록흔은 지금 제 자신이 몸서리나게 싫었다. 열흘이 아니라 백날을 헤매도 못 찾는 걸 번히 알면서 수하들을 내박쳐 두었다. 이리 못난 자를 상관이라 우러르는 부접들이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다.
“이거야……, 마굴에서 지낸 후론 가끔 이럽니다.”
무심한 말투가 되려 더 신경 쓰였다. 진과는 록흔을 치어다보았다.
“팔이 그래서, 어찌……. 오자마자 일하란 소리만 전해서 면목이 없구나.”
팔은 열흘 전과 같았다. 곽아밀이 여지를 넣어준 뒤, 뾰족한 요치 같은 건 없었다. 록흔은 이젠 붕대만 감긴 팔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아닙니다. 그저, 폐하께서 명하신 일, 끝맺지 못한 것이 송구할 뿐입니다.”
록흔 휘하의 호분위는 곧 움직여야 했다. 장성의 첫 번째 관문 류천관, 그곳에 지금 인월국의 사절이 와 있었다. 여느 사신이 아니라 왕제가 직접 오기에 다른 때보다 더 챙기는 듯했다.
“변변히 쉬지도 못하고.”
“걱정 마십시오.”
록흔은 예바르게 말하며 돌아섰다. 심산하니 진과의 걱정조차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런가?]늦은 밤, 묵직하게 떨어진 음성. 그건 지금도 록흔의 심장을 짓눌렀다.
[내리신 명, 받잡지 못했습니다.] [없다…….]그저 짧은 술어, 그러나 몹시도 아픈 말이었다.
[송괴하옵니다, 폐하.]황제는 더는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그저 물러가라 손짓만 했으나, 록흔은 눈 곁으로 보았다. 속내 같은 건 좀체 비치지 않아 초인으로 여겼는데, 그는 크게 낙담하고 있었다.
‘멀었구나, 아직도.’
록흔은 눈귀를 비틀었다. 한번 무너진 가슴은 쉬이 돋지 않았다. 심란하여 강무관으로 향하는 길마저 몹시도 멀었다.
“연중랑장, 장성엔 지금 선유(뱃놀이)가 한참이라지요?”
“예, 전하. 요즘의 안강은 꽤 볼 만합니다.”
인월의 왕제는 건장한 장년으로 인품 또한 그럴 듯해 보였다. 가늠하기로 막 마흔을 넘겼을까? 이야기하는 것을 꽤나 좋아하는지 아까부터 계속 이런저런 말을 붙여 왔다. 그러나 불쾌치 않아 록흔은 묻는 말에 다복다복 대답했다.
“팔은 어찌하여 그런가요? 썩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조금 다친 겁니다. 전하, 말씀을 좀 낮춰 주시면…….”
황룡의 위성국이나 인월 또한 그리 만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일국의 왕제가 자꾸 공대를 하니 그 품이 높아 보이는 것만큼이나 불편하기도 했다. 행여 기분 상할세라, 록흔은 말끝을 흐렸다.
“하하, 불편한가요? 나는 좋은 사람에겐 막 대하지를 못한답니다. 정히 싫지 않으면 그냥 들어요.”
마치 아버지 같았다. 록흔은 사람 좋은 왕제에게서 그리운 얼굴을 보고 그예 미소 짓고 말았다.
타닥, 타닥!
덜커덕덜커덕!
선위사 이현은 젊은 중랑장을 할긋할긋 보았다. 호분중랑장 연록흔은 급작스런 중용으로 태화성 내에선 꽤나 미움 받는 이였다. 그러나 가깝게 보니 생각보다 밉지 않았다. 상긋이 웃고 겸허히 말하는 것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었다.
포로포롱, 파라랑…….
그 때 난데없이 새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왕제 만혁의 유(임금의 사자가 타는 수레)에서 기인했다. 이현은 뭔가 싶어 고개를 살짝 틀었다. 인월을 상징하는 문양이 빼곡한 휘장 너머, 영묘하게 생긴 날짐승이 사려 앉은 참. 눈보시가 절로 되었다.
포로로로…….
참으로 고운 소리라 듣는 귀가 절로 황홀했다. 이현은 정신없이 비금을 바라보았다.
“이선위사, 왜 그러시오?”
만혁이 상긋방긋 웃었다.
“아니, 그게……. 전하, 기르시는 새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하얀 새는 진정 고왔다. 깃털 하나하나마다 서기가 서려 찬연하기 그지없었다. 은빛 부리는 달처럼 빛나고 금빛 눈동자는 해인 듯 밝았다. 가느다란 목을 길게 빼고 머리를 모로 비튼 모습이 마치 새침한 미희를 보는 듯했다.
“그렇소?”
“예. 비록 견식 짧으나, 이렇듯 영롱한 조성은 들어 본 바 없습니다.”
이현은 감탄을 거듭했다. 미성에 홀려 영접의 임무는 잠시 묻힌 듯싶었다.
“연중랑장께서도 그리 생각하는지요?”
록흔은 눈귀만 실긋 틀었다.
‘응?’
오석 같은 눈동자가 반뜩 빛났다.
“예, 섬려하긴 합니다만.”
단아한 입술이 얇게 펴졌다.
“아가씨 계시기엔 좁지 않은지요?”
의외로운 대답이었다. 저렇듯 작은 샌데 무엇이 협소한가? 게다가 암컷이라? 이현은 데꾼한 눈으로 록흔을 보았다.
“하하, 그런가요?”
“답답하실 것 같습니다.”
“하긴, 성정이 분방하여 갇히는 걸 싫어하긴 하지요.”
“예, 그러실 듯합니다.”
“조심하세요, 그러다 미움 받을지도 몰라요.”
“전하, 그건 사양하렵니다.”
“어쨌거나, 연중랑장께서 눈이 매우 밝군요.”
“많이는 아니옵고, 남들보단 조금 더 봅니다.”
이현은 점점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왕제와 호분중랑장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수레에 들어앉은 건 새 한 마린데 두고 하는 소린 하 수상했다.
포롱포롱!
새가 조잘댔다. 둘 얘기만치나 제 말 하는 게 싫은 듯 소리가 아까보다 거셌다.
“자고로 미인은 앙칼진 맛이 있다더니, 깜냥의 미색이라 성질이 곱지 못하답니다.”
만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나 록흔은 대꾸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파라라랑!
은빛 부리가 앙증맞게 벌어졌다. 만혁이 새소리에 가만 귀를 기울이다가 록흔을 향해 물었다.
“연중랑장, 이 아이가 무슨 색으로 보입니까?”
어인 우문인가? 이현으로선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아가씨는 강옥석 중에서도, 마치 홍옥 같습니다. 그것도 북홍(매우 짙은 붉은 물감)에서 박홍(연붉은 빛깔)까지 다양하게 지녔습니다.”
이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눈처럼 하얘서 은빛으로도 보이는 새였다. 어찌 저걸 붉다 하는가? 엉뚱한 대답임에도 왕제는 빙긋 웃기만 했다. 이현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포로로록!
마치 새와 대화를 하는 듯. 만혁은 한참 듣다 입을 열었다.
“연중랑장은 푸름이 많다 하는군요. 내 보기에도 그렇습니다만.”
“과찬이십니다, 전하.”
참으로 요지경 속. 이현은 이젠 앞만 보았다. 왕제나 호분중랑장이나 괴짜가 분명하니, 저리 에둘러 말하는 것을 신경 쓰다간 제 명에 못 살 터였다.
타랑타랑…….
수레에 휘늘어진 주렴이 드맑았다. 왕제와 새는 흐드러진 빛발 속에 의연히 앉았고, 백색 갑주의 중랑장은 허리 꼿꼿이 세우고 말을 몰았다. 사신의 유를 호위하는 자들은 호분위이요,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수십 대의 수레였다. 바리바리 실은 것은 인월의 보배, 간들간들 올라탄 것은 일군의 미희……. 행렬은 화려하고 장엄했다.
피로로롱!
지저귀는 소리가 모질고도 날카로웠다. 록흔은 눈을 얇게 떴다. 휘장 안, 성질 나쁜 새는 험악스레 부르짖었다.
‘응석받이로군.’
왕제 만혁은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애조를 달래는 모양. 록흔은 피식 웃다가 행렬의 선두로 말을 몰아갔다.
“장령, 집금위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런가?”
이제 태화성까지 두 시진 남았다. 황룡은 대국 중의 대국이라 예로부터 우러름만 받아왔다. 그리하여 주변의 어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도 그저 왔느냐 고개만 끄덕이면 되었다. 왕제가 나섰다 해서 이러하진 않을 터. 록흔은 고비를 좨치며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부중랑장.”
“예, 장령.”
“인월에 대해서 아는 바가 무엇인가?”
“예? 아, 그것은…….”
이야기는 이랬다. 인월의 왕제와 황상은 막역지우, 연배는 달라도 서로간의 우의는 몹시 깊단다.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으나 그러한 연유로 그 나라에선 왕보다 그 아우가 더 세가 크다 했다.
“하지만, 저 역시 이번 행차는 어인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급작스런 방문이라서요.”
록흔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다만 태화성 내에 떠도는 말에 의하면…….”
소곤대는 소리에 연한 눈매가 순식간에 틀어졌다.
“……그런가?”
“예. 듣기론 그렇습니다.”
“흠.”
록흔은 헛기침하듯 숨을 가다듬었다. 머리로는 담담한 사실, 마음으론 참람한 것. 그는 부러 표정을 지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집금위가 바로 목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