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41
연록흔 – 41화
‘봄이어라…….’
처녀마다 입은 색색의 비단옷이 마치 꽃이 잔뜩 핀 봄의 동산 같았다. 록흔은 옆에 앉은 창해도 잠시 잊고 아련히 보았다.
‘곱기도 하구나. 가까이서 보면 더 고울까?’
“저는 하나도 부럽지 않은데요.”
소리 내어 중얼댔는지 창해가 대꾸했다. 록흔은 뜨끔해서 멍한 시선을 바로잡았다. 시치미 뚝 테고 그게 뭐냐 묻는 연빛 눈에 구척 거한의 호방한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황후 간택 같은 거 말입니다. 사랑은 스치듯 지나다 운명처럼 만나는 겁니다. 저렇게 인위적으로 가려 뽑는 것이 아니라……. 하긴 폐하께선 사랑보단 여러 자질을 갖춘 황후감이 우선이시겠지만.”
“그런 말 함부로 말게.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야.”
“폐하께선 말씀입니다, 접두.”
“응?”
“무척 곧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을 누구보다도 가깝게 모실 수 있어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래, 그런 분이시지.”
“하지만 가끔 무척 외롭게 보이시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가, 그게?”
“세상을 짊어진 자는 외로울 수밖에 없지요.”
의외로이 예리한 말에 록흔은 할 말을 잃었다. 왁달박달한 창해라 그리 볼 줄 몰랐다. 허나 뉘한테나 그리 보이는 모양. 독야청청한, 하여 더 외로운 이……. 록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인지 황후 간택이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첫눈에 반해 버린 사랑 같은 걸 폐하께서도 찾으셨으면 하고 말입니다.”
“우리 같은 작은 그릇들이 품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군.”
이쯤해서 끝냈으면 하는 마음에 록흔이 눈귀를 조프리는데 저 아래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그를 올려 보았다.
“접두, 게 계셨습니까?”
“창해 녀석 좀 차 주세요!”
사강과 아진이 번갈아 말했다.
“왜, 무슨 일 있나? 창해가 죽을죄라도 진 모양이군.”
록흔은 번연히 알면서도 농하듯 물었다. 그러자 당장에 ‘접두!’ 하는 창해의 볼멘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아닙니다, 접두. 가만있자니 좀이 쑤셔서, 축국이라도 한판 거나하게 뛰었으면 하는데요.”
유장이 반긋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 기리단의 손에는 꿩 깃이 달린 가죽공 하나가 놓여 있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좋아, 삼 대 삼으로 숫자도 딱 좋고. 접두께선 심판을 봐 주시고.”
창해가 희희낙락해서 외쳤다.
“싫은데.”
록흔이 짧게 잘랐다.
“예?”
“접두, 싫으세요?”
“창해, 너 접두한테 혼났지?”
“이 자식아!”
“그러길래 어지간히 성가셔야!”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져서 위를 보다,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다친 건 팔이고 발은 성하니, 나도 넣어라. 심심해서 병이 날 지경이야.”
록흔이 정색하고 말하자, 창해가 가장 먼저 웃었다.
“예에? 하하하하!”
“접두, 간 떨어질 뻔했습니다.”
일순, 구장이 왁자그르르했다.
“좋습니다, 접두. 단, 팔로 무리하시는 것 같으면 무조건 접두는 제외시키겠습니다. 약속하시죠?”
“좋아.”
록흔도 창해도 높다란 난관에서 뛰어내렸다.
차악!
굵은 삼줄로 엮어 만든 그물이 네 개의 기둥에 매달렸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펄럭이는 그물 새, 파란 하늘이 잗다랗게 조각났다. 모처럼 록흔이 활짝 웃으니 부접들은 마음이 가분해졌다. 그들 모두 근자 들어 수척해진 접두 때문에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었다.
“접두께선 수비든 공격이든 좋을 대로 하십시오. 어느 편을 들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 후회 마라.”
“예, 아무렴요.”
아진이 한 눈으로 빙글거렸다.
“어이, 다 이리 모여 봐.”
부접들이 저들끼리 모여 수군대더니 이마에 띠를 묶었다. 부접안은 청색 띠, 부접수는 홍색 띠, 백호 자수가 좁다란 천마다 정교하게 올라앉았다.
“접두, 이거 죄송해서 어쩝니까? 저희가 먼저 개시를 해서…….”
“이설 아가씨께서 솜씨가 정말 좋으신데요.”
액건은 축국이나 격구를 할 때 편 가르기 용으로 쓰라고 이설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사내들의 너스레에 록흔은 빙긋 웃기만 했다. 뉘가 쓰든 잘만 쓰면 될 터, 그에겐 큰 상관이 없었다.
“뭐, 그거야 이러면 되지. 접두, 팔 이리 주세요.”
하균이 해사하게 웃더니 록흔의 왼손에 띠 두 개를 묶어 버렸다. 이내, 호분위의 하얀 제복 위에서 청홍비단이 어우러져 날았다.
“접두께선 우리 모두의 편이시니까요.”
“사하균, 저놈 머리가 그런대로 쓸 만하단 말이지.”
“하하하, 이제 알았냐?”
사내 여섯이 왁자하게 지껄이는 걸 록흔은 가만 들었다. 이런 소요함이 되려 포근해 적적히 마른 얼굴에 볼우물이 깊게 팼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펑!
커다란 소리가 터졌다. 그리고 꿩의 꽁지깃을 우쭐대며 공이 날았다. 즉시, 일곱의 신형이 날파랍게 그 뒤를 따랐다. 솟구치고 내리고, 올랐다 가라앉고……. 공 차는 이들마다 땅 위는 사양하니, 푸른 잔디에 그림자만 휙휙 슬쳐 지났다.
휘익!
파앙!
“하하하하!”
건강한 소성이 구장을 가득 메웠다. 부접들 속에서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 록흔도 마음껏 웃었다. 모두 즐거우니 그도 즐거워 시름 따위 잠시 접었다. 기꺼우니 묶어 맨 우완도 그리 아픈 줄 몰랐다.
퍼억!
투웅!
모두 경공술이 높은 만큼 공중에서 벌어지는 축국이라고 해야 옳았다. 공 역시 땅 맛 볼 새가 거의 없어, 어어 떨어진다 싶으면 누군가 잽싸게 차올렸다. 공은 속도가 붙어 유성인 듯 혜성인 듯 창공을 잽싸게 긁어댔다.
쓰으으으…….
파앗!
가죽공이 발기매, 푸른 하늘에 투명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타닥!
툭!
타악!
다리끼리 부딪치고 팔끼리 얽혔다. 뉘 할 것 없이 용맹하게 덤비는 모습이 격투라 봐도 좋았다. 구문을 지키는 수망, 공격이 주된 정축과 출첨, 구문 앞에서 수비하는 정협도 작금은 따로 없었다. 그들은 록흔을 곁다리로 끼우고 육인장 축국 대출첨 판을 신나게 벌였다. 저 멀리, 굵다란 대나무를 드높이 세운 구문이 창천을 꿰차고 파르랗게 빛났다.
“자, 받아라!”
“옳아!”
창해가 제 머리로 공을 받아쳤다. 이름하야 앙두괴, 거한의 위력을 그대로 받아 진천뢰인 듯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어이쿠!”
유장이 야들야들한 허리를 크게 틀었다. 무지막지한 놈이 창해라 우군인지 적군인지 당최 구분이 안 갔다. 미부가 손을 까닥대니 공이 저 위에서 통통 튀었다. 이른바, 곤롱이었다.
“유장, 재롱 그만 떨어라!”
사강이 은발을 찬란히 휘날리며 덤벼들었다. 은빛 눈이 번쩍 빛나매, 공이 그에게 옮겨 갔다. 발로 차서 머리에 이고, 다시 무릎에 얹어 돌리다가, 두 발로 주고받아 다시 차올리니……. 이러한 일련의 동작을 정륜이라 했다. 공이 착착 와 감겨 사람과 혼연일체어니, 보는 맛이 있었다.
타앙!
별다른 규칙은 없었다. 구문에 공을 넣으면 득점, 몸의 어느 부위로 공을 다뤄도 무방했다. 단지 축국이라 함은 발로써 공을 주로 다루기 때문이었다.
“접두, 갑니다. 받으세요!”
저만치서 공이 방향을 되게 틀었다. 하균에게서 기인한 것, 평상시의 과묵함이 작금은 없었다. 한창 신명이 오른 판이라 그는 공을 록흔에게 보내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쉬익!
록흔이 공을 받아 발등에 얹었다.
파릿파릿!
속도를 주체 못해 꿩깃이 아롱거리며 휘돌았다.
“접두!”
기리단이 검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피이잉!
공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어허라, 비롱일세!”
사강이 노래하듯 외쳤다. 말마따나 공은 까마득히 높이 올랐다. 꿩은 이미 죽었으되, 놈의 꽁지깃은 구름을 만지고 햇발을 닦았다. 공이란 놈,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접두, 어디로 보내셨습니까?”
“상제님 계신 곳까지 오른 모양인데…….”
피아아악!
공이 무서운 속도로 낙하했다.
터엉!
뚝 떨어진 것을 록흔이 무릎으로 차냈다. 공은 사행하여 구문을 찾아들었다. 이내, 그물이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굵다란 대나무 기둥이 다르르 떨렸다.
“선점이다!”
“얼씨구!”
“좋았어!”
부접안 셋이 환호했다. 그에 록흔이 입귀를 들어 올렸다. 연붉은 입술에 흐뭇한 미소가 연연히 번졌다.
“방심 마라, 이제 막 시작했다!”
아진이 높이 날아올라 그물을 발로 찼다. 그러자 공이 창천으로 치솟았다. 즉시, 구척장신 창해가 움직였다. 거한은 아름드리 기둥을 발로 차고 도약해 떨어지는 공을 받아쳤다.
“이봐, 창해. 나한테 보내!”
유장이 크게 외쳤다. 창해가 씩 웃더니 부르는 쪽으로 공을 차냈다. 또 유장은 받은 걸 아진에게 돌렸다.
“뉘냐, 입으로 공 다루는 놈이!”
전광석화! ‘어!’ 하는 순간에 사강이 공을 빼앗았다. 호분위답게 몸놀림이 비호인 듯 날랬다. 그를 따라 청건이 휘날렸다.
파악!
텅!
록흔은 여유롭게 공을 쫓았다. 사생결단 낼 일은 물론 아니거니와, 즐거움이 무엇보다 커 눈귀가 절로 말랑해졌다. 바람이 이매, 호분중랑장복이 가는 몸피에 설백빛으로 휘감겼다. 모두가 걱정하는 걸 번히 알아 되도록 살살 움직였다. 모두 신기에 가깝게 공을 차내는 걸, 그는 반쯤은 구경꾼의 입장으로 지켜보았다. 깃 달린 공이 바삐 오가니, 점수는 막상막하로 치올랐다.
팔락!
찰나, 록흔이 손목에 묶은 띠가 풀렸다. 유독 푸른 천만 바람에 되게 휘둘려 저 아래로 떨어졌다. 부지불식간, 그는 액건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일순, 다친 팔이 독하게 욱신댔다. 찌릿하던 것이 짜르르하니 균형을 잃는 건 순간이었다.
“접두!”
부접들이 외쳐 불러도 위기감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왜일까? 몸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데도 생각 역시 없었다. 저 짓푸른 천은 어디로 가건데……. 록흔은 그저 멍하니 읊조렸다. 그는 흐르는 흰빛으로 곤두박질쳤다.
탁!
부접들이 손을 쓰기 전, 뉘인가 날파랍게 달려들었다.
‘응?’
푸른빛, 금빛……. 눈앞이 몹시 어지러웠다. 록흔은 정신을 수습할 새도 없이 이젠 귀에 붙박이 된 음성을 들었다.
“이걸 쫓았나?”
가륜이 손에 쥔 것은 푸른 띠였다.
“어설픈 녀석 같으니.”
넓고 다슨 품이었다. 어깨를 옥죄듯 감싼 팔은 차마 뿌리치지 못할 만큼 강했다. 록흔은 아득한 눈으로 어룽어룽 번지는 금빛을 보았다.
“폐하?”
속삭임은 미풍인 듯 약하고 안개인 듯 연했다.
“저, 저는…….”
좁다란 천 하나가 무엇이관데 홀린 듯 보았을까? 저것 아니면 이리될 일도 없었건만. 록흔은 가륜에게서 벗어나려 어깨를 틀었다. 부러 힘을 주니 다친 팔이 지르르 당겼다.
“험히 상해도 제 몸 돌볼 줄을 모르는군.”
“제 행동, 그저 괴란하니…….”
록흔이 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 새, 부접 모두 황망히 구장으로 내려섰다.
“폐하를 뵈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부접이 머리를 납작 조아리니, 가륜이 비로소 땅을 밟고 섰다. 여전히 록흔을 품에 안은 채였다.
“낯꽃이 푸릇하더니, 살 만한가?”
분명 빈정대는 말툰데 외려 다사하게 들렸다.
“예. 미천한 몸이라 이리 움직이는 게 더 낫습니다.”
그러니 이것 좀 놔주십시오……. 록흔은 맑진 눈에 희구를 가득 담아 가륜을 올려 보았다. 일순, 어깨와 허리가 더 강하게 압박됐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는 옆으로 놓여났다.
“어떠냐, 팔선과해는?”
록흔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창휘루에 계실 분이 여긴 어인 일이시냐 묻기조차 난감한데, 저건 또 무슨 하문인가? 곧이곧대로 해석해야 옳은지 그는 잠시 생각했다.
“폐하, 저희야 큰 광영이옵니다.”
사강이 곁눈질을 하더니 록흔 대신 나섰다.
“청은 내게 넘어왔고 홍은 네게 있으니, 편 가름은 자연스레 됐나?”
모두 어리벙벙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개중 가장 넉살이 좋은 창해가 록흔을 얼른 잡아끌었다.
“예, 폐하. 접두는 저희가 모셔 갑니다.”
짙붉은 띠가 록흔의 하얀 손목에서 하느작거렸다.
“좋다. 상하 없이 임한다.”
가륜이 제 손목에 푸른 띠를 묶었다. 청홍의 띠가 펄럭이매, 부접들이 굽힌 몸을 펴고 일어섰다.
“한수 배웁니다, 폐하.”
록흔은 공수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곱게 다물린 입술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 딱딱함에 창해는 뭔 일이랴 싶어 할긋할긋 보았다. 세상 둘도 없는 그의 접두는 왠지 평소와 같지 않았다.
“무진, 가림은 네가 해라.”
“예, 폐하.”
록흔은 그제야 우중랑장 설무진이 곁에 있다는 걸 알았다. 혼이 잠시 나갔던 모양, 그는 제 허술함에 눈귀를 바짝 조프렸다.
“그럼, 선을…….”
무진이 공을 들고 물었다.
“폐하께서 먼저 하십시오.”
“아니다. 하던 대로 잇자.”
록흔이 권하니, 가륜이 곧바로 받아쳤다. 사양하며 싱긋 웃는 눈매가 진정 즐거워 보였다.
“예, 폐하.”
록흔이 공을 받아 높이 차올렸다. 동그란 것이 불끈 치솟아 해인 양 하늘에 동실 떴다.
투웅!
차악!
팔인장 축국, 팔선과해. 신선 여덟이 푸른 바다를 누비듯, 가륜을 위시한 부접들이 구장 위를 내달았다. 호걸들이 가죽공을 희롱하니, 푸른 잔디 위에 매운바람이 불었다.
“이쪽이다, 한눈팔지 마라.”
“예, 폐하!”
가륜이 껴들자마자 판도가 달라졌다. 속도는 더 빠르고 힘은 더 강해 공에 매달린 꿩깃조차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맞으면 크게 다칠 터. 그러나 그 뉘도 개의치 않고 기껍게 공을 받아쳤다. 외려 박진감이 넘쳐 축국 할 만했다.
샤아아악!
출럭!
그물을 찢을 듯, 공이 구문을 뚫었다. 그 때 우레 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분명 구장 안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저 위, 석조난관마다 어전시위들이 빼곡했다.
“맥없긴.”
가륜이 픽 웃었다.
“한쪽 날개라도 꺾였느냐?”
록흔은 이를 사리물었다. 불쑥 끼어들어 아픈 속을 하작대더니, 이젠 숫제 빈정댄다. 바라는 게 말이라면 그리 행하면 될 터. 그는 견대를 바투 조였다.
“감히 날개라 칭할 건 못 되옵고.”
가륜이 눈귀를 바짝 좁혔다. 뭐라 대드느냐 묻는 듯해 록흔은 더 어긋지게 나갔다.
“그저 하찮은 게 조금 상했습니다. 그럭저럭 지루한 판은 되지 않도록, 바동대 보겠나이다.”
록흔이 혀를 날카롭게 세우는 동안, 사강이 공을 구문에 앉혔다. 어느덧 구장 주변의 높다란 난관에 머리통이 수없이 보태졌다. 뉜가 황상께서 친히 축국 하신다 전했을 터. 여인이든 사내든 이도저도 아닌 중관(환관)이든 바글바글 모였다. 눈을 크게 뜨고 공을 쫓느라 저마다 바빴다.
“폐하, 건승하시어요!”
소단이었다. 그 옆에서 소현이 흰 눈을 치떴다. 월한도 알게 모르게 인월의 옹주를 할겨 보았다. 별것도 아닌 주제에 스스럼없이 나서는 게 몹시 얄밉상스러웠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여기서 옥작옥작, 저기서 복작복작……. 강무관이 유례없이 들끓었다. 잔뜩 고조된 군중은 오직 황제를 소리 높여 불렀다.
“그래, 연록흔. 맘껏 바동대 봐라.”
가륜이 볕처럼 웃더니, 오른팔을 등 뒤로 돌려 붙였다. 어언간 록흔은 눈귀를 붉혔다. 어연번듯한 사내다움에 멀쩡한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연심은 항시 저 밑바닥에 그윽이 고여 말리려도 수이 말리지 못했다. 록흔은 말 대신 고개만 깊다랗게 숙였다.
“접두, 갑니다! 받으세요.”
아진이 기세 좋게 외쳤다.
터엉!
두르르르르…….
공이 부접안 쪽의 구문 기둥을 치고 반대편으로 날았다.
“와아아아아!”
록흔이 뒤도 보지 않고 발꿈치로 쳐내니 신묘한 솜씨에 환성이 드높아졌다. 옹골차게 볼록한 공이 치솟으매, 구장이 왁자그르르 무너졌다. 여심도 같이 노글노글 물러지니, 어린 궁인들은 흰빛으로 휘감은 젊은 중랑장을 범상치 않게 보았다. 저 위, 좀복숭아 같은 얼굴들이 발그레 고왔다.
차앙!
공이 앓았다, 동그란 형체가 길쭉해질 지경. 가륜이 쳐내니 질긴 가죽도 견뎌 내질 못했다. 여전히 오른손은 뒤로 돌린 채, 그는 그렇게 록흔을 내리눌렀다.
퉁!
타악!
투우웅!
가륜도 록흔도 좌수로써 맞섰다. 공은 이미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고, 둘은 서로를 쫓았다. 쳐내고 찍어 누르고, 비틀고 뒤틀고……. 나붓대는 꿩깃인 양 인영끼리 휘어들었다.
“제법 바동댄다.”
안검 안의 검, 가륜이 피 없이 록흔을 벴다.
“어지간히 즐거우신지요, 폐하?”
심장이 설큰설큰 베여도 겉은 독하게 멀쩡하니, 록흔은 그리 야물게 물었다.
“아직…….”
가륜이 왼손으로 바람을 휘어잡았다. 일순, 구장의 잔디가 한 방향으로 누웠다. 이어, 구경하는 이들의 옷자락이 되게 휩쓸렸다. 그러나 정작 용포엔 미동조차 없었다.
“이봐!”
“어?”
유장이 부르는 소리에 기리단은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발 위에 얹었던 공이 어디로 갔을까? 그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크게 꺾었다. 과연, 바람 끝에 황제가 있었다.
“멀었다.”
공이 목전에 떨어졌다. 록흔은 가륜을 응시했다. 미어(수수께끼) 놀이를 하자는 것인가? 황제는 그냥 하는 말일 테지만 숨은 뼈가 있는 것 같아 그로선 마음이 편치 않았다.
휘이익!
공은 둘 사이에서 회오리바람인 양 거칠게 맴돌았다. 그 기세에 두 옷자락이 황백으로 섞였다.
펑!
정륜으로, 비롱으로……. 록흔은 공만 상대했다. 지금으로썬 통통 튀는 저것이 그래도 제일 만만해 눈에 심을 박고 보았다. 곁에 선 이야 괜히 잘못 건드리면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아…….”
비록 기골장대하지 않아도 늘품 있게 날렵한 모습에 여인들이 한 숨을 내쉬었다.
“창해, 간다!”
록흔이 공을 거한 쪽으로 차냈다.
“예, 접두!”
구척 거한이 공으로 달려드는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어?”
“저런!”
뉘가 소리치고, 뉘가 감탄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일은 그저 찰나에 벌어졌다. 뉘 발부린지, 공이 까마득히 높은 창공으로 올랐다. 어언간, 공을 뺏긴 창해가 아래턱이 빠진 사람 모양 입만 크게 벌렸다. 누군가 왔다는 기척조차 없었는데, 공은 이미 저만치 멀어졌다. 그는 날파란 궤적을 따라 고개를 크게 꺾었다.
“폐하!”
거한의 뱃구레에서 커다란 소리가 꿰져 나왔다. 구장에 모인 하많은 시선이 일제히 그 소리를 따라 쏠렸다. 아름드리 솟은 높직한 기둥 끝, 황룡의 하늘이 있었다.
“주랴?”
참으로 놀라운 일. 용음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공이 허공에서 딱 멈춰 섰다. 돌지도 튕기지도 아니하고 못이라도 박은 듯 꼼짝도 안 했다. 소리도 모두 깨뜨려져 적막만 가라앉았다.
탓, 파랏!
바람이 하얗게 일었다. 정체가 무엇이든 사람들은 그리 보았다.
“오오오!”
구문의 다른 기둥 위, 록흔이 가륜을 마주 보고 섰다.
파락파락!
모두 숨을 죽여 천끼리 부대끼는 작은 소리도 크게 돋았다. 저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조마조마한데, 무언가 밑으로 뚝 떨어졌다. 그러나 누가 보든 황제와 호분중랑장은 칼금 닮은 눈으로 서로만을 보았다.
투어엉!
공이 터질 듯 차였다. 꿩깃이 산산이 조각났다.
타앙!
록흔은 그 모진 힘을 수장(손바닥)으로 받아 냈다. 손샅이 금세 벌게졌다.
챠아악!
공이란 놈, 가륜에게 동그란 머리통이 되게 깨졌다. 거죽이 죽 째져 속이 드러날 판, 저 지경이면 바람은 시나브로 샐 터였다. 그는 씩 웃으며 용포의 자락을 한쪽으로 걷었다. 부접들은 이미 한쪽으로 몸을 사린 뒤였다. 아까와는 힘이 확실히 달라, 작정하고 피하는 게 그저 상책이었다. 이제 판은 이인장 백타였다.
두엉!
발에 닿는 팽팽함이 사뭇 줄었다. 소리 역시 조금 둔하고 낮았다. 록흔은 헐거운 듯한 구체를 힘껏 차올렸다. 제 힘이 헤진 우완을 후벼 파도 이 악물고 높직이 보냈다. 올랐던 것은 언젠가는 떨어지는 법, 공이 다시 강하했다. 그가 받아치려 무릎을 든 순간, 다른 이의 발이 얽혀 들어왔다. 사위스럽게도 분명 황제였다.
탁!
타악!
툭!
투욱!
흰 소매가 춤추듯 파사하게 나부끼니, 금빛 소매가 바로 엉겨 들어왔다. 손끝이 부딪치고, 발과 발이 엇갈렸다. 첨예한 백타,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한 치도 주저하지 않았다. 보는 이는 소마소마 불안한데, 막상 본인들끼린 아무런 내색도 안 했다. 아래서 우러르기에 외려 황제는 즐거운 듯싶었다.
“……?”
록흔은 눈귀를 급히 들었다. 방금, 들은 것. 또 다른 환청인가? 그 때, 가륜이 한 발 더 깊숙이 움직였다. 피할 새도 없이 록흔은 손목을 잡혔다. 그리고 사늘한 시선을 머리 위에서 느꼈다.
파아악!
창공이 땅이라면 깊게 팼을 터. 가륜이 차내니 공이 분출하듯 나아갔다. 멀리 날수록 나달해져 매끈한 몸피에 가뭄 끝 논바닥마냥 쩍쩍 균열이 생겼다.
“어어어!”
구문은 저쪽인데 공이 애먼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에 황제의 면전이나 그런 소리들이 절로 나왔다.
“아앗!”
“이럴 수가!”
황제께서 헛치셨구나 싶어 모두 고개를 저었을 때, 공이 몸을 되게 틀었다. 저건 원광괴, 그러나 처음부터 커다랗게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휘며 나아가는 보통의 것과는 달랐다. 공은 구문 있는 방향과 비켜나도 한참 비켜난 곳을 향해 직선으로 무섭게 뻗다가, 갑자기 진로를 툭 꺾어 구문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처얼럭!
두르르르!
파앙!
구문의 기둥이 휘청대고, 이어 그물이 찢겼다. 그리고 공이 폭발하다시피 터져 버렸다. 일순, 소리란 단 한 알갱이도 없이 구장은 고즈넉했다.
“못 쓰게 된 건가.”
머리 위에서 가륜이 말했다. 그는 무섭도록 가까이 있었다. 록흔은 잔뜩 굳은 얼굴로 중의를 파악하려 애썼다. 형체 없이 바숴진 공을 두고 하는 말인지, 저분께 억세게 잡힌 팔을 가리키는 것인지……. 머릿속이 마구 엉켰다.
“와아아아아!”
하늘을 쨀 듯, 땅을 엎을 듯, 함성 소리로 구장이 절절 끓었다. 꿈에서 깨난 듯, 구장 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모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록흔에겐 무음이었다.
“어찌 생각하나?”
삼각으로 접은 견대 위, 붉은 점이 점점 커졌다. 가륜이 비비는 대로 얼룩은 더욱 선명하게 볼가졌다. 그는 느긋이 보았다. 악력을 가할수록 어린 중랑장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극도로 인내하며 삭이는 아픔이래도 그로선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아닙니다, 폐하. 쓸 만합니다.”
그 뉘가 뭐래도 저는 사내였다. 록흔은 말을 마치고 입귀를 오달지게 틀었다. 하얀 무명이 새뜻하게 붉어져도 이 앞에서 물러설 순 없었다.
“폐하, 이쯤해서 마무리를 지심이…….”
무진이 가로막고 들어왔다. 한참 전, 구장에 붉은 방울이 돋을 때부터 그는 빠짐없이 보았다. 고집통이 연록흔은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저희가 졌습니다, 폐하.”
록흔이 고개 숙여 말했다. 이내 부접들도 가륜을 향해 커다란 몸을 우그렸다. 비로소 승패가 가름이 났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구장 밖, 함성은 커닿고 열기는 뜨거웠다.
“황제 폐하, 만세!”
헌거롭고 수려하게 잘난 황상이라 어디에 있든 특출하게 돋았다. 입귀를 비틀고 어긋지게 웃어도 분명 미소려니, 궁인 몇몇은 맥없이 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