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54
연록흔 – 54화
똑.
또옥.
뉘에게서 돋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산호의 물에 흠뻑 젖은 상태였으니. 록흔은 바스러지도록 안겨 잠시 헛된 꿈을 꾸었다. 목덜미를 움켜쥔 손이, 허리를 둘러 안은 팔이, 이토록 강하게 뛰는 더운 심장이, 다만 임의 것이기를……. 짙은 어둠만큼 이성 또한 가리어졌다. 저도 모르게 건 망각이라 낯선 입술은 낯설지만도 않았다. 입맞춤이 깊다래질수록 고운 눈귀만 애참하게 젖어들었다.
“작약을 취하고.”
아랫입술을 빨리고, 입 안 수줍은 살까지 앗기고, 호흡 한 자락도 이미 제 것이 아니었을 때, 록흔은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귓불에서 지분대는 이는 임이 아니었다. 분명 왕산청이었다. 순간, 낮게 가라앉은 심장이 높이 치솟았다.
“이, 무슨……. 이것 놓아…….”
록흔은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더 강도 높은 구속이었다. 그나마 온전한 팔을 억세게 짓눌리고, 목은 꺾이도록 뒤로 젖혀졌다.
“싫은데.”
“젠장…… 왕산청!”
마도굴 이후로 록흔이 마음 칼을 세웠을 경우, 뉘라도 그를 제압하지 못했다. 너른 강호라도 스스로 벼리고 세웠으니 제 몸 하나는 능히 지켜낼 수 있다 자신해 왔다. 물론 단 하나 있으나, 지키려는 마음이 커 대적의 상대로는 아예 생각치도 않았다. 하지만 왕산청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이대로 억눌려 목 꺾인 꽃인 양 대롱거릴 수만은 없었다.
“외숙이라 칭하며, 제법 귀엽게 굴더니만.”
“별말씀을!”
지금 록흔에게 자유로운 것은 다쳐 싸맨 오른손뿐이었다. 등 뒤로 돌려진 왼팔은 있으나마나, 두 발은 가분히 들려 달랑거렸다. 산청이 이 정도인지 미처 몰랐다는 것은 어쭙잖은 핑계거리일 뿐, 그는 작금의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왜, 계집에게도 빼앗긴 것이 아깝더냐?”
입술 위에서 산청이 지분댔다. 낮게 긁어 말하는 소리가 록흔을 전율케 했다. 엽소단을 이르는 말인가? 어찌 보았을까? 록흔은 아미를 깊게 찡그렸다.
“겹겹이 에워싸도 보일 건 다 보이더군.”
보얀 귓불 위, 매끄럽게 그어진 것은 능욕이라 해야 옳았다. 산청은 설단으로써 록흔을 희롱했다.
“뉘나 탐내는 것…….”
산청이 이죽대는 동안, 록흔은 오른 어깨를 크게 비틀었다. 앞으로 영영 팔을 못 써도 좋았다. 이 순간의 굴욕과 맞바꾸고자 하노라면, 뭐든 못 내줄까 싶었다. 그는 이를 아득 물고 묶인 것을 맵차게 떨어냈다. 노희구란 건 이후로 쓰지 않았던 것이 일시에 놓여났다.
티욱!
그간 굳었는지 팔목이 뻣뻣했다. 조금 움직이니 혀끝이 오그라지게 아팠다. 그러나 록흔은 이만 자그시 물고 참았다.
“그만한 값어치가 있군.”
손끝이 다르르 떨렸다. 입술 끝도 바르르 떨렸다. 산청이 거푸 입술을 겹쳤다.
“흐읍…….”
산청이 삼킨 것, 록흔은 어서 되찾고 싶었다. 입술에 뜨겁게 와 닿는 이질감이 그의 모든 신경을 태웠다. 이건 필시 불쾌감이다, 그렇게 미친 듯 되뇌고 또 되뇄다. 하지만 설레발치는 눈썹 끝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만…….”
입술 위의 입술, 입술 안의 입술. 어느 것이 뉘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
록흔은 불명료한 소리로 산청을 밀쳐냈다. 그 와중에도 우수는 조금씩 움직였다.
“정절이라도 지키려는가?”
“천만……, 에…….”
빠득!
뭔가 바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록흔은 제 손끝에 모질게 힘을 주었다. 그악스럽게 구는 통에 팔목이 억지로 꺾였다. 이어 어깨가 간신히 들렸다. 어찌됐든 다 상관없었다. 다만, 그는 산청의 어깻죽지만 바듯하게 부여잡았다.
“나는…….”
잘 익은 석류마냥 붉은 입술이 버긋지게 열렸다. 완벽한 암흑 속에서 록흔은 산청을 올곧게 응시했다. 가늘어진 눈이 첨예하게 반득댔다.
쿠욱!
록흔은 다섯 손가락에 모든 힘을 실었다. 노리고 들어간 것은 산청의 견정혈, 그는 목적한 곳을 맵차게 눌렀다. 엄지로 혈을 짚고 나머지 네 수지로 겨드랑이를 사정없이 그러잡아 비틀었다. 일시에 허리를 둘러 안은 악력이 조금 약해졌다. 그리고 두 발이 땅에 닿았다.
“큭.”
아픈 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산청이 입귀를 비틀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다만 그렇다 여길 뿐. 록흔은 자세를 바로 하고 무릎을 들어 올렸다.
탁!
복사뼈 바깥, 구허혈. 록흔은 발끝에서 뇌전을 느꼈다. 가격한 자가 그러하니 가격당한 이 또한 말할 것이 없을 터. 찰나, 산청이 제자리에 우뚝 굳어 섰다. 두 사람 새, 검은 바람을 맞아 나슬나슬 풀린 붕대가 험하게 팔락거렸다.
“내 것일 뿐, 뉘에게 속한 바 바이없으니.”
록흔이 내뱉은 말 끝, 공기가 위험스럽게 깨졌다. 산청이 몸을 날파랍게 틀었다.
“정녕 그러하냐?”
보일 리도 없건만 록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탁!
타악!
산청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검지와 중지로, 수도로, 야멸치게 록흔을 좨치었다. 칼과 같고 창과 같아 날캄하게 요혈마다 찌르고 들어오니 매 수가 위기였다. 록흔이 쳐내면 산청이 즉시 다른 곳을 노리니 둘의 팔다리가 섬전처럼 빠르게 얽혔다가 풀렸다.
“과연 호분중랑장답군.”
록흔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빛이 별로 없었던 마도굴에서처럼 그는 시각을 잠시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네 가지 감으로 산청의 공격을 쳐냈다.
“혈맥으로 올라앉은 자린 아니니까.”
그다지 손속이 악랄하지는 않았다. 대혈은 건드리지 않고, 소혈만 노렸으므로. 그러나 록흔은 산청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청쟁은 실컷 봤으니 아쉽지 않다만.”
호흡이 얽히는 틈, 그 짧은 찰나에 산청이 속삭였다. 보드랍기 그지없어서 가만 서서 하는 것과 같았다. 록흔은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 떴다.
티욱!
내간혈, 팔오금과 팔목 사이 정중앙. 오른팔에 놓인 요혈이 잔독하게 당했다. 송곳이라도 박아 넣은 듯해, 록흔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나 산청이 아픈 티를 내지 않은 것처럼 그 역시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래서 네가 좋은 거다.”
“바란 바 없습니다.”
터엉!
턱!
힘과 힘이 부딪쳤다.
“다친 팔로 무리하는군.”
산청의 말과 동시에 록흔이 무릎을 접었다. 극심한 통증으로 단정한 입술선이 흐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겁략이 이어졌다.
“공평치 않다만.”
되찾은 것은 다시 앗겨, 록흔은 제 입술을 덮는 사내의 내음에 진저리를 쳤다.
“네가 탐나는 꽃이어서 그러려니 해라.”
산청의 혀끝에서 녹아난 말은 록흔을 잠식해 들어갔다. 생각도 움직임도 용이하지 않으니, 그는 애꿎은 눈귀만 비틀었다. 강건한 어깨를 틀어쥐고 밀쳐냈으나, 상대는 태산인 듯 버티고 섰을 뿐이다.
“그만…….”
“이건 양에 안 차.”
입속 소리나 분명히 들렸다. 록흔은 몸이 왜 이렇게 까라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꾸만 밑으로 늘어져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작금 왼손이 놓인 곳은 단단하고 넓은 가슴, 그는 유중혈을 깊다랗게 짚었다. 분명 타격이 클 텐데도 산청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꾹.
록흔에게 되돌아온 것은 피내였다. 아프게 깨물린 자리에서 붉은 방울이 돋았다.
“아…….”
신음은 얇으나 그 소리는 충분히 애참했다.
“연록흔.”
깊게 씹힌 자리를 산청이 혀로 더듬었다. 비릿한 쇳내가 타액에 섞여 그에게 넘어갔다. 록흔은 부푼 입술 끝으로 제 것이 아닌 체온을 느꼈다.
“무슨 수를 써도 지금은 무리다. 처음부터 공평치 않은 싸움이었거든.”
그들 머리 위가 점차 밝게 깨졌다. 쟁의 공간이 사라져 밖의 햇발이 스미는 듯싶었다. 조프린 눈시울 새, 록흔은 흐릿한 하늘을 보았다. 그건 무거운 잿빛이었다.
“얻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
산청의 목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렸다. 록흔은 눈을 바로 뜨려 애썼다. 그러나 계속해서 시야는 어둑하게 변했다. 그것은 방금 전의 암흑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비굴함도, 교활함도, 불공정함도.”
밖에서 스민 눈발 하나가 팔랑거리며 날았다.
“문제되지 않는다.”
산청의 속삼임은 먼뎃말 같았다. 귀가 멍멍한 가운데, 록흔은 몸 안의 진기를 끌어냈다. 그리고 역으로 입술에 실은 힘은 풀었다. 봄바람인 듯 살포시, 산청의 입술을 나긋하게 핥았다. 즉시 반대급부로 그를 짓누르던 강압적인 힘이 조금 나슨해졌다.
사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있었다. 까마득한 천공은 점점 더 밝아지는데, 암흑 속의 그림자 둘은 깊게 포개진 채였다.
“맘을 바꿨나?”
산청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도톰하게 부푼 록흔의 입술을 달금하게 핥았다.
“그것보다는.”
왼손은 산청의 가슴에 놓은 채, 록흔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조금은 습했다. 되려 산청이 시선을 내렸다. 다시 한 번 곱다란 붉음을 탐하고자 함이었다.
샤아아아앙!
일순, 상량한 기운이 사방을 쳐냈다. 진원지는 록흔의 좌수, 산청의 온몸이 다르르 울렸다. 그리고 빛이 폭발했다. 둘의 인영이 십여 보 간격으로 떨어졌다.
“전략을 바꿨습니다.”
록흔이 차게 끊어 말하는데 산청이 맵차게 돌아섰다. 그건 참으로 의외로운 반응이었다. 지금껏 펼친 기량으로 보건대, 산청이 이 정도의 발경으로 꼬리를 사릴 위인은 아니었으므로. 록흔은 메마른 눈으로 산청을 보았다. 시나브로 밝아진 시야라 이젠 그 뒷모습이 확연히 들어왔다.
“동천이 깨지는군.”
이제 쟁의 공간이란 것은 거의 껍질이 까졌다. 빛이 작렬하매, 얼어붙은 하늘이 떨어져 발치에 하얗게 쌓였다. 산청의 속삼임이 삭풍을 따라 록흔에게 흘러왔다.
“도망가는 겁니까?”
등을 보인 상대를 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런즉슨, 록흔은 잠시 손을 거뒀다.
“좋을 대로 생각해라.”
산청이 싱긋 웃고 있었다. 록흔은 돌아선 이의 입술을 그리 읽었다. 보이지는 않으나, 치올린 입귀가 눈앞인 듯 선연했다.
“또 보자, 연록흔.”
파앗!
광화(아름다운 빛)가 찬연하게 일었다. 부신 빛에 눈이 멀 지경, 록흔은 눈귀를 일그러뜨렸다. 커다란 빛에 산청이 뚜렷하게 도드라졌다. 옆태가 보이려는 찰나, 쟁의 공간이 완벽하게 바숴져 무너졌다. 그리고 인영 하나가 흔적도 없이 바랬다.
얇은 비단 장막 너머, 가륜이 있었다. 그리고 탁자를 사이에 두고 오른편에는 무진이, 왼편에는 진과가, 맞은편에는 누군가가 등을 돌리고 앉았다. 동떨어진 자리에 오롯이 앉은 참, 록흔은 기다리기가 지루해서 백자 접시에 새뜻하게 놓인 과실편을 젓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연홍빛 오미자편, 금빛 유자편, 진홍빛 앵두편, 선홍빛 산딸기편……. 과육을 삶아 설당으로 굳혀 낸 것으로 입맛 돋우는 데 예부터 이만한 게 없다 했다. 그러나 생김부터가 몹시 달아 보여 그로서는 선뜩 손이 가지 않았다.
달각.
호분위국에 들러서 보고할 문서를 꾸미고 부접들에게 한바탕 걱정을 듣다가 온 길, 록흔은 젓가락으로 과일묵을 톡톡 쳐댔다. 금세, 살빛 고운 것들이 말랑말랑 졸깃졸깃 와 감겼다. 불투명한 반고체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다가 또 찰람찰람 흔들리는 게 꽤나 어여뻤다.
“연중랑장님, 화찹니다.”
“예, 고맙습니다.”
간간이 들리는 바로 화제는 록흔이 태화성에서 잠시 벗어난 새에 있었던 일들이었다. 등을 보이고 앉은 자가 누군지 궁금해 하던 차, 그는 반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차 시중드는 궁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신이 직접 잔을 건넸다.
“봉오리가 곱군요.”
“예, 섣달 뒤 반만 핀 것을 대칼(죽도)로 따서 꿀에 재워 둔 겁니다. 향이 일품이지요.”
하신이 웃으니 백설 같은 눈썹이 부드럽게 휘었다.
“눈서리 잊고, 호천(여름하늘)가에 맺힌…….”
록흔은 저도 몰래 나직하게 읊조렸다. 연한 입귀에 미소가 얇게 묻었다.
“하시는 말씀마다 바로 시구로 떨어집니다.”
하신이 칭예하는데, 록흔은 그 순간 호중설을 생각했다. 겉은 하얗고 보송보송하나, 실상 그 속은 붉고 끈적거리는……. 고운 눈이 어느새 사다리꼴로 변했다.
동.
밀중매, 황금빛 꿀 안에 담긴 매화는 대개 봉오리째 끓는 물에 타서 냈다. 아직은 반쯤 개화한 상태, 옥색 다관 안에 수십 송이가 조롱조롱 사이좋게 들어찼다. 록흔은 두어 송이 건져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꽃잎이 설백빛에 가깝고 수줍은 연홍빛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연중랑장님, 여기 빙수가…….”
하신의 손짓에 궁녀가 유리잔을 조신하게 내밀었다. 주둥이가 넉넉하고 품이 깊은 것이 보통의 다기보다는 훨씬 커다랬다. 몹시 투명하나 록흔이 두 손으로 감싸 쥐니 연록빛이 비춰 돌았다. 물은 손끝이 저릴 만큼 차가워 뒤로 두고 온 은상의 백설인 듯싶었다.
“이것 또한 꽃차를 즐기는 이들이 아끼는 것입지요.”
“만첩홍매로군요.”
얼음이 담겨 차가운 유리잔에 붉은 봉오리가 하나 똑 떨어졌다. 물에 풀려 겹겹이 싸인 꽃잎이 열리매, 선홍빛 꽃물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왔다. 노란 진주가 영근 수술들이 활짝 펴지니, 그 안에 숨은 향이 찻물에 고스란히 배였다.
“청정한 숲에서 따 올린 것이라 색이 더 곱습니다.”
록흔은 그간 소소한 재미나 아기자기한 맛 따위는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작금 꿀 속에 잠들었다가 얼음물에서 다시 피는 홍매를 보노라니 이런 것 또한 제법 기꺼운 듯싶었다. 그는 파리반비(유리 숟가락)로 차분차분 열리는 꽃송이를 살짝살짝 건드렸다. 흰 봉오리도 곱고 붉은 봉오리도 고우니 하얀 볼에 우물이 깊게 팼다.
“같이 하셔도 좋으련만…….”
하신이 비단 휘장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이공공. 제가 껴들 자리가 아닌 듯합니다만. 폐하께서 부르셔서 왔으니 신하된 자로서 기다리는 수밖에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록흔은 낯선 손이 정말 궁금했다. 뒤태만 보아도 태화성 내에서 본 적 없는 이라는데 은자 오백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저들끼리는 구면인 듯, 아니 두 중랑장의 태도로 보아 면식이 깊은 자 같았다.
“인월의 왕제 전하께서는 돌아가셨는지요?”
록흔은 묻고픈 말 대신 다른 소리만 했다. 그러자 하신이 유리잔에 홍매 한 송이를 더 떨구며 고개를 저었다.
“소단 옹주마마께서 더 계신다 하여……. 연중랑장님께서 아시듯 어디 옹주마마 고집이 보통이라지요. 자, 혼곤함이 싹 가실 터이니 한번 드셔 보십시오.”
“제 계셔야 하는데, 저 때문에 번거로우시니.”
얄따란 휘장 너머, 푸른 대숲에서 사내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단출하게 있겠노라 하셔서 들어와 있는 참입니다. 간만에 오셔서 하실 말씀이 더 많으신가 보옵니다.”
직접 캐묻지 않아도 대충 짐작은 됐다. 하신의 말로 넘겨짚자면 저 넷은 적어도 벗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록흔은 유리잔을 두 손으로 감아쥐었다. 얇게 뜬 눈에 그 앞의 세상이 가득 들어앉았다.
“예…….”
록흔은 곱다란 붉음을 한 모금 들이마셨다. 서늘한 매화차는 향긋하고 달금하나, 깨물려 부운 입술에는 과히 좋지 않았다. 저도 몰래 아픈 소리가 튀어나왔다. 서둘러 막으려다 되려 같은 데를 곱씹고 말았다. 즉시, 성나 부푼 것이 툭 터졌다.
차락!
휘장이 날파랍게 들렸다. 자연바람은 아닌 듯해 록흔은 입을 가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일별, 심장이 덜컥 하고 멈췄다. 등을 돌리고 앉았던 사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록은 동색이고, 유유상종이라던가? 가륜의 벗은 그 벗을 닮아 눈빛이 상량했다. 그리고 두려울 만치 곧았다.
“연중랑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신이 깜짝 놀라 잔을 치우는 새, 궁녀가 흰 명주수건을 서둘러 내밀었다. 록흔은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입술부터 꾹 눌렀다. 산청이 씹은 곳은 은상의 찬바람에 거듭 상해 그 상처가 꽤 오래 갔다. 가만두어도 나을 성싶은 것을 무작스레 깨물었으니 피가 철철 흐르는 건 당연지사였다.
“피가 너무 많이 흐르는데요.”
“괜찮습니다.”
아랫입술에서 피가 붉게 번졌다. 그러나 그런 것쯤이 무슨 상관이랴, 록흔에겐 제게 몰린 사내들의 시선이 더 신경 쓰였다.
“호분중랑장.”
명주수건이 선홍으로 젖어드는데 가륜이 록흔을 불렀다.
“예, 폐하.”
록흔은 붉진 수건 뒤에 숨어서 될 수 있는 한 명료하게 대답했다.
“게 있었나?”
“예.”
가륜 정도면 이곳에 뉜가 계속 있었다는 걸 진작부터 알았을 터였다. 그러나 마치 뜻밖이라는 듯 묻기에 록흔 역시 짧게 말했다. 그런 와중에도 입술은 욱신거렸다.
“이공공.”
“예, 폐하.”
“연중랑장을 이리 모셔라.”
낯선 사내는 황룡의 사람이 아니었다. 복식이 그리 다르지는 않으나 미묘하게 차이가 났다. 마치 인월이나 숙신의 옷이 조금씩은 다르듯. 그러나 한번 쓱 훑어도 그가 지닌 힘이 보였다. 벗의 격에 맞게 이자 역시 이것저것 가진 것이 많은 듯했다.
“현국, 진양후 각하십니다.”
바로 곁에서 하신이 속삭였다.
‘산…….’
진양후 범산. 먼 현국이나 록흔도 익히 알았다. 거상 중의 거상이며 현국 황제의 질자(조카)이자 부마, 이스펠이고 황룡이고 그의 상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했다. 왜인지 대숲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심장이 묵직하게 덜컹거렸다.
“최연소 중랑장이시군.”
범산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다. 강한 기가 음마다 배여, 뉘든 듣게 되면 허투루 굴지 못할 듯했다. 록흔은 고개를 반듯이 들어 현국의 사자를 바라보았다.
“범산이오.”
여인이 바라는 것은 모두 갖추었는가? 가까이서 보매, 그 잘남이 더 도드라졌다. 실로 헌헌장부라 곱다란 몸피 한 줌 안 되게 그러안을 만큼 품이 넓고, 웬만한 이는 잔약해질 만큼 커다랬다. 록흔은 깊다란 눈을 올려 보았다. 그 안에 담긴 제가 조금은 작다 느껴졌다.
“호분중랑장 연록흔입니다, 각하.”
바로 보지 않았으나, 분명 가륜이 입귀를 살긋 들어 올렸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쪽으로 눈을 돌리기가 버거웠다. 록흔은 입을 가린 손수건에 눈마저 묻고픈 충동을 간신히 이겨냈다.
“답답하지 않나?”
가륜이 빛접게 웃었다. 날캄하게 반득대는 그 눈에 담긴 것은 농이 반절, 비꼼이 반절.
록흔 역시 입을 가리고 말하는 것이 예가 아님을 번연히 알았다. 하여 행여 터진 상처가 보일까 저어돼 가리고 있던 것을 치워냈다. 이내, 핏빛으로 부푼 입술이 드러났다. 씹힌 자리에서 여전히 피는 돋아 농익어 이지러진 자두 같았다. 해사한 얼굴이라 그 빛이 더욱 도드라졌다.
“거듭 씹혔군.”
아무렇지 않은 어투나, 조소가 역력했다. 록흔은 눈귀를 잔뜩 굳혔다. 그 순간, 그의 간장도 바짝 오그라들었다.
“폐하, 송괴합니다. 소신이 어쭙잖아서 흉한 모습을 봬드립니다.”
가륜이 원한 답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순순히 다박다박 일러줄 만큼 백치 또한 아니었다. 철석간장은 아닐지언정 겉을 꾸미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록흔은 태연자약하게도 잘도 에둘러 말했다. 그는 무진이 내어 준 옆자리에 앉으면서, 잠시 흔들렸던 눈빛을 재빨리 바로 잡았다.
“은상에서 늑대라도 한 놈 해치웠나?”
무진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보는 눈이 많아 대답하기도 뭣해서 록흔은 그저 웃으며 눈짓으로 아니라 했다.
“폐하께 심심찮게 들어, 이미 고면인 것 같은데…….”
왼편을 향했던 고개가 절로 오른편으로 돌아갔다. 록흔이 바라보매, 범산의 시선에는 온기가 일점도 없었다. 적의는 없으나, 받기에 썩 개운치 않았다.
“뭐라 하셨는지 궁금하지 않소?”
범산이 준수한 입귀를 얄긋하게 틀었다. 저런 미소 대하면 여느 처녀들은 가슴이 뛰련만, 록흔으로선 심장이 우뚝 멈췄다. 그는 가륜과 관계된 일이라면 일단 겁부터 먹곤 했다.
“우중랑장께 하신 말씀하고 비슷할 테지요.”
불경하지 않을 정도의 퉁명스러움, 록흔은 딱 그만큼 세운 날로 가륜으로 인해 자란 겁증을 베어냈다. 그 때, 범산이 드레 깊은 눈으로 록흔을 보았다. 일순, 오석빛 눈이 연빛으로 풀렸다. 원치 않았으나 시선으로 되돌아온 답은 ‘들은 바는 그와 같지 않다’였다.
“부른다니, 먼 길 헤쳐서도 바로 이리 왔겠지. 연중랑장, 고하라.”
가륜이 불안스레 흔들리는 록흔의 눈빛을 잡아채 꼼짝도 못하게 붙들어 맸다.
“예, 폐하.”
야멸친 몰아침이 때론 기꺼울 줄, 록흔은 미처 몰랐다. 그는 아린 입술로 리갈의 전모를 고해 올렸다.
“사윤성 대부호 문정과 그 첩 안리를 비롯해서 총 열 명이 시살됐습니다. 최초 발단은…….”
무진에게 따로 보고 받은 것도 분명 있을 터였다. 그간 틈틈이 문서로 고한 것도 있고 해서, 록흔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것은 정황이 명확하게 드러나나, 군더더기 없는 복명이었다.
“자흔은?”
“피의자……, 모두 지녔습니다.”
일순, 가륜이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석연찮은 구석이 눈에 띄었으리라, 록흔은 속으로 그리 중얼댔다.
“록흔, 너답잖게 머뭇대는구나. 범인이란 정황이 모두 명확하지 않으냐?”
그 때, 조용히 있던 진과가 한 마디 껴들었다. 록흔의 말끝 어디에선가 두둔하는 기색이 읽혔기 때문.
그간의 이야기를 통해 사건의 잔학성을 알고 있던 바, 그는 평소와 다르게 날이 서 있었다.
“연중랑장도 나름의 가설이 있겠지. 안 그렇습니까, 폐하?”
범산이 찻잔을 돌리며 록흔에게서 가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커다란 손아귀 안, 유리잔에 깃든 만첩백매가 향긋하게 휘돌았다.
“이제껏 치우침 없더니, 그리 생각한 연유는?”
가륜이 특유의 서늘한 눈매로 록흔을 가뒀다. 그는 결코 알 리 없겠으나, 이런 순간이면 록흔 안에서는 두렵고 버겁기까지 한 설렘이 일었다. 맑진 눈에 잗다란 파문이 떠올랐다.
“문정의 본처 홍은은 어릴 적부터 같은 꿈을 거듭 꾸었는데, 몽중에 항시 자신이 비(새끼 너구리)로 보였다 합니다. 그니 또한 양 손목에 한 번 잘린 듯 짙붉은 상흔을 지니고 있습니다.”
계속하라는 눈, 록흔은 가륜의 시선을 읽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