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63
연록흔 – 63화
록흔은 호수 아래를 깊게 들여다봤다. 무슨 뜻인가? 섭슬리지 말라는 말만 그녀 안에서 물무늬인 양 찰람거렸다.
탓.
가륜이 잡아챈 대로, 록흔은 돌아섰다. 어깨에 놓인 손이 그리 거세지는 않았다.
“마음의 준비는?”
인호에 대해 물었거니, 록흔은 우선 고개부터 끄덕였다. 맑진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언제나 돼 있습니다.”
딱 부러지는 대답에 가륜이 입술을 늘렸다. 금세, 날캄한 눈이 다사하게 얼녹았다.
“내게 올 준비는?”
“……!”
록흔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의외로운 곳에서 허를 찌르니, 그녀로선 가륜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그다지 참을성이 없어서, 창졸간에 너를 한입에 털어 넣을지도 모른다. 조심해라, 록흔.”
“폐하…….”
어긋났던 날들, 기만했던 말들……. 록흔은 깊다래진 눈으로 가륜을 응시했다. 그 역시 눈이 깊었다.
“사류성에선……, 너무 나서지 마라.”
잡힌 어깨가 뜨거워 록흔은 여린 숨만 드내쉬었다.
“너 다치는 건 내겐 과히 좋지 않다.”
이젠 턱을 잡혔다. 피가 끓을 듯, 록흔은 데워졌다.
“알았나?”
“예……, 폐하.”
록흔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나 제 안전만을 챙길 생각은 바이없었다. 힘의 우열은 중요치 않았다. 그녀는 마음 가는 대로 행할 터였다.
“허투루 답하는군.”
“아닙니다, 전…….”
가륜이 록흔의 턱을 치켜 올렸다. 이내, 둘의 시선이 곧게 얽혔다.
“피가 끓다 조는 것, 네 덕에 알았지.”
냉정한 이가 내보이는 사랑이란, 그 수혜자를 벙어리로 만들었다. 록흔은 그예 벙긋댔다.
“그러니 책임져라, 연록흔.”
“조심…… 하겠습니다.”
목이 아릴 지경, 록흔은 간신히 대답했다.
“나를 지킨다는 가당찮은 명분으로, 이런 미련스런 상처도 더는 늘리지 말고.”
거듭 다쳐 매단 팔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가륜이 누르듯 다짐해, 록흔은 고개만 끄덕였다.
“부접들이 건너오는군. 저들 앞에선 널 모른 체해야 하나?”
노가 물을 훑는 소리가 아스무레 들려왔다. 록흔은 눈을 가분히 들었다. 먼 그림자로 수하들이 보였다.
“예, 폐하.”
“왜냐?”
쉽고도 간단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록흔에겐 온당치 않았다. 작금의 처지가 번듯하지 못함에도 그녀는 솟는 화를 누를 수 없었다.
“폐하, 그러면 제가 어찌해야 옳습니까?”
“몰라서 묻나?”
“제가 어찌 폐하의 곁을 꿈꾸겠습니까? 여직 봬드린 것이란 온통 거짓뿐이었는데…….”
록흔이 언성을 높이는 만큼, 그 눈은 격하게 일렁였다.
“그러면, 황제 기만 죄로 목이라도 쳐야 옳은가?”
“……!”
가격은 주먹으로써만 가한 게 아니었다.
“날 속인 게 밉긴 하다만, 사랑하는 여잘 죽이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일 따윈 사양하겠다. 너 없애고 애달파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일시에 록흔은 전의를 상실했다. 사랑, 짧지만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단어였다. 가륜이 말하는 것이라 더 그런지도 몰랐다. 저 눈을 뉘라서 차갑다 했던가? 나 또한 그랬던가? 그녀는 먹먹한 가슴으로 속절없이 되뇄다.
“일단.”
“…….”
“네게 맞춰 주지.”
애참함이야 그저 묻는다 해도, 저 눈빛은 어쩌란 말인가? 록흔은 제 머리칼을 쓰는 손길에 서서히 굳었다. 가륜은 날캄하나, 다사했다.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눈시울을 좁혔다.
“접두…….”
저 멀리서 창해가 불렀다. 덩치가 산만 한 자나 어울리지 않게 해맑았다. 거한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큼지막한 손을 내저었다. 사란과 대류아가 곁에 없으니 본디 호칭으로 정답게도 불러댔다.
“꽃은 숨어도 향은 스미지. 고운 꽃일수록 더 그러하다.”
창해를 보고 록흔을 보는 눈이 사늘했다.
“애면글면했을 테지, 제대로 덮지도 못할 것을.”
가륜이 무엇을 두고 하는 얘긴지 록흔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저 또한 여인인 양 군 적 없고, 저들 또한 사내인 양 굴지 않았다. 창해가 곧잘 따르는 것은 주종간의 돈독함일 뿐, 남녀간의 정리라 보기 어려웠다. 단 한 번도 그리 생각한 적 없기에 그녀는 눈빛을 곧게 세웠다.
“아닙니다. 저들은 제 혈육 같은 수하입니다. 그런 류의 감정은 서로 없습니다.”
“사내도 아니면서, 사내의 속을 어찌 아나?”
가륜이 피긋 웃었다. 냉소가 섬뜩할 만치 차가웠다.
“비록 아니나, 전혀 무지하지도 않습니다.”
가만 입을 다물어도 시원찮을 판, 그러나 록흔은 차분하게 되받아쳤다.
“이 꽃은 어여쁘나 제법 드세군.”
가륜이 웃었다.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만면에 역력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애초에 가장 크게 쳤던 것이 바로 저 당당함이었다. 예전, 서도 새에서 봤던 빛은 작금과 같았다. 록흔이 말을 곧게 세울수록 미소는 더 깊다래졌다.
“폐하, 저는 꽃이 아닙니다. 저는……!”
“맞다. 한화(늦가을, 겨울철에 피는 꽃)도 아니고, 아끼는 주인까지 지녔지.”
“이때껏 그리 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는 그리 될 터, 그러려면 다분한 연습이…….”
갑작스레 숨이 막혔다. 가륜이 훔켜잡은 대로, 록흔은 그의 가슴에 안겼다.
“필요하지.”
가물가물한 그림자일랑 가륜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도리질을 쳤으나, 록흔은 곧 하릴없이 입술을 열었다. 이내, 치대고 되받아치던 것이 무의미해졌다. 마음 안, 그가 온전히 들어차 그녀는 눈을 감았다.
“사내란 이런 거다.”
몸이 혼곤하고 까라졌다. 모나게 돋은 마음 역시 연해졌다. 록흔은 백치인 양 생각을 털어 버렸다.
“알았나?”
“예…….”
인정하든 안 하든, 명백하게 가륜에게 속했다. 록흔은 떨리는 입술로 한숨인 양 말했다.
“그래, 착하다.”
가륜이 아이 어르듯 하매, 록흔은 눈귀를 붉혔다. 그로 인해 부푼 입술이 더 짙붉어졌다.
“잠시만 호분중랑장으로 있어라. 암행이 끝나면, 더는 하고 싶어도 못할 테니.”
“하오나, 폐하!”
록흔은 위험도 잊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가륜이 막 등을 보인 참, 치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옷소매를 붙드니 그가 날파랍게 돌아섰다. 호수 위, 부접을 실은 배가 둥실 돋았다. 노 젓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나 둘 다 개의치 않았다.
“반박 마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건 없었다.”
실로 황제다운 말이었다. 가륜은 지극히 오만했다.
“폐하, 어젯밤 약언하신 바와 같지 않습니다.”
록흔은 몹시 심산했다. 강요하지 않겠다, 기다려 주겠노라……. 가륜이 했던 말이 뇌리에서 맴돌았다. 여반장도 아니고 어찌 저리 뒤집는가? 그녀는 이를 자그시 물었다.
“그래, 언어도단이지.”
가륜이 차게 뱉었다. 그리고 냉기가 뚝뚝 돋는 눈으로 록흔을 좨쳤다.
“비록 높다란 폐하시지만, 제게 마음의 굽힘까지 명하실 수는 없습니다.”
록흔 역시 맑진 눈을 곧게 치떴다.
“주군으로서든 사내로서든, 네겐 매한가지다. 항명엔 가차 없다.”
“쉬이 굽히지 말라셨습니다.”
‘사형!’ 하는 소리가 조금 더 가깝게 들렸다. 대답을 들을 때까지는 계속 부를 터, 록흔은 호수 쪽을 할긋 보았다. 배 두 척이 가분하게 떠오고 있었다. 그러나 의미 없는 풍경이라 눈으로써 그쳤다.
“과연 그런가? 연과 가륜이었던 그 밤 이후, 그리 단순한 논리가 아니었을 텐데.”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가륜이 옳았다. 그가 그저 황제였던 것은 그 이전, 그 이후로는 마음이 썩 맑지 못했다. 록흔은 그예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무치라 하지 않더냐? 내가 말한 걸 뒤집는다고 뉘라서 욕을 하겠나?”
묻긴 했으되, 답 따윈 허락지 않았다. 가륜이 바로 돌아서, 록흔에겐 꼿꼿이 세운 등이 전부였다. 그 뒷모습이 크고 높아 마치 벽과 같았다. 명확하고 냉정하니, 매사에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작금은 그 명성과 부합되지 않았다. 그답지 않은 억지논리요, 억압이었다.
“…….”
알 리도 없건만, 록흔은 가륜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할겨봤자 그에겐 대수롭잖을 터. 그녀는 입귀만 쓰게 비틀었다.
“사형, 보기보다 한참 걸렸습니다.”
거의 목전에서 창해가 상글방글거렸다. 그와 동시에 둘의 공간도 깨졌다. 가륜은 벌써 월영 위에 있었다.
“지체 없이 바로 출발한다.”
원치 않았으나, 천노는 자연스레 이뤄졌다. 록흔이 차게 내긋는 말에 부접들이 고개를 납작 숙였다.
“예, 접두!”
사형이란 소리는 잠시 잊은 듯, 창해가 커다랗게 외쳤다. 가륜이 저만치 앞서가기에 록흔 역시 효한하게 말에 올랐다.
찰람찰람.
물내가 저마다의 옷자락에 축축하게 뱄다.
필설로는 석림의 모습을 풀기 어려웠던 듯, 직접 보니 듣던 바와 같지 않았다. 삼면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태곳적 그대로였다. 뉘가 깎고 벼렸는지 모르나, 돌 하나하나가 제각각 달랐다. 수인 맺고 정좌한 문수보살인 양, 잔뜩 몸을 도사리고 앉은 범인 양, 주작의 긴 꼬리인 양……. 장쾌하고 장엄한 풍광은 보는 이마다 상이한 해석을 가능케 했다. 정으로 쪼아 부러 만든대도 저리 절묘하기란 어려울 듯싶었다.
피릿피릿!
본시는 바다였단 전설대로 암석마다 짠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검은 돌에 촘촘히 박힌 것은 조개, 바람이 씻어 발라 그 속이 훤히 드러났다.
피리링!
기다란 바위는 칼처럼 날카로웠다. 저마다 끝 간 데 없이 솟아 석림을 메우고 하늘을 찔렀다. 뾰족한 틈새마다 껴들어간 야화가 향긋해, 이름 모를 산꽃이래도 곱다랗기는 매한가지였다.
“사형, 과히 절경이라 일컬을 만합니다.”
창해가 코를 벌름거리며 록흔을 돌아보았다.
“저런 곳도 이런 곳도 있고, 이게 천하를 주유하는 맛이겠지요?”
“그런가?”
록흔은 열의 없이 대꾸했다. 창해를 보고 있으되, 온 신경이 가륜에게 가 있었다.
“이곳 석림에서 만난 인연은 평생 간다 하던데, 사형께서도 아십니까?”
“글쎄다, 그런 일이 있나?”
“위쪽으로 올라가면 소석림이란 곳이 나오는데, 워낙 미로 같은 곳이라 길을 잃기도 십상이고 이리저리 복잡한 길이 연결되어 만나지기도 한답니다. 그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마주치는 남녀는 혼인까지 하게 된다고 하지요.”
창해는 얼굴까지 벌게졌다. 그 옆에서 하균이 싱긋이 웃기만 했다.
“가히 낭만적이군.”
가륜이 차게 말하며 입귀를 실긋 틀었다. 일순, 록흔은 가슴이 뜯겼다.
“그렇지요, 사형?”
창해는 물색 모르고 신이 나 있었다. 그러나 거한이 활짝 웃으며 되물어도 가륜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리 만나면 두 사람은 말이지요…….”
썩 마뜩찮았다. 항시 귀엽게 보던 것도 제 속이 불편하니 곱지 않았다. 록흔은 창해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창해, 유람 온 길이냐?”
록흔답지 않은 상량함이었다.
“예? 예…….”
이내, 창해는 입을 다물었다. 어제 불가에서 들었던 꾸중까지 합쳐진 모양, 그는 묵묵히 말만 몰았다.
피리링, 피링!
시간이 많지 않아 석림의 가장 좋은 산수는 부러 지나쳤다. 지름길 중에도 가장 짧은 것을 쫓아, 괴석이 빼곡한 숲을 가로질렀다. 아까부터 영묘한 새소리가 뒤를 따르는 참, 몹시 청아한 것이라 록흔은 어언간 고개를 들었다.
포로롯!
새들은 깃이 알록달록했다. 눈이 호동그래질 만큼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이채였다. 록흔은 흘끗 보다, 고삐를 바투 쥐었다. 그리고 선두를 향해 나아갔다.
“어머, 색이 너무 곱구나. 대류아, 내 관을 장식하면 멋질 것 같지 않으냐?”
행렬의 가장 끝에 뒤처져 짐짝처럼 끌려가던 차였다. 사란은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잡아 올릴까요, 궁주님?”
“응! 그러려무나.”
사란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곱다란 것을 보니 사내들이 홀대하여 상한 마음이 조금은 녹아내리는 듯했다. 어떻게든 가지고 싶어 그녀는 주먹을 꼭 쥐었다.
스익!
부접들의 머리 위로 살 하나가 날아올랐다. 바람을 긁어, 바위를 할겨……. 대류아가 쏜 것은 몹시 재빨랐다. 순식간이라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파앗!
투드드!
툭!
태양처럼 짙붉은 깃털이 날렸다. 이어 새 한 마리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무슨 짓이냐?”
노성이 커다랗게 돋았다.
“저는 단지…….”
활은 여전히 제 몸을 다르르 떨었다. 저만치, 짙붉은 새는 팥물 같은 피를 토하고 죽었다. 대류아는 영문도 모르고 하균을 쳐다보았다. 온화하기 그지없던 이가 벽력처럼 화를 내니 그저 멍할 따름이었다.
“자네, 들은 적 없는가? 석림의 동식물은 함부로 죽여선 안 된다는 걸!”
하균의 말에 분위기가 험악스레 변했다. 모두 눈귀를 딱딱하게 굳히니, 대류아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활을 거뒀다. 그 때, 사란이 눈을 치올렸다.
“저깟 새 한 마리 죽인 게 대순가요?”
괴괴한 적막이 바위숲을 메웠다. 대류아는 데꾼한 눈으로 이쪽저쪽을 번갈아 보았다.
“명색이 사내들이 무얼 그리 두려워하는지요? 향접궁주 문사란이 갖고자 한 게 보배라도 되던가요?”
“어리석긴! 저건 이랑진군의 새란 말이오!”
하균이 버럭 외치자, 사란이 입을 벙긋 벌렸다.
“설마…….”
이랑진군 양전, 옥황의 질자이며 물을 다스렸다. 도교에서 치수의 신으로 받들려 예부터 그 신앙의 뿌리가 깊다랬다. 사란은 하균을 멍하니 보았다. 예리하게 선 눈으로 보건대, 설마가 맞는 듯싶었다.
“석림은 이랑진군의 정원이오. 꽃을 비롯한 식물, 새를 비롯한 짐승, 모든 것은 이랑진군의 충견 천구가 지키고 있…….”
하균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 검은 그림자가 날파랍게 하늘을 긁었다.
크르르르릉!
짐승이 포효했다. 사납게 으르렁대는 것도 순간, 거센 것이 맵차게 스쳐 날았다. 몸놀림이 효한해 되레 생김이 없는 듯싶었다. 놈은 바람인 양 검게 흘러 대류아에게 꽂혔다. 이내 그의 어깨에서 붉은 물이 돋았다. 험히 발겨진 상처는 분명 발톱자국이었다.
“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하늘을 찢었다.
“저런 것이, 저런 게…….”
사란이 겁에 질려 헐떡였다.
크르르르…….
커다란 개였다. 찢긴 눈에서 푸른 불꽃이 이글댔다. 굵다란 몸피에서 자르르한 털이 낱낱이 섰다. 이랑진군의 천구가 분명했다. 놈이 핏빛으로 붉은 입아귀를 크게 찢어 그르렁대니, 그 기세에는 범도 돈점박이(표범)도 겨룰 바가 못 됐다.
“가까이 오지 마, 저리 가!”
칠흑빛 개는 커다랗게 도사리고 앉아 한곳을 쏘아봤다. 누가 새를 죽였는지 다 아는 듯, 검푸른 안광이 형형했다. 오직 사란만 잔뜩 오그라졌다. 그 눈이 글썽하고 얼굴은 파르랬다.
크아아앙!
거친 울부짖음, 뒤이어진 위협적인 도약. 천구가 목적한 바는 하나였다.
탈싹!
무언가가 나가떨어졌다. 소리로 가늠해 몸피가 가벼운 이였다.
“이런!”
“젠장!”
이것저것 섞였으나, 뜻은 하나였다.
으르르르…….
사란 대신 록흔이었다. 그녀는 천구를 미처 막아내지 못하고, 놈에게 허벅지를 물렸다. 가만 누운 모습이 마치 죽은 듯했다.
“접두!”
유장이 외쳐 부르고, 하균이 서둘러 달려갔다.
“썩 놓아라! 어서!”
창해가 일갈을 토해도 천구는 끄덕 안 했다. 그저 그악스레 록흔을 물고 늘어질 뿐. 깊이 들은 뼈에라도 이빨을 박을 양, 놈은 양턱에 힘을 주었다.
“아아아, 저렇게 커다란 개가! 까아아아!”
록흔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는데, 비명은 되레 사란이 내질렀다. 방금 전까지 눈을 감고 오들오들 떨더니, 이제는 숫제 쇳소리였다. 부접들의 얼굴이 일시에 험악해졌다.
“저리 가!”
“네 이놈!”
부접 모두 각자의 무기로 천구를 을렀다. 그러나 놈은 꼼짝도 안 했다. 다만, 뼈라도 바술 기세로 주둥이를 윽물었다. 이내,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축축하게 돋았다.
“그걸 놓아라. 내 손에 죽고 싶지 않으면.”
부접들의 머리 너머에서 냉량한 소리가 돋아 들렸다. 록흔은 입술을 깨물며 눈만 간신히 들었다.
크르르르!
가륜은 시선으로 천구를 제압했다. 사금파리처럼 날캄하고 설산인 양 차가워 제아무리 하늘의 짐승이라도 담이 서늘할 터였다.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는 것은 어여쁘나, 도가 지나치면 되려 화를 부른다.”
천구가 귀를 쫑긋 들었다. 파르란 눈도 조금 치떴다.
“그러니, 내 사람을 놓아라.”
그저 언(言)이나 가륜의 것이었다. 천구는 불현듯 양순해져 꼬리부터 내렸다. 그리고 야무지게 물었던 것을 놓았다. 뒤로 물러나 몸 사리는 양이 개보다는 강아지에 가까웠다. 록흔은 눈을 가늘였다. 놈이 발긴 자리에서 피가 철철 돋으나, 그저 그런가 보다 싶기만 했다. 그저 ‘내 사람’이란 말만 거듭 돋아 들렸다.
“그래…….”
가륜이 어르며 천구의 머리를 쓸었다. 그러자 푸른 불꽃이 일렁이던 눈이 무름하게 풀렸다. 정제된 분노에 놈은 조용히 가라졌다.
“착하다.”
개 어르는 소리나, 그 읊조림이 사란에게는 시와 같았다. 이제는 공포 대신 연정이 차올라 눈썹 끝이 설레발을 쳤다. 저 품에 안긴 애송이가 될 수 있다면 심장이라도 내주고픈, 그녀는 가륜을 몹시 열망했다.
컹!
개가 온전히 물러섰다. 부접들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대류아 역시 눈이 흐렸다.
“사형, 이젠 괜찮습니다.”
아픈 한숨 끝에 록흔이 속삭이듯 말했다. 놔달라는 소리였으나, 가륜은 팔을 풀지 않았다. 그의 눈 안에 그녀는 없었다, 오직 하늘 짐승이 담겼을 뿐.
“선한 사람을 해쳤으니.”
천구가 머리통을 크게 들었다.
“어찌할 테냐?”
분명 협위였다. 잔금 없는 시선에는 일호의 틈도 없었다. 천구가 주춤 한 발 물렀다가 천천히 록흔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엎드리듯 몸을 낮췄다.
“영리한 놈이로군.”
츄읍츄읍.
기다란 혀가 들락날락했다. 이내 선연하던 피비린내가 옅어졌다. 욱신거리다, 쓰라리다, 따끔하다……. 천구가 핥을수록 통증은 연하게 바랬다. 그러는 내내 가륜은 록흔을 다독였다. 어언간, 날캄하게 발겨졌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피살은 말끔해졌다. 그녀는 얕은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머리칼을 쓰는 손길은 다사했다.
“창해.”
“예, 사형!”
“이사제의 말을 끌어라.”
“존명!”
창해만 움직일 뿐 대개가 여전히 멍했다.
커엉!
록흔은 몸 사릴 새도 없이 안아 올려졌다. 어언간 월영 위, 저 아래에 천구가 있었다. 처분이라도 바라는 듯 놈은 가륜만 보았다. 흑단 같은 머리통에 조금은 힘이 없었다.
“새냐 사람이냐, 경중을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사람이 상했으니, 네 주인도 나무라진 않을 터. 비듬하진 않지만, 그리 치자 전해라.”
크엉!
천구 나름의 답이었다. 이내, 청광이 놈의 눈에서 파르랗게 일었다.
“모두 출발한다.”
“예!”
월영을 선두로 일행은 석림을 다시 헤쳐 나갔다. 사란 역시 잔뜩 풀이 죽어 그들을 따랐다. 조금 전의 일로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동안 말발굽 소리만 암벽에 괴괴하게 깨져 흘렀다. 가륜이 멀찍이 앞서 나가도 뉘든 섣불리 따라잡지 않았다. 현재로썬 그의 진노를 희석시킬 길이 바이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다각, 다각.
“왜 그랬나?”
문책은 어김없이 떨어졌다. 부접들과 상당히 떨어졌구나 싶었을 때였다. 허리를 옥좨 안은 팔에 화가 묻은 듯해, 록흔은 바로 눈을 떨궜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문사란은 연약한 여인입니다. 번히 알면서 당하도록 놓아둘 수가…….”
갑작스레 입이 막혔다. 손아귀의 힘이 강해 도리질도 불가했다. 록흔은 채 못한 말을 혀끝에 사렸다.
“그럼 연록흔, 넌 강한 사내더냐?”
대답하려도 불가했다. 가륜이 입을 막고, 턱으로 정수리를 내리눌렀다. 그러나 억세게 안겼어도 록흔은 힘겹지 않았다. 차갑고 건조한 어투가 다는 아니었다. 걱정스러움, 안쓰러움, 소중함……. 그녀는 그예 눈을 좁혔다. 목메는 다사함이라 입으로 담기엔 너무 컸다.
“더는 다치지 말라 했다.”
록흔은 고개만 끄덕였다. 가득 찬 감정만큼 곱다란 눈이 연하게 풀렸다.
“어기라 한 말이냐? 왜 네 뜻대로만 하는…….”
매몰차게 쏟아지던 말이 딱 그쳤다.
다악.
가륜이 앗고자 하면 앗겨 주었으나, 록흔 스스로 다가서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작금은 닿고픈 마음이 컸다. 입술 위 억세게 올라앉은 손, 그리고 또 다른 손……. 그녀는 맹인처럼 손으로써 더듬었다. 그 외에 뵈는 빛 없으니 살피살피 어루만졌다. 울툭불툭 굴곡진 손등을 보드랍게 쓸었다.
“너…….”
어언간, 악력이 약해졌다. 그러나 록흔도 가륜도 의식치 않았다.
“아예 을러대는군.”
록흔은 커다란 손을 작은 제 손에 담뿍 담았다.
“어영부영 넘기지 마. 아직 멀었다.”
오직 말뿐이었다. 가륜의 음성에 화는 한 조각도 없었다. 전에는 읽기 어렵던 것이 이젠 그저 읽혔다. 록흔은 가륜의 손바닥에 입술을 살포시 눌렀다.
“너부터 챙겨라. 다른 이 뉘보다 너 하나가 소중하다.”
상량한 눈에 미소 걸렸으리……. 록흔은 보지 않아도 알았다. 예, 폐하……. 그녀는 마음으로 읊조렸다.
사락.
가륜은 록흔의 정수리를 턱으로 쓸었다. 그 눈귀에 입귀에 밴 미소가 연연했다.
포로롯!
포롯!
석림 새, 월영이 물처럼 흘렀다. 위에서 돋는 새소리가 고왔다. 가륜이 감싸 안는 대로 록흔은 제 몸을 맡겼다. 스치는 것마다 뾰족하고 예리한 바위투성이나 보는 눈이 편하니 둥근 것도 같았다. 불공이 중천을 누벼도 돌숲은 청상할 뿐, 둘은 서로에게 섭슬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림의 가장 높은 바위, 지암봉.
깎아지른 석벽에 심상찮게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았다. 발치에는 크단 개를, 우수에는 커다란 칼을……. 우뚝 솟은 것은 석림의 어느 바위보다 장쾌하고 웅대했다.
“녀석.”
부르는 소리에 검정개가 고개를 발딱 들었다.
“실수했구나.”
묵직한 음성에 하늘짐승은 혀만 길게 빼물었다.
“황룡의 황제라…….”
까마득히 낮은 곳에서 사람의 행렬이 꼬리를 사렸다. 그리고 곧 흐리마리 졸아들었다. 그 때 괴석인 듯 멈춰 있던 것이 움직였다.
크엉!
흑갑의 장부는 훤칠하고 늠름했다. 그가 몸을 트니 세 갈래로 갈린 커다란 칼이 금빛으로 작열했다. 바로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 그 주인을 닮아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벼린 날에 햇발도 산산이 찢겨 날았다.
“그래, 나도 적잖이 놀랐다.”
사내는 커다란 손으로 개의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었다. 그러자 놈이 하늘을 향해 긴 울음을 토했다.
“달리 황제려고…….”
컹!
동의라도 하는 양, 개는 머리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니?”
미성이 지암봉 꼭대기에서 갑작스레 돋았다. 어언간 오채 은은한 실구름이 석봉에 설핏 어리더니, 가희 하나가 그 끝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누님, 이곳에는 어인 일이십니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하나 있다 해서 내려왔지, 이랑진군 양전.”
칠고랑 산희는 옥황상제의 서녀였다.
“그게 무엇인지요?”
산희가 고개를 갸울이매, 발치까지 흐르는 기다란 머리채가 햇빛을 머금고 찰랑거렸다. 도톰히 붉은 입술은 향기롭고, 적자색 눈은 보석인 양 영롱했다. 그녀는 여신답게 자색이 빼어났다.
“천구 사루가 애먼 이를 공격했다기에 한걸음에 내려왔지. 그만하면 흥미롭잖아, 안 그래?”
“설마, 그럴 리가요.”
“어머, 이랑진인! 내 말을 안 믿는구나?”
말 많고 바쁜 누이였다. 산희가 너스레를 떨어도 양전은 싱긋 웃기만 했다. 분명 다른 곡절이 있을 터, 그는 곧이듣지 않았다.
“정말 이러기냐? 그나저나 저 아인 괜찮다더냐?”
“사루가 핥아주었으니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갸륵하게도 인간 중에선 보기 드물게 맑습니다. 그나저나 누님, 하계에 내려오신 진짜 이유가 뭡니까?”
산희가 교묘히 말을 돌리니, 양전 역시 같은 수로 받아쳤다. 준수한 얼굴에 웃음빛이 일렁였다.
“그게 말이다…….”
갑작스레, 산희가 얼굴을 찌푸렸다. 근심이 깊은지 아름다운 눈이 이내 적자색에서 흑자색으로 흐려졌다.
“내가 잠시 수도를 위해 두문불출한 사이, 시호가 말썽을 부리고 다닌 모양이거든.”
시호는 산희가 인간사내에게 본 딸이었다. 양전 또한 모계는 신으로부터 부계는 인간으로부터 이어져, 더 친밀하게 대하던 터였다. 그러나 아직 어린데다 호기심만 넘치게 많아 가끔 말썽을 크게 부리곤 했다.
“시호가 무슨 일로 누님을 근심케 했습니까?”
“내 거울을 가지고 장난을 좀 친 모양이야. 여기저기 어긋난 인연을 보여주고 다녔으니……. 걱정이다.”
칠고랑 산희는 처녀들의 간구를 받아 그니들에게 장차 신랑 될 사내를 보여주곤 했다. 그때 소용되는 것이 신안경으로 시호 같은 아이가 가지고 놀 장난감은 확실히 아니었다.
“시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잘못한 줄은 아는지 아버님 뒤에 숨었구나. 고 버릇없는 것을 얼마나 끔찍하게 귀애하시는지, 너도 알잖니?”
“하하, 시호답군요.”
“큰일이다. 그 엉킨 것을 어찌 되돌릴지…….”
산희는 얼굴을 찡그리다 양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흐리마리한 구름 아래, 그림자는 아스라했다.
“황제가 황성을 비우고 암행에 나섰다? 저 둘, 참으로 흥미로운 짝이로구나.”
“누님, 저 둘 가하겠습니까?”
양전이 가리킨 것은 가륜과 록흔이었다.
“글쎄…….”
“서로 그리는 마음이 남다른데, 맺어질까요?”
멀리 내다보는 눈이 깊다랬다. 산희는 사촌아우의 준수한 옆태를 보다가 눈을 반득 빛냈다.
“흠, 명세제가 탐스러운 건 아닐 테고……. 너 혹, 저 아이를 눈에 담았느냐?”
“그럴 리가요?”
양전은 조금은 지나치다 싶게 즉각 부인했다. 그러자 산희가 커다랗게 웃었다. 천구 사루 역시 크게 짖어댔다.
“정색하긴, 농담이란다. 유달리 관심을 보이는 건 확실한데……, 왜일까?”
“본연이 몹시 선합니다. 다른 이를 구하고저 천구 앞에 저를 던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다만, 욕심 내지 마라. 저 둘 새, 질긴 연이 이어 그 끈을 절대 풀어낼 수 없단다.”
“과연 그럴까요?”
“…….”
산희는 그저 웃기만 했다. 어느덧, 붉은 보랏빛 눈에 먼 곳의 풍광이 담겼다. 사류성의 첫 번째 관문 라덕문, 그곳에 가륜 일행이 막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