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83
연록흔 – 83화
“해루입니다. 저걸 지니면 사랑을 잃지 않는다지요.”
푸른 눈물 줄기줄기, 연심은 알알이 배여 지금에도 선연했다. 바라보니 록흔은 왠지 가슴이 아팠다. 이미 죽었으되 마음은 남아, 무엇이 저리 애달픈 것인지……. 제 것은 잃었어도 타인의 사랑은 지켜준다 하니 참으로 슬픈 역설이었다. 녹옥은 석상의 뺨을 입아귀를 지나 물처럼 흘렀다.
“해루를 받으면, 여인은 평생 그 사내 곁에 머문다는데.”
어깨에 놓인 손에 록흔은 눈을 살폿 들었다. 등을 감싼 체온에 그녀는 반벙어리가 됐다.
“…….”
목이 멨다. 그리고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차마 그리 하겠노라, 록흔은 대답치 못했다. 심장이 터질 듯해 입술만 섧게 물었다. 천창을 지난 달빛에 그 뺨이 해쓱하게 바랬다.
토록, 톡.
가륜의 손 위로 해루가 졌다. 찬란한 취옥, 그 빛돌보다 더 빛나는…… 눈물은 몹시도 투명한 결정이었다.
다악.
록흔은 가륜에게 손이 잡혔다. 이내,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그녀의 손안 그득 담겼다. 진록빛 빛돌에 투영돼 하얀 손바닥이 새뜻하게 바랬다.
“연랑, 뉘나 얻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해루는 아무 때나 뵈는 게 아니고, 만월의 밤이라 해서 돋는 것도 아니라 했던가? 진정 사랑하여 발현했으니 그 마음이 몹시도 깊다 하는 감탄도 록흔에게는 닿지 않았다. 진문이 뭐라 하건 그녀는 손에 이드거니 차는 것만 깊게 보았다.
“오래토록 행복하십시오, 연랑.”
축원의 말 또한 귀에 담기지 않았다. 록흔은 가륜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한 손 그득 쥔 것은 선뜻하게 찬데, 불이라도 되는 듯 뜨거웠다. 물기 연하게 도는 눈에 그가 가득 담겼다.
“마음에 안 드나?”
록흔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해루가 스몄는지 눈이 절로 습해졌다. 그녀는 그예 눈시울을 좁혔다.
“수많은 사내들이 해루를 찾는데, 왜인지 아나?”
가륜이 훔켜 안아 록흔은 다소곳이 안겼다. 귓전에 닿는 심장박동에 그녀는 먹먹히 갈앉았다.
“청혼의 증표, 나 또한 그로써 구했으니.”
록흔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눈도 깜박일 수 없고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그저 돌인 듯, 그의 품에 잠긴 채였다.
“록흔, 태화성에 돌아가면 내 아내가 되라.”
명령하는 투나 ‘아내’라는 말은 발음조차 부드러웠다. 록흔은 뒷목이 잡힌 채로 고개를 젖혔다. 눈은 깊게 젖고, 묻지 못한 말만 그녀의 입술에 연하게 묻어 있었다.
“도둑처럼 안고, 기분 내킬 때 찾아보고. 그러려고 너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난 아내가 필요해.”
“폐하…….”
막막하고 놀랍고 또 두렵고, 설레기도 했다. 그 하많은 감정에 짓눌려 록흔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굳이 말하지 마라, 스스로 황룡의 주인임을 안다.”
“저는……. 폐하, 그것은…….”
가륜이 자조하듯 피긋 웃었다. 그 미소가 몹시 써 록흔은 가슴이 저렸다.
“그래, 그저 촌부의 아낙이면 좋을 테지. 그러나 어쩌겠나? 너만이 차는 것을.”
록흔은 눈물을 애써 참았다. 그예 도홍빛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몹시 주린 사내라 네 가진 것 모두 삼키고, 더 달라 보챌 거다. 결코.”
가륜이 말을 멈추고 록흔을 들여 보았다. 아슴아슴 번진 연빛 눈에 봉안이 부드럽게 풀렸다.
“배려는 불가하다. 네가 고갈되더라도 물리지 않을 터.”
분명 협위의 말, 그리고 깊은 고백이기도 했다. 애써 참은 것이 그예 터졌다. 록흔은 갈쌍한 눈으로 가륜을 응시했다.
“너를 얻기 위해서라면 후안무치해도 좋다. 그러니 록흔, 대답해.”
“절 곁에 두시면…….”
록흔은 바로 이어 말하지 못했다. 커다란 멍울이 가슴을 짓누르고 목을 메워 한 음 한 음 말하기도 버거웠다.
“마음 상하실 일 많을 거예요, 그래도…….”
“상관없다.”
록흔은 머뭇거리나, 가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지만 폐하…….”
“걱정일랑 접어라, 난 그리 섬세하지 않으니.”
“실재는 분명 다르온데…….”
일순, 가륜이 눈귀를 틀었다. 빛접은 눈동자가 날캄하게 빛났다.
“그만 됐다. 연록흔, 내 아내가 되어 줄 건가?”
록흔은 입술을 붉게 감물었다. 그리고 참았던 것을 잔약하게 풀어냈다.
“그…….”
말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가륜이 곧게 보기에, 입술을 한 번 더 달싹였다.
“그럴게요.”
우련 붉은 뺨에 볼우물이 팼다. 그리고 도홍빛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록흔, 너 외엔 원치 않는다. 앞으로 나를 위해서라, 뉘가 상처 입는다 해서 물리지 마라.”
“……예.”
수많은 꽃 중에 하나거니, 조금 더 길게 보는 꽃이겠거니, 매오로시 하나인 꽃은 아니겠거니, 록흔은 그리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황제에겐 오직 저 하나였다.
“양보하는 것도 숨어 우는 것도 안 된다. 약언해라, 록흔.”
“예, 폐하. 그리…….”
울지 말랬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저 흘러 막힘없이 터져 설움인 듯, 록흔을 가라앉혔다.
“너 하나면.”
록흔은 단단히 안겨 눈을 감았다.
“온전히 찬다. 그러니 울지 마.”
인생은 전쟁터였다,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언제든 싸울 준비를 해야 하는. 안락하게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깨져 바숴질지언정 지키고픈, 록흔에게는 가륜이 그러했다.
“폐하, 잠시만. 그리고 다시는…….”
섧게 입술 물지도, 움츠러들지도, 갈쌍한 눈 하지도 않으리라. 록흔은 가륜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 품이 축축해지도록 눈물을 쏟았다. 지금껏 그를 위해서라 자조하며 물러선 것이 어쩌면 제 상처입음을 저어한 것일 수도 있었다.
“폐하, 곁에서…….”
되게 다쳐도 이젠 상관없었다. 록흔은 사랑하고 또 지키리라 결심했다. 가진 힘으로든 품은 마음으로든, 뜻은 매오로시 하나였다.
“함께할게요. 폐하 곁에서 같은 곳을 보고, 폐하를 바라보고. 이제 물리실 수 없으니……, 어쩌지요?”
비에 젖은 꽃인 양, 록흔이 눈물 속에서 웃었다. 가륜이 바라보매, 함빡 젖은 눈귀가 서럽도록 고왔다. 그가 어루만지자, 맑은 물이 한 방울 톡 떨어졌다
“너야말로 돌이킬 수 없으니 어찌한다. 남 보기 화려한 자리나 평탄치 않으니, 되돌리라 할는지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가륜의 눈에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록흔은 고개만 사분히 저었다.
“그래, 록흔. 나만 보고 살아라. 나를 보고 따른다 했으니.”
“예, 그럴게요.”
고갯짓에 하르르 풀린 머리칼이 밤빛인 양 곱다웠다. 달빛에 씻겨 반드르르하니, 그 마음결처럼 보드레했다. 가늘고 하얀 깁을 이리저리 껴 넣어 땋은 머리채는 밤바람이 쓰는 대로 연하게 흘러내렸다.
“달빛조차 탐을 내나?”
월광은 이제 록흔 위에 있었다. 하얗게 씻긴 뺨을 가륜이 그러잡았다. 그대로 그녀는 도홍으로 익었다. 그 빛이 기꺼워 검남빛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욱적대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만 내려가지.”
진문이 입귀를 굳히며 말했다. 곧 해루를 쫓는 사내들이 들이닥칠 터, 그로서는 저런 소란함이 마뜩찮았다.
“각다귀들이 몰려들 것 같아.”
무덤덤하게 말하는 듯해도 거한의 눈귀는 젖어 있었다. 언 듯 굳은 듯 살아온 벗이 봄을 맞아 기쁘기 한량없음이었다.
“음, 해루도 얻었고. 록흔…….”
록흔이 너울을 다시 썼을 때였다. 가륜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춥지 않나?”
여름이지만 밤이고 또 높은 곳이라 서늘했다. 체감하는 바가 사내나 여인이나 다르지 않으니, 이 정도 상량함이면 다 같을 터였다. 가륜이 겉옷을 벗으려 하기에 록흔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제 한 몸 따뜻하고자 그를 춥게 하고 싶지 않았다.
“폐하, 괜찮습니다.”
“가만있어.”
어깨가 옴쭉도 못하게 눌렸다. 이내, 커다란 옷이 록흔을 감쌌다. 깁에 묻은 다사한 체향이 그녀를 갈앉게 했다.
“이리 드러내고 다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은안도 노렸는데, 다른 놈은 없을까. 되풀이되면, 그땐 내 심기 나도 못 다스릴 것 같으니 그냥 입어라.”
“설마요…….”
“그 설마에 감모라도 걸릴지 모르잖나. 너 아픈 건 더 못 볼 것 같다.”
옷을 되돌리려다 록흔은 가륜을 반히 보았다. 사뭇 거친 말투나 분명 걱정이 묻어 있었다. 어언간, 어깨에 살짝 걸친 게 단단히 여며졌다. 그녀는 그예 옷 안에 갇혔다.
“아무래도 륜.”
진문이 싱긋이 웃으며 운을 뗐다.
“됐다, 진문.”
가륜이 채 끝나지 않은 말을 단칼에 쳐냈다.
“아니, 은라한테 죄 이야기해야겠어.”
반은 놀림, 반은 흡족함. 진문은 계속해서 깊다랗게 웃었다.
“그러든가, 괴로운 건 내가 아니잖나.”
가륜의 말에 진문이 고개를 갸울었다. 그것도 잠시, 커다란 눈이 가느다래졌다.
“그래, 자네가 옳아. 은라가 몇 날 며칠을 두리두리 부풀릴 테지. 귀 꽤나 아프겠군.”
벗이 황제로서 살기보다 사내로서 살기 바라니, 마냥 안심이 됐다. 그런 마음은 아내 또한 같을 터, 얼굴 찡그림은 순간이었다. 진문은 또다시 빙그레 웃었다.
“…….”
록흔은 귀를 바짝 세웠다. 몇 무리인지 모르지만 족장에 닿는 진동이 꽤 컸다. 해루를 얻으려 산을 올랐을 터, 점점 이곳으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깝게 됐군, 저 사람들.”
진문이 이를 드러내고 씩 웃으매, 가륜 또한 빛접게 웃었다.
“연랑, 가시지요.”
오른 길과는 반대편으로 진문이 앞장섰다. 천창에 걸린 달은 여전히 곧으나, 그 밝음은 다소 사위었다. 록흔은 한 손으로는 해루를, 다른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잠시 멈춰 서서 눈을 높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 밤의 달빛은 결코 잊힐 것 같지 않았다. 영원토록 뇌리에 남을 듯싶었다.
***
열대의 꽃은 화려하고, 남쪽에서 기이한 바람은 맑으며, 농염하게 부푼 달은 눈부셨다. 산천을 꾸밈없이 둘러 누각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야색이 찬연한지라 안주 없이도 술이 술술 넘어갈 듯했다. 그러나 자리 마련한 양주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록흔은 그예 연삽하게 웃고 말았다.
탁.
산만 한 덩치답잖게 진문은 송주 몇 잔에 나가떨어졌고, 밤새자 호언장담했던 은라는 그 곁에서 발개진 볼로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록흔은 곧게 앉아 빈 잔에 물을 채웠다. 벌써 여러 잔, 눈속임으로 따르는 참이었다.
“들어갈까?”
은라가 거듭 내민 잔에 물을 채우던 차, 록흔은 눈귀만 사분히 들었다. 이내, 가륜과 시선이 곧게 닿았다. 지금껏 잔을 돌리기만 했으니 술 생각은 바이없었다.
“…….”
진즉 취했던 것 같았다, 눈빛에 체취에 미소에. 그래서 술이 달지 않았을지도. 록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시간만 끌었군.”
말 지자마자, 곁에 그늘이 생겼다. 고개를 젖혀 보니 다름 아닌 가륜이었다. 록흔은 그대로 압도당했다. 넋까지 굳었으랴, 팔도 다리도 제 것이 아닌 듯싶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녀는 바짝 마른 입술만 감물었다.
“갈증이 나나?”
록흔은 고개만 간신히 저었다.
“움직이지 마라.”
그리 하고프나 불가했다. 록흔은 하릴없이 가륜만을 바라보았다.
“귀엽다, 아예 얼었군.”
“어, 저……. 아니, 폐하!”
부드럽게 들어간 오금, 그곳에 손이 스쳤나 싶었다. 그런데 몸이 달랑 들렸다. 어언간, 록흔은 가륜에게 안긴 채였다.
“내려주세…….”
찰나, 록흔에게서 저도 모를 신음이 샜다. 그 즉시, 가륜이 눈을 상량하게 빛냈다. 그리고 연하게 팬 살갗을 거듭 쓸었다.
“어디 아픈가?”
록흔은 입귀를 비틀었다. 애써 참으려 해도 닿은 곳마다 저릿했다.
“폐하, 내려주세요. 왜 이렇게…….”
혀마저 굳었는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싫다, 이때껏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내려가자.”
심장이 오그라든 듯, 록흔은 조금은 가락거렸다.
“힘드세요. 그러니 그만…….”
가륜에게 록흔은 드나마나 같았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대는 새, 그는 그 고집스러움까지 바짝 조여 안아 버렸다.
“가만있어.”
취했으되 결코 들어 안지는 않았다. 그리 소중하게 여길 존재가 아니니, 사내의 반대편 자리에 있어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가륜은 애틋함으로 록흔을 알았다.
“체면 차리지 마라. 그냥 매달리고 응석 부리면 될걸.”
“하지만 익숙지 않아서,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었다. 록흔은 뒷말은 혀 아래로 사렸다.
“그거야 차분차분 배우면 되겠지.”
많이 기다리셔야 하올 텐데요. 록흔이 눈으로써 하는 말은 몹시 연했다.
“침선 배우는 것만큼 더디겠지?”
가륜이 입귀를 치올리며 물었다. ‘네게 옷을 지으라면 무리겠군’이라 했던가? 일순, 록흔은 다른 말을 겹쳐 들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뜻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젖혔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네 살 닿는 게 좋다. 보드레한 살갗도 말랑한 입술도 기꺼우니, 밑지는 일엔 애당초 눈도 안 떠본다.”
핏기가 확 올랐다. 록흔은 드러난 모든 곳을 도홍으로 붉혔다.
“그러니 그만 꼼작대라.”
어린애를 대하듯 하는 소리가 좋았다. 그예 록흔은 가륜에게 머리를 기대고 온몸을 맡겼다. 귓전을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에 불안스레 뛰던 것이 차분히 갈앉았다. 연하게 늘어진 입술만치, 곱다운 눈도 보드레했다. 눈시울 새, 빛 고운 눈동자가 점점 가리어졌다.
“졸리는군, 그런가?”
이마에서 눈꺼풀에서 록흔은 속삼임을 들었다. 눈을 감았어도 가륜이 뵀다. 실긋 틀린 입귀에 밴 미소가 다스했다.
“아뇨.”
“아니긴, 눈을 감았는데…….”
제 것이 아닌 숨결에 록흔은 눈썹 끝을 떨었다.
“졸리지 않아요.”
록흔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작금은 온몸이 심장 하나였다. 작은 소리도 크게 볼가지고, 미미한 소리도 이명으로 크게 남았다.
“잘 됐다. 오늘 널 재울 생각이 없었거든.”
“예?”
록흔은 눈을 반작 떴다. 목전에 가륜이 있어, 홍채의 동그란 고리까지 그대로 보였다. 암조가 여러 겹으로 번득여 그녀를 그 안에 잡아 놓았다.
“말 그대로 밤새 널 괴롭혀 볼까 생각중이다.”
빙긋 웃는 걸 보면 농인 것도 같고 진지한 어투로 봐서는 진담인 것도 같았다. 이내, 록흔의 눈동자에 떨림이 잗다랗게 일었다.
“진위는 겪어 보면 알겠지.”
저리 가슴 설레게 웃는 사람이 그동안 어찌 얼음인 양 차게 살았을까? 록흔은 아련한 눈으로 가륜을 올려 보았다.
“폐하께서 제게 그러실 리 없다고 말씀드리면……. 그러면 더 웃으실래요?”
록흔이 머뭇대며 하는 말에 가륜이 더욱 깊다랗게 미소 지었다.
“사내란 동물이란다. 믿지 마라, 록흔.”
“…….”
뭔가 대꾸할 말이 더 있었다. 그러나 가륜이 더 높이 안기에 잊고 말았다. 록흔은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았다.
“월우로군.”
달빛 아래, 보얀 이가 사랑스러웠다. 가륜은 나직이 읊조리며 그 연한 뺨에 얼굴을 댔다. 두 팔에 안은 몸이 나긋하고 사분하니 절로 너그러워졌다. 그는 높다란 누각을 한 단 한 단 천천히 내려갔다.
“전하, 상헙니다.”
문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저 바스라질 것 같은 적막뿐이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조심한다 해도 문소리는 컸다. 방 안을 살피자마자, 상허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창문은 활짝 열린 채, 그리고 침상은 비어 있었다. 탁자에 펴진 지도만 팔락거렸다.
“전하!”
상허는 저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어차피 이 주위는 모두 남연인들뿐이니 들어도 상관은 없었다. 그는 한걸음에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드넓은 정원에 우뚝 솟은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준미한 옆모습이 월광을 긋듯 벴다.
“소란스럽군.”
주융이 천천히 돌아서매, 달빛이 그의 등 뒤로부터 산란했다. 상허는 부신 그 빛에 눈귀를 바투 좁혔다.
“전하, 주작도를…….”
강철로 빚었으나, 칼날은 홍옥처럼 짙붉었다. 발도의 여운으로 놈이 잘게 떠는 중, 배게 섰던 솔숲은 스러지고 없었다. 푸르게 뭉개진 것들만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그저 바람 좀 쐬고 있었지.”
답답하신 모양이다. 상허는 어금니를 사리물며 중얼댔다. 그 근원은 벽해에서 만난 여인일 터. 예하와의 일도 잘 됐고 하니 현재로써는 그것이 유일했다. 그는 창턱을 가분히 넘어 주군 곁에 가 섰다.
“이놈들만 된서리를 맞았습니다.”
“그런가?”
발밑에서 올라오는 솔잎향이 진했다.
“율목이 처녀 하나를 데려왔습니다. 하여 전하께 여쭈러 온 길입니다.”
지이잉!
칼끝에서 주작이 울었다. 주융이 떨치는 대로 도(刀)는 밤하늘을 차갑게 깨치고 제 집에 잠겼다.
“몽원에 핀 연.”
심기 불편하니 되었다 야멸치게 내칠 줄 알았다. 그러나 주군은 시구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보드란 말만 했다. 그 은안이 무뎌 보일 지경, 상허는 그예 입만 벙긋댔다.
“아슴아슴 흐렸건만.”
주융은 속눈썹 짙은 그늘에 가리어진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하나하나를 되새겼다. 드맑진 것도 우련 붉던 것도 그녀였다. 잠시잠깐 봤으나, 분명했다.
“월우 지난 자리에.”
상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성도에서 봤던 그림이 떠올라서였다. 사분히 내리뜬 눈, 그것에 그 처녀가 겹쳐 보였다.
“설백으로 맺혔으니.”
“전하, 혹여…… 몽적연과…….”
주융은 상허를 보고 입귀를 치올렸다. 은빛 눈이 선득 빛나매, 하늘에 뜬 달이 무색하게 바랬다.
“상허, 입에 든 혀라도 너 같진 않을 테지. 그래, 내 연이었다.”
방금 전에 선잠 얼핏 들어 뵌 게 그 처녀, 주융은 눈시울을 좁혔다. 그 밤에 처음 본 대로 두 눈 내리떴으나, 곧 눈꺼풀 살폿 들어 그를 보았다. 벽해에서 눈에 담자마자 서슴없이 나간 걸음이 비로소 설명이 됐다. 그녀가 바로 심연이었다.
“전하, 어찌 그런 일이 있습니까?”
남연의 전승에 의하면 진정한 연은 만나지기 전에 봬져, 꿈결에서 먼저 서로를 찾는다 했다. 상허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옛날 얘기라 치부했던 것, 직접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온밤토록 안고 탐할 터.”
주융이 차게 하는 말에 상허는 바짝 굳었다. 주군이 언급하는 바를 알아 어떤 답도 치지 못했다.
“사내구실 못하는 놈이 아닌 바에야 두고 보기만 하랴.”
달이 담긴 눈이었다. 하여 차고 서늘했다.
“아깝군.”
주군이 웃기에 상허는 눈썹만 조금 치올렸다.
“벗이라면 좋았겠지.”
“뉘 말씀입니까, 전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주융은 간곳없고, 상허만 홀로 남아 빈 뜰을 채웠다.
별채는 누각과도 안채와도 멀었다. 방 안 그득 찬 것은 눈부신 달빛, 주렴 드리운 창가에서 실바람이 날았다. 가륜은 록흔을 안은 채로 문턱을 넘었다. 방에 아무도 없으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은라가 뵀다. 꽃잠 드는 곳이라며 동동거리며 신경 써서 꾸몄을 터. 그는 피긋 웃어 버렸다.
“불……, 켜지 마세요.”
록흔이 꺼질듯 잗다랗게 속삭였다. 달빛마저 부끄러운 듯, 가륜은 두 말없이 그녀가 바라는 대로 했다. 둘이 아니라 서넛이 누워도 좋을 만큼 커다란 침상 위라 가냘픈 몸이 더 도드라졌다. 애잔한 마음이 일어 그는 그 곁에 앉아 가는 허리를 감싸 안았다.
“곤한가?”
가륜은 턱으로 록흔의 정수리를 내리눌렀다.
“이리 안고 잘까?”
어찌 호분중랑장으로 부접으로 부렸을까 싶었다. 잔약하게 가는 몸이라 안쓰러웠다. 가륜은 가느다란 팔에서 동그란 어깨로 손을 옮겼다. 한 손에도 차지 못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여자다움이었다.
“……세요.”
“음?”
가륜은 손에 와 감기는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만지다 고개를 들었다. 록흔이 뭐라 중얼거린 듯했다.
“뭐라 했나?”
“머리칼……, 풀어 주세요. 은라부인이 이리저리 솜씨를 부려놔서 도저히 제 손으론. 보이지도 않고, 조금…….”
록흔이 말끝을 흐리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아픈가?”
가륜이 서늘히 어루만지자, 록흔이 눈썹 끝을 조금 폈다.
“예, 이런 걸 어떻게 견디고 사는지…….”
당겨 묶었으니 아마도 발긋할 터. 가륜은 뒤로 물러앉아 록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밑머리로부터 시작해서 머리칼 한 가닥, 천 한 가닥 그렇게 꼬아 땋았다. 검푸르고 반드레해서 실비단 같으니, 살살 더듬어 얽히고설킨 하얀 깁의 끝을 찾아냈다. 그리고 더는 아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풀어 내렸다.
“되게 다쳐도 그저 괜찮다더니.”
가륜이 서글서글하게 하는 말에 록흔이 볼 언저리를 붉혔다. 창으로 들이치는 월우 아래서, 그녀는 마치 교인 같았다. 부드럽게 굴곡져 굽이쳐 흐르는 머리칼이 그처럼 아름다웠다.
“더 풀어 줄 건 없나?”
“예, 폐…….”
머리칼을 쓰는 줄로만 알았다. 가륜의 손이 등 뒤에서 느껴져 록흔은 고개를 반작 들었다. 뒤여밈으로 단단히 동여매 혼자 힘으로는 풀 수 없다 했던가, 그래서 주루성 여인들이 사내에게 사랑을 받는다던……. 갑작스레 은라가 했던 말이 선연하게 돋았다. 억세게 묶어 숨을 들이쉬던 기억, 그리고 그의 손이 매듭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툭.
끈 하나가 풀어졌다. 그리고 록흔의 심장도 조금 내려앉았다. 트임 부분이 조금 열려 하얀 피부가 감질나게 보였다.
툭.
다른 끈 하나가 또 풀렸다. 그리고 천은 조금 더 벌어졌다.
툭.
또 풀렸다. 등이 절반쯤은 드러났다. 실수로 먹물 한 점 떨어뜨린 듯, 새하얀 살갗에 새카만 점이 하나 있었다. 미처 몰랐던 그곳에 가륜은 입술을 댔다.
“……!”
록흔이 소스치자, 어깨에 간신히 걸렸던 옷이 미끄러졌다. 잔약한 어깨에 달빛이 흘러내렸다. 달비는 가는 팔에도 설백빛 가슴에도 보얗게 스몄다.
투둑.
마지막 남았던 끈마저 헐겁게 풀렸다.
탁.
가륜이 움켜쥔 대로, 록흔은 돌아앉았다. 그 바람에 머리칼이 부드럽게 휘늘어져 가슴을 쓸었다. 그 곁이라 작은 것도 크게 닿았다. 그가 결 따라 쓸기에 그녀는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수줍어 움켜쥐니, 얇게 걸친 것이 보드랍게 구겨졌다.
“너 없을 때…….”
아팠다. 눈으로 읽은 말에 힘이 빠졌다. 록흔은 담뿍 그러쥔 것을 놓고 말았다.
“그런데 곁에 있어도 같군.”
가륜이 록흔의 손을 잡았다. 하르르한 깁이 이내 물처럼 흘렀다. 하얗게 벗은 가슴이야 가릴 생각도 못하고, 그녀는 그가 이끄는 대로 했다. 손바닥으로 체온이 박동이 아프게 닿았다. 그의 눈빛에 그녀는 아프게 벴다.
“해동된 것은 제 몫을 못하지. 얼녹아 버걱거리니, 여기가 딱 그렇군. 몹시 아프다.”
달금한 것이 사랑이면 아린 것 또한 사랑, 록흔은 가륜이 하는 말을 심장으로 이해했다.
“우습잖나, 계속 이대로라도 좋다. 그저 기꺼워.”
세상이 두려워한대도, 상처 하나 없으려고. 록흔은 아련한 눈으로 가륜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자신이 그 상처일 수는 없었다.
“폐하…….”
록흔은 가륜을 안았다. 가슴을 거슬러 어깨를 타올라 두 팔로도 모자라는 그 품을 당겨, 생각 많은 그 머리를 쉬게 했다.
“전 속박하는 사랑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폐하께서도…….”
가륜은 록흔이 하는 대로 온전히 맡겼다. 눈귀 자그시 조프리고, 연삽히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 때문에 무얼 잃는 사랑도 하지 마시고, 가슴 아파하지도 마세요. 근심도, 걱정도, 가슴앓이도, 다 제 몫으로…….”
어린 시절 이후, 가륜은 두렵다는 감정은 묻고 살았다. 삶은 또 다른 불구덩이라 심검만 날캄하게 벼렸다. 믿을 자보다 믿지 못할 자가 더 많아 보드랍고 연한 감정일랑 존재조차 잊었거니, 그러나 지금 그것들이 되살았다.
“제게 주세요.”
손대기가 두렵다는 것, 그것 또한 가륜에게 가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록흔으로 인한 것이라 그예 받아들였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날 밤.”
봄볕보다 다사하고 봄바람보다 연했다. 록흔이 달래니, 마음속에 든 것이 얼녹았다. 가륜은 그녀의 품에 그대로 잠겼다. 연삽한 숨결이 그의 뺨을 귓전을 어루만졌다.
“다른 사내의 아낙이니 불가하다 여기면서도 더러운 욕심내어 널 만지려고 했었지. 네 입은 소복에도 다른 생각은 안 했다. 그저 존재치 않은 그 사내였기를 바랐을 뿐.”
가슴이 미어졌다. 그 밤에 가슴이 찢긴 이, 록흔 혼자는 아니었다. 정말 미안했노라, 이 마음도 해졌었노라, 깊이 은애하노니……. 심어는 안어가 되고 또 입술로 닿았다. 그녀는 입술로써 가륜을 달랬다. 서로 다른 둘이나, 작금에는 하나였다.
“…….”
“…….”
살갗이 닿는 여린 소리뿐, 그저 침묵했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안겼던 이가 되레 안았다.
푹신한 포단에 파묻혀 더운 가슴에 단단히 덮여, 록흔은 오롯이 가륜 안에 있었다. 장막처럼 드리운 그의 머리칼 아래서, 그녀는 저를 잊었다. 달꽃인 양 그저 하얗게 개화했다.
“폐…….”
미처 부르지 못하고 손이 잡혔다. 깍지 끼어 속박된 채로 록흔은 가륜을 올려 보았다. 그 입귀가 비긋 틀렸나 싶었다. 그가 날캄하게 눈을 빛냈다. 귓불을 물고 쇄골을 긁어, 그녀는 얕은 숨만 내쉬었다. 자유로이 남은 손으로 얇게 깔린 깁을 그러잡았다. 그의 입술 지나는 대로 손마디만 하얗게 불거졌다.
“……!”
결코 보드랍지 않았다. 쇄골 바로 아래, 잇자국이 선연히 남았다. 실핏줄이 터졌어도 가륜은 그대로 있었다. 다만 혀를 세워 지끈지끈 뛰는 맥을 핥았다.
“폐하…….”
보얗게 부푼 가슴께까지 우련 붉어졌다. 가륜이 이 세운 대로, 아릿한 열감이 스몄다. 록흔은 그예 말은 못하고 입술만 깊게 물었다. 어느덧, 포단 위의 주름이 짙었다. 그녀가 울든 가락거리든 변하는 것은 없었다. 작금, 그는 염이었다. 이대로 태워질 듯했다. 그녀는 아스무레 눈을 감았다.
“록흔.”
분명 저를 부르는 소리였다. 록흔은 눈썹 끝을 잔약하게 떨었다. 그리고 붉은 입술을 살폿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