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85
연록흔 – 85화
‘……?’
까무룩 시들었던 모양, 록흔은 눈을 깜박였다. 뺨에 닿은 게 베개라 하기에는 다습고 부드러웠다. 짧지만 단잠을 잔 듯, 그녀는 제 있는 곳이 어딘지 잠시 헤맸다.
‘……!’
부접들과 함께 머물던 객잔도 아니고, 선잠 들던 호분위국의 집무실도 아니었다. 흐린 눈이 갑자기 맑아져, 록흔은 사위를 살폈다. 창은 아직 어두우나, 새벽이 멀지 않은 듯했다.
다악.
돌아누우려 고개를 조금 틀었는데, 허리가 바짝 당겨졌다. 굵다랗고 억센 팔이라 록흔은 잠시 숨을 멈췄다. 순간, 맑진 눈이 잗다랗게 떨렸다. 그제야 그녀는 곁에 뉘가 있음을 깨달았다.
“고작 그것뿐인가?”
가슴이 우둔우둔 뛰었다. 록흔은 숨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했다. 그린 듯 깎은 듯, 가륜에게 잡힌 채였다.
“제가 잠시 잠이 들어…….”
“그것보단 기진했겠지.”
가륜이 입귀를 실긋 비틀며 보얗게 솟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도홍빛 자국 남은 어깨에 입술을 댔다. 그 즉시 록흔이 아린 소리를 흘렸다.
“폐하…….”
“음.”
봉긋하고 말랑해 어루만지는 대로 따랐다. 가륜은 손에 담은 것을 부드럽게 굴렸다. 그예 록흔이 고개를 젖히더니 입술을 물었다. 달빛 벤 턱선이 아려해, 그는 그것조차 맵차게 그러잡았다.
“못한단 소린 아니겠고.”
“하아…….”
이러다 졸아 없어질지도. 록흔은 속절없이 중얼댔다. 불분명한 소리라 가륜에게는 닿지 않았다. 가분히 들어 올려져 어언간 그녀가 그 위에 있었다. 살 스치매, 입술이 절로 감물어졌다.
“괜찮나?”
바로 부딪치는 시선에는 냉기도 암영도 없었다. 록흔은 저도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사하게 봐 그저 무름해졌다.
“어디 보자.”
록흔이 이내 발그레해졌다. 그 모습이 하양 탐스러워 검남빛 눈이 무겁게 갈앉았다.
“아니, 보지 마세요. 괜찮아요.”
“너, 온몸에 꽃물이 들었는데…….”
가륜은 서슴없었다. 록흔이 몸을 사려도, 목덜미까지 번진 홍조를 부러 느릿하게 쓸었다.
“여기가 짙붉다.”
가륜이 록흔을 깊게 응시했다. 그러자 그 시선에 진홍빛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연한 살갗엔 앗긴 자취가 역력해, 안쓰러울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아픈가?”
열 오른 입술 위로 서늘한 손이 닿았다. 가륜이 어루만져 핏빛이 더 짙어졌다.
“조금…….”
얼굴 붉히는 것, 록흔은 기껍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지 않아도 가륜 앞에서는 절로 그리 됐다. 곱다시 핀 홍조에 그가 입귀를 유하게 늘어뜨렸다.
“이열치열, 이러면 덜 아플지도 모르지.”
부어 도톰한 입술에 상량한 것이 닿았다. 가륜이 달래듯 어루만져 록흔은 아스무레 눈귀를 좁혔다. 앗으려는 입맞춤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늘어졌다. 입술 새로 스미는 숨결이 봄비인 듯 연삽해 터진 자리도 그다지 아린지 몰랐다.
“록흔.”
“……?”
뺨을 부시는 부름에 록흔은 눈만 살폿 들었다.
“멍투성이로군.”
희뿌연 어둠 속에서도 상처는 선연하게 돋았다. 가륜은 발긋하게 피가 몰린 곳을 살살 어루만졌다. 도홍으로 쓸린 가슴도, 문흔 아로새겨진 목덜미도, 잇자국 팬 어깨도……. 가여우면서도 흡족해, 그는 쓰게 웃어 버렸다.
“그래서 더 곱다.”
철들고부터 쥔 것은 검이라 항시 긴장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벼린 가슴에도 꽃씨가 숨었던 모양, 나풋 움 틔워 지금은 봉오리를 맺었다. 아직 애어리나 곧 만개할 터였다. 록흔은 가륜의 품에 잠겼다. 이름 모를 꽃은 아마도 여인이라 불릴 듯, 그녀는 그 연함이 낯설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해가 뜨면, 록흔.”
“예, 폐하.”
그 음성만 들어도 알았다. 세상사 잠시 밀쳐두었을 뿐이니 거슬러 가야 할 터. 록흔은 가륜의 가슴에 뺨을 댔다.
“하지만, 지금은…….”
열 오른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록흔이 흐리게 사린 말에 가륜이 날파랍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를 내리눌렀다. 보얗게 눌린 가슴 위로 커다란 손이 올라앉았다.
“뭐든지라 했지?”
국예에서 약속했던 것이었다. 가륜이 되물어 록흔은 눈만 연삽하게 내리떴다.
“결코 탕감이 안 될 거다.”
“예, 저도 알아…….”
허벅지 새로 내려앉은 묵직함에 록흔은 숨을 멈췄다.
“아니, 짐작조차 마라.”
가륜이 음절마다 끊어 뱉었다.
“하윽!”
짓눌리는 만큼, 록흔은 신음을 깨물었다. 열감이 그녀를 온전히 감쌌다.
사랏.
물결같이 흐른 머리칼이 반드레했다. 뺨에 목덜미에 감기더니, 하얀 깁 위로 늘어지고 헝클어졌다. 가륜이 한 줌 그러잡아, 록흔은 고개를 젖혀 그를 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가까워 서로의 체향이 섞였다. 제각기 지닌 열 또한 섭슬렸다.
타악.
탁.
묵천에서 달이 이울어, 떨어진 높이만큼 창백하게 바랬다. 록흔 역시 설백, 어둠이라 더욱 애잔히 뵀다.
땅, 땅, 따당!
경쾌한 금속성 새로 빨간 불티가 탁탁 튀었다. 메질꾼 셋이서 잘 달군 쇠를 두들기는 중, 팔뚝 근육이 불뚝불뚝 솟으니 커다란 망치가 휙휙 날았다.
타닥타닥!
불 걸게 잡순 화덕님이 화륵화륵 웃었다. 대장장이는 삿자리를 깔고 앉아 방울집게를 다뤘다. 자루가 기다란 것이 슥 움직이니 모루위에 벌건 쇳덩이가 놓였다. 그는 이맛살을 한 번 찌푸리더니 집게로 쇠를 집어 이리저리 모양을 잡았다. 노야장의 등 뒤로 이미 만든 것이 즐비했다. 커다란 쟁기에서 문의 경첩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땅, 땅, 따당!
팍팍팍!
메질꾼들 망치 다루는 소리에 흥이 나서 풀무질 하는 아이가 발풀무를 세게 밟았다. 바람이 쉭쉭 들어가니 화덕 안에 도사린 불이 무섭게 일어섰다. 벽마다 걸린 여러 모양의 쇠 집게마다 붉은 빛이 들쭉날쭉 돋았다.
“낫 갈러 왔소.”
초장부터 낫 가는 이가 왔다. 개시로는 썩 탐탁지 않으나, 대장장이는 별말이 없었다. 그래도 재수 없는 고양이가 뛰어 들어오거나, 계집이 설쳐대는 것보다는 나았다.
“저쪽으로 가보슈.”
메질하던 이 중에 가장 노련한 이가 고갯짓을 했다. 사내는 많이 해본 듯, 구석진 자리에 놓인 숫돌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 손을 탄만큼 황갈색 돌은 많이도 닳아 있었다.
“그나저나, 철장께선 재 너머 단철장 이야기 들으셨남?”
쓱쓱 날 세우는 소리 중간 중간, 사내가 대장장이에게 말을 걸었다. 심부름하던 아이가 호기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저치는 재미난 이야기꺼리를 물고 와 올 때마다 심심찮았던 것이다.
“뭔 소리요?”
풀무질하던 청년이 껴들었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말없이 담금질만 했다. 구유 모양으로 나무를 반 가른 물통 안에서 쇠가 식었다. 치직치직 소리 끝에 뿌연 김이 올랐다. 큰 메, 작은 메, 중간 메, 망치 머리에도 희부연 기가 잠시 어렸다.
“금철장께선 저희 철장 어른하고 태단야로 같이 일하셨습니다. 무슨 일인지요?”
메질꾼 중 가장 어린 이가 공손히 묻자, 사내가 낫 갈던 손을 멈추고 제 턱을 문질렀다.
“아, 자네한테 그리 들었던 기억이 나서 말이야. 내 엊저녁에 뭘 보았냐면…….”
태단야. 그것은 대장장이들이 일생의 소원으로 아는 자리였다. 공부에서 거느린 오천 철장 중에 가장 솜씨가 으뜸이라, 녹도 상당히 받았다. 이곳의 명철장도 저 너머 금철장도 모두 이제는 관직에서 물러난 참, 호미를 벼리고 낫을 벼르는 삶이었다.
치익, 칙!
명철장은 못 들은 체하고 낫을 다시 물에 담갔다. 날 부분만 살짝살짝 넣었다 꺼냈으니 썩 예리할 듯싶었다.
“예 어르신하고 게 어르신하고 사이가 틀어진 건 나도 아오만. 어제 새벽에 그 어른이 사라졌다지 뭐요?”
차앙!
벼르던 낫날이 툭 떨어졌다.
“도위들도 여럿 왔다가고, 거기 지금 시끌벅적해요. 납치당한 것 같다지 뭐요. 사람은 온데간데없는데 화덕은 잘 살아있고, 모루에 칼날도 그대로고.”
사내가 다소 흥분해서 하는 소리에 모두들 일손을 놓았다. 그리고 철장의 표정을 살폈다. 자식 혼사 문제로 틀어지기는 하였으나, 두 어르신이 전에는 둘도 없는 벗이었다.
“예하 놈들이 몇 번 와서 행패를 부렸다고 하고. 아주 소문이 흉흉합디다.”
명철장이 서둘러 일어섰다. 그리고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어르신!”
“내 잠시 다녀오마.”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다, 일 봐라.”
평생 제가 벼려온 쇠붙이 같던 사람이 지금은 낯빛이 허옜다. 명철장이 허위허위 나가고 난 뒤, 철작방은 그야말로 적막했다. 화덕의 불만 활활 살아, 사람들을 붉게 데워 놓았다.
거울에 비친 건 생경했다. 분명 제 얼굴인데 왠지 모르게 설었다. 록흔은 그 앞으로 가깝게 다가서 입술을 가만 쓸어 보았다. 터지고 부푼 자리가 은상에서와 비슷했다. 제대로 피었다던가? 조금 전에 뒤채에서 은라를 만나서 들은 소리였다. 온천에서 나오던 길이라 그나마 다행, 아마 그 안이었다면 숨김없이 보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젠.’
몸 여기저기 발긋하게 상한 데가 많았다. 록흔은 저도 몰래 입술을 물었다. 사랑으로 핀 꽃이라 은라가 기꺼워하던 것, 햇빛이 스며 더 새뜻하게 돋았다. 왜일까? 가슴이 벅차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잔약함이 섧기도 했다. 그녀는 잘 갈무리해 두었던 깁을 들어 올려 가슴께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 능숙하게 동여맸다.
‘……!’
녹옥발이 차랑 하고 흔들렸다. 록흔은 흠칫 놀라 손을 멈췄다. 거울에 뵈는 것은 없었다. 아마도 은라인 모양, 상한 곳에 잘 드는 연고를 가져다 준다 했었다.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숙여 깁을 단단히 당겨 맸다.
“부인, 부러 그러지 않으셔도…….”
두어 마디 하다 록흔은 입을 다물었다.
“선사 받는 것이면 풀어 본다 기대도 하겠다만.”
귓전을 베는 소리에 친친 동여 싸맨 가슴이 우둔거렸다. 록흔은 어언간 귓불을 붉혔다.
“폐하.”
록흔이 놀라 굳은 것도 순간, 가륜이 다가온 것도 순간이었다. 검남빛 날캄한 동공 안, 하얗게 곱다운 동인이 그득했다.
“이런 건 재미없잖나.”
얼결에 록흔은 손에 쥔 것을 뺏겼다. 깁의 끝은 이미 가륜이 그러잡고 있었다.
“그만두라 했을 텐데.”
“오늘 떠난다 하셔서, 제가…….”
가륜이 곧게 보아, 록흔은 혀끝을 떨고 말았다.
“그랬었지. 그런데 무슨 상관인가?”
“아직은…….”
“아직은?”
되물으나, 명백한 질책이었다. 록흔은 맑진 눈으로 가륜을 올려 봤다. 그리고 사린 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은 황성 밖입니다.”
마주 닿는 시선이 어느 겨울 삭풍에 되게 일어선 상고대처럼 찼다. 그러나 록흔은 설검을 물리지 않았다.
“폐하를 단독으로 모시고 나왔으니, 태화성에 도착할 때까지는 제 소임입니다.”
“그러면 그 후엔?”
가륜이 입귀를 실긋 틀었다.
“…….”
“그만둘 텐가?”
천이 아스러지는 소리가 유난스레 컸다. 가륜이 깁을 바투 당겨, 록흔은 옴쭉도 못하고 끌려갔다. 젖은 머리칼이 그녀의 뺨에 곡선으로 떨어졌다.
“천생 꽃인데, 속은 야물기도 하지.”
“아니요, 다만.”
가륜은 록흔을 들여다보았다. 딸에게서 어미를 보니 그 피의 흐름을 알 듯도 했다. 이리 연하고 이리 고와 사내라면 뉘든 바랄 터였다. 한아히 드맑은 눈에 서럽게 진 어느 여인이 언뜻 비췄다. 마뜩찮아 그는 눈귀를 서늘히 좁혔다.
“폐하께서 주신 패 거두실 때까지 저는 호분중랑장입니다.”
“지금 당장 앗는다면 어쩌려고?”
받을 때는 기껍지 않았던 것. 그러나 이젠 바로 저였다. 인간 연록흔은 호분중랑장, 작금도 가륜이 바라는 모습보다 그것이 더 뚜렷했다. 멀지 않은 일인 줄은 알았건만, 떨어진 하문은 야멸쳤다. 그녀는 올곧은 눈으로 그를 올려 봤다.
“지금……인지요?”
대저 사람이란 두 부류라 봐도 좋았다. 비단으로 감고 보화로 싼 삶을 좇거나, 힘들어도 마음칼 일어선 대로 행하거나……. 록흔은 후자였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으려 하는. 가륜은 깊게 보다 그예 입귀를 우그렸다. 저런 뻣뻣함이 더 고우니 이리 좨치는 게 언어도단인지도 몰랐다.
“부접에겐 뭐라 할 텐가?”
록흔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형제처럼 여겨온 수하들, 그들 앞에 여인으로 나서는 게 얼마간은 두려웠다. 저를 향해 오롯이 떨어지던 신뢰를 잃는다는 것 또한 가슴 한 켠의 먹먹함이었다.
“…….”
“해신전에서 답했잖나.”
“예, 잊지 않았어요.”
동그라니 하얀 어깨에 가륜은 손을 올려놨다. 그리고 깁 쥔 손에 힘을 바투 주었다. 둘 새, 한 치 틈도 없이 가까웠다. 그는 고개를 숙여 보얗게 꽃솜 돋은 귓불에 나직하게 읊조렸다.
“좌천시켰다 말할까?”
록흔이 눈귀를 살풋 떨었다.
“고도로 유배 보냈다 둘러댈까?”
가륜이 비틀린 미소로 록흔을 을렀다.
“아니지, 그리 말하면 상관을 좇아 유배 가련다 할지도 모르겠군.”
“폐하…….”
그동안의 도타움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터. 록흔은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록흔, 너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무관이다.”
“…….”
“인정하마, 네 날개를 꺾으려는 것이지.”
발겨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보드란 천끼리 사락사락 스쳤다. 가륜이 두르는 대로 설백으로 빛나던 것들이 가려졌다. 남복하여 가슴을 싸매는 것을 마뜩찮아 하더니, 지금은 그가 선선히 깁을 묶었다. 의외로운 일이라 록흔은 번히 보기만 했다. 몇 번 휘돌아진 끝에 심장 이 뛰는 바로 위에서 매듭이 지어졌다. 그녀는 더 깊다란 곳을 묶인 듯해 잠시 숨을 멈췄다.
“적잖이 버린 만큼.”
“아니요, 폐하.”
뉘가 들으면 웃을 터. 서로 오르지 못해 살천스런 자리였다. 록흔은 고개를 가만 저었다. 남들은 크나큰 것을 얻었다 할 텐데, 가륜은 그녀를 그리 살폈다.
“채워 줄 테니.”
“그렇지…….”
“애운해 마라.”
커다란 손 안, 보얀 얼굴이 담겼다.
“…….”
태화성 넓은 뜰보다 오롯이 작은 뜰이 더 기껍고, 높다란 자리보다 나지막한 자리가 더 편했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 가륜이 없다면 공허할 터였다. 록흔은 그가 어루만지는 대로 뺨을 기울였다. 가슴이 녹진하게 녹아내려 묵직했다. 무지근한 심통에 그녀는 입술을 자그시 물었다.
“하지만 넉넉히는 못 준다.”
“예, 폐하.”
“아주 잠시.”
“예.”
이제는 예살을 입고 사내보다 더 강하게 눈빛을 세울 때. 록흔이 지켜야 할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녀는 심장의 무게에 짓눌려 고개를 숙였다. 머리칼이 바로 흘러 얼굴을 가려, 그 새로 숨은 달이 금빛으로 반작 빛났다.
차라랑!
녹옥빛이 산산이 깨졌다.
“들어가도 돼요?”
조금은 달뜬 목소리였다. 록흔이 서둘러 상의를 걸치는데, 대답 떨어지기 전에 은라가 들어왔다.
“아침 준비 다 됐어요.”
둘을 보는 눈이 밝았다. 윤이 하르르한 게 개구쟁이 아인 듯했다.
“어머, 내가 눈치가 없어서. 록흔, 그런데 그게…….”
은라가 록흔을 보더니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륜, 도대체!”
연고 가져다 준다는 핑계로 들어온 참이었다. 은라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결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그것 때문에 부러 왔나?”
“아니, 어, 그러니까…….”
유들유들 재잘대는 은라라도 가륜 앞에서는 굳을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사늘히 하는 말에는 얼결에 얼고 말았다.
“너답잖군.”
벗의 아내이기에 앞서 벗이었다. 가륜이 툭 뱉으니, 은라가 비로소 제 낯을 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머뭇거리기는 했다.
“아무튼 남복은 이제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닌가요?”
분명 선을 긋는 어조여서 더는 팔 수가 없었다. 은라는 가륜 대신 록흔을 봤다.
“움직이기엔 이편이 낫습니다.”
“하지만, 륜이 곁에서…….”
그래, 그랬지. 은라는 하려던 말은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올곧고 예바른 록흔이 할 법한 말, 그래서 가륜이 곁을 내준 것이다. 뉘보다 강한 이라도 지키고자 하니, 그게 바로 나름의 사랑이었다. 그녀는 쥐고 있던 약을 비죽 내밀었다.
“내가 오지랖이 좀 넓어서. 입성이란 건 몸을 싸고 가리는 것인데, 뭘 입든 그게 대순가요? 어쨌든 록흔은 같은 사람이잖아요.”
록흔은 그예 눈으로 웃었다. 해사한 볼이 귀염 있게 우묵 팼다. 그러나 미소는 은라에게 섧게 닿았다.
“어쩜 좋아…….”
은라가 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 록흔을 바짝 끌어안았다.
“벌써부터 이리 아쉬운데, 보고 싶을 거예요.”
어머니란 이런 것인가? 은라의 품은 몹시 다스했다. 록흔은 새삼스레 느꼈다. 저를 감싼 팔이 한없이 낙낙하고 포근했다. 미처 몰랐던 것이라 눈귀가 아스무레 좁혀졌다.
“꼭 다시…….”
은라가 울먹대는데, 주렴이 걷혔다.
“이런.”
진문이 문가에서 혀를 찼다.
“웬 눈물바람이야, 당신.”
“하지만 록흔하고 헤어지려니 서운해서…….”
“곧 볼 건데. 적당히 해두라고.”
은라가 코맹맹이 소리를 하자, 진문이 벙긋 웃었다.
“응? 진문, 무슨 말이에요?”
“글쎄. 연랑, 어서 아침 드셔야지요.”
“가군, 설마?”
“은평아, 은약아!”
“아니! 왜 말을 제대로 안 해요?”
“륜, 어서 가지.”
진문이 어영부영 말을 다른 데로 돌리자 은라가 눈을 상크랗게 치떴다.
“어서 말해요, 진문!”
“다 식었겠어. 여보, 다시 데워야지?”
커다란 진문이 녹옥 주렴 새로 나가고, 조그만 은라가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랐다. 그제야 록흔은 가륜을 향해 돌아섰다. 그를 향한 눈동자는 이 아침에 연빛으로 바래 있었다.
“저런 삶도 좋겠지.”
드맑은 눈 안, 파문이 잗다랗게 일었다.
“예, 폐하. 하지만 마음 죽은 곳이면 무릉도원인들 기꺼울까요?”
검남빛 눈 안, 칼금이 날파랗게 일었다.
“마음 산 곳이면 어디라 마다할까요.”
도홍빛 입술이 연삽하게 다물렸다.
“네가 저어하는 자리라도?”
준미한 입술이 직선으로 다물렸다.
“예.”
“강호가 아니어도?”
“예, 폐하.”
반지레한 머리칼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곧 가륜에게 한 움큼 잡혀 그 위로 햇빛이 말갛게 부서졌다. 서로를 눈으로 품어, 다슨 빛이 감돌았다. 주렴 너머에서 뉘가 부르든 이 방 안의 시간은 멈춘 듯했다.
***
황룡의 거리는 아름다웠다. 오채 맑은 자기 조각으로 맵자하게 짜 맞춘 어느 주루의 둥근 지붕도, 상감기법으로 새기고 채운 돌담의 기왓장도, 푸른 화초 우거진 양 길도, 수레 지나는 대로도…… 어느 것 하나 곱지 않은 것이 없어, 부드럽게 휘늘어진 뒷거리의 빨래마저도 구차하지 않았다. 남의 것이 더 커 보인다 했던가? 주융은 궁형의 창 너머로 비치는 것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저 아래에서 허리 가는 어느 처녀가 지나다 그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홍조 짙어지매, 비딱한 미소가 사내다운 입귀에 잠시 걸렸다 사라졌다.
“대인, 표국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들어와라.”
상허와 함께 사내 둘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운해표국, 표두 대백입니다.”
먼저 들어선 이가 공손히 읍했다. 그러나 주융은 그 뒤에 선 사내를 보았다. 일별에도 훤칠하고 눈이 예리해, 범상은 아니었다. 그는 눈을 가늘이다 고갯짓을 짧게 했다. 사내 역시 고개 한 번 까닥했을 뿐이었다.
“상총관.”
“예, 대인.”
주융은 황룡에서 꽤 높은 거상인 체했다. 실제로 그가 부리는 수하들이 장성의 거리에 크고 작은 전포를 지녀 영 거짓도 아니었다. 그는 상허를 굽어보았다. 저나 이놈이나 꾸밈새가 그럴 듯해 보였다. 여러 인종이 모이는 대국의 번화가라 이스펠이나 현국에서도 몰리는 상인들이 많아, 그중 하나인 듯 행동하니 지금껏 무얼 해도 묻히고 썩 수월했다.
“물건에 대해선 일렀나?”
“예, 대인.”
“건네라.”
말 떨어지자마자, 상허가 자개로 보얗게 꾸민 나전 함을 하나 꺼냈다. 즉시 대백이 공손히 받잡으니 보기보다는 묵직해 굵다란 두 팔이 조금 휘청거렸다.
“저희 총표두께서 주남으로 출타 중이시라 대신 받잡습니다.”
대백 곁에서 함께 온 그 사내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보수가 든 상자를 곁눈으로 흘끗 보더니, 바로 주융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개 표사답지 않게 번득이는 눈빛이 녹록찮았다. 장담컨대, 저 표두의 수하는 아니었다.
“통성명이나 하지.”
주융이 꺼낸 말에 상허가 질겁했다. 그러나 속으로만 그런 것이라 거무튀튀한 얼굴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맞은편의 사내 역시 눈귀만 조금 좁혔을 뿐이다.
“조융이오. 장사치지.”
주융이 댄 거짓 이름에 상허는 눈을 치떴다. 주(周)자 앞에 왕(王)자를 붙여 신분을 숨긴다라……. 주군다운 글자놀이라 과연 이 상황에 맞게 뜻이 잘 통했다.
“전산청이요, 보다시피.”
사내는 어깻짓으로 대백을 가리켰다.
“조대인, 제 벗입니다. 따로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대백은 사람 좋게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산청이 본디 성을 이야기하지 않고 꾸며 말하니, 필시 무언가 곡절이 있는 듯싶었다. 그러나 호기심 따위야 대강 쓸어 덮었다. 선불이 이리 후하니 챙길 것은 따로 있었다.
“전할 곳은 어딘지요? 남연임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 함에 들었소.”
“예, 대인.”
대백은 대꾸하면서 함을 바투 안았다. 이번 의뢰인은 겹겹이 싼 게 많았다. 비밀스러우니 산청이 저리 되되하게 구는 모양이었다.
“그럼, 일 끝나면 다시 뵙겠습니다.”
“사람 상하면, 그 값도 후하게 쳐줄 테니 잘 부탁합니다.”
상허가 되짚자 대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량에 들러 남연에 물건을 전하면 되는 것, 다소 원행이기는 하나 으레 있는 일이었다. 그는 함을 어깨에 지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턱짓으로 산청을 재촉했다.
“전협.”
산청은 부르는 소리에 돌아섰다. 거울처럼 밝은 두 눈이 그를 향해 있었다.
“표국 일이 지루커든, 우리 상단에 오시오.”
“글쎄…….”
뉘를 거두려는, 밑에 두고픈…… 그런 빛이었다. 불쾌하기보다는 궁금했다. 이내 산청은 씩 웃어 버렸다. 들이친 햇발에 하얀 이가 동물처럼 반작였다.
“서운케 안 할 테니.”
상허는 눈살을 세웠다. 흑량에서도 홍묵에게 저런 빛 보이시더니, 지금도 그랬다. 퍼렇게 날 선 은안이나, 웃음이 묻어 있었다. 그는 주군과 표사를 번갈아 보았다. 마른침을 삼키니 험히 째진 상처가 크게 도드라졌다.
“귀 상단이, 무얼 파는지 모르겠소만.”
“이것저것 되는대로.”
“아아, 표사 노릇 지겨워지면.”
산청은 두 손을 활짝 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비록 웃기는 하나 눈빛은 어디에도 빈틈이 없었다.
“생각해 봅시다.”
주융이 고개를 끄덕이매, 산청 역시 눈인사를 했다.
“살펴 가십시오.”
상허가 인사를 닦자마자, 문이 여닫혔다. 아래로 떨어지는 발소리가 점점 여려졌다. 주융은 다시 창가로 다가가 거리를 내려 보았다. 말 두 필이 한가롭게 여물을 먹고 있었다. 비밀리에 왔는지 운해의 표사들은 따로 뵈지 않았다.
“상허, 네 보기엔 어떠냐?”
“전산청이란 자 말씀인지요.”
주융은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호기롭고 사내다운 게, 무공깨나 높을 듯합니다. 눈빛도 좋고 전하께서 거두셔도 썩 좋지 않을까 하는데요.”
“뢰검이라 들어 봤나?”
“그거야 뢰검이라 하면 저도 들어 아옵니다. 창해표국 총표두 왕산청…….”
거기까지 말하다 상허는 말끝을 흐렸다. 뢰검 왕산청, 진즉 그 생각을 못했다니. 주군이 성을 숨겼듯, 저자 또한 그런 것이다. 그 눈이 얕지 않으니 혀가 절로 내둘러졌다.
“내가 뉘인가 알아채진 못한 것 같다. 다소 수상히 여기기는 하더라만.”
상허는 저도 몰래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얼른 주군의 안색부터 살폈다. 번득이는 그 눈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황룡은 드넓고, 거둘 이도 많으니. 상허, 배가 고프다.”
“전하…….”
“시샘 마라, 네가 제일이니.”
“그리 말씀 안 하셔도, 이놈…… 압니다.”
상허가 정색하며 하는 말에 주융은 입꼬리를 들었다.
“선사할 것은 확인했나?”
“예. 어젯밤에 전서구가 왔습니다.”
토판의 밀림에는 잔독한 것들이 많이 사나, 그중 황마가 제일이랬다. 주융은 놈을 넘기며 낯빛 검은 상고배가 으쓱해하던 것을 떠올렸다. 으뜸이든 버금이든 알 바 아니니, 낙수가 바위를 깎듯 목숨도 그리 시나브로 깎으면 됐다.
“전하, 그 뉘도 모를 겁니다.”
주융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창에 비스듬히 기대 눈을 내렸다. 막 대백이 말 등에 함을 싣고 있었다. 떨어지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묵중하게 읍했다.
다각다각.
다각.
편자 소리가 맑게 부서졌다. 주융은 휘늘어진 버들 새로 가려지는 인영을 보았다. 폭풍 전야인 양, 은빛 눈이 점점 어두워졌다.
다각.
다각다각.
“산청.”
“음.”
“왜 전가라 했나?”
“그야, 놈이 속이기에.”
“뭐?”
함의 무게만큼 말 잔등이 묵직했다. 대백은 고삐를 짧게 잡고 벗을 돌아보았다.
“그 수하 놀라는 걸 못 봤군.”
“글쎄, 나는 별다른 건…….”
여름 거리는 푸르고 하늘거렸다. 나뭇잎도 그렇고 얇게 휘늘어진 휘장도 그랬다. 산청은 턱밑을 쓸다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친구를 흘긋 보았다.
“자네야 두둑한 자개함만 봤겠지. 두억시니 같은 그놈, 조융이란 소리에 눈귀가 살짝 떨렸거든.”
겪을수록 귀신같은 친구였다. 대백은 고개를 내젓다가 한쪽으로 처지려는 함을 바로 잡았다.
“먹이랬던가?”
“특별한 것이라 손 탈까 저어된다고. 작은 물건 옮기는 것치곤 참으로 후하군.”
“홍묵장께서 만드신 건가?”
“아니, 갈묵장 거라는데.”
갈묵이라는 말에 산청은 입귀를 일그러뜨렸다. 얼핏 어렸다 사라진 것은 조소였다.
“소인배가 만든 것이면 깨끗한 물건이 아닐 터. 대백, 몸조심하게. 사람 나고 돈 났잖은가.”
산청은 야로는 질색이었다. 제가 하는 것은 재미로우나 남이 하는 것은 봐주고 싶지 않으니, 이번 의뢰가 창해로 왔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흑량의 갈가라면 손속은 좋으나 심보가 좋지 않은 이였다. 썩은 것에 파리가 꼬이니 엮여 좋을 일은 하나 없었다. 그는 픽 웃다가 갑작스레 눈귀를 바짝 좁혔다.
“걱정 마라,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 어, 이봐. 산청!”
대백은 부르다 말고 산청이 쫓는 것을 보았다. 먼눈으로 푸른 옷자락이 얼핏 스쳤다. 길은 꺾어져 이미 벗도 그 앞의 것도 존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