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86
연록흔 – 86화
근 두 달 만이었다. 이 아침의 황제는 더 강하고 높았다. 광세전은 으레 그랬듯 틈 없이 돌아가, 대신들은 제 소임을 하느라 바짝 날이 서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나 그 공백이 무색했다. 아마도 암행을 다녀오셨을 터, 어쨌거나 일일만기의 일상은 여전했다. 광휘 찬란한 용상 위에서 황제는 각 지방에서 올라온 사안들을 처리하고 백관의 의견을 들었다. 날파랍고 날캄한 봉안, 그 빛이 선득하게 그들의 담을 저몄다.
“폐하, 동주에 큰비가 내려 피해가 막심하다 하옵니다. 진강이 범람하여 논밭을 뒤덮은 지 만 하루가 넘었으며, 수재민들이 속속 고향을 떠나고 있다고도 하옵고…….”
이른 새벽에 급히 파발로 올라온 것이다. 좌승상 오인황이 푸르게 말린 것을 펴 받쳐 들자, 하신이 다가가 용반에 담았다. 그가 오갈 때마다 금빛 됫박에서 황금 해시계에서 빛이 눈부시게 깨졌다.
탁.
황제의 시선이 종이를 스친 것도 순간, 종이가 접힌 것도 순간이었다.
“좌승상.”
“예, 폐하.”
그저 부르는 소리일진대, 저 아래서 듣는 이들은 등골이 사늘했다.
“진강의 제방은 누가 쌓았는가? 그자를 벌해야겠군.”
의외로운 하문에 오인황은 말문이 막혔다. 진강의 천 리가 넘는 제방은 유사 이래로 있어 왔던 것으로 그 시원이 명확하지 않았다. 주옹이 쌓았다 하나 전설이라 봐야 옳았다. 그런즉슨, 그 제방을 누가 쌓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긴 세월 동안 붕퇴되면 고치고, 일그러지면 채워 넣은 것……. 계속되는 보수로 무탈하던 것이 작금에 터져 그를 진땀나게 했다.
“폐하…….”
오인황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황제는 제방의 기원을 하문하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제방 개축을 책임진 이가 누구인지 밝히라는 것이었다.
“황공하옵게도 폐하……, 소신 무능하와 알지 못하옵니다. 용서하소서.”
가륜이 눈썹을 치올렸다. 준미한 입귀가 실긋 비틀어지매, 바라보는 이로서는 난감했다. 식은땀이 숫제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오인황은 허리를 더욱 깊다랗게 숙였다.
“그렇다면 우승상은 아는가?”
우승상에서 멎기를. 조정대신 모두 제 차례는 바라지 않았다. 부디 갈우휘가 황상께서 내리신 하문에 비듬한 답이라도 했으면. 지혜롭고 강직하니, 그늘이라도 하나 쳐줄 터. 그들 소망처럼 우승상은 오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공손히 들고 황제를 올려 보고 있었다.
“그것은 담당자가 아옵니다.”
갈우휘의 목소리는 몹시 맑았다.
“담당자라……. 우승상, 그 담당자란 뉜가?”
가륜이 살천스레 되묻자, 대신들 대부분은 자라목이 되었다. 저런 우답이라니, 우승상 영감 딱도 하군. 저마다 눈빛으로 수군댔다.
“폐하께서 만약 법에 대해 알고자 하신다면 정위와 고율사에게 물으시고 출납에 대한 것은 호부의 회계사에게 물으십시오. 제방의 건축일이라면 공부의 수부낭중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옵니다.”
갈우휘의 대답에 가륜이 눈을 가늘였다. 그 안에 담긴 찬별만큼 떨어진 용음 역시 상량했다.
“다들 제 소임을 챙긴다니 묻지. 그렇다면 우승상이 담당하는 바는 무엇인가?”
서릿발 같은 어조라 듣는 이마다 손끝이 차갑게 굳고, 오금이 저렸다. 그러나 갈우휘는 동요치 않았다. 머리를 깊숙이 조아리며 진중한 음성으로 용상을 향해 사뢔 올렸다.
“송괴하옵니다, 폐하. 신이 우둔하여 그런 우답을 올렸습니다. 무릇 재상이란 자가 하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위로는 황제 폐하를 모시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억지 없이 따르도록 하고, 공경대부들이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 있게 돕는 것뿐입니다. 그리해야 천지가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인가 하옵니다. 신 무능하니 그저 황감할 따름입니다. 폐하, 신을 용서하소서.”
충신에겐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다만 황제를 향한 충심만큼 허리를 깊게 숙여 늙은 그 몸을 낮췄을 뿐이다. 대신들은 바짝 얼어 조심스레 용안을 살폈다. 그러나 놀랍게도 황제는 웃고 있었다. 빛접은 입매가 얼마간은 부드러워, 야멸친 빛은 잠시 사위었다. 저런 미소 손에 꼽아도 좋을 정도라 그들 모두 번히 보기만 했다.
“우승상 말이 맞소. 무위하여 다스리는 게 가장 좋은 정치겠지. 그대 같은 현신이 있으니 내 마음이 흡족하군.”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칭예가 떨어지자, 갈우휘가 더욱 몸을 낮췄다. 그예 가륜의 미소가 좀 더 깊다래졌다. 그보다 아래서 태사 선우지천 또한 주름진 입귀를 보드랍게 늘였다.
“좌승상은 수부낭중을 따로 불러 개축 공사 시 비리가 없었는지 알아내어 보고 올리라. 또한 우승상은 양곡을 풀어 이재민을 구휼토록 하라.”
“예, 폐하. 명하신 대로 거행하겠나이다.”
두 재상이 입을 모아 대답하자, 나머지 대신들도 함께 머리를 조아렸다.
“다음 건은?”
“폐하…….”
갈우휘가 다시 공손히 읍하고 나섰다. 진중하게 사뢰는 말에 충직한 그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팼다.
“……하여, 소신은…….”
굵직하고 잗다란 국정이 몇 건 더 오간 후, 가륜은 용상에서 일어섰다. 대외적으로 시급한 사안은 대강 끝났으나, 아직 안의 문제가 남았다. 자리를 떨치자마자 하신이 바로 와서 시립했다. 진과 역시 그를 따랐다.
“인녕전으로.”
“존명.”
하신은 구부정한 허리를 더욱 숙이며 그동안 하지 못한 두 글자를 기쁘게 말했다.
“이공공, 별다른 일은?”
“태사대인과 좌우승상대인께서 무리 없이 하셨습니다만, 아무래도 인녕전은…….”
얼녹은 눈이 다시 서늘해졌다. 가륜의 어깨 아래, 대신들은 감히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두 손만 맞잡고 있었다.
“이공공, 계속 하라.”
“예, 폐하. 태후마마께서 가리고 가리시어 초간택은 마무리 지어졌고, 탈락한 열둘은 고향으로 돌아간 지 이레가 되었습니다.”
가륜은 더는 묻지 않았다. 걷는 걸음마다 화가 묻은 듯, 그는 드넓은 정전을 성큼 지났다. 대신들이 더욱 몸을 낮추니 곡령대수마다 축축 늘어졌다.
인녕전의 하루는 차를 따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인혜태후는 찻잔에 동실 뜬 찻잎을 바라보았다. 저 푸름이 연함이 눈앞에 벌여 앉은 처녀들인 것 같아 눈귀에 잡힌 미소가 깊어졌다. 꽃인 듯 곱고 향기로운 스물넷, 초간택은 이미 끝이 났다. 황상께서 저 중 하나와 가연 맺으실 터. 태어날 증손 생각에, 그로 인한 웃음의 무게로, 곱게 늙은 눈시울이 거의 맞닿았다.
“오늘 아침은 다들 더 고와 보입니다. 어서 들지요.”
가리고 가려 뽑은 보옥이나 그중에도 더 탐스러운 게 있었다. 태후는 잔을 받쳐 잡고 자애로운 눈으로 처녀들을 굽어보았다. 사실상, 심중에는 재간택 대상이 정해져 있었다.
“예, 태후마마.”
저마다 섬섬옥수로 막 찻잔을 들었을 때였다. 문 밖을 지키고 섰던 상궁이 황제 폐하께서 곧 납신다 낭랑히 아뢨다.
“오오, 이런!”
태후는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 두 달만이라 몹시 반가워 체통은 잠시 잊었다. 그녀보다 낮게 앉았던 처녀들도 조심스레 시립했다. 동요는 조용하면서도 격했다. 그니들 모두 홍안이 되었으나, 개중 도홧빛이 더 짙은 이들이 있었다. 몹시 설레 문만 치어다보는데, 인녕전 큰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이어 들이친 빛접고 준수한 인영에 여린 가슴마다 도곤도곤 뛰었다.
“오, 황상. 어서 오세요. 그간 강녕하셨지요?”
가륜은 심화는 잠시 눌렀다. 서조모가 항시 그러듯 두 팔 벌려 반겨주기에 실긋 웃어 주었다. 준미한 그 모습에 닿는 여심마다 무름하게 녹아내렸다.
“할머님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이 할미야 잘 지냈지요. 어인 일로 이곳까지 오셨나요? 이곳 오시는 건 마다하시더니…….”
“저 없이도, 할머님께서 잘 하셨잖습니까?”
태후는 적잖이 당황했다. 비록 자신이 황상께서 황후 간택을 탐탁지 않게 여김을 집어 말하긴 했으나, 돌아온 답이 예상 외로 찼다. 드러내지 않아도 뵈니, 분명 책망에 가까웠다. 그녀는 재빨리 용안을 살폈다.
“초간택이 끝났다 하더군요.”
가륜이 처녀들을 무심히 훑었다. 그가 보는 곳마다 홍조가 일어, 어떤 이는 목덜미까지 발갰다.
“그랬지요. 이 할미가 심사숙고하여…….”
태후가 더듬대자, 가륜이 날파란 시선을 그니에게 되돌렸다.
“할머님.”
부르는 소리가 선득하게 찼다.
“예, 황상.”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용안이 범상치 않았다. 태후는 어언간 고개를 끄덕이고 처녀들을 향해 돌아섰다.
“모두들, 반 시진 뒤에 친잠원에서 봅시다.”
“예, 태후마마.”
안개인 듯 아지랑이인 듯 처녀들은 사분하게 곱다랗게 물러나갔다. 비단자락 스치는 소리가 아스란데, 태후는 적잖이 불안했다. 무엇이 황상의 심기를 거슬렸는지 도시 알 수가 없었다. 하여 그리 좋아하는 누에 거두는 일도 작금엔 그저 멀기만 했다. 중화원이 내다보이는 창가에서 둘은 오롯이 마주 앉았다. 상궁이 새로 차를 올릴 때까지 사위는 그저 고즈넉했다.
“황상, 민정을 두루 살피시고 오셨습니까?”
침묵이 버거워 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돌아오셨단 말은 들었습니다. 너무 늦게 오셔서 이 할미가 찾아뵙지를 못했군요.”
“별말씀을요. 그보다 할머님…….”
맑은 소리 깨치며 찻잔 뚜껑이 열렸다. 향을 음미하는 듯, 가륜이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나 실상은 차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말씀하세요, 황상.”
“재간택은 순조롭습니까?”
태후는 가슴을 조금은 쓸어내렸다. 비록 용안에 일말의 관심도 뵈지 않았지만, 그녀는 나름 그간의 일을 소상하게 늘여 말했다.
“……해서 그중 어여쁘고 솜씨 좋은 처자들로 스물넷을 뽑았습니다. 곧 재간택으로 여덟만 추려낼 작정이에요.”
창.
찻잔이 탁자 위로 단정한 음을 깨뜨렸다.
“할머님께 묻지요. 어인 연유로 제 뜻을 거스르십니까?”
태후는 한순간에 멍해졌다. 황상께 들은 말이 영 머리까지 닿지 않았다.
“그게 무슨……? 황상의 뜻을 어기다니요? 이 할미 그럴 리 없다는 걸 아시잖소? 무슨 일인지 소상하게 살펴 말씀해 주세요. 도통 영문을 모르겠군요. 황상께서 진노하신 듯한데…….”
가륜은 눈시울을 좁히고 서조모를 응시했다. 거짓이 일호라도 있다면 찾아낼 터, 그러나 뵈는 것은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한 기색뿐이었다.
“보름 전, 전서구를 보냈습니다. 받지 못하셨습니까?”
“전서구요? 황상께서 보내신 것이요? 금시초문입니다, 이 할미는…….”
눈 지릅뜨고 입을 크게 늘이니, 태후는 그야말로 화들짝 놀랐다. 몰랐으니 어겼을 터. 이제야 아귀가 들어맞았다. 가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상, 그게…….”
“황후 간택을 중단하시라, 전서를 보냈습니다. 주남에서 보냈으니 닿아도 벌써 닿았겠지요.”
태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황상께선 암행도 비밀리에 떠나셨는데 뉘 있어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지……. 황제의 통신관이란 남다르게 생겼으니 궁인들이 함부로 없애지도 못했을 터였다. 놀란 뒤에 겁이 더럭 밀려와, 그녀의 눈귀에 잔 경련이 마구 일었다.
“결단코 영문도 모르는 일입니다. 누가 있어 그런 발칙한 짓을 저질렀을까요? 황상의 권위에 도전하는 짓이거늘!”
“세상은 겉보기완 다르니, 누가 제게 고개를 들이미는지는 알 수 없지요.”
알 수 없다 말했으나 그 눈은 무지하지 않았다. 바로 꽂히는 안광이 어둡고 차기에 태후는 눈귀를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가륜의 손을 부여잡고 근심을 보탰다.
“헌데 황상, 왜 황후 간택을 중단하라 하셨나요? 그리 마음 걸려 하시더니 그예 그만두라고 하십니까?”
“마음에 둔 이를 찾았습니다.”
“예? 그럼…….”
불현듯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라 한들 사람 사이 정리만큼은 어찌할 수 없다 했던가? 마음 주고 싶은 여인이 남의 아낙이 되었더라, 그러나 아비와 같이 살지는 못하겠노라……. 그날 적적하고 쓰라리던 낯빛이 작금 선연히 뵀다. 어언간, 주름진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황상, 혹시 접때 말씀하신 그 여인…… 찾으셨소?”
“예.”
단음으로 떨어진 대답에도 태후는 마냥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허면 홀로 되었단 말씀이오? 분명 혼인한 여인이라 들었는데…….”
가륜이 빛접게 웃었다. 늘품 있는 입매가 모처럼 부드러웠다.
“아닙니다, 오해였습니다.”
일순, 태후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황상께서 마음을 두고 계시다면 과부면 어떻고 처녀면 어떻겠냐는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론 황룡의 국모로서 손부가 티 하나 없는 처녀였으면 하는 마음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찾으셨소? 대강 압니다만, 흔적조차 없었다…….”
“재미롭게도 지척에 있더군요.”
태후는 기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같은 여자로서 황후 간택이 무언지 알기에 더 걱정됐다. 삼간택에 오르지만 않으면 혼사에는 장애가 없지만, 그래도 여심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륜을 올려 봤다.
“황상, 참으로 잘 된 일입니다만, 황후 후보들은 어찌하면 좋을까요? 기대를 잔뜩 하였을 터인데.”
“제가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할머님께선 우선, 일이 이리 되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
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서구를 가로챈 자는 어찌합니까?”
“걱정 마십시오. 소멸하여 없어지지 않는 한, 제 눈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곁 없고 야멸친 어투였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명세제의 모습이어니, 태후로서는 절로 안심이 됐다. 용상 아래 언제든 있어 온 그늘이래도 저런 눈빛이라면 완전히 말려낼 것 같았다.
“이 늙은 것이 걱정이 많기만 합니다. 그런데, 황상…….”
태후가 사가의 할미처럼 다정하게 가륜을 불렀다.
“예, 할머님.”
“그 어여쁜 아가씨는 언제 보여주시렵니까? 황상의 마음을 차지한 그이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하오.”
태후가 호기심에 눈을 빛내니, 가륜이 그답잖게 온유하게 입귀를 들어 올렸다.
“여기 일이 깨끗이 처리되면, 그때 인사드리지요. 티 없이 데려오고 싶은 사람입니다.”
태후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황상께서 저리도 아끼는 여인이 뉘인가? 은애하는 빛이 그저 흘러, 봉안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황상, 이 할미 이런 날이 올 줄 정녕 몰랐소. 정말 기쁩니다.”
“저도 기쁩니다, 할머님.”
“정말 다행이오. 누군지 모르나 이 할미는 벌써부터 그 사람이 어여쁘군요. 고맙고 예쁠 따름이에요.”
가륜 또한 그랬다. 록흔이 어여쁘고 고마웠다.
“너무 고맙구려, 진정.”
태후가 눈가가 젖는지도 모르고 웃었다. 가륜은 커다란 손으로 서조모의 손을 담뿍 잡았다. 피의 연결 없으나 가까운 그들이라 나누는 정은 깊다랬다.
인호의 아이는 자라는 게 남달랐다. 한 달 정도 떨어진 것뿐인데 숙성한 정도가 벌써 너덧 살은 되는 듯했다. 동물은 태어나 제일 처음 본 것을 어미로 안다더니, 호류가의 마지막 자손도 그러했다. 록흔이 강무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내달려와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그녀가 얼결에 받아 안자, 어린것은 정에 주린 듯 뺨을 마구 비벼댔다.
“참 내, 한 달 내동 안아 주고 먹여 준 사람은 본체만체군요.”
유장이 빙긋 웃으며 호분위국에서 나왔다. 한여름의 가운데인지라 옷이 바뀌어 있었다. 팔뚝을 드러낸 짧은 훈련복이 시원스레 보였다. 저보고 하는 말에 범아가 입술을 쫑긋댔다. 뭐라 이르는 것처럼 보여, 록흔은 그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등을 토닥이니 녀석이 금빛 눈을 호동그레 치뜨며 해죽댔다.
“무고하게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접두.”
유장이 인사치레를 하자마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커다란 문이 왈칵 열렸다.
“접두! 돌아오셨습니까?”
창해였다. 겉은 구척 거한이나 속은 범아와 한끝 차이, 그는 눈물마저 글썽해서는 냅다 달려 나왔다. 록흔이 눈짓으로 인사하니, 모란만 한 입이 헤 벌어졌다.
“접두!”
“아이고, 어제 꿈에 뵈시더니.”
“무탈하셨는지요?”
“오셨습니까?”
나머지 넷도 반갑게 얼굴을 드밀었다. 록흔은 수하들 하나하나 어깨를 반갑게 잡아 주고는 범아를 내려놓았다. 그녀 아래서 녀석이 금빛으로 부푼 눈으로 방긋방긋 웃었다.
“잘들 지냈나, 별일 없고?”
록흔이 묻자, 창해가 얼굴이 벌게졌다.
“그게 영 없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아니 다소…….”
사강이 은안을 좁히며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렸다.
“유장.”
“예, 접두.”
“창해가 발갛게 익었는데, 무슨 일인가?”
주눅 든 게 마치 잘못한 어린애 같았다. 록흔은 대강 짐작하면서도 창해를 을렀다. 피식 웃을 만도 하련만, 부러 눈귀를 꼿꼿이 세웠다. 그러자 거한은 더욱 곱게 익었다.
“보고 드린 대로 곽아밀이 없어졌습니다. 그날 창해가 번서던 참이라서요.”
“창해.”
“예에, 접두!”
대답에 기합이 잔뜩 들어갔다.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을 각오가 된 듯했다.
“오늘부터 닷새 동안.”
창해는 얼굴을 찡그렸다. 제발 접두께서 먹물 가까이 가라 하시지만 않으면, 그로서는 더 바랄 게 없었다.
“범아를 본다.”
말 지자마자 털복숭아 같은 것이 창해의 뺨에 닿았다. 동글동글한 게 인호 놈의 머리가 분명했다.
“이의 있나?”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창해는 지은 죄가 있어 아무 말도 못했다. 부접들은 그것 고소하다는 빛일 뿐, 누구 하나 거들려 하지 않았다. 미음 먹인다 서대다 놈을 되게 한 번 떨어뜨린 후에 아예 거두려고도 안 했던 것이다.
“아오옹!”
범아가 방긋 웃었다. 금빛 눈이 또록또록 굴렀다.
“예, 잘 봅지요.”
창해가 풀 죽어 하는 말도 록흔은 짐짓 모른 체했다. 그 때, 부중랑장 고하준이 막 호분위국 뜰로 들어섰다. 반작 빛난 눈에 반가움이 그득했다.
“오랜만이다, 부중랑장.”
록흔이 먼저 상긋 웃어 주었다.
“장령께서도…… 강녕하셨습니까?”
“음, 덕분에.”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풋내기인 양 하준이 머뭇댔다. 뵈는 건 진심, 거리감은 이제 없었다. 록흔은 다슨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할 말들이 많을 테니.”
호분위국 내, 회의실은 여전했다. 록흔은 휘둘러보다 제자리로 정해진 상석에 앉았다. 이곳에 들이치는 햇빛이 짧아진 것을 보니, 여름이 무르익긴 했다. 창해한테 갔던 범아가 조르르 그녀 곁으로 왔다. 방긋 웃기에 그예 옆에 앉혔다.
“접두 안 계실 때 모화라는 궁녀가 이걸 전해 드리라며 두고 갔습니다.”
유장이 함에 잘 두었던 것을 록흔 앞에 놓았다.
“모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지이도 도희도 아닌. 록흔은 뇌리를 스치는 불쾌감에 이를 자그시 물었다.
“예, 아실 거라 했는데. 아닌지요?”
“그…….”
록흔은 겹겹이 싸진 것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동그랗게 까진 그것에서는 약초 내가 났다. 그리고 고기 삶은 내도 희미하게 풍겼다. 처리한 것은 본 적 없으나, 생것은 분명 복륭사에서도 보았다.
“뭡니까, 이게?”
기리단이 눈을 치뜨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온태, 용란을 쪄서 말린 것.”
“용의 알이란 말씀입니까?”
아진이 한 눈을 지릅떴다. 그런 것도 있느냐는 눈빛이라 록흔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 그러할 뿐, 용이 낳은 것은 분명 아니었다.
“마령서(감자)의 일종인데, 삼처럼 구하기 어렵지. 영산 서늘한 그늘에서 뱀을 양분으로 취해 자란다.”
“예? 감자류라면 식물이잖습니까?”
이번엔 창해가 소 방울만 한 눈을 굴렸다.
“산무애뱀 중에 용란 꽃을 좋아하는 놈들이 있다. 왠지 모르지만 향기에 취해 꼬였다가 그 아래서 죽지. 그러면 녀석이 탐욕스레 빨아먹는데, 어릴 적 본 바로는 거죽만 겨우 남는다.”
복륭사 뒤로 오르면 오롯이 피었던 그 꽃은 향기도 거의 없었다. 뱀이란 놈은 후각이 대단하다니 그래서 꼬였을지도……. 록흔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흑빛이 되도록 거듭 쪄서 말린 덩이줄기를 건드렸다.
“그 궁인은 이걸 왜 전하라 했을까요?”
하균이 점잖게 한 마디 했다.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유장.”
모두들 날이 선 눈으로 록흔을 보았다.
“모화라는 궁녀, 곽아밀이었다.”
“그런…….”
유장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 묘한 분위기가 비로소 설명이 되니, 고개만 무겁게 끄덕일 뿐이었다.
“장령, 다시 한 번 내궁에 드셔야 합니까?”
하준이 눈귀를 걱정스레 좁혔다.
“아무래도. 용란 건 외에 다른 건?”
록흔이 묻자, 창해가 하균을 보고 눈을 꿈적댔다. 부접들은 곤란한 일은 으레 하균에게 떠밀곤 했다. 그녀는 수하 중에 가장 진중한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접두, 말씀 드리기가 몹시 조심스럽습니다만,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무언가? 왜…….”
창해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저 묻느라 동그랗게 모인 입술인데, 그 선이 연하고 몹시 보드랍게 보였다. 너무 오랜만에 뵈어서 그럴 터. 그는 스스로 다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말이 되지 않으나, 상관은 날이 갈수록 고와지고 있었다.
“목숨 여럿이 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강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찬란한 은빛이 여름 햇살 받아 매끄럽게 빛났다.
“답답하군. 뭔가?”
록흔이 좨치자 창해가 하균의 어깨를 툭 쳤다.
“그냥 까놓고 말씀드려. 접두께서도 곧 아실 텐데. 철석간장 접두시니, 괜찮다.”
“접두, 실은 안 계신 동안…….”
벽에도 귀가 있다던가? 하균이 나직하게 사뢰는 말에 록흔은 귀를 기울였다. 그 사정이란 게 듣기 편치 않았다. 사강도 유장도 볼 언저리가 붉었다. 아진이나 창해 역시 이마에 핏대가 불뚝 선 채였다. 기리단은 흑면이 더욱 검었다.
“사실이면.”
록흔이 아미를 찡그렸다. 생각하느라 입귀를 비트니 볼우물이 깊게 팼다.
“말인즉슨.”
들은 것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록흔은 눈을 잔뜩 조프렸다. 그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황당하군.”
“예, 그렇습니다. 접두.”
유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요컨대, 황후 후보를 능욕하는 자가 있다. 헌데 분명 있으나, 그 형태는 없다. 소문의 출처는 아기나인들이고?”
록흔이 하나씩 되짚자 부접들이 얼굴을 굳혔다. 사실이라면 크나큰 일, 인륜을 넘어선 범죄라 다들 분노가 깊었다.
“얼마나 퍼졌나?”
“우선 아는 이는 적은 듯합니다. 파장이 큰 사안이라 몇몇 궁인 사이에서 쉬쉬하며 퍼진 것 같습니다.”
“접두, 잘못 발설하면 제가 다치는 일입니다.”
인녕전에 심은 첩원에게서 들어온 말, 차라리 아니 들은 만 못했다. 사실이 아니면 좋으련만. 록흔은 이를 자그시 물었다. 폐하께서야 내내 암행 중이셨으니, 도대체 뉜가? 그녀는 곽아밀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기필코 그놈은 아니어야 했다.
“알았다. 내가 좀 더 추이를 살펴보고, 폐하께 말씀 올리겠다.”
궁인들 사이에서 퍼진 것이니 그들에게서 캐는 것이 가장 빠를 터. 록흔은 용란을 흘긋 보다 의자를 밀치고 일어섰다. 그러자 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사리 손을 내밀었다.
“방금 오시고, 어디 가시려고요?”
창해가 아쉬운 듯 커다란 눈을 굴리며 물었다. 아쉽기는 유장도 마찬가지여서 그 역시 눈으로써 상관을 붙잡았다.
“노독이 이만저만 아니실 텐데. 조금 쉬었다 가시죠, 접두.”
아진도 걸걸하게 껴들었다.
“괜찮다. 그런데 이 녀석 이름은 지었나?”
록흔이 묻자, 범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제 말 하는 것은 귀신같이 알아서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아직요, 접두께서 지어 주셔야죠. 저희야 그냥 범아야, 호류아야, 그랬습니다.”
유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록흔이 털북숭이 뺨을 쓸고 보드란 턱을 간질이자, 범아는 빨간 입을 벌리며 방싯 웃었다.
“무(武)라 부르지, 호류무. 우리 무인들이 키우니 무라는 이름자가 붙어도 좋을 듯한데. 안 그런가?”
“좋군요, 호류무. 강단지게 들립니다. 인석아, 앞으로 넌 호류무라고 불릴 것이다. 접두 말씀대로 우리가 강하게 키워 줄 테니 자라서 강건한 무인이 돼라.”
사강이 맞장구를 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범아는 아직 말은 못했다. 그러나 눈치는 반해 제 말을 하면 지금처럼 황금빛 눈을 이리저리 또랑또랑 굴렸다.
“장령, 온태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그래, 대강 짐작은 간다만. 태화성 밖 의원에게 보이도록.”
하준이 용란을 다시 싸맸다.
“저희는?”
“철장 실종 건, 보고하도록.”
“예에? 예, 접두!”
방금 오셔 놓고 모르는 게 없었다. 유장은 혀를 내두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는 내궁에 잠시. 어, 이 녀석…….”
호류무가 록흔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녀가 동그란 머리통을 쓱쓱 쓸어줘도 떨어질 생각은 않고, 녀석은 금빛 눈만 드밝게 키웠다. 아직은 한참 어린것, 굽어보자니 측은한 마음이 크게 일었다.
“그 녀석, 접두를 너무 따르는데요. 이거 샘나려고 하네. 우린 커다래서 저렇게 들러붙지도 못하는데…….”
기리단은 농하듯 말하건만, 창해는 괜스레 얼굴이 벌게졌다. 거한은 록흔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애먼 발끝만 보았다.
“별수 없지. 가자, 호류무!”
범이 아니라 강아지인 양, 호류무는 록흔을 졸래졸래 따랐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범아 역시 잗다랗고 통통한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빙긋 웃으면, 놈 역시 해죽 웃었다.
“어, 가시네.”
사강이 맥이 빠진 듯, 한 마디 툭 했다.
“어찌, 얼굴이 더 야위신 게. 저러다 조막만 해지시려나.”
아진이 혀를 찼다.
“너무 열심이시란 말이지.”
하균 역시 멀어지는 록흔을 애잔하게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