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97
연록흔 – 97화
탕! 탕! 탕!
“문 여시오!”
“이봐라!”
텅, 터엉!
뇌희원 정문이 갑작스레 소요했다. 두껍다란 나무 위로 쇠고리가 되게 깨졌다.
“뉘, 뉘십니까?”
“열어라. 비익사에서 나왔다.”
“예에? 비익사라굽쇼? 자, 잠시만…….”
안에서 놀란 숨 들이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육중한 문이 널찍하게 열렸다.
“칠왕야께서는 계시는가?”
“예. 공주마마와 함께 본채에…….”
비익사라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도찰원 직속 감찰기관이었다. 역당 중에서도 흉당을 쫓으니, 뇌희원 문지기는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전에 버티고 선 이 역시 눈빛만으로 기를 질리게 해, 그 살천스러움에 제 양물이 오그라지는 듯했다.
“흉당을 쫓고 있다. 그중 일부가 뇌희원 담을 넘었으니, 지체 말고 앞장서라.”
“예, 예에!”
작금 사유지든 별저든 문선왕의 소유면 된서리를 맞고 있었다. 비익사 도위들이 들이닥쳐 샅샅이 뒤지는 참, 명목은 달라도 목적하는 바는 하나였다. 모든 것이 황명 하에 이뤄지는 일이라, 뉘도 저항하지 못했다.
“이쪽, 이쪽으로…….”
문지기는 오금이 저린지 숫제 비척댔다.
[문서든 뭐든 살피살피 훑어라. 그리고 특히…….]비익사 버금 원상현, 그는 눈살을 꼿꼿하게 세웠다. 뒤로 따르는 도위들 역시 시선이 하나같이 날카로웠다. 그 무리가 날파랍게 지나니, 마주치는 이들마다 땅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전하!”
문지기가 우는 듯한 목소리로 제 주인을 불렀다. 한낮인데도 창마다 휘장이 어둡게 휘늘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
대답하는 목소리가 몹시 나른했다. 오수라도 즐기는 모양, 상현은 눈귀를 바투 좁혔다.
“칠왕야, 비익사 부총관 원상현입니다. 잠시 나오셔야겠습니다.”
상현이 딱딱하게 알리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가조는 웃통을 벗은 채, 바지허리를 추스르는 것으로 보아 그저 낮잠을 잔 건 아닌 듯했다.
“자네가 웬일인가?”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흉당 일부가 뇌희원에 있다 하더이다.”
“뭣이? 그럴 리가…….”
특히 가조를 잘 살펴라, 안팎으로. 총관께서 엄중히 내리신 명이었다. 상현은 가조를 위아래로 훑었다. 겉으로는 유약하게 보였는데 가슴팍도 넓고 팔도 꽤나 울툭불툭했다.
“아시는 바 없으십니까?”
“뭐, 보다시피…….”
등이며 가슴팍이며 어깨며 손톱자국이 선연했다. 입성에 꽤나 신경 쓰는 이답잖게, 문선왕 가조는 몹시 흐트러져 있었다. 상현은 검 쥔 손으로 공손히 읍했다. 그러나 얄풋이 찢긴 눈은 잔뜩 날이 선 그대로였다.
“제대로 아는 것은 없소만, 황룡에 위해를 가하려는 무리라 하면 아나 모르나 응당 도와야지. 잠시만 기다리게. 의장을 갖추고 나올 테니.”
“예, 전하. 송괴합니다.”
상현은 고개 숙이면서도 가조의 가슴 위쪽을 유심히 보았다. 그저 긁힌 자국뿐, 뚫린 자국은 바이없었다. 사내치고는 해사하여 그 몸피가 백옥처럼 부유스름했다.
“아, 그러고 보니.”
가조가 들어서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뇌희원이 좀 크지 뭔가?”
‘……!’
상현은 바로 보았다. 가조의 허리께, 아랫배와 가까운 곳의 살이 몹시 흉하게 부풀어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듯, 살피건대 자상이 몹시 깊었던 듯했다.
“수색하려면 시간이 상당히 걸릴 테니 어차피 할 거, 지금 바로 시작하오.”
“예, 전하.”
상현이 의연히 몸을 세웠다. 그리고 턱짓으로 수하들을 부렸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고, 남은 것은 다섯. 그들은 가조가 되나올 때까지 한자리만 뿌리박힌 듯 지켰다.
비이걱.
되나온 가조는 그 아내와 함께였다. 상현이 긁어 살피니, 서로의 공주는 열이 있어 뵀다. 아파 오른 것은 분명 아니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공주마마, 사안이 위급하여 이리 결례를 범합니다.”
“아니오. 중한 일 하시느라 수고가 많소.”
상현이 에둘러 말하자, 하스란은 아예 홍시로 익었다.
“보자, 어디부터 할까?”
처는 어떻든 가조는 낯이 낙낙했다.
“종이 한 장까지 챙겨야 합니다. 전하께서 그들과 무관하다 밝히는 것이 우선이므로, 조력 부탁드립니다.”
“아아, 나야 털면 돈밖에 나올 게 없어 놔서……. 따라오오, 서재는 이쪽이니까.”
가조가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상현은 하스란에게 예를 갖추고, 수하들과 함께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동총관은 잘 계시오, 뵌 지 좀 됐군.”
“예, 전하.”
“그런데 말이오. 혹시…….”
상현이 눈을 날카롭게 들었다. 무슨 중한 말인지 가조는 제 입께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비익사 일이 아니라, 도찰원 일 아니오? 부정축재라든가, 뭐 그런…….”
“왜 그리 물으십니까?”
“금고에 금괴가 좀 많이, 아니 잠뿍 있소. 다른 건 아니고, 도박을 좀 하였거든. 제 발이 저려서 말이오. 내가 담이 좀 작소.”
가조가 해죽 웃는데, 상현은 마주 웃지 않았다. 파르란 눈으로 곧게 볼 뿐, 중책 맡은 이답게 가타부타 잔말 또한 없었다.
“설마, 흉당의 자금줄이라 뒤집어씌우진…….”
“일단 실어간 후, 문제없으면 되돌리겠습니다.”
서재는 널따랬다. 도위 셋이 이미 압수를 시작한 참, 가져갈 것이 썩 많았다. 상현은 팔짱을 끼고 서서 가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미령하신 것 같은데, 한데서 좀 쉬십시오.”
“아, 그래도 되겠소? 안 그래도…… 칼침 맞은 곳이 결리는군.”
가조가 뒷말을 거의 뭉갰으나, 상현은 어렵잖게 알아들었다. 어찌 생긴 것인지 깊이 파야 할 터. 그는 매서운 눈길로 황제의 사촌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 몸은 백설인데, 참으로 번거롭소.”
“황친이라는 게 원래 녹록잖습니까?”
“그러게 말이오. 아이고, 내 정신. 금괴는 이걸로 여시오.”
가조가 열쇠 하나 건네고는 손을 털레털레 흔들었다. 그가 멀찍이 간 후, 상현은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무심히 내려 보았다. 불시에 왔건만, 불시에 오지 않는 듯. 그는 그예 입귀를 일그러뜨렸다.
***
벽마다 괘서(이름을 밝히지 않고 내건 글)가 빼곡했다. 어느 것은 필체 수려하고, 어느 것은 조악하며, 어느 것은 글 대신 그림으로 풀어 놓았다. 하얗게 나풀거리는 것은 한이라 섧고도 슬펐다. 록흔은 아연하여 그저 바라만 보았다. 태화성 바로 곁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으니 부접으로 보낸 세월도 그다지 크지는 않은 듯싶었다.
“가여운 한풀이지. 아니 그렇소?”
태후가 눈귀를 일그러뜨렸다.
“할머님, 어찌 이런 곳을 아셨는지요?”
궁녀들이 드나드는 서의문, 그곳에서 수십여 보 떨어진 곳이었다. 마치 누가 봐주길 바라는 것처럼 네 벽에 덕지덕지 붙은 참, 록흔은 가장 가깝게 닿은 것을 떼어냈다.
아이를 잃었습니다. 제 아이는…….
바람에 햇빛에 바랜 종이 위로 록흔의 시선이 연하게 오갔다. 그저 읽는데도 아렸다. 애가 녹고 장이 끊겼을 터, 자식 잃은 어미의 마음이란 애참했다.
“저 집이 들어선지 삼백 년은 족히 되었을 거요.”
태후가 가리킨 것은 와가, 태화성과는 가깝고 민가와는 제법 멀었다. 록흔은 종잇장을 쥐고 아담하게 들어앉은 것을 올려 보았다.
“사연 품은 여인들이 찾는다오. 주인 없는 날에는 저렇게 매달고 붙이고…….”
“그러면 할머님께서 저곳을 꾸리시는지요?”
“아니요, 그저 잠시 맡은 것뿐. 이 몸 역시 시할머님을 따라 이곳에 왔었지. 명혜황후 이후로 끊겼는데, 주인이 없기에…….”
명혜는 제 슬픔이 커서, 마혜는 잔독하여, 그런즉슨 태후가 맡았던 모양이다. 황제가 미복잠행하여 민정을 살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록흔은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황후께서 계시니…….”
태후가 말을 흐렸다. 보드랍게 휜 눈에 물기가 많았다.
“할머님, 외람되오나.”
록흔이 운을 떼자, 태후가 그녀를 번히 보았다.
“아직 제가 어리고 모자란 것이 많아 할머님께 배울 것이 많습니다. 오늘처럼 따르고픈 마음이온데, 아니 되올지요?”
“황후…….”
첫날부터 지금까지 태후에게 이 일은 짐도 의무도 아니었다. 기꺼움이요 보람, 록흔은 곱게 늙은 눈을 보고 알았다.
“여직 아는 게 검뿐이라, 그래 주시겠습니까?”
재차 묻는 소리에 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은소현이 황후가 되었다면 이곳으로 데려올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손부는 볼수록 마음에 흡족하게 찼다. 저리 보드란 이니 황상께서 마음 주셨을 터. 그녀는 고개를 거듭 끄덕였다.
“그럼, 할머님.”
“그래요, 들어갑시다.”
록흔은 걸으면서 글들을 훑었다. 억울하게 소박당한 이, 돈에 팔려 몸을 앗긴 이, 야차 같은 사내에게 맞고 사는 이, 시어미 구박에 목을 맨 이, 죽도록 일하고 돈 한 푼 못 받은 이, 이놈저놈에게 짓밟힌 이…… 이름은 없으나 그들 모두 여인이었다.
영원당(聆怨堂)
당호가 눈에 박혔다. 록흔은 잠시 보다 태후를 부축해서 문턱을 넘었다.
“살펴 주소서.”
문 그늘에 숨어 기다린 모양, 여인 하나가 그들 발치에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렸다. 좁다란 어깨나 가늘게 뻗은 목이 몹시 잔약해 뵀다.
“운이를, 제 아들 운이를…….”
여인은 목이 메어 말을 잘 못했다.
“일어서세요.”
“아, 아닙니다.”
“병색도 짙은데, 자…….”
록흔이 일으켜, 여인이 비틀거리며 몸을 세웠다. 자세히 보니 뺨이 홀쭉하고 눈 아래가 검었다. 오래 앓았는지 몸피가 몹시 가분하게 들렸다.
“어디서 오셨소?”
“상주 청랑성…….”
태후가 묻자, 여인이 답했다.
“저는 상주 청랑성에 사는 안도의 처, 금명이라 합니다.”
파리한 입술이 다르르 떨렸다.
“어찌하다 아들을 잃었소?”
“채운이 이제 열셋입니다. 서원 다니러 간 길에 돌아오지 않아 이제 백 일이 훌쩍 넘어서……. 제발 도와주세요.”
록흔은 눈을 가늘였다. 하준이 넘겨준 것에서 봤던 것이 머릿속으로 살피 스쳐 지났다.
“자자, 예서 이러지 말고 들어갑시다.”
태후가 여인을 다독이며 안으로 이끌었다.
“소문 듣고 찾아왔습니다. 이곳에 가면 귀부인께서 덕을 베푸신다기에……. 부디 살펴주세요.”
여인은 금세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운이를, 제 아들을…….”
아이 잃은 어미란 상처 입은 짐승보다 더 가련했다.
‘놈들이…….’
록흔은 이를 자그시 물었다. 부접이 전한 바, 사람을 사고파는 그놈들의 소행이 분명했다. 저 혼자 보드랍게 파묻혀 있기에 세상은 험하니, 어언간 연한 그 눈이 아청빛으로 짙어졌다.
무세전 청방.
비익사 으뜸과 버금이 북면하고 선 참, 저 위에서 내려 보는 눈이 몹시 상량했다.
“어떠했나?”
“예, 폐하. 각처에서 보고 올라온 바, 아직까지 크게 수상한 점은 없습니다. 하오나 세작들을 심어 두었으니 밝혀질 것이 있으면 여실히 드러날 것이옵니다.”
동국한은 예부판사 동윤의 아우였다. 질녀가 걸리어, 이번 일로 그는 눈이 더욱 섰다. 만약 문선왕이 그자라면 배를 갈라 간을 꺼낼 터. 읍한 두 손에 힘이 몹시 들어갔다.
“폐하, 신 원상현 아룁니다.”
상현이 뇌희원을 수색한 게 바로 어제였다. 그 후로 그는 수하들과 함께 장성 내 기루와 유곽, 도장(도박장)까지 가조의 뒤를 캐고 다녔다. 파볼수록 다라운 이라 황친이라는 이름이 아까웠다. 놈은 겉만 번지르르한 파락호였다.
“문선왕의 복부 자상은 유락이라는 자와 도박하다 생긴 것이라 합니다. 도장 주인 말이 판돈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하옵니다.”
“얼마기에?”
“은괴도 아닌 금괴로 삼백을 걸었다 하옵니다. 하여, 뇌희원에서 압수한 금괴와 도장 기록에 남은 금괴 번호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은괴나 금괴나 사사로이 주조한 것이 아니면 고유의 표식이 있었다. 전폐국에서 만든 것은 황룡의 국장이 찍히고 일련번호가 붙는 바, 주변의 위성은 물론이고 바다 너머 이스펠에서도 그 가치가 그대로 쳐졌다. 가조가 도박으로 얻었다 한 것 또한 용문이 있고 수와 문자가 찍혀 있었다.
“딴에 칼부림할 만하군.”
가륜이 조소하자, 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선왕은 그 일로 한 달 동안 거동을 못했다 하온데, 그 와중에도 아끼던 애첩을 팔고 새 애첩을 들였다 합니다.”
첩을 팔았다는 소리에 국한이 얼굴을 찌푸렸다.
“황친으로서 상속받은 재산을 다 날렸다가 도박으로 다시 일으켰다가…… 기복이 몹시 심하다 들었습니다.”
가륜이 눈귀를 가늘였다. 그 봉안이 깊으매, 국한도 상현도 높이 우러렀다.
“흉당 소리 듣고는 뭐라 하던가?”
“순순히 협조하였으나, 되려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런 일 없다 펄쩍 뛰는 것이 보통인데, 놀라는 기색 또한 없었사옵고…….”
“폐하, 낙낙한 빛으로 앞장까지 섰다 합니다.”
“그야말로 사촌 형답군.”
마혜 치하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발톱이야 넣었다 빼었다 할 터. 가륜은 피긋 웃어 버렸다.
“의원은 뉘던가?”
“신광준이란 자로, 진신건당에서 스무 해 넘게 지낸 터라 명망이 제법 높았습니다. 요치한 일지를 받아와 살폈는데, 처음 벌어진 상태부터 아무는 것까지 기록이 세세합니다.”
“낯은?”
“깨끗합니다. 흉곽에도 이렇다 할 부상 흔적이 없었습니다.”
상현은 대답하면서도 석연찮았다. 완벽하리만치 혐의가 없으니, 마치 미리 알고 치운 듯만 싶었다.
“알다시피 황친 아니던가? 겉으로는 티 없는 걸 털자면,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계속 살펴라.”
“예, 폐하. 내밀히 헤아리겠나이다.”
비익사 수장이 고개를 숙여, 바로 밑도 몸을 낮췄다. 가륜이 막 둘을 물러가라 했을 때, 문 밖에서 황후께서 오셨다는 전언이 들렸다. 여태껏 말없이 섰던 하신이 눈을 반작 빛냈다. 문 열리매, 봄이 들어선 듯했다. 가륜을 제외한 셋이 일시에 몸을 낮췄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국한과 상현이 동시에 예를 갖췄다.
“동총관, 원부총관, 수고들 많으십니다.”
록흔이 다사하게 답해, 두 사람 다 흔치 않은 웃음을 입귀에 걸었다. 급박한 일로 물러가노라 하면서도 그 걸음이 급하지 않았다. 황후를 가까이서 뵈니 눈들이 절로 연해졌다. 따듯이 어여쁜 분이라 더욱 기꺼운 듯, 비익사 불칼들도 마냥 무름했다.
“폐하, 차를 올리라 하올까요?”
청방이 여닫힌 후, 하신이 보드랍게 물었다. 그래라 하는 대답 떨어지자마자, 그 역시 물러나갔다. 깊다랗게 숙인 얼굴에 미소가 한 가득이었다.
“황후께서 어인 일이신가?”
가륜이 깊게 들여다보아, 록흔은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췄다. 은라가 하란 대로 하긴 하는데 어색스럽고 몹시 수줍었다. 그녀는 팔에 낀 바구니를 조심스레 들어 보였다.
“응?”
“쉼 없이…… 하실 듯해서…….”
“부러 짬을 내주러 왔다?”
“예에…….”
록흔은 말끝을 사렸다. 은라의 말을 따르는 게 아니라, 이 앞에 서니 절로 그리됐다. 청방에서는 항시 호분중랑장으로 있었기에 여인의 옷도 여인의 일도 제 것이 아닌 듯 몹시 부끄러웠다.
“좋다. 황후께서 말씀하시는 건, 들어야지.”
가륜이 비단보로 덮인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록흔의 손을 다뿍 움켜잡았다.
“저긴 처음이지?”
가륜이 눈으로 가리키며 묻기에 록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듣고 날파랍게 돌아섰던 곳이라 청방 외에 무세전에 든 방들은 잘 알지 못했다. 문은 휘장 뒤에 숨어 있어 바로 옆으로 통하는 듯싶었다. 그녀는 그가 이끄는 대로 그 너머로 들어갔다.
‘……!’
눈앞이 온통 초록이었다. 아기연둣빛에서 심록까지, 폐부로 푸른 바람이 들어찼다.
“술이고 차고 다 싫다, 돌아섰잖나.”
“폐하, 그건…….”
“이제야 알겠다. 네가 왜 그렇게 서둘러 피했는지.”
“아니어요.”
“아니긴, 숨긴 게 많아 내 앞에서는 편치 않았겠지.”
가륜이 웃음으로 좨쳐 록흔은 대답은 안 하고 연푸른 것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림자 드리우니 잗다란 어느 잎이 옴찍거리며 오므라들었다.
“예서 계시면, 잠깐의 혼곤함은 녹으실 듯해요.”
“그렇지.”
세죽관에 가기 번거로울 때, 가륜은 이 방에 있었다. 하신이 솜씨 좋게 가꾸고, 가륜은 그 푸름에 잠시 쉬고는 했다. 천장까지 타고 오른 양치식물이 보드란 바람에 나푼거렸다. 록흔의 시선이 저 위로 사분하게 들렸다.
“꽤 묵직하다. 뭐가 들었나?”
“정과가 조금.”
“살을 찌우려는군.”
“아니요.”
궁녀 하나가 살짝 들어와 화차를 유리잔에 받쳐두고 나갔다. 향긋한 기가 부옇게 서려 잎사귀 하나가 축 늘어졌다. 가륜은 록흔을 옆에 앉히고, 바구니를 열었다. 색색으로 알록달록 고운 것은 산삼으로 빚은 정과였다. 쌉싸래하면서 달금한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누가 시켰지?”
가륜이 대뜸 하는 소리에 록흔은 조금 움츠러들었다. 무얼 덮고자 하면 눈을 흐려야 한다기에 은라가 일러준 대로 행하던 차. 천성에 맞지 않은 일이라 요령이 더 없었다.
“은라 외엔 없을 터. 하지만 뭐, 상관없다.”
록흔은 입을 방긋 벌렸다. 가륜이 허리를 끌어당겨 그의 품에 깊이 잠겼다.
“호분위 일은 얼추 마무리됐겠지?”
“예.”
“부접 일은 눈도 안 떠보는 것 맞고?”
“예. 폐하, 저…… 이거…… 하나 드셔 보세요.”
록흔이 머뭇대며 정과 하나를 집어 권했다. 입을 막으려 드는 게 분명한대도 가륜은 별 내색 없이 한입 베물었다. 삼 냄새가 그녀의 손끝에서 그의 입술로 알싸하게 퍼져 나갔다.
“그악스레 달군.”
가륜은 단맛은 질색이었다. 록흔이 내민 것이라 사양 않고 받아먹었으나, 눈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그가 인상을 쓰자, 그녀가 얼른 일어섰다. 그러나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바로 그의 무릎에 앉혀졌다.
“어딜 가려고?”
“화차 또한 달아서, 담박한 것을 찾으러…….”
“됐다, 예까지 오기도 쉽잖았을 텐데. 옳다구나 도망치려는 걸, 그냥 둘 수야 없지.”
“폐하, 단것을 싫어하시는 줄 미처 모르고.”
“은라가 챙겨 준 것 다 안다. 어쨌든 단것도 나름인데.”
가륜이 짙은 눈으로 록흔을 내려 봤다. 그가 허리를 옥죄고 턱을 들어 올려 그녀 역시 그만 보았다.
“아무리 달아도 싫지 않더라만.”
“전…….”
록흔이 연하게 속삭이는 걸, 가륜이 짙게 빨아들였다. 푸름에 싸여 뉘가 볼 염려도 없는데, 그녀는 그를 밀었다. 손바닥으로 닿은 고동에 연빛 눈이 잗다랗게 떨렸다. 입술이 겹쳐져 머금어져 시계가 아슴아슴했다.
“록흔, 쓸어 덮으려는 게 뭐지?”
“그런 것 없어요.”
가륜이 록흔의 아랫입술을 자긋자긋 물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몸을 뒤채자, 그는 어깨를 잡아 제게 바짝 붙여 버렸다.
“그러면?”
“그냥 폐하께서…… 저…… 뵙고픈 마음에…….”
“안 되겠군. 내일 각림에 데려가야겠다.”
“어딜 가시기에……?”
말하는 중간중간, 가륜이 록흔의 대수삼 자락을 걷고 손목을 드러냈다. 손가락 끝에서 잔약하게 돋은 팔꿈치 뼈까지, 그가 살피살피 쓸고 만지기에 그녀는 말을 길게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눈귀를 가늘이고 보드레한 살갗을 거듭 살폈다. 걱정이 묻은 듯, 검남빛 눈이 깊게 갈앉아 뵀다. 그녀 생각에는 다사하고 찬 정도를 가늠하는 듯도 싶었다.
“모처럼 모인지라 사냥을 하러 가마 약속했다. 사내끼리 모임이나, 내 곁에 두면 하등 상관없을 터. 어떤가?”
“어, 저는…….”
범산을 생각하매, 록흔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운환이나 진문과는 같지 않으니 될 수 있으면 마주치지 않아야지 싶었다. 그녀는 부러 말을 느리게 끄셨다. 그리고 맑게 부푼 눈으로 가륜을 응시했다.
“왜?”
“몸도 곤하고, 좀 쉬었으면 하고요.”
“곤해?”
가륜의 눈빛이 대번에 달라졌다. 딱히 아프다는 소리 한 것도 아닌데 날캄한 봉안에 금세 수심이 가득 꼈다.
“폐하께서 아니 계신 동안, 게으름을 펴도 되올…… 까요?”
어언간 록흔은 눈이 촉촉해졌다. 저 마음이 고마워 흐려진 것이나, 생각은 달리 닿은 듯. 가륜이 이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
“버거웠군.”
“…….”
“이해해라, 나 역시 신랑이라…….”
의미하는 바에 록흔은 뺨이 붉어졌다. 매일 밤 안기어 혼곤한 것은 사실이나 뜻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로서는 어찌하든 시간을 벌려 쉽게 내건 핑계였다. 미안한 마음만큼 홍조는 더욱 짙어졌다.
“자제한대도, 쉽잖다.”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며칠 쉬어라. 각림에 가 있는 동안이라도.”
록흔은 대답 대신 가륜의 품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떳떳치 못한 눈이라도 뵐까 그녀는 더욱 파고들었다.
“폐하.”
“음?”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 제게도 해 주시면 아니 될까요?”
“별것 없었다. 따로 신경 쓰지 마라.”
“하지만 제가 뵙기엔.”
항시 신경 쓰고, 태 안 나게 보살피고, 가륜이 노심초사하는 걸 록흔은 알았다. 그녀가 한숨을 얇게 내쉬자 그가 보드레한 머리칼을 감아 잡았다.
“그만.”
이불로 꼭꼭 싸듯, 강보를 덥게 여미듯, 가륜은 록흔을 덮어 안았다. 다사한 품 안에서 그녀는 아기라도 되는 양, 오롯이 안전했다.
“네가 고와서 그런 거다. 록흔,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예.”
참 밉기도 했다. 록흔은 입안에 든 말을 소리 없이 삼켰다. 뉘 울어 가슴 아파하다, 이 품에서는 세상이야 알 바 없다는 듯 곱게만 있으니…….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잠시 잊어야지, 그래도 좋으려니……. 우련 붉은 입술이 연하게 늘어졌다.
“옛적, 은애가 깊어 은애라 말 못하는 사내와 여인이 있었다.”
록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눈만 보아도 가슴이 차고,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 하지. 이렇게…….”
가륜의 손이 록흔의 가슴 위에 놓였다. 그 말처럼 가슴이 우둔거려 그녀는 입술을 살폿 떨었다. 겹겹이 입은 옷 따위 없는 듯, 그 체온이 바로 스며 떨림은 더욱 빨라졌다.
“여인이 너무 아름다워, 잔악한 사신조차 반해 버렸지. 사내가 잠든 새, 꽃으로 꺾어 품에 넣고 가 버렸다는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가륜은 록흔의 머리 위에서 서사시의 처음을 읊조렸다. 그것은 뉘도 알지 못하는 연시, 록흔 또한 처음 접했다. 비장함에 연한 눈이 절로 어두워졌다.
“사내는 시왕청까지 쫓아갔다. 사신이 명부까지 꾸며 데려갔기에 그 또한 향을 먹으며 생귀신으로 지냈지. 칠 일을 걸어 진광대왕을 만났다.”
지옥 첫 번째 판관, 진광대왕. 그는 극선과 극악을 가렸다. 타인의 생명을 해하였는지의 여부에 따라 사자마다 그 갈 길이 달라졌다.
“그는 전사라 앗은 목숨이 숱했다. 도산지옥으로 가게 되었으나, 외려 기뻤지. 사신의 궤적이 그러했거든.”
식인귀, 악귀, 그악스러운 것이 죄 모여 망령을 물어뜯고 짓찧고 지르밟는 곳. 산마다 높다랗게 솟은 직벽이니 오르기조차 불가한 곳. 록흔은 산사에서 봤던 지옥도를 선연히 떠올렸다.
“옥졸귀를 베고 나아갔다. 눈보라인 양 몰아치는 침풍에도 사내에겐 오직 하나, 아내만이 뵀지.”
그저 먼 얘기로 닿지 않았다. 바늘바람에 제 가슴도 찔린 듯싶었다. 록흔은 대꾸 없이 가만 듣기만 했다.
“칠 일을 더 걸어 삼도천을 건너고, 초강대왕을 만나 제 죄가 아닌 사신의 죄를 논했다. 물건을 훔쳐도 화탕지옥에 드는데, 남의 아내면 어떠한가? 망령들은 기름에 튀겨지고 끓는 물에 불리었으나, 그는 무사히 두 번째 옥을 지나갔지.”
푸른 잎이 연두 잎이 보드랍게 돋아 휘휘 늘어졌다. 록흔이 푸릇한 뺨으로 보아, 가륜은 제 온기로 그녀를 덮어 버렸다. 지난 일 생각하매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러나 뉘로 인한 것인지 자명하니 가슴 아린 것은 어쩌지 못했다.
“그래서요, 폐하?”
“음, 그다음은 한빙지옥인데 다음에 하자.”
“송제대왕이니 명분이 더 섰겠지요?”
“으음.”
송제는 순결을 다스렸다. 마음이 깨끗지 못해 뉘 가슴을 서느렇게 식힌 이들일랑 구원받지 못하니, 바로 제3옥. 강간, 근친상간, 간음……. 록흔은 무상피를 둘러썼던 자를 떠올렸다. 저 지옥에서 살이 얼어 뼈가 드러날 바로 그런 치였다.
“그러고 보니 너, 이야기 듣는 걸 썩 좋아한다.”
“예. 어릴 적에 큰스님께도 더 해 달라, 조르곤 했었는데.”
“봐라, 아직도 어림이 이렇게 많군.”
가륜이 록흔의 귓불을 쓸었다. 보얗고 말랑말랑한데 꽃솜조차 돋았다. 자분자분 만지니 그녀 얼굴이 우련히 붉었다.
“폐하, 방금 하신 이야긴 처음 듣는 것인데, 어느 책에서 읽으셨어요?”
드맑은 눈이 반작 빛났다.
“글쎄, 이만했을 때.”
가륜이 손으로 표시하는 게 몹시 낮아, 록흔은 곱답게 웃어 버렸다. 예닐곱이셨을 적, 무슨 생각으로 저걸 읽으셨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해사한 미소가 더 깊어졌다.
“그리고 다시 이만했을 때.”
가륜이 손을 더 높였다. 록흔은 고개를 좀 더 들었다.
“읽을 때마다 결말이 달랐다. 아니,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해야 옳을지도.”
“스스로 메워지는…… 건가요?”
“음, 대충 그렇다. 자, 그러면.”
가륜이 록흔을 안아 올렸다. 두 발이 달랑거리기에 곱다란 눈이 반작 커졌다.
“곤하다 했잖나.”
“폐하, 그게…….”
“너 쉬어도 세상은 돈다. 홍인전에 데려다주마.”
“어…… 저…… 괜찮아요.”
“내가 좀 편해져야겠기에 그래. 그러니 가만있어.”
갑자가 세 번, 백팔십 년. 가륜은 그 말이 늘 마음에 걸렸다. 작용하는 힘에는 반하는 힘이 그와 같이 있으니, 효한한 만큼 고강한 만큼 록흔이 사윈다 했다. 혜덕 대종사가 등신불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그는 한 대 크게 맞은 듯했었다. 하여 더는 아내가 강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환은 들었지?”
“예.”
“필사는?”
“꼬박꼬박 하는걸요.”
팔이 차가워지면 그다음에 심장이 식는다 했다. 록흔은 모르는 듯하나, 가륜은 한밤중에 깨서 혹 서느래진 것은 아닐까 하여 그녀의 손이며 팔을 어루만졌다. 여전히 다사함을 느끼면 안심하여 잠이 들고는 했다.
“폐하, 이번에 전렵 가시면 며칠이나 걸리셔요?”
혀에 익지 않은 말을 하느라 록흔의 입귀에 힘이 제법 실렸다. 그 볼웃음이 어여뻐, 가륜은 싱긋 웃었다. 빛접은 눈동자가 다사하게 풀렸다.
“사흘 정도 걸린다만. 왜, 더 있다 오랴?”
록흔이 말하는 대신에 고개를 젓자, 가륜의 입귀에 걸린 미소가 더 커졌다.
“은라가 더 가르친 건?”
“어, 없어요.”
록흔이 더듬대자 가륜이 커다랗게 웃어젖혔다.
“정녕?”
가륜이 장난 담아 하는 말에 록흔이 제 입을 막았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은라더러 오래 있다 가라 해야겠는걸.”
록흔은 그예 은라가 일러준 것은 하나도 제대로 못했다. 는실난실 구는 법이라 했던가? 그녀는 어언간 소매 안에 감춰진 손을 부챗살처럼 폈다. 그리고 가륜의 뺨에 연하게 댔다. 일순, 그가 그녀를 향해 눈을 내리떴다.
“…….”
“…….”
초록 것이 해를 향해 잎사귀를 뻗듯이, 록흔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향긋한 숨결 닿으매, 검남빛 동공이 무름하게 갈앉았다.
***
월한은 건반청에서 모화 오기만을 기다렸다. 은소현이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더니 또다시 쓰러졌다. 배를 움켜쥐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것으로 보아 유산기가 도진 듯했다. 한편으로는 참으로 잘되었다 생각되면서도 거사가 어그러질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녀는 멱리를 아예 걷어내고 파리우리한 얼굴로 문께를 보고 또 보았다. 창밖에서 나붓대는 나뭇잎도 지금만큼은 몹시 거슬려, 그녀는 눈살을 꼿꼿이 치세웠다.
“선자님.”
“무어냐?”
“모화가 왔습니다.”
“어서 들여보내잖고!”
문이 열리자마자, 월한은 살천스레 돌아섰다. 아래 두고 부렸으면 좋으련만 태후전 명으로 건반청에 있는 것이니 아쉽기만 했다. 모화가 앞치마 두른 채로 들어서는 걸, 월한은 짜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보았다.
“언제부터 이러셨습니까?”
“아침도 변변찮게 드시더니. 쓰러지신 건, 반 시진 전이다.”
“예, 선자님. 잠시 보겠습니다.”
모화가 이불을 떠들자, 소현이 눈시울을 파르르 떨었다. 뭐라 표독하게 외치고 싶은데 기력이 딸리는 듯, 소현은 끝내 가락대며 고개를 모로 비틀었다.
[어찌하겠나?]모화의 뇌리에 용음이 가득했다. 그녀는 턱을 자그시 비틀며 소현의 손목을 잡았다.
“모화야, 날…… 황자를…….”
죽여 없애련다 대답했었다. 내궁에 숨어들었을 때 이미 작정한 바였으므로. 그러나 생긴 것이 죄라 하기에는 그 숨탄것이 가엾기는 했었다. 모화는 눈을 가늘였다. 은소현은 맥이 좋잖게 잡혔다.
[살리되, 여아로 키워라.]태아의 성별 전환이 가한가 묻기에 그렇다 아뢨다. 황명은 의외로워 아이를 살리라 했다. 제 것이 아닌 의지로 생긴 목숨이지만, 그 말씀 떨어지고 감읍하고 또 감읍했었다.
“선자님.”
모화가 낮게 부르는 소리에 월한은 눈이 가늘게 째졌다.
“온태 덕을 보셨습니다.”
소현은 이미 둘의 말을 듣지 못했다. 새파란 얼굴로 까라진 참, 모화와 월한의 시선이 첨예하게 마주쳤다.
“뭐?”
“바라시던 대로 되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마통이 말하길, 제가 구해 온 온태는 아주 특별한 것이라 했었다. 여아에게는 해가 없고, 사내에게만 해로우니 장복하면 달수를 못 채우고 흘리게 된다 했다. 그러한 것을 은소현에게는 계집애도 사내애로 바꾸는 것이라 사탕발림을 했던 차였다. 월한은 입귀를 상그레 치올렸다.
“죽게 생겼군.”
아직 뱃속에 든 것, 곧 유산될 것……. 월한은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주위를 물리십시오.”
“……?”
“마마께서 쌍태를 가지셨으니, 한 아기씨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쌍생아란 말이냐?”
“예.”
모화는 아미를 찡그렸다. 국혼 있던 날, 그제야 쌍태인 것을 알았다. 그때 이미 사내 하나에 계집 하나로 잡히기에 사내 쪽을 침으로 바로잡으려 했었다. 허나 온태가 생각보다 잔독해 이리될 줄은 미처 몰랐다. 어쨌든 이미 때늦었으니 한쪽이라도 살려야 했다. 그녀는 은침을 하나 빼 들었다.
“마마께는 뭐라 해야지?”
“그나마 다행 아닙니까? 두 분 아기씨 다 잘못되었으면 선자께서도 무사치 못하셨을 터, 복중에 한 분 남았으니 기운 차리시라 다독여 주십시오.”
“그렇군.”
대답하면서도 월한의 눈에는 화가 많았다. 쌍둥이가 들었을 줄 누가 알았으리. 그녀는 검을 틀어쥐고 문가로 갔다. 파르족족한 눈귀에서 독기가 뚝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