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0
10화. 복귀
나는 물살에 휘말리다가 건져진 사람처럼 한가득 모인 숨을 터뜨리며 깨어났다.
“헉!”
내내 식은땀을 흘린 건지 온몸이 축축했다.
상체를 세워 앉은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마땅히 손끝에 잡혀야 할 총이 없었다. 귓가도 짚어 보았지만 말끔하게 비어 있었다.
항상 지니던 흰색 총도, 통신용 단말기기도 없었다.
잠깐만. 없는 게 당연하지!
당황하던 것도 잠시 나는 탄식하며 몸을 눕혔다.
설마 또 죽을 뻔했다가 깨어난 건가?
주위를 둘러보니 엷은 분홍빛 커튼이 사방에 드리운 상태였다.
부대의 의무실 병상은 아니었다. 헌터 아카데미의 보건실인 듯한데.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흘리며 팔목을 이마에 얹었다.
바깥에 있을 보건 교사에게 모습을 보이기 전에 기억을 정리해 보려는 것이었다.
신전에 들어갔고, 억지로 제단에 경배했고, 칼을 찾아서 도망치기는 했는데…….
이후에는 물가에 두고 온 조원들을 찾으러 달려가다 세이렌과 대치했었다.
몸뚱어리가 일반적인 새보다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그놈의 복부를 찌르던 순간.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 제단에서 가져온 성물은 나의 소유가 되었다.
그래, 성물만 아니었어도 그런 미친 짓은 안 했다고.
‘성물’이란 강력한 신성력이 깃든 물건을 가리킨다.
주변의 만류에도 무모하게 C급 던전에 뛰어든 이유도 원래였으면 차진명의 손에 들어갔을 성물을 얻기 위해서였다.
일단 첫 번째 목적을 이루었으니 됐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숲을 빠져나오던 나는 쓰러져 있는 조원들의 모습부터 확인했다.
내가 검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모래사장 코앞까지 다다랐을 즈음 그나마 의식이 남아 있던 설연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설연호에게 복귀했음을 알리려 했으나 나에게도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간신히 인벤토리에 검을 집어넣고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춘 다음…….
기력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인지 기억을 떠올리려 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다음에는 무척 강력하고 신성한 기운이 느껴졌어.
분명 성물에 깃들어 있던 신성력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나는 사고의 흐름이 더디게만 느껴지는 탓에 거듭 인상을 찌푸렸다.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려 애썼지만 쉽사리 그려지지 않았다.
힘겹게 가늠하다 보니 걸리는 점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순간에 내가 느낀 건 성물에 깃든 신성력만이 아니었다.
같은 신성력이지만 분명 다른 곳에서 시작된 힘이라는 걸 구분할 수 있었으니까.
찬찬히 호흡을 가라앉히며 근처에 누군가 있는지 확인하고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길게 내린 커튼 너머 나란히 놓인 침상에서 누군가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고통에 시달리는 건지 이따금 앓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래도 죽지 않고 돌아와서 다행이네, 설연호.
설계하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대로 던전에서 빠져나오기 직전에 내가 느꼈던 또 다른 신성력은 설연호가 사용한 스킬에서 비롯된 듯했다.
그래도 둘 다 보건실에 있는 것을 보니 해변에 도착해서 제대로 귀환석을 쓰긴 했나 보네.
자세한 건 설연호한테 물어봐야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의식을 되찾으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으니 다른 것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나는 시스템 창을 눈앞에 띄웠다. 이윽고 푸른빛을 품은 글자가 떠올랐다.
[도해월 – 각성자• 보유 스킬 목록
‣ 공정한 판별자 (SS)
‣ 천리안 (S)
‣ 증폭 (D)
‣ 기력 증진 (D)
‣ 설계 (D)
‣ 강화 (E)
‣ 확률 (D)
• 미개방 스킬
‣ 선택된 예언자 (미개방)
‣ 준비된 설계자 (미개방)]
됐다, 됐어!
나는 조용히 쾌재를 불렀다. 이내 침착해지며 새로운 스킬을 눌렀다.
[‣ 공정한 판별자 (SS)―칭호 부가 스킬
지정한 상대가 시전자에게 품은 ‘악의’를 읽어 냅니다. 여부에 따라 정도가 극심할수록 공격의 효과는 배가됩니다. 천칭의 심판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됩니다.]
칭호 부가 스킬.
그것은 성물과 보편적인 무기 혹은 아티팩트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점이었다.
습득한 성물이 자신의 것으로 귀속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동시에 부과되는 칭호 부가 스킬은 말 그대로 칭호와 동일한 이름의 스킬이다.
성물의 고유 칭호를 얻게 되면 그때부터 성물은 해당 헌터에게 온전히 귀속된다.
본인의 의지로 타인에게 넘기지 않는 이상 이것을 갈취하려면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성물은 그 종류도 다양해서 무기뿐 아니라 비녀, 반지 등 장신구로도 나타난다. 그 종류와 능력을 알기 위해 연구자들이 노력하고 있다지.
다만, 성물은 막강한 힘을 가진 만큼 다루기가 힘들어 성물을 습득했어도 일반적인 전투 상황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전 세계에서 발견된 성물의 수가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숫자이기는 하나, 이때까지 성물을 습득한 헌터들도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인벤토리에 성물을 보관해 두었다고 한다.
성물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봤자 성물 사냥꾼의 목표만 될 뿐이니까.
하지만, 성물들은 각자 그 칭호의 효과만으로도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건 과거의 차진명도 마찬가지였다.
차진명의 명령으로 던전에서 ‘유스티티아의 검’을 습득한 나는 곧장 차진명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는‘공정한 판별자’라는 칭호 스킬을 사용하여 자신에게 악의를 품은 이들을 차례로 처단해 버렸다.
자신이 실행하려는 계획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를 일찍이 정리해 버린 것이다.
‘공정한 판별자’라는 칭호와 달리 유스티티아의 검은 오로지 자신의 주인만을 섬기며, 그 주인을 공정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위험하고 다루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가져 보지도 못한 검에 대해 이토록 잘 알고 있는 이유 또한 차진명 때문이다.
이제 내 수중으로 들어온 이상 검이 지닌 특유의 능력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유스티티아의 검이 가진 검능인 ‘충성심’은 일종의 광기였다.
광기와 맞닿은 검능에 중독되고 나면 나 또한 차진명처럼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게 될지도 몰랐다.
보다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스킬의 기능 중 일부인 ‘천칭의 심판’이었다.
유스티티아의 천칭에 죄의 무게를 달아 심판을 감행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시스템 창을 흩뜨렸다.
푸른 활자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전 생에서 차진명이 사용했던 가장 강력한 무기를 빼앗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는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했다.
다음으로 내가 다다를 목표는 이 검을 차진명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지난 생에서는 차진명의 눈에 들고 싶어 그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여 살았다.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헛되고 남루한 욕망이었는지 잘 알고 있다.
내 안에 남아 있던 그의 흔적들을 계속해서 덜어 내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내 모습도 되찾을 수 있겠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상념을 거두었다.
이어 침상에서 내려와 커튼을 거두었다.
바로 옆쪽 침상에도 커튼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마도 저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이 설연호일 텐데.
무사히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는지는 설연호가 의식을 되찾은 후에 물어야겠다.
설연호는 잠시 제쳐두고, 내가 얻은 새 스킬부터 확인해 보자.
나는 마른기침을 하며 기척을 냈다.
그러자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던 보건 교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니? 몸은 좀 어때.”
교사는 멀뚱히 서 있는 나를 잡아다 자신의 책상 근처에 앉혔다.
“더 늦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사정은 다른 선생님들께 전해서 들었단다. 어째서 그런 무모한 생각을 한 거니? 아무리 점수가 중요해도 그렇지…….”
염려 어린 잔소리가 이어졌다. 교사는 동시에 이런저런 도구를 집어다 내 상태를 살폈다.
그런 교사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으려니 눈앞으로 푸른 활자가 떠올랐다.
[스킬 ‘공정한 판별자’가 발동됩니다. 지정한 대상이 지닌 악의를 측정합니다.]그래, 이거지.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악의’는 ‘0%’입니다.]퍼센트로 표시된다고? 신기하네.
스킬 사용에는 문제가 없었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며 일정한 퍼센트 에이지에 따른 반응을 확인한 후 일정한 기준을 세우기만 하면 될 듯했다.
설명에는 기재되지 않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내게 느끼는 감정을 판별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감정’은 ‘적당한 염려’,‘약간의 한심함’입니다.]오, 된다.
염려? 그럴 수 있지. 한심함? 그래, 어른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했다.
“너희에게 점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섣불렀다. 무사히 복귀했으니 다행이지만. 문제는 없으니 이만 돌아가 봐도 좋아.”
“감사합니다.”
나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다, 잠깐만!”
다급한 목소리가 문간으로 다가서던 나를 불러 세웠다.
“네?”
“깨어나는 대로 정건후 선생님이 자기한테 찾아오라고 하셨어.”
“아, 네.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건후를 찾아가려 했는데.
나는 교사에게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간을 넘어갔다.
* * *
“그 위험한 상황에서 용케 살아 돌아오다니. 이건 뭐, 감개무량하다고 해야 하나.”
상담실에서 나를 기다리던 정건후는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와서 앉아. 몸은 좀 어때.”
“네, 괜찮습니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정건후는 창가의 커튼을 쥐어 확 끌어당겼다.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아.”
이어 잠시 문을 열더니 상담실 주변을 살피다가 문을 굳게 닫았다.
자리로 돌아와 종이를 몇 장 넘겨 보던 정건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너 조별 선발할 때 제비뽑기 확률 조정했지. 왜 그랬어?”
얕게나마 어려 있던 장난기도 빠져나간 목소리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는 잠시 정건후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사실대로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별할 필요가 있었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악의’는 ‘0%’입니다.]이건 됐고.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다음 판별을 기다렸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감정’은 ‘강한 호기심’,‘수상쩍음을 동반한 깊은 의심’, ‘깊은 염려’입니다.]다행히 전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처음 정해진 각성자 등급은 대부분 평생 간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것도 해 보지 않고 졸업하게 되면 죽을 때까지 후회스러울 것 같아서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나친 처사였다는 건 너도 인정해야 할 거다. 무엇보다 그렇게 들어간 던전 등급이 C등급에서 A등급으로 상승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으니까. 그 사고에 대한 책임은 리호 길드의 책임이지만 거기 들어가기로 한 건 네 선택이었어. 그건 인정해야 할 거다. 그렇지?”
그렇게 묻는 정건후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인정합니다. 졸업하기 전까지 해 볼 수 있는 건 뭐든 해 보고 싶어져서 그랬던 거지만, 규칙을 어긴 건 잘못이니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나는 적당히 고른 말을 차분하게 내뱉었다. 고심하던 정건후는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네 잘못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야. 너한테 귀환석을 맡긴 건 조장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대답하는 대신 정건후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던전에서 나온 다른 애들 말에 의하면 네가 실습 내내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굴었다고 했어. 다른 의견을 귀 기울여 들을 생각보다는 네 뜻대로만 하려고 고집을 부렸다지.”
“음, 그건 그것대로.”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싶겠지. 전투 상황에서 지휘하는 방식은 훌륭했지만, 조원들이 믿고 따를 만한 조장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어. 위기 상황이 수도 없이 발생한 와중에도 귀환석을 쓰지 않고 버틴 건 지나치게 무모한 판단이었다는 건 인정해야 할 거다.”
“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감점 처리가 들어갈 거야. 다음 실습에서도 조장이 하고 싶은 거라면 이 부분은 진지하게 성찰해 봐. 고집불통에 강압적인 리더는 누구라도 다시 따르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답만 잘하는 건 아니지? 선생님이 지켜볼 거야.”
정건후가 파일을 내려놓으며 손을 팔랑거렸다.
자신의 이야기는 끝났으니 나가 보아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이제 내 차례인가.
“선생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 무슨 부탁인데?”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