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한 사람의 세계
오늘은 7학년이 헌터 등급 측정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7층 필드는 작년처럼 한국마력연구소에서 파견된 이들로 북적였다. 나는 긴 대열에 합류하여 순서를 기다리다가 측정을 마치고 돌아섰다.
소매를 걷고 시간을 확인한 뒤 서둘러 계단을 밟고 내려가 상담실로 향했다. 잠시 닫혀 있던 문 앞에서 숨을 고른 나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섰다.
“어서 와라. 조금만 더 늦었으면 차가 다 식었을 거다.”
자리에 앉아 있던 정건후가 기척을 따라 돌아보면서 손짓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맞은편으로 건너가 의자를 끌고 착석했다.
“어쩐지 예전보다 뵙기가 더 힘들어진 것 같아요.”
인사치레 삼아 전하면서 내 몫으로 놓여 있던 찻잔을 쥐었다.
그의 말대로 딱 좋을 만큼의 온기만 남겨 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지. 일이 더 많아졌으니까.”
차민훈이 불명예스럽게 퇴직한 뒤 2학기부터 정건후가 내 담임이 되었다. 그 외에도 차민훈이 맡았던 업무까지 그에게 넘어간 탓에 날마다 분주하다고 했다.
지금처럼 정건후와 평화롭게 마주 보고 있을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까지 떠올리니 졸업이 얼마 안 남았다는 실감이 한층 더 생생해졌다.
“오늘 뵙자고 한 건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습니다.”
“어떤 거지?”
“차정주 이사장과의 관계가 이전과 어떻게 달라진 건지 궁금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묻는 내 말에도 정건후는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사장과 협의 끝에 헌터 아카데미에서의 재직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처음에 임용되면서 작성한 계약서에는 지난 학기가 마지막이었거든.”
그가 말문을 맺으면서 찻잔을 내려놓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외의 대답인 터라 잠시 시간을 셈해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차진명이 용산 던전 브레이크에서 정건후를 처리하려고 했던 건…….
설마 정건후가 헌터 아카데미를 떠나는 타이밍을 일부러 기다린 건가.
“어디까지나 나와 차정주 이사장 사이의 일이니 너무 자세한 것까지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은 양해해 줬으면 한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짚고 넘어가자면 네가 염려할 만한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있으니 느긋하게 숨을 고르던 정건후가 말했다. 그 말을 경청하던 나는 표정을 감추고자 찻잔을 입술 가까이로 가져갔다.
“말씀해 주신 대로 기억하고 있을게요.”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뒤 차를 몇 모금 마시자 이번에는 그가 질문했다.
“이번에는 내가 묻도록 하지. 지난 학기 현장 실습을 마치고 병원에서 면담을 진행하면서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한데.”
“배후 세력이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셨죠.”
“그래, 정확해. 그와 관련해서 너한테도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찻잔을 느릿하게 내려놓으면서 정건후를 마주 보았다.
“그때 넌 배후 세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어. 아마 짐작하는 바가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차진명인가?”
순간 테이블 아래로 내려놓았던 손끝이 움찔거렸다. 정건후가 호명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지금부터 얘기하는 건 극비 사항이니 절대로 발설하지 말도록 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곁눈으로 창문과 문가를 돌아보았다.
창문은 꽉 닫혀 있었고 복도에서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민훈 선생이 수사 과정에서 그 이름을 언급했어. 그마저도 아주 잠깐이었고, 담당 수사관에 의해 묵살됐다고 들었다.”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거죠?”
“작년 현장 실습을 기점으로 네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일 년 동안 지켜보다 보니 가닥이 잡히더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선히 끄덕였다. 나 역시 정건후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애란을 동아리원으로 받아 준다고 했을 때는 그러려니 했었다. 하지만 강현욱과 차민훈을 동시에 보내 버리고, 강준희까지 떠난 뒤에는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게 됐지. 무엇보다 어느 순간부터 너는 하나의 목적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처럼 보였어.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하다가 알아챈 거다.”
하나의 목적. 나는 정건후가 힘주어 발음한 그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이사장의 제안에 순순히 응한 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문제혁과 지선일 때문이었어. 네가 먼저 졸업하고 나면 그 두 사람을 걱정할 테니 여기에 계속 남아서 지켜보려고 했던 거다.”
이어진 말은 그야말로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내 목적을 알아채는 건 그렇다고 쳐도 이사장의 제안을 수락한 것까지 나 때문이라니.
나와 그 둘의 친분이 공공연하게 알려진 이상 차진명은 학교에 남아 있는 이들을 그 곁에 붙여 두고 감시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 것까지 고려하면 정건후에게 감사할 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호의를 베푸는 이유를 분명히 할 필요는 있었다.
“선생님께서 졸업하고 학교를 떠나면 그만인 저에게 이런 호의까지 베푸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정건후는 쥐었던 찻잔을 다시금 내려놓았다. 잠시 고개를 돌리고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말문을 열었다.
“언젠가 내가 알던 사람이 너와 닮았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니.”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건후는 그런 나를 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도 성물을 소유했었다.”
나지막한 소리로 털어놓는 정건후의 옆얼굴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발설한 적은 없지만 S급 마석이 묻혀 있던 던전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네가 가지고 있던 성물 때문이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
“도해월 네가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한 데는 그 물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때부터였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입술을 떼려던 순간 정건후가 팔을 들며 저지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야. 네가 어째서 달라진 건지, 그리고 그 물건을 왜 가지고 나온 건지 앞으로도 영영 묻지 않을 생각이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한도일 마스터에게도 그 물건에 대해서 일절 언급한 게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내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내 호의는 그저 나를 믿고 비밀을 고백한 제자에게 선생으로서 마땅히 베풀어야 하는 도움이라고 생각해라. 그러니 앞으로도 나한테 무언가 보답할 필요는 없어.”
그로부터 한참 대답이 없던 나를 지켜보던 정건후가 먼저 일어섰다. 이윽고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더니 문간을 넘어갔다.
나는 그 순간 한 사람의 세계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일이 당사자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차진명에게 충성하던 시절에는 어딘가 허전하고 늘 헐겁게만 느껴졌는데.
이제 나의 세계도 내가 바라고 원하던 것들로 채워지고 있구나.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진실한 관계를 맺고 그로부터 비롯된 소중한 것을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 * *
정건후와의 만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헌터 등급 측정 결과가 나왔다.
나는 여름에 느꼈던 신비한 감각이 무색하지 않게 목표했던 B급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소식이 학교 바깥까지 전해진 건지 범람이 날마다 떠들썩했다.
“어, 도해월이다!”
“쟤 진짜 B급으로 오른 거야? 구라 치는 거 아니지?”
“진짜면 헌터 라이센스 한 번만 보여 주면 안 돼? 어?”
오늘만 해도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
그만 좀 불러라. 이름 닳겠다.
이제는 복도를 거닐기만 해도 어디선가 내 이름을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수많은 인파가 몰려오면서 주위를 감싸는 행태가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단순히 호명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나와 관련한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어지럽게 뒤섞인 목소리를 뒤로하고 인파를 헤집으면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어제보다 빨리 왔네.”
나는 복도의 끄트머리에서 손을 흔들던 고예성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오늘도 그와 나란히 동아리실로 향하면서 학교 내외부의 사정을 간단하게 전해 들었다.
“강현욱 주위에 있던 애들도 이제는 잠잠해. 보육원 원장한테는 연락 왔어?”
나는 느릿하게 숨을 게우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말문을 열었다.
“네가 예상했던 대로야. 졸업하고 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더니 본론만 얘기하라고 하니까 곧장 후원금 얘기부터 나오더라.”
“그럴 줄 알았어. 그런 장사치 같은 인간이 무슨 애들을 돌본다고.”
혀를 끌끌 차면서 대답하던 고예성을 흘긋 바라보았다. 문득 그곳에 남아 있을 아이들의 수를 셈해 보다가 동아리실로 들어섰다.
학기가 시작된 이후 몇 번의 동아리 모임을 거쳤으나 분위기는 여전히 삭막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칠판 앞에 서서 동료들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문제혁과 김미솔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모두의 앞에서 재차 반복했다. 강준희의 이탈은 선택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하다 보니 대부분 수긍하는 게 느껴졌다.
“오늘 이후로도 마음고생이 심한 사람 있으면 나한테 따로 얘기해. 어떤 이야기든 들어줄 수 있으니까.”
차분하게 말문을 맺을 즈음 지선일이 한숨을 쉬면서 창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 너머로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는 모습이 마치 전생의 문제혁을 보는 듯했다.
“강준희가 떠난 뒤로 다들 어떤 걸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 설령 우려하던 일이 생기더라도 그때마다 우리가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는 미래를 설계하면 돼. 벌써 너무 겁먹지 말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야.”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면서 앉아 있는 모두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나는 문득 머릿속으로 학교에서 보낼 수 있는 남은 시간을 잠시 셈해 보았다.
“그래도 7학년한테는 이번 학기가 학교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학기니까 괴로웠던 건 털어 버리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보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서로를 힐끔거리는 이들 가운데 입을 연 건 지선일이었다.
“솔직히 준희 선배만 생각하면 아직 괴롭거든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선배들한테 남은 시간을 이대로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내색하지 않았어도 모두가 지선일의 눈치를 보고 있던 건지 그 말을 듣던 이들의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어서 대답한 건 고예성이었다.
“그래, 특히 난 제일 늦게 들어와서 더 아쉽다니까? 6년 내내 의미 없던 학교생활이 이제야 좀 재미있어지는 것 같거든. 나중에 돌아봤을 때 마지막만큼은 즐겁게 기억할 수 있도록 너희가 나 좀 도와줘라. 부탁할게.”
장난스레 어깨를 움츠리며 두 손바닥을 모아 붙인 고예성을 보던 이들이 하나씩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나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 동아리 만들어진 지도 이제 딱 일 년 된 거 아니에요?”
“흠, 그보다 조금 더 지났지. 작년 가을 학기 시작하자마자 만들어졌으니까.”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기념 파티 같은 건 안 해도 돼?”
“기념 파티 좋아요. 그러면 그때 해월이 형 B급으로 상승한 것까지 같이 축하해 줄까요?”
지선일의 말에 홍원하와 고예성이 이어서 대답하면서 조용하던 내부가 소란해졌다.
이윽고 문제혁까지 말을 보태자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로 향했다.
“있잖아, 나 아직 실감이 안 나서 그러는데 헌터 라이센스 갱신된 거 보여 주면 안 돼?”
홍원하가 나에게 넌지시 묻더니 아예 손을 모아서 내밀었다. 공손하게 모인 손끝을 내려다보던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지갑에서 헌터 라이센스를 꺼내 내려놓았다.
“와, 다들 이거 봐. 도해월, B급 각성자래. 이게 실화라니. 처음에 애들이 얘기할 때까지만 해도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니까.”
“솔직히 다른 사람이 B급으로 성장했다고 하면 안 믿었을 것 같거든요. 근데 해월 선배라서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해요. 근데 진짜 어떻게 한 거예요?”
“나도 볼래.”
내내 조용하던 서애란까지 웅성거림에 합세하면서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바깥이 어두워지면서 창문에 고스란히 비친 그들의 모습에 잠시간 시선을 두었다.
그러다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곳에 비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