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출항
각성자 등급이 B급으로 상승하면서 시작된 소란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중간고사를 거치면 어느 정도 가라앉을 줄 알았던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예상을 벗어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범람에서도 계속해서 내 이름이 거론되었다.
강당의 2층 관람석에서 고예성을 기다리던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휴대전화 화면을 가득 채운 빼곡한 활자 사이로 내 이름이 툭툭 불거지고 있었다.
[ㅅㅂ 야 아니 진심 현실적으로 말이 됨?] [어제 졸업한 선배들 얘기도 들어 봤는데] [그래도 걔 6학년 때부터 ㅈㄴ 열심히 했잖음] [ㄷㅎㅇ 등급 오른 거 주작일 가능성 제기함]스크롤을 당겼다 놓으면 또다시 같은 화두의 제목이 연이어 나타났다.
개중 몇몇 게시물의 제목을 읽어 보던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눈을 감았다.
며칠 전부터 교내에서도 범람의 존재 또한 수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정인은 내 이야기가 적힌 게시물 링크가 퍼지면서 접속자 수가 급증했다고 보고 있었다.
이틀 전부터는 헌터 등급 측정을 주관하는 한국마력연구소가 직접적으로 거론되었다.
등급 측정 결과가 발표된 직후에만 몇 번 언급되던 것이 중간고사를 지나면서는 검사를 다시 진행해 봐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으로 변모해 갔다. 그러다 한국마력연구소가 내놓은 측정 결과 자체의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니냐는 가능성까지 제기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창문 근처를 서성이고 있으니 멀리서 고예성이 나타났다.
등급 측정 결과가 발표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날마다 그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동아리 모임을 하기 전에 그와 같이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눴다면 이제는 그를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전해 들어야 하는 수준이 되었다.
며칠 동안 고예성을 창구 삼아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확실히 그는 문제혁과 내가 바라던 것 이상으로 유능한 인재였다.
지난여름부터 고예성에게 길드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으나 아직 답을 듣지 못했다.
고정인처럼 설득이 수월할 줄 알았기에 의외였으나 우선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고예성은 넥타이 없이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둔 차림새였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내 곁에 서서 입을 열었다.
“차정주 이사장이 정건후 선생님을 어떻게 설득한 건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정건후 선생님 눈치를 꽤 보더라. 차씨 일가에서 차민훈 선생님을 내친 것도 정건후 선생님 때문이라고 떠드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고.”
“그렇겠지.”
“네가 전에 얘기해 줬던 대로 선생님은 딱 계약 연장만 조건으로 걸었다고 했어. 강압적으로 군다고 해서 넘어올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런가. 이사장도 선생님을 더 데리고 있으면서 설득할 계획인가 봐.”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청하고 있으니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정면을 응시하던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고예성이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동아리 일주년 기념 파티 말이야. 이왕 밀려 버린 김에 용산 길드 사무실에서 하는 건 어때?”
고예성은 그동안 길드 사무실에 온 적도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한다고?
길드의 존재를 한참 전에 알아차렸으면서도 내내 고민하던 고예성이었다.
나로서는 그 질문이 달가우면서도 조금은 의아해졌다. 아니면 혹시.
“계속 미루더니 이제는 결정을 내렸나 보네.”
넌지시 대답하자 고예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누나가 어떤 마음으로 합류했는지 이해는 하지만 난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달리 대답하지 않고 고예성이 마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난 너희랑 있으면 정말 즐거워. 6년 내내 무의미하다고 느꼈던 내 학교생활이 드디어 빛을 보는 기분이라고 했던 것도 거짓말이 아니야. 하지만 결정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 이해해.”
“동아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전투 능력 자체가 출중하고, 또 너랑 일 년 혹은 그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 신뢰를 쌓았다지만 난 아니잖아, 맞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반응을 지켜보던 고예성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나 같은 E급은 너랑 던전에 들어갈 일은 거의 없을 거고, 다른 사람들이 입이 닳도록 얘기하는 너의 설계도 제대로 따라가지도 못할 거야.”
“…….”
“몇 달 동안 지켜보니까 네가 사람들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낀다는 걸 느꼈어. 그래도 그것만 가지고 결정할 수는 없으니 네가 내 미래의 고용주가 된다는 걸 가정하고 하나만 제안할게.”
“그래, 얘기해 봐.”
가만히 고예성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그가 결정을 보류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너희 길드에 들어가게 되면 사무 업무 총괄은 나한테 맡겨 줘. 또 나중에 길드가 커진다고 해도 나랑 정인 누나의 등급이 낮다는 이유로 내치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고예성이 그동안 망설인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를 지금 이 자리에서 구두로 약속할 수 있고, 추후에 계약서까지 작성한다고 하면 길드에 들어갈게.”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중해 보이는 고예성을 위해 나 또한 좀 더 차분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 계약서는 방학에 작성해 보자.”
그 말을 듣고 시원스럽게 웃던 고예성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섰다.
머지않아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은 김미솔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김미솔과 범람에 올라온 게시물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분간 별다른 제지 없이 지켜보기로 결정한 뒤 그녀가 화두를 돌렸다.
―그나저나 길드 이름은 언제 알려 줄 거야? 휴가에서 돌아온 지도 한참 지났잖아.
“음, 이왕이면 문제혁이랑 지선일도 있을 때 얘기하고 싶어서.”
―그런 거였으면 미리 얘기 좀 해 주지. 아무튼, 너희 일주년 파티 할 거라며?
“다음에는 먼저 얘기할게. 그리고 선배들만 괜찮다면 이번 주말에 용산 사무실에서 모이면 어떨까 싶은데.”
―파티를 여기서 한다고? 하긴 지금 동아리실은 좀 그렇지? 범람에 올라오는 글 보니까 그쪽까지 기웃거리는 애들이 있다고 하더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지금 물어볼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기 너머에서 고정인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었지? 다들 좋대. 아, 그러면 선일이도 초대하는 것 맞지?
“맞아. 문제혁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지선일한테도 더 늦기 전에 말하려고.”
―아하.
“다들 모인 자리에서 생각해 놓은 길드 이름도 알려 줄게.”
―그래, 그렇게 해.
잠시 뒤 김미솔과의 통화를 종료하고 창문 너머로 쾌청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바람도 적당히 부는 좋은 날이었다.
* * *
전화를 끊고 며칠 뒤,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찌감치 들어선 사무실은 이미 화려하게 꾸며진 상태였다.
지난겨울에 선배들의 졸업을 기념하며 준비했던 것보다 훨씬 요란하고 눈이 부셨다.
“안녕. 보니까 어때. 애들이 좋아할 것 같아?”
머뭇거리며 회의실 안쪽으로 들어서니 설연호가 풍선을 띄우면서 손을 흔들었다.
설연호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으니 김미솔이 나를 이끌었다.
“왔어? 일찍 왔네. 준비는 우리가 다해 뒀으니까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자리에 앉은 채로 내부를 둘러보니 화려한 색감의 풍선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일어서려고 할 때마다 저지당하던 나는 그대로 다른 사람들을 맞이했다.
“어, 나도 케이크 사 왔는데.”
“선배도? 사실 저도 샀거든요.”
“와, 우리 케이크 네 개 됐어!”
별다른 상의 없이 모인 터라 어느새 테이블에 놓인 케이크만 네 개가 되었다. 나란히 놓인 케이크 상자를 보면서 웃던 것도 잠시 문제혁과 지선일이 회의실을 둘러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게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쾌적하네요. 솔직히 이제 막 시작하는 길드라서 엄청 좁고 낡은 사무실일 줄 알았거든요. 여기는 어떻게 구한 거예요?”
사정을 다 알지 못하는 지선일이 순진하게 묻자 설연호가 헛기침을 했다.
숙연한 표정을 짓는 고정인과 그 곁에서 망설이던 김미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이 넓은 사무실에서 우리 지분은 이 회의실밖에 없어. 다른 곳은 다 취우 소유거든. 그러니까……. 일종의 대출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그로부터 김미솔이 그간의 사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아무튼, 취우 쪽에서 사무실을 대여해 주겠다고 했을 때 여러 건물을 돌았어. 그런데도 이 큰 사무실을 고른 건 순전히 창문 때문이야.”
슬그머니 웃으면서 말문을 맺은 김미솔이 설연호와 고정인을 돌아보았다.
팔짱을 끼운 채 모두를 지켜보고 있던 설연호가 김미솔을 따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창문 너머로 남산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나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지난 뒤에도 해월이를 따라온 걸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나긋하고 부드러운 어조를 따라 분위기가 먹먹해지려는 찰나 홍원하가 이목을 모았다. 그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모두를 관조하던 내 어깨를 앞으로 살살 떠밀었다.
“다들 벌써 감동한 건 아니지? 우리 아직 길드 이름이 어떤 건지도 못 들었잖아. 분명 휴가 다녀와서 얘기해 준다고 했는데 벌써 가을이 다 됐어. 이거 어떡할 거야.”
홍원하가 떠미는 대로 화이트보드 앞에 선 나는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일순 그들의 뒤로 동아리실의 풍경이 겹쳐 보이는 듯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늦어서 미안해. 되도록 모두가 모였을 때 얘기하고 싶었어.”
가볍게 눈짓하면서 양해를 구한 나는 흰 여백에 내내 곱씹던 단어를 적었다.
[도해 蹈海]그대로 한 걸음 물러난 나는 보드와 동료들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면서 말했다.
“바다에 몸을 던져 죽다, 혹은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항해한다는 뜻이야. 지금은 없는 내 가족들이 지어 준 이름 두 글자에 같은 음을 쓰는 한자를 넣어 봤어.”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만큼 많은 말들이 떠올랐으나 힘껏 삼키면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대부분 끄덕거리면서 호응하거나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멋있네. 의미도 좋고. 근데 해월이 너, 의외로 자기애가 넘치는 스타일이구나.”
사뭇 진지하게 발언하는 홍원하를 곁에서 지켜보던 서애란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감춘 채 풉, 하고 웃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뭐야, 왜 웃어? 나도 다시 태어나서 길드 만들게 되면 원하라고 지을 거야.”
그 말을 기점으로 간신히 참고 있던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내 의견을 반대하는 이 없이 모두가 존중해 주었다.
“나도 마음에 들어. 가만 보고 있으니까 우리가 처음 같이 갔던 현장 실습도 생각나고 그러네.”
적힌 글자를 한참 들여다보던 김미솔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설연호가 동조하면서 말을 보탰다.
“그러게. 그때 생각하면 해월이도 참 많이 달라졌지.”
“왜요? 어땠는데요?”
설연호의 말에 지선일이 곧장 받아치자 김미솔이 내 눈치를 봤다.
“이거 다 얘기해도 되나? 그때 배 타고 나가다가 희찬이랑 싸웠던 거 얘기해도 돼?”
이미 다 얘기했으면서 무슨.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나는 그러려니 하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야 얘기하는 거지만 난 희찬 선배랑 해월이 싸울 때 그대로 난파돼서 다 죽는 줄 알았어. 일단 다들 앉아 봐. 먹으면서 마저 얘기해 줄게.”
그렇게 말한 홍원하가 모두에게 손짓하자 서 있던 이들이 의자를 찾아서 앉았다.
내 옆에는 설연호와 문제혁이 앉아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설연호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회의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서로에게 고개를 기울이면서 살갑게 웃는 이들 너머로 펼쳐진 하늘이 쾌청했다.
이로써 헌터 아카데미를 벗어나 또 다른 세계로 향하기 위한 출항 준비를 마쳤다.
시간은 또다시 파도처럼 내리쳐 부서지고 또다시 몰아치기를 반복하겠지.
그리고 난 그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게 항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