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들불
며칠이면 지나갈 이슈라고 생각했던 등급 이야기는 예상보다 오래 갔고.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지속되는 소란은 또 다른 파문을 불러왔다.
각성자 등급 상승을 둘러싼 의문은 다양한 방향의 게시글로 이어졌다.
나와 함께 타깃이 되었던 한국마력연구소에서도 비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누군가 가족이 그곳에서 근무한다며 내부 입장을 포함한 게시물을 올린 것이었다.
해당 게시물의 논지는 간단했다. 한국마력연구소에서 사용하는 등급 측정 기구에는 문제가 없고, 책임의 소재는 당사자인 나에게 묻는 것이 옳다는 얘기였다.
그로부터 비슷한 논지의 글이 수도 없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작년 등급 측정 결과가 발표된 이후에 돌았던 헛소문 또한 어느 순간부터 기정사실처럼 퍼져 나갔다. 차진명이 커뮤니티를 통해 여론을 장악하는 방식과 굉장히 유사했다.
차진명의 방식을 가만히 상기하다 보니 그가 서애란을 곤경에 빠뜨렸을 무렵의 일이 떠올랐다. 그는 특정 대상에 대한 낭설을 마구잡이로 퍼뜨린 뒤 끝내는 그것이‘실제처럼 보이도록’ 상황을 움직였다. 일종의 세뇌라고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작자였다. 한때 서애란이 강효서가 속한 실습 조원들의 정신을 조종하여 강제로 막역한 사이를 유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대척하기 위해서는 나 또한 같은 방식으로 패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간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서애란과 지선일, 그리고 고정인까지 떠올리던 나는 자세를 곧게 가다듬었다. 이어서 내가 불법 마석 가공물을 어떤 방식으로 섭취했는지 상당히 구체적으로 서술한 게시물을 읽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마지막 학기에는 조용히 지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잠시나마 한가롭기를 바랐던 내 바람이 무색해지는구나.
이와 관련하여 한국마력연구소에도 항의가 들어갔지만 그들은 끝까지 공식적인 입장 발표를 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본인의 가족과 지인이 연구소에서 근무한다는 이들이 추가로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에 선동되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으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었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찌감치 당도한 탓에 동아리실은 아직 고요했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테이블에 내려놓은 나는 칠판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대로 팔짱을 끼우고 서서 간결하게 적은 활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헌터 등급 측정 결과가 전생과 다르게 나타난 이유]근 몇 주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활자를 눈에 담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과거로 회귀한 이후 나에게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각성자 등급이 상승하던 순간의 감각은 전생에서도 똑같이 느꼈었다. 하지만 그때는 무슨 짓을 해도 D급이라는 결과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결국 각성자 등급이 상승했다는 내 주장은 사람들이 나를 멸시하기 시작한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햇빛 한 자락 들지 않는 시궁창에 내몰리고 말았다.
이쯤 돼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전생의 내가 지금처럼 안정적인 상태였다면 차진명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진명은 일부러 나를 취약한 상태로 몰아간 걸까.
그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또 불필요한 패를 처리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가정한다면 의심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나를 포섭하기 위해서 한국마력연구소와 결탁해서 등급 측정 기구를 건드린 거라면.”
내내 머릿속에만 떠오르던 가정을 나지막하게 속삭여 보았다.
귀로 직접 듣고 나니 더더욱 어이가 없는 나머지 헛웃음이 나왔다.
방금 내가 제시한 가설이 성립하려면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지켜봐 왔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만 한다. 대체 내가 뭐라고 그런 짓을 하지?
생각을 이어 나갈수록 터무니없었으나 이번 생에서 확실히 규명해야 할 문제 중 하나였으므로 우선은 이쯤에서 추측을 멈추기로 했다. 머지않아 동료들이 나타날 시간이었다.
칠판을 말끔하게 지운 나는 자리에 앉아서 범람에 올라오는 글을 주시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가 울리기 시작하더니 문간이 소란해졌다.
“해월이 안녕. 오늘도 일찍 왔네.”
“안녕하세요, 선배. 가만 보면 매번 선배가 제일 일찍 오고 제일 늦게 가는 것 같아요.”
“안녕.”
나는 왁자지껄하게 등장한 홍원하와 지선일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뒤이어 나타나는 서애란에게도 눈인사를 전한 뒤 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오늘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다른 사람들까지 오면 바로 회의 시작하자.”
* * *
마지막으로 고예성이 나타난 뒤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요 며칠 동안 범람에서 올라온 게시물의 동향을 파악한 뒤 곧바로 노트북 앞에 앉아 고정인과 전화를 연결했다.
―다들 화면 잘 보이지? 그대로 움직여 볼 테니까 마저 확인해 봐.
테이블 중앙에 놓인 휴대전화에서 고정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문제혁과 나란히 앉아 있던 나는 고정인이 제어하는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선배, 버벅거리는 것 없이 잘 움직여요. 다른 선배들도 괜찮죠?”
서애란과 함께 화면을 들여다보던 지선일이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저희도 괜찮아요.”
“나도 괜찮아.”
문제혁이 대꾸한 뒤 곁에 있던 홍원하의 의사까지 확인한 고예성이 말했다.
―오케이. 우선 이 커뮤니티가 어떻게 생겼는지부터 설명해 줄 테니까 너희는 보고 있기만 하면 돼. 궁금한 것 있으면 얘기하고!
고정인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은 강효서가 관리자로 활동하는 커뮤니티 화면이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범람과 달리 적갈색으로 꾸며진 페이지 상단에 적힌 이름이 눈에 띄었다.
[들불]―이 커뮤니티 이름은 들불이야. 범람이랑 생긴 게 좀 다르지? 여기는 게시물을 업로드할 때마다 자기 신분을 인증해야 하더라고. 그래서인지 업로드 주기 자체는 느린 편이야.
언제나처럼 명확한 어조로 설명을 잇던 고정인이 커서를 옮겨 다른 곳을 가리켰다.
―제목만 봐도 대충 알겠지만 여기는 범람처럼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는 분위기는 아니야. 대부분 이렇게 정보만 공유하고 있어.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스탯 보상 던전 좌표 공유]이어서 고정인이 눈에 띄는 게시물의 제목을 클릭했다.
[1658―상호 교환]―다들 보여?
“네, 이게 뭐예요?”
고정인의 말에 홍원하가 의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선 제목부터 보면 들불에서는 제목에도 불필요한 단어를 넣지 않더라. 본문에도 사담은 적지 않는 것 같았어. 아마 괜한 말을 적었다가 무슨 화를 입을지 몰라서 그런 건가 봐. 아무튼, 이런 식으로 단어를 툭툭 끊어서 적는 게 대부분이야. 지금 이건 공략하고 나면 스탯이 보상으로 지급되는 던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거지. 다들 여기까지 이해했어?
“네, 이해했어요.”
“얘네 진짜 치밀하다. 마저 말해 줘요.”
지선일과 고예성이 전화기에 대고 대꾸하자 고정인이 커서를 옮기면서 말했다.
―여기 적힌 1658은 채팅방 번호야. 관심 있는 사람은 1658이라고 적힌 채팅방에 들어가서 정보를 공유하면 돼. 이 채팅방은 어디까지나 일회성으로 사용 가능하고, 다른 정보를 공유하고 싶으면 또 다른 채팅방 번호를 발급받아야 해.
무릎끼리 포개고 앉은 나는 상체를 조금 기울이면서 고정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호 교환이라고 적힌 건 대충 눈치챘지? 교환할 정보가 있는 사람만 저 채팅방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야.
“그러면 공유할 정보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집중하는 건지 눈가를 미약하게 찡그리던 문제혁이 물었다.
―그럼 저 정보는 못 얻는 거지 뭐, 대신 이런 것도 있어.
[아티팩트 시세 공유]고정인이 이어서 다른 글을 클릭했다.
[5782―선착순 2]“선착순? 이건 또 뭐야.”
―말 그대로 선착순이야. 2라고 적혀 있는 건 두 명한테만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뜻.
나는 문득 서애란이 앉은 쪽을 곁눈으로 살펴보았다.
그녀는 어떤 말도 보태지 않고 고정인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근데 선배,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뭔데?
“아티팩트 시세 공유를 왜 여기서 하는 거예요? 미술 작품 사서 모으는 것처럼 아티팩트로 재테크 하는 건 어른들 얘기인 줄만 알았거든요.”
고정인이 음, 하는 소리를 내며 말을 고르는 동안 서애란이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설명할게요, 선배.”
서애란은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는 탓에 쏟아진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말했다.
“들불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어. 집안에 돈이 많거나, 등급이 높거나,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강효서 선배가 커뮤니티에 초대했거나. 모쪼록 이런 정보를 공유받는 애들은 대부분 돈이 많은데 정보가 부족한 사람들일 거야.”
홍원하가 낮은 소리로 감탄하는 동안 고정인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맞아! 애란이가 방금 한 말 그대로야. 그리고 선착순이라고 해서 조건이 없는 건 아니야. 이런 경우에는 정보를 교환하는 대신 상대가 요구하는 부탁을 들어줘야 해.
“부탁이요? 예를 들면?”
―잠시만. 캡처한 화면 보여 줄게.
지선일의 질문에 대답한 고정인이 커서를 움직이더니 텍스트 파일을 띄웠다.
―채팅 화면 캡처는 금지되어 있어서 대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거야. 요새 한국마력연구소랑 해월이는 일절 관계없다고 하면서 이상한 헛소문으로 선동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왔었잖아? 아무래도 얘네 짓인 것 같아.
고정인이 옮긴 대화 내용에는 범람에 어떤 식으로 게시물을 올릴지에 대한 매뉴얼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와, 업로드 주기랑 댓글 다는 타이밍까지 적혀 있어요. 강효서 선배 알면 알수록 지독한 사람이다, 진짜…….”
그래, 그런 놈이니 차진명의 곁에서 질기게 붙어 있는 거겠지.
나는 등받이에 느슨히 기대어 앉은 채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탓에 더는 화면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졌다.
―아무튼, 난 요새 범람이 우리가 처음 만들었을 때의 취지랑 완전히 동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해. 이건 다들 동의하지?
“물론이죠. 보이지 않는 청자가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창구가 됐으면 해서 만든 건데 지금은 그냥 해월 선배를 헐뜯고 싶어 하는 사람만 남은 것 같아요.”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지선일이 고개를 저으면서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자세를 바르게 하면서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번 일로 커뮤니티의 규모가 갑자기 커지면서 온갖 어그로가 잔뜩 유입돼서 그런 것 같아. 여론을 안정적으로 다잡으려면 서둘러 처리하는 게 좋을 듯한데.”
“학기가 끝나려면 시간이 꽤 남았으니까 이 타이밍을 이용해서 제대로 반격해 보는 건 어때. 이렇게 된 김에 커뮤니티의 여론까지 확실하게 잡아 보자. 커뮤니티 취지에 맞지도 않는 애들이 내내 상주하면서 헛소리 지껄이는 것도 다 치워 버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채로 입을 다물고 있던 고예성이 말문을 열었다. 모두를 둘러보던 고예성의 시선이 나에게서 멈췄다.
“괜찮은 것 같아. 구체적으로 생각한 게 있으면 마저 얘기해 줘.”
오랫동안 침묵하던 내가 입을 열자 고예성이 일어나서 칠판으로 다가갔다.
“솔직히 난 해월이 등급에 관련한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궁금한 건 그 성장이 가능한지,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거니까. 성장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어서 뭔가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성장했을 거니, 어쩌느니 하면서 떠들어 대는 거라고 봐. 현실적으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잖아.”
숨을 가볍게 고른 고예성은 모두와 눈을 맞추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강효서 선배가 운영하는 커뮤니티에 대한 건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했었어. 현장 실습에서 어떤 사람이 그 선배의 조원으로 합류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다들 아, 그 사람도 커뮤니티에 들어갔겠구나, 하는 반응이었고.”
칠판 근처를 느릿하게 거닐면서 말을 잇던 그가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그 커뮤니티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청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할 거야. 굳이 들불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알아서 퍼지겠지. 거기서 여기 얘기가 나온다더라 하면 하나 남은 밥그릇까지 뺏긴 것 같지 않겠어? 게다가 우리가 아직 터뜨리지 않은 것도 하나 남아 있잖아?”
고예성은 말문을 맺으면서 서애란을 돌아보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서애란이 그를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들불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성문에 마석을 헌납해야 했다던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파문이 꽤 클 거야. 크게 보면 그 사람들도 용산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가능성에 가담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성문에서도 그 부분에 대한 건 끝까지 침묵하기로 협의했을 거야. 아니었으면 정도윤도.”
서애란은 말을 멈추더니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이후의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다들 예상 가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도 동의하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고정인이 전화기 너머로 말문을 열었다.
―그 부분은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부정행위 걸리고 나서 너무 분하고 속상할 때 제일 먼저 했던 게 들불에 가입하는 애들이 성문에 마석을 헌납했다는 정황을 모으는 거였거든. 그거 다 모아서 복수하려고 했던 건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네.
“누나도 참…….”
―고예성, 할 말 있으면 얼굴 보고 해라. 아무튼, 그렇게 알고 계획 세우면 되는 거지?
나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으로 다가갔다.
근처에 있던 고예성의 어깨를 잠시 짚었다가 놓은 뒤 모두와 마주 보고 섰다.
“다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에 동의한다고 하면 계획을 세워 볼까 하는데. 어때?”
차례로 시선을 맞추고 있으니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조하는 게 보였다.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서서 앞으로의 계획을 간략하게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강현욱과 차민훈도 처리했으니 강효서의 기세를 꺾어 놓을 때가 되었다. 그를 완전히 정리하면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 첫걸음부터 차근차근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