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커튼콜 (1)
하루 뒤로 예정되어 있던 기말고사는 연극의 여파로 연기되었다. 해당 사태를 벌인 주범을 찾고 무대에 올랐던 세 배우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연극의 내용과 별개로 단숨에 망가진 면학 분위기를 거론하며 분노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특히 이번 시험의 결과를 토대로 한국마력연구소 및 각종 기관의 서류 전형 합격 결과를 예측하고 진로를 확정해야 하는 E, F급 상위권 학생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다음 날 오전에는 서울시 교육청에서도 공문이 내려왔다. 그들은 이번 사태의 주범을 찾아내 엄벌을 내릴 것을 지시했다.
비각성자의 교육 시설과 헌터 아카데미를 개별의 것으로 구분하고 때로는 별종 취급까지 하던 그들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반응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난 이 년 동안 현장 실습에서 여러 사고가 발생하는 동안에도 매번 ‘오래전부터 독단적인 길을 걷고 있는 헌터 아카데미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라는 입장을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외면했던 이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들이 반응하는 건 현 서울특별시 교육감이 5827의 조부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기억대로라면 5827의 집안 구성원들은 대대로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집안의 풍조 때문인지 그들 중 유일한 각성자인 5827 또한 C급으로 각성하여 재능 또한 출중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마력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명예롭게 살아가기를 꿈꿨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자연스레 강효서를 떠올렸다. 강효서도 5827과 마찬가지로 굴지의 재벌 가문인 효신 그룹의 유일한 각성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의 친부이자 효신의 회장인 강우석도 내가 총사령관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아들의 모든 행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강효서가 효신의 지분을 끌어다 차진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굳이 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4713의 마지막 애드리브를 통해 성문과 강효서 사이의 유착 관계가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된 이상 한동안은 소란할 것이었다. 하지만 효신이 그의 뒷배로 존재하는 이상 강효서를 손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수확이 영 없는 건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해당 연극에서 강효서의 이름이 거론되었어도 작년에 졸업하여 헌터로 활동하는 그를 처벌할 수 없는 노릇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아무렴 괜찮았다. 들불의 관리자가 강효서라는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졌다는 것만 해도 유의미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연극에 대한 책임은 나와 서애란 두 사람이 지는 것으로 협의했다. 서애란의 예측대로 다음 날 4713이 교사와의 면담에서 작년에 나와 서애란이 9층 필드에서 만나는 걸 목격했다고 진술했기에 일이 한층 수월해졌다.
그와 동시에 학생들 사이에서도 나와 서애란이 범람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돌기 시작했다. 연극이 끝난 뒤 범람이 그와 관련된 화두로 도배되는 것을 지켜보던 고정인은 의문에 답을 남기는 대신 커뮤니티 운영을 임시로 중단하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용의자가 나와 서애란으로 확정된 뒤 교사들 사이에서는 처벌 수위에 관련해 열띤 논의가 이어졌다. 연극의 정황을 전해 들은 모든 교사는 나와 서애란이 학교의 규칙을 어기고 해당 학생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대해 엄벌로 처리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수립해 갔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지금, 나와 서애란은 기숙사의 가장 위층에 자리한 공실에서 각각 근신 중이었다. 문제혁과 분리된 나는 휴대전화를 압수당했고 스킬 사용 또한 금지되었다.
목덜미에는 검은색 제어구를 착용해야 했다. 그 외에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제공되었다. 들고 올 수 있었던 개인 물건은 전생의 내가 사용하던 일기장이 전부였다.
앉은 자리에서 팔짱을 끼운 채 고개를 젖힌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펼쳐 둔 일기장의 낱장이 손끝에서 사락거리며 쏟아지는 감각과 목덜미를 불쾌하게 조이는 가죽의 촉감만이 선연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한테 목줄을 채우고 건물 꼭대기에 가둬 버리다니.
검지를 제어구에 걸친 채 힘껏 잡아당기던 나는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체내의 마나를 조금이라도 방출하려고 하는 즉시 제어구가 반응하면서 살갗을 가시덩굴로 옥죄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한숨을 쉬던 나는 감옥처럼 최소한의 물건만 남겨진 방을 돌아보았다. 4평이 채 되지 않는 좁은 방을 계속 돌아다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이 막혔다.
이런저런 상념을 이어 나가던 것도 잠시 느릿하게 자세를 가다듬었다. 회귀 직전, 과거의 내가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던 페이지의 모서리를 쥐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얼마 전에 들춰 보았던 대로 일기장의 절반이 여백으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 넘긴 흔적조차 없이 빳빳하게 넘어갔으나 손끝은 일기장을 다뤘던 감각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낱장을 펼치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전생의 내가 남겼던 활자가 환영처럼 떠올랐다. 손끝으로 그 위를 짚어 보면 그날의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되풀이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기억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 될 수 있다는 걸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 * *
정건후가 나와 서애란을 호출한 건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다. 기숙사 건물로 넘어온 정건후는 같은 층에 자리한 작은 규모의 상담실에서 나와 서애란을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어느덧 그와 대거리한 지 이십여 분이 흘렀으나 그는 눈을 감은 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눈앞에 한가득 쌓인 서류 파일을 힐긋 보면서도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길어지려던 적막을 깨뜨린 건 서애란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창백해진 서애란이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동시에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쏟아져 내렸다.
그 모습을 비딱한 눈길로 쳐다보던 정건후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틀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서늘한 눈길이 생경했으나 우선 서애란을 따라서 입을 열었다.
“저희가 벌인 일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학교에서 결정한 대로 처벌도 받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들은 정건후는 나와 서애란을 나란히 눈에 담고 바라보았다. 이따금 한숨을 내쉬던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너희가 벌인 일이 단순한 장난이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네, 작정하고 벌인 일입니다. 마땅한 처분을 받겠습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곁에 있던 서애란이 고개를 조금 숙이는 듯했다. 그런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던 정건후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런 일을……. 아니, 내가 그동안 너희를 너무 편하게 풀어 줬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저희의 독단적인 선택으로 벌인 일입니다. 죄송해요.”
이번에는 서애란까지 합세하여 대꾸했다. 정건후는 한숨을 쉬더니 이내 진절머리가 나는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사죄는 됐다. 지금 너희는 나한테만 죄송한 거지 일을 벌인 것 자체는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정건후는 나와 서애란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잘못을 부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면서 화가 조금은 누그러든 건지 무던한 손짓으로 파일을 열었다.
“학교에서 너희에게 내리는 처분을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라. 이번 사태의 주범인 도해월과 서애란에게 각각 일주일의 정학 처분을 내린다. 지금부터 일주일 동안 지금 머무는 공실에 계속 근신해 있도록. 그동안 제어구도 계속 착용해야 할 거다.”
“근신 처분이 내려진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어구는 벗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발을 묶어 둔 걸로 모자라 이런 식으로 통제하는 건 과분한 처사 같습니다.”
“마땅한 처분을 받겠다며?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으니 마저 듣도록.”
나는 파일에 끼워져 있던 서류를 내려다보던 정건후가 말을 맺는 즉시 받아쳤다. 그러자 정건후는 가라앉은 눈으로 나와 서애란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또한 두 사람은 2학기 기말고사 응시를 금지한다. 더불어 너희 두 사람과 홍원하, 고예성이 졸업할 때까지 동아리 모임도 금지하기로 했다. 동아리 자체를 없앤다고 하는 걸 겨우 말렸어. 이 부분에 대해 이견은 없겠지.”
순간 움찔하던 서애란과 달리 나는 고개를 차분하게 끄덕였다. 서애란 또한 목을 옥죄는 제어구가 답답한 건지 옅은 한숨을 쏟아 냈다.
“마지막으로 동계 현장 실습의 참여 자격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대신 실습 이틀 전까지 7층 필드에서의 훈련은 전면 금지야. 몰래 훈련하는 게 발각되면 선발된 조원들에게 페널티가 있을 테니 유의하도록. 어차피 그때까지 제어구를 착용해야 하니 허튼 수를 쓸 생각은 접어라.”
그 말을 끝으로 파일을 소리 나게 덮은 정건후가 약지로 눈썹을 매만졌다. 이내 꼬고 있던 다리를 반대쪽으로 바꾸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가 학교의 결정이야. 어떤 처분이든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은 여전하겠지?”
정건후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꾸하려 했으나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여기서 더 반박했다가는 겨우 얻은 훈련 기회조차 앗아 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너희가 느끼기에는 과분한 처사 같겠지만 이건 7년 동안 너희를 교육하고 보호해 왔던 학교가 내릴 수 있는 지극히 온당한 처분이야. 어차피 헌터로 활동할 너희에게 기말고사를 응시 안 하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겠지. 그럼에도 졸업 직전에 기말고사 응시 불가에 정학 처분까지 내린 건 너희가 똑똑히 깨달았으면 하는 게 있어서다.”
그 말을 듣던 서애란은 끝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가 미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아마도 한 단어로 단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이때까지 너희가 벌이는 일들을 반쯤 눈감아 줬던 것도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나조차도 학교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어. 졸업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너희는 여전히 아카데미에 소속된 학생이야. 그런 이상 학교는 너희가 스스로 잘못을 깨우칠 만한 물질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게 당연해. 말이 근신이지 너희를 꼭대기에 가둔 것도, 제어구를 채운 것도 그래서였다. 그리고 또…….”
한숨을 간신히 삼키는 듯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리던 정건후가 말끝을 흐렸다. 그 설명을 듣고 보니 학교의 처분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교육청에서 움직이고 4713이 강효서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렇게 된 이상 헌터 아카데미에서도 마땅한 처분을 내려야 했겠지. 그래도 억울하고 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너희가 강효서까지 건드리는 바람에 이사장 쪽에서도 곧바로 반응이 있었다. 내후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앞둔 이사장으로서는 자식이 조금이라도 엮인 일이라면 관여할 수밖에 없었겠지.”
정건후는 그즈음에서 말문을 닫으면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서 다 전하지 못한 의중을 알아챌 수 있었다.
차정주는 작년 하계 현장 실습 이후부터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으니 이번 일에 대해서도 어떤 식으로 반응이 올 터였다.
적기를 따진다면 오늘일 듯한데…….
“면담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서애란은 마저 묻고 싶은 게 있으니 남아 있도록. 도해월은 상담실 밖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이사장의 비서가 찾아오면 따라가서 추가 면담까지 진행하고 오면 된다.”
그럼 그렇지.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서애란의 안색을 확인한 뒤 정건후에게 허리를 숙이고 상담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