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06
106화. 커튼콜 (2)
학생들이 떠나간 교정을 거닐고 있으니 창문 너머로 일찌감치 내린 저녁의 푸른빛이 완연했다. 차정주의 비서라며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나를 교장실로 데려갔다.
오랜만에 마주한 차정주는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말끔하게 넘긴 은빛 머리카락과 선이 짙고 날카로운 인상이 여전했으나 표정만큼은 온화했다.
“오랜만입니다, 도해월 학생.”
한참 전에 당도한 것인지 그의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은 절반쯤 비워진 상태였다. 비서의 안내를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서는 나를 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오랫동안 장검을 사용한 그는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불거져 있었다. 예의상 그의 손을 맞잡고 악수하고 있으니 맞닿는 손바닥에서 그가 칼날로 베고 넘어선 세월이 느껴지는 듯했다.
나를 대하는 차정주의 태도나 몸가짐만 보면 잘못을 추궁할 것 같지 않았다. 이어서 그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은 나는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는 채로 그의 모습을 가만히 주시했다.
“재미있는 일을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혹여 숨겨진 내막이나 제가 알아야 할 의도가 있다면 도해월 학생에게 직접 묻고 싶더군요.”
작년 여름, 나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겠다고 말했던 차정주는 이제 그 말에 담겨 있던 의중을 숨기지 않으려는 듯했다. 이쯤에서 오늘 그가 나를 여기까지 부른 것이 잘못을 책망하기 위함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그가 나를 소환한 이유는 무엇일까.
차정주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대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니 그의 시선이 내 옆얼굴에 집요하게 머물러 있는 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옆에서 관찰해 온 바 어느 정도 차정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상됐다. 차정주는 지금 내가 그가 설계한 판에 올라갔을 때 어떤 패로 쓰일 수 있을지 계산하는 중이었다. 안 들킨다는 확신만 있으면 유스티티아의 검을 쓰는 건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 본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차정주가 다시 입을 떼는 순간, 오늘의 대담이 졸업한 이후의 내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예감 또한 한층 명징해졌다.
* * *
차정주가 꺼낸 본론은 간단명료했다.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발자취를 몸소 설명하더니 나와 함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까지는 그가 나에게 악수를 권하던 순간 예상한 것이었다.
차정주는 자신이 원하는 상대가 아닌 이상 쉽게 손을 내미는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의외라고 생각한 건 다른 대목에서였다. 정확히는 그가 나에게 자신의 세력에 합류할 것을 제안하면서 함께 언급한 부차적인 것이었다.
‘지금부터 향후 삼 년 이내에 해월 학생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지금부터 우리 집안과 함께해 준다면 때가 되었을 때 해월 학생의 실력에 알맞은 자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이사장이 아닌 동료 헌터로서 정식으로 제안하는 겁니다.’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온 건 맞지만 아직 학생인 나한테 이런 말을 한다고?
그는 이런 중요한 제안을 허투루 꺼낼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내가 길드를 창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질의하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설연리와 한도일의 제안 또한 예상했으나 부담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차정주까지 나에게 손을 내밀다니. 그 제안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으니 목을 옥죈 제어구가 한층 답답하게 느껴졌다.
‘길드 창설에 관한 소식은 이미 접하셨다고 하니 바로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이사장님의 제안을 거절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면서 내가 했던 대답을 상기했다. 내가 일부러 이사장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했다는 걸 그도 알아챘을 것이다.
내 대답을 잠시 되뇌던 차정주는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힌 사람처럼 헛웃음을 지었다. 그 견고하고 매끄러운 얼굴에 균열이 떠오르는 모양까지 차진명과 몹시 흡사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건넨 대답으로 인해 후일 나와 동료들의 길드에 반드시 타격이 올 것이다.
하지만 보복이 두렵다고 해서 차정주의 밑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그의 밑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내가 끝내 다다를 수 있는 건 고작 차진명의 곁자리일 터였다.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그때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지.
나는 그즈음에서 손바닥에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겨울의 시린 바람이 쉼 없이 불어왔다.
연극이 끝나던 날 밤부터 드문드문 내린 눈송이는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그쳤다. 얕게 쌓인 눈이 반쯤 녹은 상태로 다시 얼어붙으면서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때때로 모질게 느껴질 만큼 서늘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온몸의 감각이 한층 또렷해졌다. 갇혀 있는 건 답답했으나 다른 사람을 마주치지 않고 휴식에 전념하고 있으니 머릿속도 한층 차분해졌다.
과거로 회귀하고 나서 이렇게까지 오래 혼자 있는 건 처음인 듯한데.
이제는 그저 가만히 아무 생각 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고 있으니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휴대전화가 없는 것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금세 익숙해졌다.
문득 숨을 크게 고르면서 바깥을 다시 내다보았다. 이곳은 내가 지내던 방과 달리 바로 아래쪽으로 주차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은 연극 무대에 올랐던 세 명의 배우에 대한 처분이 결정되는 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떼로 모인 사람들과 5827이 나타났다. 5827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서 5827을 호명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으나 그는 초연한 얼굴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굳이 증폭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들의 말이 어느 정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쟤 그래도 자퇴는 안 한다더라. 학교에서 겨우 뜯어말렸대.”
“그렇겠지. 그럼 쟤도 기말고사 안 보는 건가? 쟤네 할아버지가 엄청 난리 쳤다며.”
“듣기로는 그런 것 같았어. 쟤네 반 애들도 자세한 건 잘 모른대.”
보호자로 추정되는 사람과 검은색 차량에 탑승한 5827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떠난 뒤에도 웅성거리면서 모여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머지않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고예성이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를 들여다보니 귓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만에 마주친 고예성은 생각했던 것보다 수척해진 상태였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상태일 텐데.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으니 며칠 전, 연극의 책임을 서애란과 나에게 돌리겠다고 했을 때 지선일이 특히 괴로워하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근신 처분이 결정된 뒤 방을 떠나올 때의 문제혁의 반응도 함께 떠올랐다. 그는 혼란스러운 상황일수록 말을 아끼려 하는 편이었기에 별다른 반응 없이 잠잠했으나 표정만큼은 숨길 수 없는 듯했다.
그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내가 두고 온 모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전날 상담실에서 정건후를 만나기 전, 서애란이 나에게 전했던 말도 떠올랐다. 그녀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머리도 식힐 겸 다른 건 다 잊고 휴식하라고 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도 아니잖아.’
어쩌면 서애란은 지금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까지 미리 예견한 듯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는 일이었으면 내 걸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깃털처럼 가벼웠겠지.
동료들을 떠올리고 있으니 주차장에 9364가 등장했다. 그는 이전보다 더 많은 인파를 몰고 왔다.
“어이, 다들 막지 말고 비켜요! 거기 학생, 비켜!”
한눈에 봐도 보호자는 아닌 듯한 장성한 남성들에 의해 끌려가던 9364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차에 탑승했다.
“쟤 진짜 불법 마석 가공물인지 뭔지 엄청 간절했나 봐.”
“왜? 뭔데? 쟤 왜 경찰차 타는 건데?”
“나도 잘은 몰라. 근데 들어 보니까 무슨 독성 강한 수면제를 불법 마석 가공물이라고 속이고 판매하던 업자랑 연락하다가 휘말렸다던데?”
9364는 두 남성에 의해 질질 끌려 가면서도 울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모르겠지만 자기 발에 걸려 넘어져 코가 깨진 격이니 어련히 책임지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경찰차에 억지로 탑승한 9364가 모습을 감춘 뒤에도 사람들은 계속 입을 모아 떠들었다. 고예성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입을 달싹이는 게 멀리서도 잘 보였다.
그러다 저들 사이에도 나에 대한 비방을 남긴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주먹을 힘껏 움킨 채 숨을 가다듬고 있으니 4713의 막역한 친우이자 전생의 이맘때에 나를 괴롭혔던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는 전생의 내가 차진명을 조우하기 직전, 화장실에 비치된 호스를 가져와 물을 뿌렸던 인물이었다. 그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멀리서 바라보았을 뿐인데도 손끝이 저릿해지기 시작했다.
창틀을 힘주어 붙든 채로 중심을 유지하고 있으니 근처에서 4713이 나타났다.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그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화려한 치장을 한 어른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중이었다.
4713의 보호자로 추정되는 이들은 주차장에 모여 있는 학생들에게 손사래를 치면서 물러가게 했다. 그러다가도 4713을 대놓고 흘겨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이윽고 어디선가 4713을 향해 날달걀이 날아왔다. 뒤통수에서 노란 액체가 끈적하게 번진 것을 4713이 손바닥으로 거머쥐던 순간.
툭!
누군가 연이어 날달걀을 던지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무언가 외치는 걸 잠자코 들어 보니 4713에 의해 커뮤니티에 비밀이 까발려진 이들인 것 같았다.
외에도 4713이 정도윤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누군가는 강효서의 이름을 언급하며 무어라 따지는 것처럼 보였다.
점점 불거지는 소란에도 우뚝 멈춰 있기만 하던 4713은 정색한 채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를 억지로 당겨서 차에 태우려던 보호자의 손길마저 거세게 뿌리친 4713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한껏 꺾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기숙사의 가장 높은 층에 있던 나와 그의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주 먼 거리였으나 카메라의 줌으로 그의 얼굴을 화면 가득 담아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에 간신히 묻어 두었던 기억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4713의 얼굴은 전생의 내가 수십 번, 수백 번도 넘게 맞닥뜨렸던 것이었다.
나를 보는 모든 이가 낄낄거리며 웃거나 인상을 쓰는 등 특정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도 4713은 언제가 됐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뒷덜미가 무언가에 붙들린 것처럼 저릿해지더니 호흡이 거칠어졌다.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흘려보낸 건지 제어구가 반응하면서 살갗을 서서히 조여 왔다.
잠시 뒤 4713의 보호자 중 한 명이 그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당겨 차에 태웠다. 차 문이 닫히는 순간에도 4713은 고개를 기괴하게 꺾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시덤불로 목을 옭아매는 통증과 함께 관자놀이까지 핏발이 섰다. 눈이 충혈된 나머지 시야가 흐릿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나 또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야, 인마! 너희들 왜 여기 나와 있어! 당장 안 들어가?”
“그만 떠들고 빨리 들어가. 남아 있다가 걸리면 벌점이야.”
4713이 탑승한 차가 멀어진 뒤 어디선가 교사 무리가 나타나 모여 있던 이들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창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린 나는 바닥에 무릎을 처박은 채 주저앉았다.
멸망 직전의 순간, 차진명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실감한 나는 끝내 나에게 무엇이 남았는지 셈해 보았다.
결국 내게 남은 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슬픔이었지. 한동안 새어 나오지 않게 잘 막아 두었던 그것이 순식간에 역류하더니 주저앉은 자리에 얕은 물살처럼 밀려왔다.
각성자 등급이 성장하면서 이전의 감각을 되찾았으나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그저 견뎠던 시절의 기억 앞에서는 전부 무용해졌다.
열연을 펼친 배우가 물러난 자리, 여전히 무대에 남아 있는 나를 보며 깨달았다. 연극이 끝난 무대 위로 나를 불러낸 건 다른 사람이 아닌 과거의 나였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