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커튼콜 (4)
4713이 학교를 떠나가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시작된 과거의 환영은 계속 되풀이되었다. 지속되는 악몽에 일주일의 정학이 끝나고 근신이 해제된 나는 곧바로 9층 화장실로 올라왔다.
맞은편의 직사각형 창문에서 사선으로 쏟아지던 겨울의 볕이 어깨를 물들였다. 한 시간 남짓 이곳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열기가 서서히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어깨에 닿는 볕에 뜨겁고 아릿한 감각이 차츰 선명해질 즈음 구석에 처박힌 과거의 내가 눈을 감고 늘어졌다. 군데군데 생채기를 달고 숨을 고르는 얼굴이 고단해 보였다.
이윽고 어디선가 얕은 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밑창이 젖으면서 냉기가 온몸을 타고 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나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모든 건 착각이다, 괜찮다. 속으로 되뇌고는 오늘 오전에 돌려받은 휴대전화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범람은 아직 운영이 중단된 상태였으나 닫히기 직전의 반응은 확인이 가능했다. 이어서 동료들이 남긴 캡처 화면을 하나씩 넘겨 보았다.
연극이 끝난 직후에는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궁금해하는 듯한 반응이 더러 나타났으나 그마저도 잠시인 듯했다. 그와 동시에 내 이름이 담긴 억측과 비방을 비롯한 어그로 또한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던 중 고정인이 전송한 캡처 화면에 이어서 첨부된 영상을 재생해 보았다.
[4713 ‘그 대사’ 클립 공유.mp4]나는 동영상 속에서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악을 쓰는 4713의 모습을 바라보다 영상을 잠시 정지한 뒤 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가 주차장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순간이 문득 겹쳐 보였다.
지잉―
손아귀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하는 순간 상념에서 빠져나온 나는 전화를 받았다. 발신인은 고정인이었다.
―어? 이제 전화도 받네? 오늘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자세한 시간을 몰라서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고마워, 선배. 선배도 잘 지냈지? 다른 사람들은 어때?”
―잘 있었지, 뭐. 근데 다른 애들은 아직 못 만났어?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텐데.
고정인의 말에 간결하게 대꾸하자 의문하던 것도 잠시 다른 사람들의 근황을 전해 주었다. 그러다 침묵이 잦아들 즈음 고정인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너랑 애란이 근신해 있는 동안 예성이가 여기저기서 알아봤는데, 학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전부 다 강효서 얘기만 하고 있다더라.
이어서 그녀는 강효서가 관리하던 들불 또한 잠정적으로 폐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들불을 폐쇄했음에도 헌터 아카데미 학생들이 그곳에 가입하기 위해 성문에 마석을 헌납했다는 소식이 공공연하게 퍼지면서 언론이 소란스러워졌다고 했다.
―핸드폰 다시 받은 거면 내가 단체 채팅방에 보낸 뉴스 링크도 확인했으려나? 연극 끝나고 나서 성문 얘기를 다룬 기사가 계속 터지니까 경찰도 눈치를 보긴 하는 건지 추가 조사까지 착수한다고 하더라. 이 기회에 강효서까지 확 꺾어 버리면 좋을 텐데.
“확인했어. 늦지 않게 움직인다고 하니 다행이네.”
짤막하게 대꾸하자 휴대전화 너머로 고정인이 홀가분하게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터질 때마다 순식간에 꼬리를 숨겼던 강효서도 이번만큼은 면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강효서는 이 정도로 무너질 놈이 아니었다. 그의 근간을 흔들어 놓기 위해서는 다른 각도에서도 공격할 필요가 있었다. 이 타이밍에 강효서의 집안과 엮인 일이 하나 터져 주면 좋을 텐데…….
―사실 근신 풀리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로 전화한 것도 급하게 전할 게 있어서 그런 거야. 아직 기사는 안 나간 것 같기는 한데, 미리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뭔데?”
―효신그룹 내부에서 일이 터졌나 봐. 걔네 가족 중에 누가 주가 조작한 정황이 밝혀졌대. 아직은 찌라시에 불과하기는 한데, 뭔가 수상해서 너한테도 얘기해 두는 거야. 사실인지는 좀 더 알아볼게.
차진명이 강효서를 택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집안의 유일한 각성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효신 그룹에서는 강효서가 각성자라는 이유로 그를 내치지는 않았으나 경영권 승계 순위에서 제외해 버렸다.
강효서에게는 언제든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댈 수 있는 재력이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그들의 세계에서 철저히 소외당했다. 그런 그에게 차진명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그만한 입지를 제공하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가뜩이나 집안에서 흉흉한 일이 터진 와중에 바깥으로 도는 강효서까지 문제를 일으켰으니 효신이 잠잠할 리 없었다. 나로서는 달가운 소식이었다.
“그럼 부탁할게, 선배. 고마워.”
―이 정도쯤이야. 그런데 걸리는 지점이 하나 있어. 이것도 확실한 건 아닌데, 찌라시 터진 타이밍이 너무 절묘한 것 같아. 많고 많은 찌라시 중에서 하필 효신 그룹에, 심지어 주가조작이라니.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터뜨린 것 같지 않아?
“음.”
―범람을 시범 운영할 때부터 외부에서 접속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었거든. 혹시 바깥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누군가의 소행인 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 해월이 넌 뭐 짚이는 것 없지?
“난 없어. 혹시 모르니까 그것도 선배가 당분간 주시해 줘.”
―오케이. 전할 소식 생기면 또 연락할게! 그리고 이번에도 현장 실습 조장으로 뽑혔다며? 마지막 현장 실습이라서 감회가 남다르겠네. 조원들이 힘들게 하면 말해! 내가 다 무찔러 줄게.
실없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곤 고정인과의 통화를 마쳤다. 잠시 그녀와의 대화를 곱씹던 나는 주머니에 구겨져 있던 종이를 꺼내 펼쳐 보았다.
내내 소지하고 있던 나머지 모서리가 삭아 버린 종이를 손바닥에 두고 내려다보았다. 4713이 사라졌으니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마지막으로 구석진 공간을 내려다보던 나는 뒤를 돌아서 바깥으로 향했다.
* * *
현장 실습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비로소 제어구를 벗게 된 내가 곧바로 향한 곳은 체력 단련실이었다.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운동 기구에서 일어선 나는 손등으로 턱을 문지르면서 숨을 골랐다.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진동하면서 동료들의 메시지가 쌓여 가는 걸 눈으로만 훑어보았다.
연이어 강도 높은 운동을 진행했으나 이전처럼 버겁다는 느낌을 들지 않았다. 목표했던 대로 졸업 전에 B급까지 성장한 덕에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쓸 만한 몸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전생의 이맘때 현장 실습을 준비하면서 있었던 일들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전신의 근육이 덩달아 괴롭게 경련하는 탓에 러닝머신의 버튼을 누르고 걸음을 멈췄다.
그대로 손잡이를 붙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턱과 목덜미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눈가에 열기가 몰리는 탓에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참혹한 시절의 기억은 몸에 새겨진다. 괴로운 시절의 기억을 불쑥 일깨우는 건 머리가 아닌 몸이었다.
과거의 나에게 던전은 학교보다 더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공간이었다. 9층 화장실에서 교실과 복도로 장소를 옮기면서 이어지던 괴롭힘은 던전까지 확장되었다. 전생의 이맘때 참여했던 현장 실습에서 나는 몬스터를 단 한 마리도 처치하지 못했다.
있는 힘껏 주먹을 쥐고 있으니 손등으로 핏줄이 불거지면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일순 눈앞으로 조원들의 스킬에 전신이 결박된 채 몬스터 사이에 떠밀려 고통스러워하던 내 모습이 나타났다.
그때의 나는 지금처럼 성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의 괴롭힘에 어떤 식으로든 반격하지 못했다. 그 힘을 제대로 다루는 법을 익히지 못했던 것도 있었지만, 신체와 정신이 전부 망가진 상태였던 탓에 그들에게 반격해야겠다는 결심을 차마 하지 못했었다. 그저 그 시간을 묵묵히 견디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던전에서 빠져나온 조원들은 조장의 채점지를 가장 먼저 작성한 뒤 그곳에 적힌 내용 그대로 실습 복기를 진행했다.
‘그 새끼들이 하는 말 다 거짓말이라고요! 제발, 제발 저 좀 믿어 주세요!’
두 주먹이 핏기 없이 질려 갈 즈음 귓가에서 악에 받친 내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당시 현장 실습 담당 교사였던 차민훈이 눈앞에서 나를 모욕하는 걸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내지른 것이었다.
그때도 차민훈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편이었다. 나는 그가 조원들의 편이 되어 온갖 방식으로 압력을 가하는 순간마다 정건후의 이름을 떠올렸다.
‘만약 정건후 선생님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를 믿어 줬을까.’
그 당시의 나는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의 도움을 바랄 정도로 절박했다. 차민훈은 갈라진 소리로 외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혀를 끌끌 찼다. 이어서 그는 나에게…….
그즈음에서 억지로 생각을 멈췄다. 과거의 파도에 휩쓸려 간 무의식을 다잡고자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드리면서 숨을 골랐다.
이어서 환부에 깨끗한 거즈를 덮는 심정으로 다시 만난 부대원과 새로이 관계 맺은 동료들과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들과 함께일 때 느꼈던 안정된 감각을 약처럼 삼키면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이제 괜찮아. 과거의 그 일은 되풀이되지 않을 거야.
저릿한 손바닥을 심장 부근에 얹으면서 천천히 쓸어내렸다. 과거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나는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마른 수건을 목에 걸치면서 짐을 내려놓은 기구에 걸터앉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뒤 텀블러에 담긴 물을 마시면서 노트를 펼쳤다. 조장 선발 직후 조원들의 공개 스킬과 전투 시 장단점 등을 빼곡하게 적어 둔 페이지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전신을 불쾌하게 뒤덮은 열기가 한 꺼풀 꺾이니 한층 차분해졌다. 나는 이번 생에도 지난번과 같은 던전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마침내 그 던전을 내 손으로 공략하고 나면 과거의 응어리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근신이 해제된 뒤에도 동료들과의 만남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문제혁과 거리를 두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번 생에서 만난 동료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나에게서 비롯된 고통이니 스스로 딛고 넘어서고 싶었다.
저릿한 손끝을 말아 쥐었다가 펼치면서 이성을 다잡고 있으니 차정주와 손바닥이 맞닿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가 세월을 칼날로 베고 넘어섰던 것처럼 나 또한 나만의 방식으로 과거를 넘어서 목표를 향해 정진할 것이다.
그 순간 근처에 두었던 휴대전화가 다시 한번 진동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구부정하게 숙였던 몸을 세운 나는 고개를 내젓고 가장 최근에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디야? 조원들 다 필드 앞에 모여 있어]발신자는 현장 실습의 조원으로 배정된 이들 중 하나였다. 나는 답장을 보내는 대신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체력 단련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