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커튼콜 (5)
며칠 뒤, 리호 길드 사무실.
드디어 마지막 현장 실습 날이 다가왔다.
“지금부터 실습 조장들에게 귀환석을 배부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설연진이 근처에서 대기하던 헌터들에게 손짓했다. 머지않아 나에게도 불투명한 회색빛 귀환석이 보급되었다.
꽤 묵직하고 겉면이 거친 귀환석을 받아 든 나는 맞은편에서 대기하던 조원들을 바라보았다. 동료들이 아닌 이들과 현장 실습을 진행하는 일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지난번에는 조원의 자격으로 참여했기에 부담이 없었으나 이번 실습은 임하는 각오부터 사뭇 달랐다. 나도 모르게 귀환석을 힘껏 쥐고 있으니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맞은편에서 올곧은 자세로 서 있던 설연진이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반쯤 숙였다가 들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설연진은 가볍게 웃어 보이더니 귀환석 배부가 마무리되었을 즈음 모두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 실습이 헌터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 실습인 학생들도 있겠죠. 훗날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었으면 합니다. 모두의 건투를 빕니다.”
* * *
[던전 입장을 시도합니다.] [입장 인원이 확인되었습니다.] [던전 에 입장을 완료하였습니다.]일순 신발 밑창에서부터 묵직한 열기가 전신을 타고 오르면서 눈앞이 흐릿해졌다. 허리춤으로 손을 옮겨 백색 권총을 그러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앞으로 끝없는 모래 폭풍이 불고 있었다. 순식간에 귓가에 달라붙은 모래알로 인해 서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누군가 턱 밑을 덜컥 움킨 것처럼 호흡이 막힌 채로 근처에 서 있을 조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또한 나와 비슷한 상황인 건지 몸을 웅크린 채 겨우 중심을 잡고 있었다.
“이거 진짜 E급 맞아? 뭐가 이렇게, 콜록, 콜록.”
근처에 서 있던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잔뜩 웅크린 어깨와 미묘하게 구부정한 자세를 보니 훈련 내내 소극적으로 임했던 조원인 듯했다.
그가 근처에 있던 다른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E급 던전이었지만 사막 지형인 탓에 거동이나 호흡에 제약이 있었다. 과거에 동료들과 입장했던 던전과 마찬가지로 이 던전도 공략을 위해선 장시간 버틸 수 있을 만한 체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번에 선발된 조원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E, F급이었다. 힐이나 방어 스킬을 구사하는 이도 없었기에 그 역할도 내가 수행해야 했다.
무엇보다 염려되는 건 이들과 합을 맞춰 본 경험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실습 이틀 전, 모의 던전 테스트를 진행하기는 했으나 아쉬움이 더 많이 남았다. 나는 그들이 무어라 입을 떼기 전에 그대로 눈을 감으면서 헛숨을 내쉬었다.
[사용자가 지정한 ‘천리안’ 스킬이 발동됩니다.]그 순간 살갗을 할퀴며 지나가는 모래 폭풍이 걷히는 착각과 함께 오감이 극대화되었다. 손아귀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행렬을 가늠하고 있으니 맑고 쾌청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눈앞에 불규칙적으로 들이닥치는 미래의 장면에만 집중한 채 내가 바라던 결말을 찾고자 애를 썼다. 한차례의 심호흡이 이어지는 동안 머릿속으로 전투 설계를 마무리했다.
확실히 이 구성으로 공략까지 성공하는 건 어려운 감이 있긴 하지. 하지만 다들 중간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공략이 영 불가능한 건 아니다.
불현듯 눈을 뜬 나는 헛숨을 토하면서 생각했다. 더불어 이번 실습도 잘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실습도 눈에 띌 만한 성과를 거두면 불법 마석 가공물을 먹는다는 것 같은 헛소리는 들어가겠지.
“다들 표정이 왜 그래. 들어온 지 십 분도 안 됐는데 벌써 나가고 싶은 건 아니지?”
생각이 길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입을 열었다. 서애란과 키가 엇비슷해 보이는 그녀는 7학년의 물 속성의 D급 헌터 안지유였다.
그녀가 말문을 맺은 뒤 주위를 둘러보자 다들 머뭇거리거나 시선을 피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손등으로 호흡기를 감춘 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쉴 새 없이 불던 모래 폭풍이 잦아들면서 사람들의 얼굴이 한층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F급인 조원에게 다가가 신중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안지유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현장 실습을 마치기 전까지 애써 외면하려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안지유는 김수호와 마찬가지로 내 손으로 처리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 또한 차진명의 독주를 마셨으나 결정적으로 그녀의 숨통을 끊어 놓은 건 유스티티아의 검이었다.
그것까지 상기하는 순간 손끝이 차게 식으면서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이번이 마지막 실습인 만큼 침착한 기세를 유지하고자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안지유의 그림자가 내게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오늘 우리는 너만 믿고 간다고 생각할게.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마른침을 삼키던 나는 고개를 들고 안지유를 마주 보았다. 전생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보다 확연히 어려진 얼굴을 보고 있으니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마저도 잠시 금세 정신을 차리고 머릿속으로 설계를 점검했다. 조원들이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도록 적정 수준에 맞춰 두었으니 체력과 정신력만 버텨 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훈련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부터 머릿속으로 펼쳐지는 장면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면 돼. 눈앞에 보이는 이정표대로 전투에 임하면 크게 다칠 일도 없을 거야.”
나는 멀찍이 떨어져 있던 조원들과 거리를 좁히면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내 탄환을 장전한 뒤 총구를 들어 올렸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하나야. 난 이미 너희를 믿고 있으니 너희도 조장인 나를 믿고 설계를 그대로 따라와 줘.”
회귀한 이후 처음 참여했던 현장 실습에서 햇병아리 같은 동료들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고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깨달은 건 이런 상황에서는 조건을 재고 따지는 대신 무작정 믿고 보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거였다.
이번 실습에서 함께하는 조원들은 그때보다 더 어리숙한 병아리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기로 했다.
조원들이 총구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과 차례로 눈을 맞추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이윽고 레몬 빛 탄환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든 모래 폭풍을 가르면서 날아갔다.
* * *
던전을 돌아다닌 지 세 시간쯤 지났을까. 폭풍은 어느새 가라앉았으나 낮게 부는 바람으로 인해 희뿌연 모래 먼지가 파도처럼 밀려와 살갗을 할퀴었다.
“확실히 B급은 다른가 봐. 엄청 쌩쌩해 보이네.”
근처에서 느릿하게 걷던 안지유가 말을 건넸다. 안지유는 조원들에 비해 오래 버틴 편이었으나 서서히 지쳐 가고 있다는 걸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안색을 살피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지난 방학 동안 되찾은 감각을 이번 생의 내 몸에 맞게 다루는 법을 익혀 왔다면 오늘은 갈고닦았던 실력으로 마음껏 활보하는 시간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전생의 내가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도 떨치지 못했던 괴로운 기억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던 건 지금처럼 동료들과 던전을 활보하던 순간이었다.
스스슥. 슥. 슥.
탕!
탕!
어느새 눈앞에 당도한 샌드 몬스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눈앞에 들이닥치는 몬스터를 처치하고 나면 성취감과 고양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떼로 몰려오는 몬스터 무리를 상대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는 건 덤이었다.
그러다 보면 예고도 없이 불쑥 떠오르는 4713의 기억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한참 전부터 뜨거워진 권총을 고쳐 쥔 나는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벌어지지 않다는 사실을 끝없이 상기했다.
쿵.
쿵. 쿵.
“다시 집중해. 이제 곧 최종 보스가 나타날 거야.”
아득하게 먼 곳에서부터 모래로 이루어진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육중한 소음을 내면서 다가온 최종 보스는 막대한 크기의 낙타거미였다.
성인 남성 다섯이 달려들어도 다 감싸지 못할 만큼 거대한 녀석이 나와 안지유를 발견한 뒤 빠른 속도로 나아오기 시작했다.
타탁. 탁. 탁. 탁. 탁. 탁.
한가득 쌓인 모래를 가로지르며 다가온 그것이 희고 끈적한 액체를 길게 퍼뜨리더니 순식간에 뒤쪽에 있던 조원 두 명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들의 다리를 옭아맨 거미줄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공격하는 속도나 패턴을 볼 때 녀석의 등급 자체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인 듯한데.
내가 최종 보스와 대치하는 사이 뒤쪽에서 안지유가 움직였다. 그녀는 더는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최대한 멀리 떨어뜨린 뒤 회복 물약을 재차 보급했다.
“몸은 좀 어때. 버틸 수 있겠어?”
“괜찮아. 버틸 수 있어.”
나는 어느새 곁으로 돌아온 안지유에게 말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엉망이 된 몰골을 한 안지유는 거칠게 들뜬 숨을 고르면서 대꾸했다.
나는 지면을 거세게 내리치며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거미 다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근처에 있던 안지유가 고통에 저항하며 돌아서려던 거미의 머리통을 향해 연이어 방아쇠를 당기자 총성과 함께 물로 빚은 탄환이 폭죽처럼 터졌다.
쿵.
쿠궁.
드넓은 사막을 자유자재로 활보하던 거대한 거미가 몸통을 납작하게 처박았다. 이제 마지막 한 발만 남은 상태였다.
나는 남은 한 발의 탄환을 거미의 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끄륵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꿈틀거리던 거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근처에 쓰러져 있던 조원들도 기력을 차린 건지 두 발로 일어서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반면 안지유는 한계에 다다른 건지 인상을 찡그린 채로 고통을 참고 있었다.
안지유와 합을 맞춘 건 이번이 세 번째였으나 전투는 생각보다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그녀는 등급이 낮은 편이었음에도 설계를 오차 없이 수행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다 된 거야? 우리 이제 돌아갈 수 있어?”
“나 이 시간까지 던전에서 멀쩡하게 버틴 건 이번이 처음이야.”
“저것만 처치하면 공략도 성공하는 거지? 얼른 하고 돌아가자.”
한가득 쌓인 모래를 가르면서 다가온 조원들이 말했다. 다들 중간에서 귀환하지 않고 견디기로 선택한 일을 뿌듯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들을 잠시 돌아보면서 만족스럽게 웃던 안지유가 총을 고쳐 쥐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선물 줄까?”
말을 마친 안지유는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일순 연기가 구름처럼 단단하게 뭉치면서 주변이 금세 어두워졌다.
투둑. 툭.
툭.
툭.
솨아아―
차가운 물방울이 미간과 뺨에 내려앉는 순간 고개를 젖혔다. 안지유가 스킬을 전개하자 사막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쏟아지는 빗줄기에 달아오른 몸을 적시고 있으니 실습 내내 겹쳐 보였던 과거의 잔상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눈앞으로 푸른 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던전 의 최종 보스를 처치하였습니다.] [던전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새하얀 빛이 가시면서 던전을 빠져나왔다. 내심 우려했던 것과 달리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좀 늦었지만, 연극은 재미있게 봤어.”
그 순간 등 뒤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두드리던 안지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곁눈으로 근처를 살펴보니 휴식하던 다른 사람들도 그녀의 말에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통쾌하다고 생각한 건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나에게서 시선을 거둔 그녀는 남은 조원들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맞아, 재미있었어. 처음에는 이게 대체 뭔가, 싶었는데 계속 보다 보니까 너무 웃기더라. 그때 그, 누구였지? 4713? 걔 그렇게 된 게 제일 웃겼는데. 그 개새끼, 언젠가는 지 발에 걸려 넘어져서 코 깨질 줄 알았다니까.”
조원 중 누군가 비에 살짝 젖은 앞머리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곳곳에서 동조하는 추임새가 들리더니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반쯤 기울인 채 땀을 닦던 안지유도 피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이어진 수다가 잠잠해질 즈음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해월이 쟤, 생각보다 훨씬 잘하던데? 예전 실습에서 조원들한테 무슨 전투 설계를 걸어 준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뭔 효과가 있으려나 싶었는데 진짜 편하더라.”
“아, 진심 인정. 우리 조원들 다 등급도 낮고, 실습에 큰 욕심도 없어서 B급인 애가 조장이라고 했을 때 진짜 꿈에 나올 만큼 부담스러웠거든. 막상 해 보니까 우리한테 강요하는 것도 없고 뒤에서 받쳐 주니까 오히려 재밌었어.”
나는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조원들을 돌아보았다. 표정을 보니 그들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해 다행이었다.
“잘 따라 준 덕분에 나도 수월했어. 고마웠다.”
숨을 한차례 고른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대답했다. 빗물에 젖은 몸은 무거웠으나 과거를 딛고 나서는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홀가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