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1
11화. 불가항력에 맞서는 (1)
“대체 무슨 도움이 필요하길래 뜸을 들여. 상담실 문은 닫아 뒀고, 근처로 지나가는 사람도 없으니까 말해 봐.”
나는 두통이 가시지 않은 탓에 손바닥으로 잠시 이마를 짚었다가 뗐다.
정건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급한 사안이니 본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제가 던전에서 성물을 습득했습니다.”
“뭐?”
일순 정건후가 반사적으로 대꾸하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던전에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해. 십 년도 넘게 오리무중이었던 새 성물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그것도 학생들이 들어가는 실습용 던전에서?”
나쁜 꿈을 헤매다 깨어난 사람처럼 질색하던 정건후는 공연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너 성물 관련 법령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아? 자기가 성물을 봤다는 둥, 가져왔다는 둥 괜한 거짓말을 했다간 까딱하면 감옥행이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네 말을 들었으면 당장 신고부터 했을 거다.”
도통 믿으려 하지 않는 정건후를 지켜보던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냈다.
자루에 손아귀를 감는 즉시 성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전신을 짓누를 듯 압도하는 강한 힘에 팔목이 절로 후들거렸다.
“직접 보시면 알겠네요. 제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그 여파를 가까이에 있던 정건후도 느낀 것인지 표정이 점점 굳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정건후는 내가 비스듬하게 쥐고 있던 검의 생김새를 혼란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성물 연구자들이 구현한 성물의 상상도와 실제의 검의 생김새를 견주어 보는 듯했다.
그는 옅은 회색빛이 감도는 흰 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검을 붙잡은 내 팔목을 붙들고 자루와 검날이 십자로 이어지는 부분에 새겨진 천칭 문양으로 자신도 모르게 검지를 뻗어 보던 정건후가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순식간에 걸음을 물리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는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던 그가 비로소 나와 눈을 맞추었다.
“유스티티아의 검이라면 연구자들한테 익히 들어 봤다. 실존 가능성이 제일 높은 성물이라곤 하지만 너희한테 이론을 가르칠 때조차도 서사시에 언급된 물건이 어떻게 실제로 존재할 수 있겠냐고 의심했는데…….”
말끝을 흐리던 것도 잠시 그는 이전처럼 헛웃음을 터뜨렸다.
“직접 보니 바로 알겠네.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정건후는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말을 거듭하여 되뇌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래서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 거예요. 당장 믿을 만한 사람이 선생님밖에 떠오르지 않아서요. 도와주실 거죠.”
이내 숨을 고르는 정건후의 어깨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물론 그래야지. 그 검은 지금 당장 인벤토리에 집어넣도록 해. 적어도 네가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나를 제외한 그 누구한테도 성물을 습득했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건 교사들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그 힘도 웬만하면 쓰지 않는 게 좋겠다. 어디서 누가 눈치챌지 모르니까.”
그렇다기엔 보건 선생님도 이렇게 말하는 본인도 스킬을 쓰는 걸 알아채지 못한 것 같지만 일단 수긍했다. 혹시 모르는 거니까.
그 외의 다른 말은 없었다. 이를테면 어떻게 네가 성물을 가져왔냐는 식의 말이라든지.
정건후는 회귀 이전에도 지금도 한결같은 태도로 학생들을 대했다.
교사의 대다수가 차정주 이사장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이 학교에서 그는 유일하게 의지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당장 내년에 발생할 용산 던전 브레이크에서 죽게 된다니.
현재의 정건후는 모르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럼 미래에서 죽어야 했던 정건후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나는 새로운 목표를 상정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든 보답할게요.”
용산 던전 브레이크에서 죽어야 하는 정건후를 살려 내 편으로 만들어야겠다.
“보답은 무슨. 학생한테 그런 거 바랄 정도로 못돼 먹은 선생은 아니거든, 내가. 됐으니까 이제 나가 봐라.”
* * *
가장 큰 짐은 덜었다고 봐도 무방하고.
다들 어디에 흩어져 있으려나.
상담실에서 빠져나온 나는 저층 복도를 차례로 배회하며 익숙한 얼굴을 찾아 헤맸다.
그 겸에 이번 현장 실습 반응을 살피고자 부러 천천히 걸어가면서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들 들었지. 이번에 열린 실습 던전 공략 난이도가 전부 극악이었대. 낮은 등급이라고 해서 방심할 것도 없었다더라.”
“진짜? 나중에 우리 들어갈 때 되면 어떻게 되려고 벌써 이러는 거야. 아, 생각만 해도 머리 아파.”
“우리 언니가 리호 길드 사무실 근처에서 일해서 들었는데, 실습 마치고 나서 그 일대에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그칠 기미를 안 보였다고 하더라.”
“에이, 설마. 너 또 괜히 과장해서 말하는 거지? 헌터 전문 병원까지 갈 만큼 다친 사람이 그렇게 많이 나왔다고? 그랬으면 다들 현장 실습 안 나가려고 하겠지.”
예상했던 대로 저학년 층에서는 없던 일도 부풀려 말하는 소리가 주로 들려왔다.
현장 실습에 관한 자세한 정보보다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느껴지는 듯했다.
강준희는 지금 어디 있으려나.
훈련하면서 듣기로는 교실보다는 인적 없는 특별실을 주로 간다고 하던데.
강준희를 제외한 나머지 고학년들은 자신의 교실에 머물러 있을 확률이 높았다.
7학년부터 확인하는 김에 다른 조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요량으로 고층으로 향했다.
“선배, 잠깐 나와 봐.”
예상대로 같은 반에 배정된 김미솔과 공희찬은 교실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 부름을 따라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을 데리고 한적해 보이는 복도 구석으로 향했다.
“도해월, 너 괜찮은 거야? 이대로 막 돌아다녀도 돼?”
내내 눈치를 살피며 눈가를 찡그리던 김미솔이 말했다.
나는 멀쩡한 사지를 두 사람에게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두 사람이야말로 괜찮은 거지? 설연호는 아직도 잠들어 있는 상태야. 아마 오늘은 일어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 말고도 다른 일은 없었지?”
걱정스레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김미솔은 내 말에 주위의 눈치를 다시금 살폈다.
그 곁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비딱하게 서 있던 공희찬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별일이야 너랑 설연호 잠들어 있는 동안 다 지나갔지, 뭐. 다른 조 얘기도 들어 봤는데, 우리만큼 큰 사고를 겪은 조는 딱히 없는 것 같았어.”
“봐서 알겠지만 나랑 공희찬 둘 다 괜찮았어. 반나절 정도 쓰러져 있다가 일어났고. 준희도 특별히 아프거나 하진 않았고.”
나는 그제야 큰 시름을 내려놓는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A급 몬스터는 갑자기 왜 나타난 거래? 들은 것 있어?”
잔뜩 심각한 얼굴로 모여 있는 나와 두 사람을 본 다른 학생들이 힐긋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등을 지면서 공희찬과 김미솔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건 우리도 몰라. 진상 규명을 확실하게 하려면 뭔가 조사를 더 해야 한다고 하는 것 같았어.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는데 다른 애들은 이미 우리가 A급 던전에서 어떻게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거냐고 계속 얘기하더라.”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애들이 어찌나 들러붙던지. 나야 뭐, 평소에도 으레 겪던 일이라 괜찮았지만 난처하기는 했어.”
김미솔의 말은 주의 깊게 새겨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있던 공희찬도 상한 곳 없이 멀쩡한 듯해 다행이었다.
“저기, 미솔아. 담임 선생님이 너 잠깐 교무실로 오래.”
그때 근변에서 머뭇거리던 누군가 김미솔을 불렀다.
“나? 갑자기? 뭐 때문에 부른 거래?”
“그건 모르겠어. 가 보면 알지 않을까.”
자신의 앞에 선 여학생과 짧은 대화를 나누던 김미솔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난 가 볼게. 자세한 얘기는 희찬이가 마저 해 줄 거야.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나는 고개를 대강 끄덕이며 김미솔을 배웅했다.
둘만 남은 것이 불편해진 건지 공희찬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가만 보면 넌 김미솔한테만 사근사근하게 굴더라. 착각하는 게 있나 본데, 나도 너보다 선배거든? 싸가지 없게 굴지 마라.”
얘는 왜 또 이래. 연장자처럼 굴어야 선배 대접을 해 주든지 말든지 하지.
“다른 조 실습은 어땠는지 들은 얘기 있어? 뭐든 알고 있는 대로 다 말해 봐.”
자신의 말을 무시한 것이 화가 난 건지 공희찬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공희찬은 자신이 전해 들은 사실들을 순순히 불었다.
“우리 조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이번 실습 자체가 전체적으로 어려웠다고 하더라. 강효서가 들어간 던전은 D급이었는데도 지형 자체가 극악이었다고 했어. 걔네 조가 들어간 게 뭐라고 했었지?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설산 지형이었다던데. 걔는 매번 왜 그런 것만 골라서…….”
거기까지 말하던 공희찬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입이 가벼운 녀석이 차진명의 커뮤니티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의문이었다.
“방, 방금 말한 건 못 들었지? 야, 못 들었다고 해. 넌 못 들은 거야.”
물론 결과적으로 나한테는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 상관없었다.
“던전에서 했던 약속은 기억하고 있지? 삼십 분 뒤에 9층 화장실로 와. 제때 오면 못 들은 걸로 할게. 아무튼, 특별히 더 말한 건 없는 거지?”
문득 나를 질린다는 눈빛을 바라보던 공희찬이 석연치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딱히. 오면서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다녀온 던전에서 생긴 일 때문에 학교가 떠들썩한 것 말고는 대부분 무난했나 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서 ‘증폭’ 스킬을 시전했다.
공희찬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7학년 복도에서 들리는 말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였다.
“둘 다 멀쩡한 것 봤으니까 올라가 볼게.”
예상대로 교실에서 보이지 않았던 강준희는 빈 동아리 교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창가를 내다보는 얼굴은 생각에 잠긴 듯 그늘이 드리운 채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사람이 오는데도 모르고.”
“까, 깜짝이야……. 해월아, 언제 왔어? 여기는 어쩐 일이야? 아니, 그보다 언제 일어났어? 몸은 괜찮은 거야?”
금세 지면을 딛고 일어선 강준희가 나를 보며 빠른 속도로 읊었다.
이런 걸 꼭 물어봐야 아는 건가.
짧게 스쳐 가는 생각은 접어 두고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했다.
“방금 왔어. 교실에 없길래 찾으러 온 거야. 얼마 전에 일어났어. 괜찮아.”
“다행이다. 다들 네 걱정 많이 했어. 나도 마찬가지고…….”
더딘 속도로 읊조리는 강준희의 모습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다행히 강준희도 별다른 이상 없이 깨어난 듯했다.
“던전에서 나온 뒤로 별다른 일은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억지로 추궁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
“응, 난 괜찮았어. 그보다 해월아, 나 궁금한 게 있었는데…….”
나는 강준희 근처에 놓여 있던 책상에 걸터앉았다.
앉고 보니 맞은편 창가로 쏟아지는 한낮의 볕이 눈부셨다.
“우리 던전에서 나오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아무래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약해서 너무 빨리 쓰러져 버린 걸까 봐.”
강준희도 나를 따라 책상에 앉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네가 나약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상황 자체가 모두한테 가혹한 거였어. 음, 네가 기억하는 건 어디까지인데?”
마침 이 타이밍에 나와 줘야 할 질문이었다.
큰 충격의 여파인지 나조차도 기억이 희미해진 부분이 있어 확인이 필요했다.
“어, 내가 기억하는 건…… 섬에 가까워졌을 때부터 숨을 쉬는 게 힘들었어. 온몸에 기력이 다 빠져나가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힘들었고. 그러다가 의식이 흐려진 것 같은데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아.”
“그런 다음에는. 더 생각나는 것 없어?”
“멀리서 네가 돌아오는 걸 본 것 같기도 한데, 그때 눈이 제대로 안 떠져서 내가 제대로 본 건지도 모르겠어. 해무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
나는 조용조용히 읊조리는 강준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성물에 대한 건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뭘 들고 왔어도 그게 성물이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네가 쓰러진 이후에도 별일 없었어. 이왕 섬까지 왔으니 뭔가 더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숲 근처를 둘러보기는 했는데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너도 알다시피 그 상황에서 D급인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었겠어.”
“그렇구나……. 그러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그냥 궁금해서. 다들 우리 조가 큰일을 겪고 나왔다고 하길래 A급 몬스터가 나타난 것 말고 또 다른 일이 있나 해서.”
그렇게 묻는 강준희의 시선에 미묘한 기색이 감도는 건 내 착각일까.
하지만 그것만 해도 충분히 큰일이 아닌가?
“그러고 이대론 안 되겠다 해서 내가 귀환석을 쓰긴 했지. 사실 나도 기진맥진한 상태라 기억이 잘 안 나긴 해. 깨고 나서야 내가 제대로 귀환석을 쓰긴 했구나 했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난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다음에 봐.”
일어나는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강준희를 뒤로하고 교실을 나왔다.
이제 던전에서 얻은 또 다른 보상을 챙기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