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마지막 실습 복기
한겨울의 복도를 감도는 공기는 얼음장처럼 단단하고 서늘했다. 현장 실습 점수 채점 기간을 맞이한 교정은 어딘가 어수선하면서도 고요했다. 실습 복기의 순서를 기다리던 나는 정해진 시간을 확인한 뒤 천천히 층계참을 밟고 내려왔다.
정건후가 기다리는 상담실을 향해 걷고 있으니 중간 지점에 서 있던 누군가 손을 크게 흔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머지않아 활짝 웃는 얼굴의 안지유가 보였다.
저기 서 있는 걸 보면 복기는 끝난 것 같은데. 날 기다리고 있는 건가?
미소 짓는 그 얼굴이 전생에서 맞닥뜨렸던 것과 흡사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손을 흔들던 그녀는 근처까지 다가갔을 즈음 팔을 내렸다.
“추운데 왜 여기 서 있어. 복기는 다 끝난 거야?”
“응, 방금 마치고 나왔어.”
안지유는 크게 숨을 고르면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베이지색 더플코트에 흰 스니커즈를 신은 모습이 어쩐지 낯설었다. 전생의 그녀는 언제나 정장 차림에 수제 로퍼를 신고 있었기에 더욱 이질적이었다.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간단하게 되물은 뒤 고개를 조금 젖힌 나는 상담실 쪽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 얼마 안 걸릴 거야. 그리고 쌤도 좀 쉬어야지.”
그 말에 금세 수긍하면서 나를 올곧게 마주하던 안지유를 내려다보았다.
“음, 나 너한테 궁금한 게 있어. 너랑 서애란, 정말 범람의 운영자랑 아는 사이야?”
“아니야. 갑자기 그건 왜?”
안지유는 타고나기를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나는 곧바로 의아한 기색을 연기하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궁금해서. 난 범람이 시범으로 운영할 때부터 계속 접속했었거든. 지금은 운영이 중단돼서 못 보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안지유는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순간 고정인이 나에게 통화로 전해 왔던 말이 떠올랐다. 바깥에 있는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고 했었지. 혹시 안지유도 관련이 있는 걸까?
“아무튼, 네가 아니라니까 됐어. 애들이 하도 떠들길래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전생에서 내가 안지유를 처음 마주한 건 이능청에서였다. 나는 그녀도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었다. 듣기로 졸업 직전에 입사를 결정했다고 했으니 이쯤이면 진로를 결정했을 듯한데.
“그러면 나도 너한테 궁금했던 것 하나만 물어볼게.”
“응, 얘기해.”
“혹시 졸업하고 나서 어디로 갈지 결정했어?”
“왜, 나도 네가 만든 길드에 스카우트하려고?”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난 건가. 나는 어깨를 들먹이면서 안지유의 대답을 기다렸다. 실습을 준비하는 동안 조원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도 그녀의 진로에 대한 건 들을 수 없었기에 지금 묻는 게 나을 듯했다.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지난 학기까지는 이관부에 입사하고 싶었거든. 근데 마음이 바뀌었어. 이관부는 안 갈 거야.”
“마음이 바뀌었다고? 어째서?”
나는 살갑게 대꾸하는 안지유의 말에 한쪽 눈썹을 추키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다문 입술을 늘리면서 허공을 쳐다보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냥, 그럴 만한 일이 좀 있었어. 너도 얼른 복기하러 가. 쌤 기다리신다.”
그렇게 말한 안지유는 슬그머니 웃어 보이더니 나를 지나쳐 복도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이능단속관리본부에 입사하지 않는다니. 그동안 안지유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정건후가 기다리고 있을 상담실 쪽으로 서둘러 나아갔다.
* * *
“그럼 실습 복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네, 수고하셨습니다.”
서류를 내려다보면서 말문을 연 정건후가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그가 한가득 쌓인 종이를 정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앉은 자리 너머 창가에서는 흰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창틈으로 스민 한기에 이따금 팔뚝이 으슬으슬 떨리는 걸 보니 겨울이 완연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허공으로 시선을 틀고 회귀한 직후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과거로 돌아오자마자 실습 조장이 되었고 부대원이 아닌 다른 이들을 동료로 맞이했다.
그리고 그들과 여러 번 부딪힌 끝에 내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지. 특히 맏이인 김미솔에게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운 덕에 부대원들과 무사히 관계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정건후와 서애란을 살렸고 앞으로 살려 내야 할 사양의 김수호와 안지유를 다시 만났다. 차근히 되짚어 보았을 때 마음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궤적은 역시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 내고 정건후를 살린 것이었다.
“3조는 모든 조원이 조장에 대해 일관적으로 평가하는 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묵묵히 서류를 정리하던 정건후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나는 그에게로 시선을 옮긴 뒤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조원의 뜻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의점을 끌어내는 리더라는 게 종합된 평가였어.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조원들의 평가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전하는 정건후의 표정과 몸짓 또한 그때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게 느껴졌다. 한데 모인 서류 위에 깍지 낀 손을 얹은 그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길드의 마스터가 된다고 해서 걱정했었는데. 그래도 이제는 시름을 좀 덜어도 되겠어.”
그러면서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젓더니 엷게 웃어 보였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잘했어.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 순간 고통으로 얼룩졌던 지난 시절이 표백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방금 정건후가 한 말은 내가 문제혁에게 들려주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동안 나는 동료들을 다독여야 하는 순간에 전생의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건네고는 했다. 한때는 그런 말들로 넘어져 있던 강준희를 일으켜 세웠었다.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으니 자연스레 소식이 없는 공희찬이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는 정건후에게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짧은 한마디였으나 내가 알고 지낸 정건후라면 내 마음을 곡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살아 있는 그에게 이 말을 전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금세 평소의 표정으로 되돌아온 정건후가 대답하는 대신 이제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자리를 정리한 뒤 상담실을 빠져나갔다. 실습 복기까지 마쳤으니 한동안 보지 못했던 동료들을 만날 차례였다.
* * *
서둘러 다다른 길드 사무실은 언제나처럼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저 멀리 닫혀 있던 회의실 틈으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곳에서부터 희미하게 겹쳐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안녕. 다들 오랜만이야.”
닫힌 문을 여는 순간 내부를 감돌던 훈기가 훅 끼쳐 왔다.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면서 안쪽으로 들어서자 앉아 있던 이들이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어?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근데 이건 뭐야?”
“드디어 왔네. 어서 와.”
입구 근처에 있던 설연호가 내 손에 들려 있던 종이 캐리어를 가져가 테이블에 놓았다. 이윽고 서애란이 뚜껑을 조심스레 열자 희고 가느다란 김이 퍼지면서 달콤한 향기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스터가 제일 늦게 오면 쓰, 어, 핫초코?”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엄한 표정을 짓던 홍원하가 창가에서 테이블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조용히 다가온 문제혁과 지선일의 안색을 살피면서 가볍게 웃어 주었다.
“식기 전에 마셔. 늦은 건 미안.”
나는 단숨에 벗은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가지런하게 걸치면서 곁에 있던 두 사람에게도 핫초코를 권했다. 그러자 고정인과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던 김미솔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안녕. 다들 선일이랑 제혁이 좀 봐. 해월이 근신하는 동안 막내 둘이서 엄청 걱정하더니. 얼굴 보니까 마음이 좀 편해졌나 보네.”
“제혁이는 선배랑 같은 방 쓰니까 근신 끝나자마자 봤겠지만 저는 선배 진짜 오랜만에 보거든요. 그동안 고생했어요.”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며 입을 연 지선일은 따뜻한 컵을 두 개 집어 올리더니 하나는 문제혁에게 건넸다. 문제혁은 핫초코를 받아 들곤 가만히 손에 들고 있었다. 핫초코의 온기를 느끼는 듯했다.
“그래?”
나는 그 두 사람의 어깨를 다독여 준 뒤 한쪽 입꼬리를 넌지시 올려 웃는 채로 고정인과 김미솔의 근처로 다가갔다. 허리를 반쯤 숙인 채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고예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해월이도 왔네. 야, 진짜 고생했다. 너랑 애란이 있던 공실 난방도 안 돼서 엄청 추웠다며?”
방금 손을 씻은 건지 손수건으로 물기를 훔치던 고예성이 말했다.
“말도 마. 얼어 죽는 줄 알았어.”
어느새 창틀에 기대어서 핫초코를 느릿하게 삼키던 서애란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고정인이 정리한 회의록을 보면서 이전까지 동료들이 나누고 있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파악했다.
“대부분 선배가 통화하면서 해 줬던 얘기네. 여기서 내가 더 알아야 할 건 없어?”
그때까지 마우스를 쥐고 있던 고정인이 손등으로 턱을 매만지며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느릿하게 허리를 세운 나는 칠판 근처로 다가가면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따로 이야기 나온 게 있긴 해. 해월이랑 애란이는 근신 중일 때 우리끼리 먼저 얘기하기는 했는데, 오늘 다 모였으니 다시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고.”
고정인을 대신해서 대답한 건 설연호였다. 핫초코를 마시던 설연호는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은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성민주가 유학에서 돌아왔대. 혹시 알고 있었어?”
“아니, 전혀.”
나는 곧바로 대답하면서 눈가를 미약하게 찡그렸다. 내가 기억하기로 전생의 성민주가 한국마력연구소에 입사한 건 내년 여름의 일이었다. 어째서 변동이 생긴 거지?
“일단 나도 그것까지만 들었어. 더 자세한 얘기는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이어지는 설연호의 말에 느릿하게 숨을 게운 뒤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이내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이목을 모았다.
“다들 숨 좀 돌렸으면 회의 시작할까. 참고로 이번 겨울은 여느 때보다 중요한 시간이 될 거야. 길드를 공식적으로 창설하기 이전에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해 두자.”
그 말을 끝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이들이 전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부의 분위기가 정리될 때까지 잠시 기다리면서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적어 내렸다.
[겨울이 지나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할 것]멀리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큼직하게 적어 넣고 뒤를 돌아보았다. 동료들의 눈동자가 전부 나를 향해 있었다. 어둠이 내린 바깥의 풍경과 대비되는 환한 얼굴을 하나씩 살피던 나는 숨을 고르면서 다시금 결의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