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동트는 겨울 (1)
“그럼 우선 한마연에 대한 것부터 다시 얘기해 볼까.”
허리춤에 손을 짚은 채 다른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던 나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등급 측정 결과가 발표된 뒤로 한마연 관계자랑 친분이 있는 걸로 추측되는 사람들이 범람에 꾸준히 글을 올렸던 거, 다들 기억하지. 그것부터 짚고 넘어가 보자.”
“방금 자료 모아서 보냈어! 보면서 얘기하면 돼.”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던 고정인이 말을 보탰다. 잠시 뒤 각자 휴대전화를 통해 그녀가 전송한 자료들을 점검하는 모습이 보였다.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거둔 설연호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이 진짜 관계자인지 아니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인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그것과 별개로 비슷한 뉘앙스의 글이 꾸준히 올라온 이유가 있을 거라고 봐.”
“맞아, 오히려 관련 없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한마연 얘기를 끌고 온 것 같달까. 괜히 자기가 훈수 두고 싶은데 그럴 만한 공신력이 없으니까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끌어모아서 익명으로 떠벌리고 다닌 거겠지.”
뒤이어 고개를 끄덕이던 김미솔이 덧붙였다. 나는 두 사람의 의견에 공감하면서 테이블 근처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익명에서 떠드는 사람들 얘기는 차치하고, 한마연 내부에서는 어떤 반응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 하지만 이미 미솔 선배가 알아보려고 했다가 불발된 것도 있고, 지금 우리 능력으로는 원하는 얘기를 듣지 못할 확률이 더 높아.”
휴대전화와 테이블 앞쪽에 선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생각이 길어지는 건지 한숨을 쉬는 이들도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정보를 모아 보자. 연호 선배 말대로 성민주 선배가 돌아왔다고 하니 그쪽에서부터 다시 출발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나는 따라서 숨을 고른 뒤 말을 마저 잇고 반응을 기다렸다. 잠시 뒤 지선일이 수긍하면서 휴대전화를 뒤집어 내려놓았다.
“네,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범람에서 그 선배 이름이 심심치 않게 언급되길래 대체 어떤 사람인가 싶었거든요.”
“강효서 선배나 나도 그 선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었어. 학교에 있을 때도 워낙 조용하게 지내기도 했고, 그 선배랑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건 항상 차진명 선배였거든. 그래도 좀 더 알아볼 수 있는 게 있는지 찾아볼게.”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서애란이 말했다. 강효서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다문 입술을 굳게 늘리던 나는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동아리 사람들과 연극을 꾸민 건 졸업한 뒤에도 나에게 압박을 가하는 강효서에게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연극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파장을 불러올 수 있었던 것도 아직 헌터 아카데미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7학년 마지막 학기까지 마무리한 지금, 교내에서의 나와 동아리원들의 입지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단단해진 상태다. 작년 여름부터 눈에 띌 만한 행동을 일삼았으니 관심을 갖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거기에 내가 B급으로 성장한 것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학생들은 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해하고, 교외의 인물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길드, 세력에 들어올 만한 인재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목이 모였다. 우리가 길드 입사 쪽으로는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더 이상 학생도 아니게 된다면 이 관심도 흩어질 거다.
그렇게 이번 방학이 지나고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백지상태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모여 있는 공간도 완전히 우리의 소유가 아닌 만큼 우선순위를 잘 정해서 움직여야 한다. 그즈음에서 나는 차진명의 이름을 떠올리며 상념의 방향을 틀었다.
차진명과 강효서가 학교에 남아 있을 때는 동료들이 군말 없이 날 따라 줬지만, 이제 길드까지 창설한 이상 내 목표와 길드의 목표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해. 믿고 따라와 준 동료들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기도 힘들뿐더러, 나를 따라서 불구덩이에 무작정 뛰어들어 달라고 얘기할 순 없으니까.
강효서는 연극을 통해 반격하면서 충분히 흔들어 놓았으니 한동안 잠잠할 것이다. 그가 다시 중심을 잡는 동안 우리는 길드 사회에서의 입지를 다잡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 겨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처음 진입하는 길드 사회 내부에 깃발을 꽂고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지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 또한 바로 그 지점이다.
“음, 성민주에 대한 것도 애란이나 예성이가 알아봐 주면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할까?”
“네, 그것도 제가 알아볼게요.”
“저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미솔이 넌지시 묻자 서애란과 고예성이 이어서 대답했다.
“그러면 이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해월이랑 애란이 근신해 있을 때 우리가 움직이면서 알아낸 것들이 좀 있거든. 다 같이 있을 때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한쪽 어깨에 손아귀를 감싼 채 지압하던 김미솔이 재차 입을 열었다. 곧바로 대답하자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난 고정인이 노트북과 스크린을 연결한 뒤 화면을 띄웠다.
“해월이, 넌 잠깐 앉아 있어. 내가 설명할게.”
김미솔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손짓했다. 그녀와 자리를 바꾸고 있으니 조용히 듣던 문제혁이 일어나 회의실의 전등을 껐다.
[성문 길드와 헌터 아카데미 사이의 소송 진행 결과]스크린 옆에 서서 화면을 올려다보던 김미솔이 회의실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근신하는 동안 우리가 모았던 자료를 정리해 봤어. 처음 다룰 건 지금까지 성문을 상대로 진행된 소송 결과를 다룬 기사들이야. 동향을 보면 알겠지만, 성문에서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계속 반박하고 있고, 법원에서는 전부 다 기각하고 있어.”
고정인이 따로 색을 입혀 표시해 둔 부분을 보니 ‘거부’, ‘반박’, ‘기각’, ‘인정할 수 없음’, ‘증거 불충분’, ‘답변 거부’ 등의 키워드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건 이틀 전에 나온 칼럼이야. 성문의 입지를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다는 게 기정사실이 된 지금, 성문에서 보유했던 수많은 던전은 앞으로 누가 관리하게 될지에 대한 예측을 담은 칼럼이야. 막상 까 보면 그동안 용산구에 있는 길드 중에서도 성문이 권력의 요충지처럼 작용하면서 갑질하고 다닌 걸 비판하는 게 주 내용이기는 해.”
“한마디로 자기들끼리 다 해 먹다가 이번 기회에 골로 가 버려서 통쾌하다는 뜻.”
김미솔이 말문을 맺으면서 고정인에게 가볍게 눈짓하자 그녀도 한마디 보태면서 화면을 넘겼다. 기사와 마찬가지로 길드 취재 전문 기자가 작성한 칼럼 본문 곳곳에 색을 입힌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갈게. 칼럼도 칼럼이지만 우리는 지난여름부터 성문이 관리하던 던전의 관리 권한이 풀리게 될 걸 예상했었던 걸 기억하고 각 던전의 위치를 다시 정리해 봤어. 이것도 다 길드의 재산이라서 그런지 공개된 건 별로 없어서 따로 알아본 것들도 있어.”
이어서 화면이 전환되더니 성문이 관리 권한을 강제로 포기하게 될 예정인 던전들의 지표가 나타났다. 대부분 등급이 낮고, 관리가 쉬운 던전들 위주였다. 성문에서도 리호와 마찬가지로 관리하는 던전의 수를 최대한 늘린 뒤 정부의 관리 지원금을 통해 고정 수입을 유지하는 듯했다.
곧은 자세로 물을 마시던 지선일이 화면을 보더니 입을 벙긋거리면서 감탄했다.
“와, 저 많은 걸 다 성문이 관리하고 있었던 거예요?”
“비각성자들이 부동산으로 재산 불리는 거랑 비슷한 것 같네.”
옆에서 고예성이 팔짱을 끼곤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어서 펼쳐 둔 노트에 깍지 낀 손을 얹고 상체를 반쯤 숙인 채 화면에 집중하던 문제혁이 말했다.
“그럼 저 던전들은 다 어떻게 나누는 거예요? 기준도 정해졌어요?”
“이건 아직 찌라시 수준의 소문이기는 한데, 내년 5월에 성문이 엮인 소송들이 마무리되면 그때 이관부에서 움직일 거라는 얘기가 있어.”
곁눈으로 지선일을 지켜보던 서애란이 자신의 손수건을 근처로 밀어 주면서 말했다. 손수건으로 젖은 입가를 두드려 닦던 지선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도 어른들한테 얘기 들었어요. 용산에서 터를 잡고 활동하고 있고, 개설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신규 길드를 위주로 심사할 거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심사라면 실적을 보는 거지?”
문제혁이 되묻는 소리에 지선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얕은 한숨을 쉬고 있으니 곁에 있던 고정인이 말했다.
“아마 그럴 거야. 근데 우리는 아직 신규 길드 창설 관련 서류도 접수를 안 했으니까 방학하면 그것부터 해결하자.”
그 말을 듣던 나는 이능청으로 승격하기 전,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 근무하던 때를 잠시 되짚어 보았다. 이윽고 눈썹을 추켜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심사를 진행한다면 최소한 3개월 이상의 실적 기록서를 제출하라고 할 거야. 신규 길드 창설 서류가 수리되려면 최소 두어 달은 걸릴 걸 생각해서 방학식 날에 이관부에 다녀오는 것도 괜찮겠어.”
“오, 좋다. 안 그래도 서류 접수는 언제 하냐고 물어보려고 했거든.”
나를 빤히 지켜보던 고정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너희 방학식까지 사흘 정도 남았다고 했었나?”
“네, 딱 사흘 남았어요.”
이어서 설연호와 문제혁이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신규 길드 창설 서류 접수에 대한 건 여름부터 준비해서 얼추 마무리되긴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제출하기 전에 최종적으로 점검해 보자.”
내가 앉은 쪽으로 시선을 옮긴 설연호가 말을 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름에 들춰 보았던 서류 목록을 상기해 보면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5월에 학교랑 성문 사이의 소송이 마무리된다고 가정한다면 이관부에서도 그 시기에 맞춰서 성문이 보유한 던전의 관리 권한을 누구한테 넘길지 결정하겠지? 그럼 그때까지 길드 실적은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을지 고민해 봐야겠네.”
“그것도 그렇고, 심사할 때 길드의 수익도 확인할 테니까 겨울 동안 자금도 최대한 확보해 두자. 와, 생각해 보니까 우리 할 일 진짜 많네.”
눈앞에 손바닥을 펼친 채 손가락을 접으면서 셈해 보던 고예성이 고개를 내저었다.
서애란이 하나씩 접히는 고예성의 손가락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건 던전 공략밖에 없긴 해. 이제 인원도 많아졌으니까 팀을 나눠서 움직여도 좋을 것 같아. 그럼 우리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던전도 알아봐야겠네.”
그녀는 주변에 흩어져 있던 종이컵을 하나씩 겹쳐 두기 시작했다.
“매번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만 파고들다가 이제는 밖으로 돌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서애란이 종이컵을 가져간 뒤 곧장 책상에 엎드린 홍원하가 웅얼거렸다. 그즈음에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흩어질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그러다 다른 이들도 하나씩 자세를 느슨하게 흩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다들 늦은 시간까지 고생했어.”
“드디어 끝! 다들 고생했어.”
“그래, 늦게까지 고생 많았어.”
분위기를 살피면서 말을 잇고 있으니 곳곳에서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펼쳐 두었던 노트에 오늘 나눴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으니 설연호가 가까이 다가왔다.
“평소보다 얼굴이 수척해진 것 같은데. 괜찮은 거지?”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펜을 손에 쥔 채 그대로 고개를 들고 설연호에게 슬그머니 웃어 주었다. 스크린을 정리하고 내부의 불을 밝히던 김미솔도 곁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관부에 서류까지 제출하고 나면 진짜 시작이겠네. 해월이 너도 내일 수업 마치는 대로 사무실로 넘어와. 오전에는 우리끼리 먼저 서류 점검하고 있을게.”
어느새 짐을 정리하고 돌아갈 채비를 마친 이들이 문간에서 기다리는 게 보였다.
“이러다 버스 끊기겠어. 빨리 가자.”
고예성의 재촉에 서둘러 짐을 챙긴 나는 코트를 입고 그들 사이에 섞여 어두운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나 진짜 개같이 일해서 오밤중에도 사무실에 불 켜 놓고 지낼 거야. 여기 지나갈 때마다 어디 걸려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 죽겠어.”
느릿하게 걷던 고예성이 말했다. 머지않아 어둠 속에서 등짝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좀! 누나 손 개맵다고! 존나 아파, 진심.”
“뭐, 존나? 너 말 다 했냐?”
그 순간을 기점으로 근처에서 고씨 남매가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동안 나는 문제혁의 곁에서 걸었다. 나를 내내 걱정했다던 그의 표정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를 따라서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채로 동료들과 함께 어두운 겨울밤을 가로질러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