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12
112화. 동트는 겨울 (2)
이틀이 지나고, 벌써 내일이면 방학식이다. 나는 방학식을 마친 뒤 곧바로 이능청에 가기 위해 일과를 마치는 대로 용산의 길드 사무실로 넘어가 서류를 살폈다. 한가득 쌓인 서류의 오류 혹은 오탈자가 없는지 확인하다 보니 눈가가 뻐근해질 지경이었다.
길드 등록 신청서, 동업 계약서, 자금 출처 명세서……. 그리고 또 서류, 서류, 서류. 대체 무슨 서류가 이렇게 많은 거야?
한숨을 쏟아 내면서 창밖을 내다보니 앙상한 겨울나무의 가지들이 바람을 타고 흔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하얗게 물든 상공 너머로 남산타워의 형상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
목덜미를 주무르며 고개를 꺾어 근육을 풀던 나는 홍원하의 목소리를 따라 눈길을 틀었다. 펜의 끄트머리로 입술 근처를 툭툭 두드리던 그가 나와 선배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우리 여름방학에 들어갔던 관광용 던전 있잖아. 내가 그때 서류 작성하고 기다리면서 그쪽 직원한테 던전 관리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봤거든.”
“그건 또 언제 물어봤어?”
“어? 너 잠깐 나가 있을 때. 기다려도 한참 안 오길래 심심해서 물어봤어.”
나는 홍원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나가 있을 때라면 바깥에서 김수호를 만났을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받았던 명함은 아직도 지갑에 보관하고 있었다.
“아무튼, 얘기 들어 보니까 관광용 던전 관리하는 게 은근히 돈이 된다고 하더라고.”
“그럴 것 같았어. 대규모 길드에서도 서로 맡으려고 난리라며.”
어느새 펜을 내려놓은 홍원하가 텀블러를 집어 들었다. 묵묵히 서류를 들여다보던 김미솔은 서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관광용 던전 등급이 상승하는 일 자체도 거의 없대. 우리가 들어갔던 던전 등급이 갑자기 올라갔던 것도 진짜 이상한 일이었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던 설연호도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홍원하를 바라보았다. 고정인과 함께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던 서애란도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자세를 비스듬하게 틀었다.
“관광용이라고 해도 던전 관리 권한은 똑같이 주어지는 거라 지원금도 그대로 나온다고 했어. 심지어 관광용은 던전 유지, 보수 비용? 그런 것까지 추가로 더 붙어서 훨씬 쏠쏠하대. 주기적으로 게이트를 개방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다녀갈 수 있도록 점검해야 해서 그렇다는데, 솔직히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럼 그 권한은 어떻게 얻는 거래? 그것도 물어봤어?”
나는 손가락 사이에 있던 펜을 내려놓고 한쪽 어깨를 돌리며 물었다. 홍원하가 기억을 되짚는 듯 미간을 슬며시 좁히는 사이 서애란이 입을 열었다.
“이미 관광용 던전 사업은 대규모 길드에서 꽉 잡고 있어서 틈을 파고드는 게 쉽지 않을 거야.”
“맞아. 한국관광공사랑 외부 길드를 연결해 주는 것도 이미 관광용 던전을 몇 개씩 맡은 사람들이 선심 쓰듯이 하는 거라고 하더라. 그때 그 직원이 이건 우리한테만 알려 주는 거라고 했어.”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많은 얘기를 듣다니. 어지간히 친해졌나 보네.
“그때 너희랑 같이 들어갔던 헌터는 어디 소속이라고 했었지?”
“그건 우리도 잘 몰라. 비각성자 관광객이 들어갔다가 관리 명목으로 같이 들어간 헌터를 위협했다나? 그런 일 있고 나서는 무조건 비공개래.”
김미솔의 물음에 홍원하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고정인이 보고 있는 모니터 화면에 대고 무언가 가리키던 서애란이 이어서 말했다.
“검 다루는 것만 보면 사양 소속 헌터 같았어.”
“어, 맞아. 나도 그 생각했어. 사양 소속 헌터들이 대부분 검을 사용한다는 건 듣긴 했는데 직접 보니까 확실히 다르더라. 사양 헌터 얘기하니까 갑자기 생각난 건데…….”
홍원하가 불현듯 말꼬리를 늘렸다. 또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분위기를 잡는 듯했다.
“그때 그 헌터가 나를 빤히 봤던 것 같아.”
“엥, 진짜? 너 거기서 뭐 했는데? 널 왜 쳐다봐?”
“모르지. 아니, 난 그냥 평소대로 했어. 근데 내가 좀 비범해 보였나? 뭔가 나를 묘한 눈길로 보더라고. 던전에서 나간 뒤에 나한테 명함이라도 주면 어쩌나 싶어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얼마나 많이 돌렸는지.”
미안하지만 그건 네가 아니라 나였어.
나는 홍원하의 착각을 굳이 정정해 주지 않고 김수호의 명함이 들어 있는 지갑을 힐긋거렸다. 시간이 많이 지나기는 했지만, 김수호에게 다시 연락해 볼 수 있을까.
언젠가 내가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 손을 써야 하는 순간에 그가 내 말을 믿게 하려면 일찍이 관계를 만들어 두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즈음에서 차정주와의 만남을 잠시 떠올렸다. 그가 내게 전했던 대로라면 향후 삼 년 이내에 이능단속관리‧본부가 이능청으로 승격할 것이다.
내후년 국회의원 선거 이후 일 년 동안 청으로 승격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손을 쓰겠다는 뜻이겠지. 차정주의 계획은 전생의 시간대와 비교했을 때도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앞으로 삼 년. 우리는 향후 삼 년 안에 이능청에도 대적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야 한다.
홍원하의 이야기를 끝으로 내부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다 문득 서애란이 커피가 담긴 잔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
“음, 아까 던전 관리 권한 얘기 나온 김에 나도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겨 보던 나는 손가락 사이에 모서리를 끼운 채 그녀에게 대답했다. 등받이에 느슨히 기댄 서애란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천천히 말했다.
“이틀 전에 회의하면서 성문이 맡았던 던전 관리 권한을 가져오자고 했었잖아. 석 달 동안 어떻게든 실적을 만드는 건 그렇다고 쳐도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 건가 싶어서. 모쪼록 지금 인원만으로 던전을 관리하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실질적으로 길드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 던전 관리 권한을 따낸다고 해도, 관리할 인력이 부족했다. 지금의 인원으로만으론 던전을 공략하고, 길드를 운영하기에도 빠듯할 것이다.
“애란이 말이 맞아. 다음 회의에는 인원 충원은 어떻게 할지, 언제쯤 하게 될지도 얘기해 보는 걸로?”
서류를 들여다보던 고정인이 손을 옮겨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보였다. 이어서 시간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던 김미솔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일단 난 다 점검했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남았어?”
잡담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열중해서 살피던 설연호가 손끝으로 눈가를 훑으면서 말했다.
“나도 거의 다 봤어. 다들 얼추 다 본 것 같은데?”
“그러면 마지막으로 점검해 보고 들어가자. 다들 고생했어.”
그의 말을 끝으로 나도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맞대고 서류를 점검한 나와 동료들은 짐을 정리한 뒤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 *
다음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행된 방학식은 금세 끝을 맺었다.
“이상으로 2027학년도 동계 방학식을 마치겠습니다.”
강현욱이 사라진 이후 학생회장의 역할을 이어받은 부회장이 목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열화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며 강당에 모여 있던 인파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 꽃다발과 상장을 품에 안고 있던 나는 고개를 반쯤 젖히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문제혁을 비롯한 다른 동료들을 찾으려 했으나 내 시선에 걸린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최우수 실습 조장 된 거 축하해.]멀찍이서 날 지켜보던 안지유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벙긋거려 말을 전했다.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좀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바로 가 버리네.
안지유가 모습을 감춘 뒤 다른 조원들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환호하면서 말을 붙였다. 나보다 더 들떠 보이는 그들과 안부를 나누고 있으니 소란스러운 내부도 차츰 한적해졌다.
“축하해 줘서 고마워. 다들 방학 잘 보내.”
“응, 너도! 나중에 보면 인사할게.”
“그래, 우린 가 볼게. 너도 조심히 가.”
마지막으로 조원들에게 인사하자 그들도 손을 흔들면서 멀어졌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제혁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형, 축하해. 기숙사에 잠깐 들렀다가 바로 나갈 거지?”
“왔어? 응, 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가자.”
나는 문제혁에게 안지유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려 했으나 이내 고개를 젓고 그와 서둘러 기숙사로 향했다. 품에 안은 꽃다발의 포장지가 부스럭거릴 때마다 싱그러운 생화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 * *
이어서 내가 향한 곳은 이능단속‧관리본부였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문제혁과 함께 건물 입구를 지나쳤다. 안쪽으로 들어서서 길드 관련 창구를 찾아가니 익숙한 이들이 보였다.
“어, 왔어? 여기야.”
나지막한 소리로 나를 반긴 김미솔이 손짓했다. 구석에 모여서 서류를 점검하고 있던 설연호와 고정인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스터 될 사람이 직접 제출해야 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 이대로 접수하고 오면 돼. 저쪽이야.”
나는 설명을 들으면서 마지막으로 서류를 점검해 보았다. 슬그머니 웃으면서 모두를 돌아본 뒤 서류를 접수할 수 있는 창구로 다가갔다.
서류 접수 자체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서류 제출 이후 잠시 기다리면 된다는 담당 공무원의 안내를 듣고 돌아섰다.
“이건 그냥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강효서가 여기까지 손을 뻗진 않겠지? 연극을 꾸민 게 너랑 애란이라는 건 그쪽에서도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접수하는 내내 손바닥을 무릎에 문지르며 침묵하던 김미솔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선배, 당분간은 자기 처신 수습하느라 잠잠할 거야.”
나는 정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주억이면서 그녀에게 대꾸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다들 생각이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모든 절차를 거친 뒤 건물을 빠져나왔을 때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계단을 천천히 밟아 내려오던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득 돌아본 오른편에는 기억하던 건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헌터 특수 정예 부대에서 사용하던 건물이었으니 지금은 없는 게 당연했다.
어느새 겨울의 서늘한 기운이 바람에 섞여 밀려들고 있었다. 날리는 코트 자락을 추스르면서 걷던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토록 드넓고 광활한 계단은 전생의 내가 수백, 수천 번도 넘게 오르내리던 것이다.
이 계단을 다시 밟는 것만으로 전생에서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디에서 멈춰야 빼곡하게 선 건물 사이에서도 하늘이 가장 잘 보이는지, 어느 시간대에 누가 이 계단을 올랐는지와 같은 것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러면서 전생의 내가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순간마다 괴롭고 힘든 기억을 이곳에 전부 내려놓았던 일을 상기했다. 어깨에 내려앉는 고통을 날마다 한 꺼풀씩 벗겨 내고 허물처럼 남은 것들 위로 다시 걸음을 겹치고는 했었지.
나는 그대로 멈춰서 내가 밟고 선 곳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상기한 일은 이번 생에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너무도 당연한 그 사실이 위안이 되었으나 조금은 서글펐다.
“춥다. 얼른 가자.”
따라서 걸음을 멈추었던 설연호가 내 팔목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면서 그를 따라서 남은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어, 눈이다.”
나는 고정인의 목소리를 따라 걸음을 우뚝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더니 눈앞에서 흰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허공에 손끝을 뻗고 있으니 금세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어서 하나둘 내리기 시작한 눈송이가 녹아내리면서 홧홧한 열기가 불거졌다. 그대로 손끝을 말아 힘껏 쥔 채 헌터 정예 부대의 건물이 있던 자리를 재차 돌아보았다.
기억하던 모습과 달리 텅 비어 있는 부지를 이르게 내린 노을빛이 채우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송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숨을 고르면서 뒤를 돌았다. 나를 따라서 걸음을 멈춘 채 기다리던 동료들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 순간 힘껏 움켰던 주먹 안쪽으로 홧홧한 열기가 둥글게 고인 채 순환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이 조금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손가락 마디마다 힘을 주면서 동료들이 서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