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14
114화. 동트는 겨울 (4)
다음 날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 나와 문제혁은 길드 사무실로 향했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곧장 시작한 회의는 한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스크린 앞에 서서 슬라이드를 차례대로 넘겼다.
“이 던전들은 전부 길드가 아닌 정부에서 관리 중인 곳이야. 보면 생각보다 많지.”
목록에 적힌 던전은 대부분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길드에게 관리 권한을 넘기기에는 지리적 위치가 다소 애매한 탓에 정부가 관리를 맡은 곳들이었다.
“그리고 이건 우리가 겨울방학 동안 공략할 수 있는 던전들만 따로 표시해 둔 목록. 등급이 낮은 던전 위주로 골랐어.”
붉은색 포인터를 스크린에 겨눈 채 목록을 크게 훑으면서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곧은 자세로 테이블에 두 손을 얹은 채 화면을 주시하던 설연호가 입을 열었다.
“잘 골랐네. 정부에서는 사실상 외부 길드에게 던전 관리 권한을 넘기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알고 있어. 달마다 나오는 지원금이 적은 금액이 아니다 보니 거기서 오는 경제적 부담을 무시할 수 없다나 봐.”
저마다 턱을 괴고 있거나 태블릿 화면을 들여다보던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연호 선배 말이 맞아. 정부한테는 아직 관리 권한이 길드에 넘어가지 않은 던전들은 서둘러 공략해서 처리해 버리는 게 이득일 테지. 이런 던전은 따로 의뢰를 요청하거나 공개 모집으로 돌린다고 들었어.”
잠시 화면으로 시선을 틀고 던전의 목록을 점검하던 나는 마저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가 유념해야 할 건 지금 당장 던전 공략에 투입될 수 있는 인원이 상당히 적다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는 여러 위험을 감수하면서 높은 등급의 던전을 도는 것보다 E, F급 던전을 위주로 돌면서 체력 소모는 최대한 적게 하는 게 중요해.”
어느새 마우스에서 손을 거두고 차가운 커피를 마시던 고정인이 덧붙였다.
“일단은 질보다 양이 중요하다는 거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른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렇지. 등급이 낮은 던전부터 성실하게 돌다 보면 자연스럽게 헌터들 사이에서 우리에 대한 평판이 퍼질 거야. 그러다 보면 다른 길드에서도 의뢰가 들어올 거고.”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숨을 고른 나는 마저 말을 이었다.
“의뢰와 관련해서 덧붙이자면, 대규모 길드에서는 고급 인력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인식이 강해. 등급이 높은 헌터는 임금도 많이 줘야 해서 등급이 낮은 던전은 소규모 길드에 외주를 주고 공략을 부탁하는 경향이 있어. 우리는 그 틈을 파고드는 걸로 일단 방향을 잡을까 해.”
그즈음에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던전 공략 일정은 내일까지 정리해서 메신저에 보내 둘게. 던전의 지형, 각자의 전투 기술, 체력, 강점과 약점 등을 고려해서 공략 팀을 배치할 거고, 만약 피치 못할 상황이 생겼을 땐 말해 줘. 일정을 조정해야 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모두의 동의를 구한 나는 자리로 돌아가 착석했다. 이어서 김미솔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정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슬라이드가 넘어가면서 새로운 표가 나타났다.
“의뢰에 대한 설명은 해월이가 했으니 나는 간단하게만 짚고 넘어갈게. 이건 내가 달해에서 받아 온 의뢰서야.”
다시금 화면에 빨간 점이 떠오르자 모두의 이목이 그쪽으로 향했다. 손가락 사이에서 펜을 돌리던 나는 턱을 한차례 까딱이며 김미솔의 설명을 경청했다.
“달해 길드에서 외부 인력을 고용해서 들어가는 방식이라 해당 길드 소속 헌터의 동행이 필요해. 던전 들어가기 전에 용역 계약서도 쓰고, 수입 배분은 확실하게 한다고 하니까 미리 걱정할 건 없어.”
김미솔의 말을 듣던 나는 던전 관리 권한을 취득할 시 지급되는 정부의 보조금 개념을 잠시 떠올렸다. 보조금을 지급하는 목적은 던전을 관리하고 유지하면서 발생하는 비용을 정부에서 일정 부분 보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명분이었다. 그 안에는 훗날 해당 던전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는 경우 관리를 맡았던 길드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사회적 함의가 함께 담겨 있었다.
고로 달해 길드 소속 헌터가 던전 공략 과정에 동행하는 건 던전 브레이크와 같은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곧바로 조치하는 동시에 던전 관리에 대한 책임을 외부 인력에 전가했다는 오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어서 김미솔은 의뢰서에 적힌 던전의 특성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설명이 마무리된 뒤에는 회의실 내부가 잠시 고요해졌다.
“던전 공략 일정을 정리하기에 앞서 방학 동안 각자 맡을 업무를 분배하는 게 어떨까 싶어. 당분간 던전 공략 팀이랑 사무 팀으로 인원을 나눠서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수월할 듯해서. 다들 동의하면 던전 공략 일정이랑 같이 정리해서 메신저에 남겨 놓을게.”
각자 태블릿을 들여다보거나 노트에 글자를 적는 동안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하나둘 고개를 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난 동의해. 오늘은 던전에 들어가고, 내일은 사무실에 출근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니까. 그리고 예성이나 정인이도 던전을 공략하려고 우리와 함께하는 건 아니잖아? 각자가 잘하는 일이 있으니까 당연한 거지.”
가장 먼저 대답한 건 김미솔이었다. 그녀가 동의를 구하는 듯이 모두를 둘러보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했다. 잠시 뒤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던 서애란이 입을 열었다.
“지난 회의에서 우리 길드가 5월까지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성문이 관리하던 던전을 넘겨받자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준비할 거야?”
나는 자연스럽게 서애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 뒤로 넘기던 서애란이 말문을 이어 나갔다.
“아니, 우리 지금 인원만으로는 던전을 꾸준히 관리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아서. D급 던전부터는 언제라도 등급이 상승할 가능성이 있으니 그것까지 염두에 둬야 하고. 그런 걸 생각하면 이관부에서 우리한테 관리 권한을 넘겨 주려고 할까? 넘겨 줬다가 관리 못 해서 문제 생기면 본인들도 일정 부분 책임져야 할 텐데.”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은 채 손등에 턱을 괴고 이야기를 경청하던 홍원하가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었다. 이어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나도 생각해 봤는데, 이관부 쪽에서도 성문과 관련된 일이라면 빨리 처리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차일피일 미루면서 골머리 앓느니 쓸 만한 길드 몇 군데 뽑아서 관리 권한을 배부하고 말지. 그것도 아니면 수익성 높은 것들 빼고는 그냥 헌터들 모집해서 공략해 버릴 수도 있고. 여기서 인원을 더 충원하지 않는 이상 우리 길드에서 제출한 서류가 통과하긴 어려울걸.”
숨을 길게 흩뜨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내내 키보드를 두드리던 고정인도 기지개를 켜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헌터를 스카우트하는 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인 만큼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지. 이제 우린 학교 동아리를 운영하는 게 아니니 누군가 들어오고 싶다고 해도 아무나 충원할 순 없어. 그리고 이름값 있는 헌터일수록 보수도 크게 줘야 할 텐데 지금 우리 재정으로선 무리야. 그리고 우리를 적대시하는 곳에서 사람을 심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고려해야 해.”
고정인의 말을 경청하면서 손끝으로 이마를 짚던 설연호가 눈을 깊이 감았다가 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학교랑 성문 사이의 소송이 5월이면 끝난다고 했었지? 성문이 보유한 던전의 관리 권한을 포기하게 하려면 거기서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할 거야. 아직은 여유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한 건 너무 조급하게 고민하지 말자.”
설연호의 말을 끝으로 내부에 침묵이 감돌았다. 회의를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조금 넘어선 탓인지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느릿하게 헛숨을 게운 나는 그들을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도 중요한 얘기는 얼추 끝냈으니 잠깐 쉬었다가 할까?”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의 휴식이 시작되었다. 하나둘 자리를 비우면서 한적해진 회의실에 남은 나는 창문을 내다보며 상념을 이어 나갔다.
길드원을 늘리는 일은 설연호의 말대로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삼 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이능청에 대적할 만큼 강해지려면 길드의 골조를 마련하고 내실을 다지는 기간 동안 미래의 계획을 치밀하게 설계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차진명은 자신의 사회적 성장에 착실하게 나를 이용해 먹었다. 시작은 특정 지역이나 건물을 대상으로 삼은 뒤 근미래의 일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한동안 나는 새로 생성되는 던전의 위치와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는 날짜 등을 예측하는 데 주력했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차진명은 천리안을 통해 특정 길드의 행보를 예측하라고 지시했다. 그 과정에서 이능청에 잠입한 스파이를 색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나는 차진명을 대신해 미래를 내다보며 그가 사람들을 손쉽게 해칠 수 있도록 동조하고 방관했다.
이능청이 짧은 시간 내에 권력의 요충지로 군림하며 길드 세력을 압박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나의 천리안이었다.
차진명을 따라 하고 싶진 않지만, 방법만큼은 본받을 만하다. 이 눈을 이용해 최대한 빠르게 길드를 성장시키고 동시에 이제 막 발을 뻗은 신규 길드와 경쟁하면서 우리만 가진 차별점을 내보일 방법도 같이 고민해 봐야겠어.
그즈음에서 상념을 마무리 짓고 주위를 둘러보니 회의실이 다시 북적해지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근처로 다가가면서 이목을 모았다.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시작할까. 그전에 스카우트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조만간 희찬 선배한테 연락해 보려고 해.”
서로 고개를 맞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자세를 정돈하면서 시선을 틀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던 고예성이 대답했다.
“그래, 안 그래도 그 선배는 어떻게 지내나 싶었어. 졸업도 안 하고 떠날 줄은 몰랐거든. 그 선배 뭐 하면서 지낸다고 했지? 아버지 돕는다고 했었나?”
“네, 맞아요. 그리고 형 의견도 좋아. 동아리 할 때부터 같이 있던 선배였으니까 연락해 보자. 지금까지 연락 없는 걸 봐선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문제혁이 어깨를 가볍게 들먹이면서 하는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질끈 감고 기지개를 켜던 홍원하도 팔을 내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 선배, 성격이 과격하고 말도 험하긴 한데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더라. 이거 혹시 미운 정인가? 아무튼, 너무 오래 못 봐서 궁금하기는 해. 다시 오면 좋겠다.”
이어서 공희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료들을 지켜보던 나는 주머니에 있던 지갑에서 김수호의 명함을 꺼내 내려놓았다.
“희찬 선배한테는 내가 연락할게. 이어서 얘기할 건 이거야.”
“이게 뭐야? 사양 길드? 김수호 헌터?”
“뭔데? 사양?”
가장 가까이에 있던 고정인이 명함을 쥐고 드문드문 읽자 듣고 있던 홍원하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지선일이 그의 팔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히면서 말했다.
“사양 소속 헌터라면 그때 우리랑 같이 들어갔던 그분 말하는 거죠? 명함은 또 언제 받은 거예요? 와, 선배 인기 진짜 많다.”
“인기가 문제가 아니지! 방학식 이틀 전에 내가 관광용 던전 얘기했을 때는 왜 말 안 했어. 이거 배신이다, 너? 어?”
얌전히 앉은 뒤에도 무어라 외치는 홍원하의 말은 한 귀로 흘려들었다. 나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잠잠해질 즈음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있을 때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다들 들었다시피 관광용 던전 권리 권한을 따내면 돈이 꽤 된다고 하더라고. 유명한 곳은 입장료만으로도 수입이 어마어마하고. 김수호 헌터가 나한테 명함을 줬던 건 스카우트 명목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염치 불고하고 그쪽에 가서 관광용 던전에서 대해서 좀 물어보고 부탁도 해 볼까 해.”
시선을 허공에 둔 채 가만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김미솔이 곧장 대답했다.
“하긴 던전을 공략하면서 얻는 일시적인 수입 말고 고정적인 수입이 생기면 훨씬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기는 하겠다. 관광용 던전 관리 권한 하나만 따내도 여름에 회의실에서 에어컨 마음껏 켤 수 있을걸?”
툭 던지듯 전한 말이 희망의 불씨가 된 건지 몇몇 사람들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도는 게 느껴졌다.
“다들 동의하는 것 같으니 오늘 저녁에 연락해 볼게. 그럼 남은 방학 동안 어떻게 움직일지 대략적인 일정부터 정해 보자.”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린 나는 김수호의 명함을 다시 지갑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고정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스크린에 달력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