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동트는 겨울 (9)
서둘러 1층으로 내려온 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원하는 사람이 적은 나머지 비교적 한적한 편이었으나 이현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근처를 배회하다 원무과에 다다를 즈음 그를 발견했다.
이현준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비스듬하게 선 자세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예성을 통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몬순 길드의 구성원은 전부 성인이 되어 각성한 이들이라고 했다. 마스터인 이현준을 비롯한 극소수의 인원만 C급이고 그 외는 대부분 D, E급이라는 것까지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돌린 그가 나를 발견하고 자세를 고쳤다. 이내 머쓱하게 인사하면서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 학생 상태는 좀 어때요? 별일 아니라고 하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나는 분명 전날 이현준과 통화하면서 문제혁의 상태를 간단히 전했었다. 그새 까먹은 건지, 아니면 원체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건지 모르겠네.
어느 쪽이든 내 알 바 아니기에 오래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총사령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수도 없이 많은 헌터와 대거리했던 나는 사람을 판별하는 일에 그리 오랜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 이쯤에서 이현준과 몬순에 대한 인상이 결정되었다.
여러 길드에서 자주 의뢰를 맡긴다길래 따로 배울 만한 점이나, 노하우가 있나 했더니. 이건 뭐, 배우기는커녕 여기까지 온 게 신기한 놈이었다.
이내 한숨을 간신히 삼킨 나는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인 채 이현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그는 이마를 긁적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 뭐, 미래를 알려 주는 게 어디까지 볼 수 있는 거예요? 어느 던전이 안전한지 뭐 그런 것도 볼 수 있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늘 그가 문제혁이 아닌 나를 만나겠다고 한 목적이 무엇인지 간파할 수 있었다. 이현준은 이 만남을 핑계로 스킬에 대해 캐물으려는 속셈인 듯했다. 어쩌면 차진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던전 밖에서도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지 궁금한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곳곳에서 헌터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내가 가진 특수한 스킬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내다볼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꾸준히 지켜볼 테다.
그러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나와 함께하기를 원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를 적수로 삼고 제거하려 하겠지. 나는 그 가능성까지 내다볼 수 있었기에 두렵지 않았다.
“내가 뭐 이상한 걸 물어봤나. 아까부터 왜 대답이 없어요? 입원을 얼마나 해야 하는 건데. 그건 정해졌고?”
얘 좀 봐라. 슬슬 말 놓네.
“최소한 일주일은 입원할 생각입니다.”
나지막한 어조로 설파하니 맞은편에 서 있던 이현준이 헛웃음을 지었다.
“뭐? 일주일씩이나? 예, 그러세요. 아무튼, 입원비 중에 30%는 우리가 부담할 생각입니다. 알다시피 우리 길드도 규모가 크진 않아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줘요? 그리고 그거 뭐, 얼마나 대단한 스킬이라고 대답을 피해요? 그래 봤자 눈에 보이는 것뿐이라 이탈해 버리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던데.”
먼저 무례하게 행동한 주제에 괜히 빈정거리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달해 소속 헌터인 유수정이 이현준의 말에 하나하나 반응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 또한 이런 녀석과 실랑이할 시간은 없었다. 거기다 30%는 또 어디서 나온 비율인 건지.
“아무튼, 치료비에 관한 얘기는 우리 길드 전담 세무사랑 마저 이야기 나눠 봐요, 연락처 넘겨 줄 테니까. 이거면 됐죠? 우리 언젠가 또 마주쳐도 이 일로 더는 얼굴 붉히지 맙시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느릿하게 까딱이면서 몬순 길드 전담 세무사의 명함을 받아 지갑에 보관해 두었다. 이현준을 보내고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니 생각보다 긴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이쯤이면 문제혁도 깨어날 것 같았으나 섣불리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근처에 있던 원무과로 걸음을 틀었다. 잠시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던 나는 직원을 통해 앞으로 수납해야 할 입원비에 대한 설명을 청해 들었다.
이 정도면 몬순뿐만 아니라 달해 쪽에도 청구해야겠는데. 고예성한테 미리 언질을 주고 자세한 건 사무 팀에 넘겨서 처리하라고 해야겠어.
원무과 직원에게 인사하고 돌아선 나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방금 문제혁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남겨져 있었다. 그 메시지를 확인하며 안도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곧바로 고개를 틀고 주위를 살폈으나 눈에 거슬릴 만한 것들 없이 잠잠했다. 내가 착각한 건가 싶어 한쪽 눈가를 찡그렸으나 방금 느낀 건 분명 낯선 사람의 시선이었다.
뭐지? 방금까지 누가 날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착각인가.
그대로 주위를 거닐어 보았지만,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여기까지 쫓아와서 나를 지켜볼 만한 사람이 있나.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나는 의아한 심정은 잠시 접어 둔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로 올라갔다.
“이제 오는 거야? 제혁이 일어났다고 한참 전에 문자 보냈는데.”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김미솔이었다.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문제혁의 침상을 들여다보니 그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 나 이제 괜찮아.”
목을 가다듬으면서 말을 전한 문제혁은 며칠 동안 잠들어 있어서 그런 건지 혈색을 반쯤 되찾은 얼굴로 나를 반겨 주었다.
“안녕. 슬슬 깨어날 기미가 보인다고 하길래 나도 부랴부랴 쫓아왔어. 근데 해월이 넌 또 얼굴이 왜 이래? 며칠 새에 왜 이렇게 수척해졌어?”
언제 온 건지 내가 앉아 있던 작은 의자를 차지한 홍원하가 손을 흔들었다. 자리가 좁은 건지 넓은 어깨가 한껏 구겨져 있는 모양새가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묻고 싶었는데. 잠은 좀 자고 일어난 거야?”
이어서 음료 세트의 포장을 뜯고 한 병씩 냉장고에 집어넣던 설연호가 말했다.
“전 이제 얼굴만 봐도 알 것 같아요. 해월 선배 지금 사흘 동안 제혁이 걱정하느라 한숨도 못 자고 설친 얼굴이에요.”
서애란과 맞은편 침상에 나란히 앉아 있던 지선일이 손등으로 턱 끝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러자 모두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어. 제혁이도 일어난 김에 좀 쉬고 오는 건 어때? 여기는 우리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
“그래, 가서 새로 갈아입을 옷도 가져오면 되잖아.”
마지막으로 고정인과 고예성까지 말을 보태는 걸 듣던 나는 수긍하면서 어깨를 가벼이 들먹였다.
“그럼 옷이랑 생필품만 좀 가져올게. 금방 올 거야.”
그런 내 말을 듣고 있던 문제혁이 눈가를 미약하게 찡그리면서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가서 눈 좀 붙여, 형. 아니면 오늘 집무실에 다녀오는 건 어때?”
“어, 그러게. 해월이 아직 집무실 안 갔다고 했었잖아.”
“아직도 안 들어가 봤어? 나 같았으면 사무실에 처음 출근한 날부터 들어가 봤을 것 같은데. 쟤도 은근히 희한한 구석이 있다니까?”
금세 소란스러워지는 걸 보고 있으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동아리 모임을 진행하는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을 놓은 나는 마지막으로 김미솔을 바라보았다.
“괜찮으니까 얼른 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할게.”
다 전하지 않은 속내까지 알아챈 건지 김미솔이 슬며시 웃으면서 손짓했다.
“도해월, 너 왜 미솔 누나랑 둘이 눈으로 얘기해? 그만 버티고 빨리 가. 가서 좀 쉬어!”
나와 김미솔을 번갈아 바라보던 홍원하가 내 어깨를 감싸더니 순식간에 문간으로 떠밀었다. 얘는 또 왜 이러나 싶어 홍원하를 돌아보기도 전에 복도에 내몰리고 말았다. 이내 문이 닫히고, 나지막한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 * *
사흘 동안 누적된 긴장이 풀린 건지 유난히 무거워진 걸음을 이끌고 길드 사무실로 향했다. 입구에서 한참을 걸어 도착한 집무실의 문은 아직 닫혀 있는 상태였다.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나는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을 밝히지 않은 내부는 바깥보다 한층 어둑해져 있었다. 사무직 헌터들을 위해 취우 쪽에서 마련해 둔 책상과 의자에는 여전히 불투명한 비닐이 덮여 있었다.
언젠가는 저 자리도 다 채워지겠지.
문득 떠오르는 감상을 따라서 내가 집무실에 서둘러 발을 들이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를 상기해 보았다. 이곳에 들어서고 나면 나도 모르게 총사령관이었을 적 사용했던 집무실의 풍경을 겹쳐 볼 것만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현재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서 있어야 해.
스스로 다짐한 나는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고 집무실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벽면에 부착된 스위치를 눌러 불을 밝히고 주위를 둘러보다 순간 멈칫했다. 눈앞의 풍경이 너무도 익숙한 탓이었다.
집무실 내부는 어두운 초록색과 고동색이 한데 섞여 마치 거대한 나무를 연상시켰다. 창문이 없어서 어쩐지 더 단단한 인상을 주는 이 공간은…….
지난여름에 한도일이랑 독대했던 공간이랑 비슷하잖아. 그래서 그때 자기 집무실도 아닌 곳으로 부른 거였구나. 자기가 보낸 선물을 풀어 봤는지 궁금해서.
한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던 한도일을 떠올리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고급스러운 광택이 나는 검은 의자에 느릿하게 착석했다. 오로지 나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아서 맞은편을 보고 있으니 커다란 나무가 나를 감싸는 듯했다.
지잉―
지잉―
그러다 휴대전화가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발신인은 설연호였다.
―어, 해월아. 잘 도착했어?
“응, 무슨 일이야?”
―그, 제혁이 병원비 있잖아. 그거 내가 대신 먼저 내려고 했거든. 나는 나중에 받아도 되니까.
나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튼, 병원비 수납하러 갔는데 누가 이미 일주일 치 병원비까지 다 냈다고 하더라.
“뭐라고?”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지만 설연호의 대답은 같았다.
“잘못 들은 건 아니지?”
―나도 몇 번씩 확인했는데 전부 납부됐다고 했어. 누가 낸 건지 물어보니까 그건 직원분도 잘 모른다고 하시더라. 대신 나처럼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뭐라고 전하라는데?”
―익명의 후원자. 혹시 뭐 짐작되는 것 있어?
나는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원무과에서 낯선 기척을 느꼈던 일이 떠오르더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착각이 아니었나 보네. 대체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