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2
12화. 불가항력에 맞서는 (2)
상담실에서 빠져나온 나는 9층으로 향하고자 계단을 올랐다.
층계참을 밟아 오르는 동안 온갖 곳에서 눈길이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현장 실습을 다녀온 뒤로 달라진 점에 대해서라면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꽤 노골적인 감정들이 읽힌다는 것.
둘째는 빤히 쳐다보는 것으로 모자라 대놓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모자라 D급이 A급 던전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놀라서 까무러칠 만도 하지.
정건후를 제외한 교사들은 학생들처럼 수군거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대하는 태
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셋째는 조장이었던 내게 내려진 평가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불과 이십 분 전 상담실에서 마주했던 정건후조차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집불통에 강압적인 리더는 누구라도 다시 따르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고도 실습에서 함께했던 조원들에게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그 말을 들었던 순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총사령관이었을 적 부대원들이 나를 두고 내리는 평가도 그와 상응했으니까.
하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이 나는 총사령관 도해월이 아니라 6학년 D급 헌터 도해월이었으니까.
주변에서 나를 대하는 평판이 달라졌다는 것.
이는 곧 나의 미래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과거의 내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게 되었으니 내가 기억하는 미래와 전혀 다른 결말에 다다를 가능성이 조금은 상승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다른 9층 복도엔 인기척 없이 서늘한 공기만 맴돌았다.
나는 고요한 공간을 익숙하게 가로지르며 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동안 굳게 닫혀 있는 옛 필드의 출입문을 힐긋 바라보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구동하던 필드의 문을 닫은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나마 신빙성 있는 추측으로는 그 안에서 인명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 정도였다지.
그 사고에 6학년이었던 차진명이 개입되었다던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진명이 유학을 떠나고 7층 필드가 새롭게 개설되면서 학생들의 이목이 옮겨 가게 되었고 소문은 금세 잠잠해졌다.
필드의 입구 방면에서 조금 더 걷다 보면 보다 구석진 곳에 자리한 화장실이 있었다.
나는 멀리서부터 퍼지는 쿰쿰한 냄새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닫힌 문을 열었다.
인적이 닿지 않은 탓에 최소한의 관리만 유지되고 있는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오랜 기억 속에도 바래지 않고 선명한 모습으로 남아 있던 공간을 구석구석 눈에 담아 보았다.
고작 이 공간에 발을 들였을 뿐이었지만 다시 숨을 크게 내쉬는 순간부터 이곳에서 겪었던 과거의 일들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 * *
2027년, 겨울.
7학년 2학기 현장 실습을 앞두었던 어느 날.
“야,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망상 중이라며? 그것도 병이야, 새끼야.”
화장실 구석에 잔뜩 웅크린 채 쓰라린 복부를 움켜쥐고 있던 나를 누군가 툭툭 건드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발끝이 허벅다리를 짓이기자 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금세 어금니를 악물면서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 놈들을 올려다보았다.
“씨발, 야리면 어쩔 건데. 눈 안 깔아?”
억세게 다물린 턱이 저릿해지며 입안으로 혈향이 번졌다.
혀끝으로 고여 있던 핏덩이를 쓸어 바닥에 뱉어 내자 놈들이 야유했다.
“아, 씨바. 더러워 죽겠네.”
“썅, 내 신발에 튀었어. 이거 며칠 전에 산 건데. 진심 실화냐?”
“야, 어디? 으, 제대로 튀었네. 아까워서 어쩌냐.”
“지가 진짜 A급이라도 되는 줄 알고 나대는 새끼 때문에 새 신발 버렸잖아. 존나 짜증 나네. 이거 뭐 세탁으로 해결이 되나?”
그러자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들끼리 웅성거리며 무어라 말하던 놈들이 이내 맞은편 구석에 있던 호스를 끌고 나타났다.
“되는지 안 되는지 해 보면 알겠지. 야, 물 틀어 봐.”
누구의 것일지 모르는 지시를 기점으로 차가운 물줄기가 온몸에 쏟아져 내렸다.
그 사이로 가로지르는 무수한 발길질이 폭우처럼 나를 짓눌렀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러고 있는 거지?
물줄기는 얼어붙은 강물처럼 서늘했으나 사지는 불덩이에 구른 것처럼 홧홧했다.
도무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의식도 차츰 흐려져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왜 끌려왔더라.
매번 정신이 나갈 정도로 처맞고 나면 기억까지 흐릿해지고는 했다.
“냉수마찰 좀 하면서 정신 좀 차려. 씨발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지. 너 그러는 거 허언이라니까. 등급 측정부터 다시 받을 게 아니라 병원부터 가야 한다고, 새끼야.”
그래, 놈들은 내가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발단은 몇 달 전에 벌어진 용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였다.
정건후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그 사태는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그가 사망한 이후 학교에는 나에게 관심을 품고 살피는 교사가 완전히 사라졌다.
애초에 나를 들여다보던 건 정건후 하나뿐이었으니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말이 적합하다.
그 사태 이후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생겼다.
내가 예측한 것이 맞다면 나는 더는 D급 헌터가 아니었다.
분명 그 이상을 웃도는 수준이 되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너 이번 주 금요일에 등급 측정 다시 하기로 했다며? 그런다고 달라질 리가 있냐? 너도 참 고집불통이다.”
달라져야만 하는 것이 달라지지 않았으니 계속하는 거였다.
규정상 한 학기의 끝 무렵마다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등급을 측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결과를 납득하지 못한 나는 계속해서 학교에 요청했다.
그 과정이 반복되자 학교의 모든 이들이 나를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를 쳤다.
근데 그게 죄인가? 그렇게 맞아야 했을 정도로 큰 잘못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듣기로는 얘만 따로 불러서 측정해 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래. 듣기로는 이사장님 귀에까지 들어갔다더라. 웬 별종이 자꾸 학교 분위기를 흐린다고.”
“아, 진심? 도해월, 너 어쩌냐. 이사장한테 찍히면 졸업한 뒤로 아무것도 못 할 텐데.”
통쾌하다며 키득거리던 놈들이 어디선가 큰 물통처럼 생긴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머지않아 나는 그것의 정체가 소독용 락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걸로 내 신발 닦는 김에 얼빠진 네 정신머리도 좀 세척하라고.”
불쾌하다 못해 구역질이 절로 올라오는 그 액체가 교복을 적셨다.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됐더라.
그래, 기억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이 떠졌다.
좁은 화장실을 가득 메웠던 기척이 전부 사라진 채였다.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물웅덩이에 엎어져 있던 나는 손끝을 바르작거렸다.
손끝에서부터 락스 거품이 드리운 물살의 궤적이 느리게 퍼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부어 터진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마치 포말을 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혐오스럽고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퍼져 나간 궤적이 어디까지 향하는지 알 수 없을 무렵.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느껴지던 기척이 귓가에 점점 선명해졌다.
머지않아 누군가 문을 열어젖히더니 구둣발로 너저분한 물웅덩이를 가로질렀다.
락스와 핏물이 한데 뒤엉켜 지저분해진 것을 개의치 않고 나아오는 것이 보였다.
나에게로 점점 가까워지는 그 얼굴을 올려다보고자 고개를 힘겹게 젖혔다.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의 얼굴 위로 새하얀 빛이 사선으로 쏟아져 내렸다.
화장실 벽면에 달린 직사각형의 작은 창문에서 비롯된 빛이 그를 비추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불현듯 실감했다.
저 사람이 나를 구원하러 왔구나.
비로소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생긴 건가.
나를 한참 내려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낮추었다.
“꼴이 말이 아니네. 이 꼴을 보고도 괜찮냐는 식의 무의미한 질문은 하지 않을게.”
내게는 익숙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이 목소리를 한동안 들을 일이 없었는데.
남자가 손끝으로 내 턱을 거머쥔 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를 따라 나도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차진명 선배? 졸업하신 거 아니에요?”
겨우 읊조렸으나 목울대에서 쇳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졸업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날 기억하다니. 영광이네.”
“그보다 여긴 어쩐 일로…….”
차진명은 내 말에 대답을 잠시 유예하고 엎어져 있던 나를 일으켰다.
그 손길로 간신히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나는 그제야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네 얘기는 이사장님한테 전해 들었어. 네가 계속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학교가 소란해졌다던데.”
“그건, 그러니까…….”
자세히 설명하려 했으나 입안까지 부어오른 나머지 발음이 뭉개져 버렸다.
“나는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더는 네가 D급 헌터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는 느끼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내가 말하지 않은 속내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나 다른 사람들이나 등급 측정 기구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거야. 이때까지 오차가 생긴 적은 거의 없었고, 그마저도 개발 초기에만 일어났던 일이니까.”
대체 뭐지? 이 선배가 왜 지금 나타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냐고?
“그러니 사람들은 소수인 너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게 당연했을 거야. 그래서 지금도 이 꼴로 여기 처박혀 있던 거겠지.”
일순 치밀어 오르는 통증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도통 정신이 없는 것 같으니까 본론부터 말할게. 먼저 말했던 것처럼 네가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입증할 방법이 없을 뿐이지.”
“…….”
“앞으로의 난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원대한 계획을 이룰 거야. 나 혼자서는 당연히 불가능해. 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줬으면 해.”
“제가, 선배를, 무슨 수로?”
“너에 대해서 알아보니까 공개된 스킬 중에 천리안이라는 게 있다던데. 맞지?”
“네.”
“불가항력 너머를 예측할 수 있는 그 눈. 나는 그게 필요해.”
* * *
똑, 똑.
똑.
똑.
나는 수도꼭지에 고인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예고 없이 되살아난 기억을 빠져나오니 온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9년 전의 겨울, 이곳에서 차진명을 맞닥뜨렸던 순간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그때의 나는 내 상황을 인지하고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그의 말을 고스란히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차진명이 의도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곁에서 지켜본 그는 아주 섬세하고 교묘하게 술수를 꾸려 나가는 작자였으니까.
대체 어디서부터 계획되었던 거지?
나는 턱 밑까지 차오르는 한숨을 쏟아내며 교복 넥타이를 헝클였다.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고 앞섬을 쥐어 펄럭이는 채로 열기를 가라앉혔다.
차디찬 물살 가운데 락스와 핏물이 뒤엉키던 그때처럼 머릿속이 소란해졌다.
과거의 나를 완전히 뒤바꿨던 그 일의 시작점에 도달하니 한 가지 사실이 확실해졌다.
설연호를 비롯한 조원들과 정건후가 나에게 했던 말들.
그리고 과거의 부대원들이 나를 두고 이야기했던 것까지…….
나는 내가 그토록 증오하던 차진명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