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움트는 시간 (1)
나는 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다시 한번 동료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오늘 내가 그들에게 전하려는 건 김수호를 설득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방해 공작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길드의 힘을 기르고, 천리안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면서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막아 내는 것. 이것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토대로 정진하는 것이 우리 길드가 성장하는 목적이 될 것이라는 논지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머지않아 동료들 또한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현장 실습에서 입장한 던전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수도 있었으나 결국 막아 냈던 일을 언급할 무렵에는 이따금 창밖 너머의 남산타워를 힐긋거리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그대로 숨을 길게 고른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동료들의 모습을 한눈에 담아 보았다.
“천리안을 통해 근미래에 벌어질 일을 내다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우리들의 이점이야. 그리고 난 내가 가진 눈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길드를 성장시킬 생각이고. 그렇게 우리의 행적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하고 길드가 유명세를 누리게 되면 사람들의 이목이 내가 가진 스킬에 몰릴지도 몰라.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에서 미래를 본다는 것을 숨기는 데엔 한계가 있고.”
나는 테이블 근처를 느릿하게 거닐면서 말을 이었다. 이내 숨을 고르면서 창가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미래를 본다는 것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나에게 바라는 게 점점 많아질 거야. 지난번에 발생할 뻔했던 재난을 막아 냈으니 이번에는 또 다른 재난을 막아 달라고 하겠지.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제일 잘 알 테고.”
그즈음에서 다시금 동료들의 반응을 살피고자 고개를 반쯤 기울였다.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서로를 곁눈질로 바라보던 이들이 차례로 수긍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크고 작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가 원하던 미래에 다다를 수 있었던 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내가 본 미래를 믿고, 나를 따라서 움직여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언제가 됐든 내가 모두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한 가지야.”
그대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나를 믿어 줬으면 해.”
모두와 눈을 마주친 뒤 화이트보드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보드 마커를 손에 쥐면서 말을 이었다.
“길드를 빠른 속도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천리안을 이용한다고는 했지만, 처음부터 이 스킬의 존재를 만천하에 공개하진 않을 생각이야. 아직 우리의 입지가 미약한 만큼 섣불리 알렸다가 도리어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말문을 맺으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모두 여기에 이견은 없는 듯했다. 나는 화이트보드의 깨끗한 면에 앞으로의 계획을 적어 보았다.
“그 과정에서 떠올린 게 범람이었어. 시범으로 운영할 때까지만 해도 각성자 등급이 낮은 학생들도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소위 보이지 않는 청자들의 창구를 만드는 게 목표였지만 범람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해 줬어. 가장 중요한 건 성문이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 진실이 폭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줬다는 거지.”
나는 중요한 단어를 위주로 적은 뒤 아래에 밑줄을 긋거나 화살표를 그리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제는 학교를 벗어나서 더 많은 사람이 그 창구를 이용할 수 있도록 규모를 넓혀서 다시 운영해 보자.”
말문을 맺은 뒤 그대로 화이트보드에서 손을 거둔 뒤 테이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고정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이미 한번 해 봤으니까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이제는 돌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 나름대로 노하우도 생겼으니 나는 좋아. 그게 내 주 전공이기도 하고.”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호응하던 나는 화이트보드의 남은 여백에 글씨를 적어 넣으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범람이 아카데미 학생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제는 규모를 넓혀서 학교 바깥의 사람들까지 끌어당겨 보자. 지금 세우는 계획은 범람이 학교 바깥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의 입지를 갖추게 되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게 될 거야.”
그 순간을 기점으로 꼿꼿하게 앉아 있던 동료들이 저마다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구상해 두었던 계획을 천천히 적어 내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미래에 벌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을 미리 내다본 뒤에 익명으로 사람들한테 알린다는 거지?”
간단한 설명을 마무리한 이후 회의실 내부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소리를 낸 건 홍원하였다.
“그래, 정확해. 처음에는 허황된 소리라고 넘기는 사람들이 대다수겠지. 하지만 내 예측이 연이어서 적중하고 나면 사람들도 우리의 말을 믿기 시작할 거야.”
나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언젠가 우리 길드가 숱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을 만큼 단단해지면 범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내가 내다본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행보를 기대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길 테지.
짧은 노트북 키보드에 손을 얹고 부지런히 두드리던 고정인이 나를 힐긋거리면서 말했다.
“운영은 언제부터 재개할 건지 생각해 봤어? 서버를 다시 열고 지금보다 많은 사람이 접속해도 안정적으로 버틸 수 있게 하려면 전체적으로 손볼 시간이 필요해.”
“졸업식 며칠 전부터 다시 열어 두면 좋을 듯한데. 가능할까?”
“음, 그럼 대략 삼 주밖에 안 남은 거네? 오케이. 일단 해 볼게.”
내 대답을 들은 고정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소매를 가볍게 걷어 올리고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마지막 안건을 확인한 뒤 사양 길드 사무실에서 만난 김수호와 나눴던 대화를 천천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 * *
회의를 시작한 건 비교적 이른 시간이었으나 창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전날부터 종일 이곳에 머무른 탓인지 슬슬 피로가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모두가 자리를 비운 뒤 마지막으로 남아 회의실을 정리하고 있으니 휴대전화가 길게 진동했다. 느지막하게 들여다보니 김수호에게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마스터인 나와 부길드장, 그 외의 중요 직책을 맡은 또 다른 헌터 한 명과 함께 조만간 사양 길드 사무실에 방문해 달라는 의사를 전해 왔다. 나는 곧바로 긍정의 의사를 담은 답신을 전송한 뒤 동료들에게도 소식을 전해 두었다.
내부를 마저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길드 사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눈이 녹아내린 거리를 느릿하게 가로질렀다. 내가 향한 곳은 헌터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한참 떨어진 대학가 거리였다. 전생의 이맘때 기억을 천천히 되짚으면서 걷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졸업식 날 학교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신촌 대학가에서 난데없이 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게이트 발생 신고가 접수된 이후 신촌에 거점을 둔 길드 소속 헌터들과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 파견된 헌터들에 의해 금세 처리되었으나 인명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게이트가 열리면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에게 공격당한 비각성자 대학생이 중태에 이르러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끝내 사망하게 되었고, 외에도 다수의 부상자가 생기고 말았다.
마침내 내가 다다른 곳은 헌터 아카데미에서 대략 4㎞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노고산 근처였다. 전생에서의 일이 이번 생에서도 그대로 발생한다면 지금으로부터 삼 주 뒤, 대학교 건물 뒤쪽에 자리한 완만한 언덕 같은 이 산에서 게이트가 열리게 될 것이다.
부단히 걸음을 옮겨 노고산과 맞닿은 작은 광장에 다다른 나는 근처에 우뚝 선 대학교 건물을 잠시 훑어보았다. 대학생들 또한 아직 방학이어서 그런지 드문드문 불이 밝혀진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서 눈을 감았다.
[사용자가 지정한 ‘천리안’ 스킬이 발동됩니다.]그 순간 오감이 열리면서 서늘한 겨울바람 틈으로 밀려든 시간의 행렬이 살갗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손아귀 안쪽을 훑고 지나가는 미지근한 바람을 따라서 숨을 고른 나는 잠시 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직전까지 무의식 속에 들이닥쳤던 미래의 잔상이 아직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나는 주변에 놓여 있던 벤치가 뒤집히고 가로등이 꺾이는 등 난장판이 된 모양새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순간 내 발치까지 휘감고 있던 회색빛 연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윽고 차갑게 식은 손끝을 말아 쥐면서 의식을 다잡은 뒤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제복과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의 내 모습이 공연히 낯설게 느껴졌다. 던전 바깥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으면서도 그러했다.
과거의 내가 미래를 내다보았던 건 차진명의 목표를 이루는 데 일조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인명 피해를 막아 낼 생각으로 미래를 내다보았다. 전생과 목적이 달라졌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 마음가짐 또한 자연스럽게 변모하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회귀하여 다시 맞이한 나의 두 번째 인생에 제대로 된 지향점이 찍히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가슴속으로 차가운 공기가 차오르는 듯했다. 나는 멈춰 있던 지점에서 걸음을 내디디면서 근처를 느릿하게 배회하기 시작했다.
천리안을 통해 내다본 미래의 장면과 눈앞의 광경을 비교하면서 머릿속으로 전투 전략을 구상하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어느새 가로등 불빛이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길목에서 우두커니 멈춰 선 나는 전생에서 몬스터에게 공격당해 끝내 사망하게 된 대학생이 쓰러진 지점을 내려다보았다.
인도와 잔디밭의 경계선에 선 가로등 주변부에 덜 녹은 눈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가로등의 주황빛을 머금고 한층 환해진 자리에 눈길을 둔 채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앞으로 나는 어떤 두려움과 불안, 번민이 나를 덮치더라도 내게 다가온 미래를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것이다.
그대로 숨을 고른 뒤 이현준과의 일을 겪고 한층 선명하게 실감했던 감정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이때까지 내가 바라던 미래 혹은 목표까지 다다를 수 있었던 건 동료들이 내 곁에서 나를 믿고 따라와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로 지금처럼 동료들이 나를 믿어 준다면 앞으로도 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생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동료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거야.
나는 문득 손아귀를 스쳐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을 가둘 것처럼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동료들을 차례대로 떠올리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공희찬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선택은 어디까지나 그의 몫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번 생에서 내 손으로 직접 선택한 동료에게 품었던 애착은 스스로 가늠했던 것 이상인 듯했다. 공희찬을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없을까. 그렇게 의문하는 순간…….
[미개방 스킬 ‘선택된 예언자’의 해금 조건을 일부 달성하였습니다. ] [미개방 스킬 ‘준비된 설계자’의 해금 조건을 일부 달성하였습니다. ]눈앞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