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움트는 시간 (2)
나는 활자가 흩어진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대로 머릿속에 부유하기 시작한 질문들을 정리하고자 같은 자리에 멈춰 있었다.
이 문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한참 전인 것 같은데.
미개방 스킬의 해금 조건을 일부 달성했다는 문구는 잊고 지낼 만하면 눈앞에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아마 리호에서 제공받은 무기를 손에 쥐었던 순간이었지. 그때 내가 추측한 스킬 해금 조건은 특정한 물건을 얻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혹시 그것 말고 또 다른 해금 조건이 존재하는 것일까?
문득 스스로 질문하면서 직전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나는 미래에서 벌어질 일을 바꾸기로 결심했고, 그 과정에서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직 그뿐, 특정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두 개의 메시지가 뜬 건 처음이야. 이것도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
현재의 나는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미래의 정보를 선점해 앞으로 벌어질 일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한쪽 눈가를 찡그리고 있으니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스쳐 지나갔다. 그 흐름을 따라서 회귀한 직후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시간 순서대로 복기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던전 멸절의 설산에서 최종 보스를 공략하던 순간이었다. 위기에 직면한 내가 떠올렸던 계책은 유스티티아의 검이 지닌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천칭의 심판을 떠올렸어.
이윽고 무의식적으로 발을 가볍게 들었다가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어두워진 상공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때 맞닥뜨렸던 시스템의 안내 문구가 눈앞에 떠오르는 듯했다.
천칭의 심판을 거행하기 위해선 특수 발동 조건을 달성해야 했었다. 그때도 멸망 직전에 내가 보았던 것처럼 나의 의지에 따른다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고.
나를 과거로 돌려보낸 존재가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가정은 예전부터 어렴풋하게 하고 있던 거였어. 그 존재가 나의 의지에 반응하는 것이라면 언젠가 그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 볼 수도 있을까?
더해서 미개방 스킬의 해금 조건을 전부 달성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내 안에서 새롭게 움을 틔우는 질문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인적 없이 드문 광장을 가로지르는 바람 속에서 연이어 떠오르는 의문을 차례차례 짚어 보았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묵묵하게 움직이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답을 찾게 되는 순간이 있을 거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그즈음에서 참았던 한숨을 허공에 흩뜨리자 하얀 입김이 퍼져 나갔다. 같은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던 나는 비로소 걸음을 틀었다.
* * *
다음 날, 문제혁의 병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날이 밝자마자 사무실로 출근했다. 한참 전에 컨디션을 온전히 회복한 문제혁은 병원에 머무르는 걸 부담스러워했으나 입원한 이유를 설명하자 나지막하게 탄식하면서 수긍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오래 입원하고 있는 건 너무 과한 처치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형이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니까 마음은 좋아. 고마워, 형.’
어떤 이유에서인지 문제혁이 병실을 나서던 나에게 했던 말이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말하던 문제혁의 얼굴을 떠올리면 내 주변으로 미묘한 온기가 감도는 듯했다. 나는 그대로 사무실 내부를 가로질러 회의실로 향했다.
“다들 바빠 보이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말했다. 그러자 한창 머리를 맞대고 일하고 있던 이들이 고개를 들더니 대강 손을 흔들면서 반겼다.
“어, 왔어?”
“엊그제 얘기했던 건 어떻게 되고 있어?”
고예성의 인사에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되묻자 금세 대답이 돌아왔다.
“몬순 전담 세무사랑 협의 마쳤고, 달해에서 보냈던 계약서 점검해 보니까 입원비의 나머지도 청구할 수 있을 듯해서 그쪽에도 얘기해 둔 상태야. 일단 알겠다고 했고, 오늘 오후에 다시 연락하겠대.”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고예성의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허리를 반쯤 수그린 채 태블릿 화면에 떠오른 자료를 차근차근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손목으로 눈길을 옮겨 시간을 살펴보았다.
지금쯤이면 던전 공략 팀도 한창 활보하고 있을 듯했다.
코트를 벗고 고예성의 옆자리에 앉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던 서류를 눈대중으로 훑어보았다.
던전 공략을 통해 생긴 소득을 정리한 회계 서류부터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까지 직접 점검해야 하니 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을 듯했다.
“우리도 신규 길드 승인 나면 세무사부터 찾아보자. 또 회계를 전담으로 맡아 줄 경영 직원도 구해 보는 게 좋겠어. 아직은 취우 쪽에서 도움받으면서 서류를 내가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어서 모두가 내 의견에 동의하는 것을 확인한 뒤 마저 서류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그나저나 사양 길드 사람들 만나러 가기 전에 따로 준비해야 할 건 없는 거야?”
고정인과 나란히 앉아서 눈앞에 놓인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던 김미솔이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던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음, 우선 사양의 마스터 정수희 헌터는 굉장히 깐깐한 사람이야. 우리를 직접 만나 본 다음에 우리와 협업을 할지 말지 결정하려는 것 같으니 이번 만남에서는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 주는 걸 목표로 삼으면 될 거야.”
잠시 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애란이 손샅에서 돌리던 펜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정수희 마스터는 사람 보는 안목이 굉장히 뛰어나. 사양이 지금처럼 커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런저런 이유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가세가 기울어진 작은 규모의 길드를 꾸준히 흡수했기 때문이라더라.”
모두의 이목을 모은 그녀는 동료들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저기서 사람을 데려오다 보니 각자 생각하는 길드의 운영 방식이 다른 건 물론이고 개개인의 가치관까지 확연하게 다른 데서 오는 문제들로 초반에는 잡음이 많았다고 해.”
그대로 서류에서 손길을 거둔 나는 자세를 고치면서 서애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게이트 시대 이전까지 촉망받는 검도 선수였고, 자신만의 고유 기술도 가지고 있었던 정수희 마스터는 길드원들에게 전투 상황에서 검을 주 무기로 활용할 것을 권고했어. 한 울타리 안에 있기는 하지만 심정적으로 흩어져 있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부터 흥미를 품고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대.”
계속해서 설명을 듣고 있으니 나도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잠시 기다리던 나는 그녀가 말문을 맺은 뒤 자연스레 덧붙였다.
“영리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해. 그 과정에서 검을 다루는 무사들의 충성심이 사양 내의 고유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됐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나는 사양이나 리호, 그리고 취우와 달해처럼 규모가 큰 길드들이 어떤 방식으로 성장했었는지 회상해 보았다. 과거의 나는 그들의 맞은편에 서 있었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들과 한층 가까운 위치에서 소통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들만큼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조만간 정수희를 만나게 되면 직접적인 조언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분명 배울 만한 게 있을 거야.
“정수희 마스터 말이야,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서 인터넷에 검색해 봤거든. 그런데 이 사람도 한마연 소장 박호재처럼 차정주 대학 동기래.”
서애란과 나의 대화를 잠자코 경청하면서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던 고예성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그것까지는 나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건 서애란도 마찬가지인지 고예성에게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손짓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 오래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찾은 거야. 너희 말대로 정수희 마스터가 길드원들한테 검술을 익히게 하고, 그렇게 해서 결속력을 높인 게 화제가 됐었나 봐. 아무튼, 차정주 이사장이 헌터 아카데미를 설립하려고 했을 때 정수희도 같은 뜻을 품고 도와주다가 어느 순간 손을 거뒀다고 하네?”
내가 기억하는 정수희는 공희찬의 아버지 공규호 의원만큼은 아니었으나 그녀 또한 이능청의 행보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이능청이 외부 길드에게 내린 권고 사항을 무시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사양에서 부대원으로 데려올 만한 인재와 접촉하려고 했을 때 정수희가 굉장히 분노했다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차정주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대학 동기라는 얘기는 또 처음 듣네.
나는 이어서 사양이 이능청 내부에 스파이를 파견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당시에 색출된 스파이들의 증언은 전부 일관되어 있었다. 차진명이 이능청장으로 재임한 이후 외부 길드를 향한 압박이 거세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이능청 내부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강효서를 비롯한 차진명의 측근들은 그 이유가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했지만, 차진명은 다른 이유를 알아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유스티티아의 검으로 그들을 척결해 버렸다. 마치 그런 일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지면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고개를 젓고 심호흡을 이어 나가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게이트 시대가 시작된 지 십오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여느 대규모 길드가 그러했던 것처럼 던전 관리 권한을 무작정 늘리는 방식으로 길드가 성장할 수 있었던 시절은 물러간 지 오래였다.
거기에 신규 길드를 창설하는 사람은 해마다 늘고 있고, 대규모 길드에서도 자신들이 바라는 훌륭한 인재를 영입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그동안 한도일에게서 한 길드를 이끄는 마스터로서의 마음가짐이나 행동거지에 관해 배웠다면, 정수희에게서는 전혀 다른 경계에 머물러 있던 낯선 사람들을 내 편으로 끌어오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만남을 기회로 단순히 던전을 관리하는 노하우만 배우는 데서 그칠 게 아니라 정수희가 나에게 흥미를 갖고 계속 지켜볼 수 있게 만들어야겠어.
그렇다면 정수희를 만났을 때 그녀가 우리에게 무엇을 물어볼지 예상해 두는 게 좋을 듯했다. 사실 전날 저녁, 내가 삼 주 뒤의 미래를 내다본 일도 사양 쪽에서 내가 했던 주장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즈음에서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낸 나는 고예성의 설명이 그친 뒤 입을 열었다.
“정수희 마스터가 우리를 직접 만나겠다고 한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을 거야. 내가 김수호 헌터를 통해서 전했던 것처럼 우리가 미래에 벌어질 재난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 진실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그쪽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걸 당장 무슨 수로 증명해? 아니면 해월이 너 혹시…….”
쥐고 있던 펜의 끄트머리를 내가 앉은 방향으로 느릿하게 기울여 보이던 김미솔이 말끝을 흐렸다.
“맞아. 그럴 줄 알고 미리 내다봤어. 대략 삼 주 정도 뒤에 우리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생길 거야.”
내가 곧바로 대답하자 이어서 고예성과 고정인이 말문을 열었다.
“삼 주 뒤? 그때는 우리 졸업식이잖아.”
“그러게? 범람도 그즈음부터 다시 운영한다면서. 아, 그럼 그것도 일부러 그랬던 거야?”
이윽고 고정인은 무언가 깨달은 듯 짤막하게 탄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긍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