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움트는 시간 (3)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문제혁의 퇴원일이 다가왔다. 전날 E급 던전 공략을 마무리한 뒤 휴식 중이었던 동료들도 선뜻 병원으로 찾아와 주었다. 그들에게도 사무실에 잔류한 동료들에게 전했던 것과 같은 계획을 설파하자 모두 선선히 눈을 빛내면서 수긍했다.
계획의 세부 사항은 다음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나와 문제혁은 병원을 나서는 길목에서 그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뒤 기숙사로 돌아왔다. 미묘하게 가벼운 걸음을 이끌고 들어서자 내부에 고여 있던 한기가 살갗을 휘감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춥네.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일단 씻고 나와.”
나는 곧장 벽면에 손끝을 짚어 보일러 온도를 높이면서 말했다. 현관에 우뚝 멈춘 채 안쪽을 둘러보던 문제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금세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차츰 얼음장 같던 벽면에도 훈기가 배어들 즈음 문제혁이 목덜미에 수건을 두른 채로 빠져나왔다. 정리를 마친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태블릿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할 말 있어?”
수건 끄트머리로 살갗에 남은 물기를 닦던 문제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턱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면서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뭔데?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연이어 묻던 문제혁은 전신 거울 쪽에 고개를 기울여 보더니 이내 나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부러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미솔 선배가 네가 생각보다 잘 쉬어서 그런지 볼이 통통해졌다고 했거든. 정말 그런가 싶어서 한번 본 거야.”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나의 말에 손끝으로 뺨을 짚어 보던 문제혁은 다시금 거울 앞으로 걸어가더니 조금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은근하게 맴도는 웃음기를 삼키면서 태블릿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형,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얘기해.”
“우리 익명으로 글 올린다고 했던 거, 내용은 어떻게 할지 정했어?”
금세 거울에서 물러난 문제혁이 맞은편 침대에 털썩 앉으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마른 입술을 달싹이면서 고민하던 나는 태블릿을 내려놓으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어렴풋하게 구상해 둔 정도야. 정확한 건 다른 사람들 의견도 들어 봐야 하겠지.”
문제혁은 한동안 회의나 던전 공략에 참여하지 못했던 탓인지 평소보다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잠시 허공을 보면서 고민하던 문제혁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렇구나. 나도 오는 길에 조금 생각해 봤는데, 처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을 전부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건 나도 동의해. 우리는 장기전을 생각하고 있는 만큼 처음부터 요란하게 예고하는 대신 추측할 만한 단서를 충분히 제공해 보자.”
문제혁의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그 말에 동의하는 건지 잠시 말이 없던 문제혁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아, 그리고 병원에 있을 때 선일이한테 들은 게 있거든. 형은 아직 못 들었지?”
나는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잊을 만하면 범람이 다시 열렸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얘기한다고 했어. 다른 선배들도 주위에서 비슷한 얘기를 종종 들었대. 그런 걸 보면 사람들도 범람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나 봐.”
그즈음에서 말문을 맺은 문제혁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종종 언급되는 걸 보면 사람들한테 범람 같은 창구가 꼭 필요했다는 뜻이겠지. 지금 계획하는 일도 잘 풀려서 학교 사람들뿐만 아니라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리를 잘 잡았으면 좋겠네.”
거기까지 들은 문제혁은 목덜미에 걸린 수건을 빼내면서 다시 질문했다.
“졸업식 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건 회의에서 마저 얘기하는 거지? 형이랑 선배들 졸업식 이후에 일이 생기는 거라면 행사가 끝나는 시간도 잘 계산해야겠네.”
“맞아. 그래도 졸업식이 진행되는 오전 시간 동안에는 잠잠할 거야. 자세한 건 회의에서 마저 나눠 보자.”
이미 머릿속으로 계획을 어느 정도 그려 둔 상태였으나 문제혁과 대화하면서 한층 구체적인 형태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서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문제혁이 나와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그와의 시간이 편안하고 익숙했다.
“그나저나 그날 현장을 수습하는 인원이 우리만 있어도 되는 걸까? 자칫 잘못 휘말렸다가 사람 목숨까지 위험해질 정도인데 지금 우리 인원만으로 감당이 될까 싶어서.”
이어서 문제혁은 내가 고민하고 있던 부분을 자연스럽게 짚어 냈다. 나와 동료들을 제외한 다른 인력을 어디서 충당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바로 한도일이었다.
“지금 우리 인원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거야. 그래도 걱정할 건 없어. 회의에서 계획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히면 한도일 마스터한테 바로 연락을 취할 생각이니까.”
“그렇구나.”
간결한 대답을 남긴 문제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쌓아 둔 짐을 들여다보았다. 곁에 둔 태블릿을 힐긋거리던 나는 게이트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벌어지는 일을 되짚어 보았다.
도심 한복판에 게이트가 발생하게 되면 근처에 있던 시민들에 의해 이능단속‧관리본부에 신고가 접수된다. 소식을 전달받은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는 사고 규모 파악이 완료되는 대로 소속 헌터를 파견하거나 외부 길드와의 협조 요청을 통해 선별한 헌터들을 현장에 보낸다.
이때 문제는 사고 현장 수습을 위해 헌터들을 파견하는 속도가 다소간 느린 감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용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각성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능청장으로 부임한 차진명은 승격을 기점으로 이능청에 배당되는 예산을 늘려 내부의 시스템 전체를 갈아엎었다. 그 과정에서 게이트 고아와 관련한 정책들도 여러 가지로 손을 보았고, 그 덕에 이능청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하게 되었다.
더하여 헌터 특수 정예 부대가 설립될 무렵에는 국익을 위해 움직이는 헌터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시민들에게 각인되면서 외부 길드에 대한 신뢰도는 점점 하락하게 된다.
전생의 흐름을 가만히 되짚어 보던 나는 그즈음에서 나지막한 조소를 터뜨렸다. 차정주가 각성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든 길드 세력에 손을 벌리지 않고 성장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미래를 계산하고 꿈꿨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와 긴 세월 뜻을 함께한 한국마력연구소의 소장 박호재가 떠오르고, 이어서 곧 만나게 될 정수희의 이름까지 떠올랐다. 정수희가 차정주와 대학 동기였다는 사실을 직접 밝힐 정도라면 과거의 두 사람에게 어느 정도 친분이 존재한다는 건데.
그 두 사람은 과연 어떤 사이였을까. 전생의 정수희가 사양 길드의 헌터를 부대원으로 데려가는 일을 한사코 반대한 것도 차정주의 행보와 관련이 있던 것이었을까.
슬그머니 의문이 고개를 들었으나 섣불리 단정할 만한 문제는 아니기에 금세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비워 두었던 방을 살피면서 돌아다니는 문제혁도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지 잠잠했다.
“사양 길드 사무실은 언제 다시 가기로 했어? 단체 채팅방에 올린 회의록에 자세한 내용이 안 적혀 있던 것 같아서.”
얼마 뒤 자신의 책상에 남은 먼지를 말끔하게 닦아 내던 문제혁이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쪽에서 아직 연락이 없네. 아마 마스터도 같이 만나는 자리라서 일정 조율이 필요한가 봐. 그래도 조만간 연락이 올 테니까 조금 더 기다려 봐야지.”
책상 앞에 비스듬한 자세로 서서 가만히 경청하던 문제혁은 다시 등을 보이더니 청소에 열중하다가 어느 순간 툭 던지듯 말했다.
“요새 자주 느끼는 건데, 형이 진짜 어른이 되어 가는 것 같아.”
문제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책상 안쪽에 비스듬하게 쓰러져 있던 교과서와 책을 바르게 세웠다. 순간 그 말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병원에서 쉬는 동안 문득 느꼈어. 사실 한도일 마스터를 만난다고 했을 때까지는 취우가 얼마나 큰 길드인지 실감이 잘 안 났거든. 그런데 이번에 사양의 정수희 마스터 얘기까지 들으니까 내가 다 긴장되고 두근거리더라고.”
그거야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심정적인 나이만 따져 보면 내가 문제혁보다 열 살이나 더 많았으니까.
“그래?”
이윽고 넌지시 웃으면서 대꾸하자 문제혁이 마저 이야기했다.
“사실 학교에 완전히 적응하기까지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서 힘들었거든. 특히 학교에 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난 앞으로 뭘 해 먹고 사나, 싶은 걱정이 제일 컸는데 이제는 그게 다 꿈 같아.”
그대로 돌아선 채 의자 등받이에 허리춤을 기댄 그가 창가를 내다보았다.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보는 눈동자에 빛이 스며드는 것을 보고 있으니 문제혁이 나에게 품은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몸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는 괜찮아졌다니 다행이다. 고생 많았어.”
그렇게 대답한 나는 문득 머릿속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공희찬의 이름이 떠올랐다. 마음을 다해 공희찬을 설득한다면 지금의 문제혁처럼 그도 나를 믿고 다시 따라와 줄까.
“이건 다른 얘긴데, 희찬 선배 있잖아.”
“아, 맞아. 희찬 선배는 아직도 연락 없는 거지? 아무튼 그 선배는 왜?”
나는 그의 질문에 얕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 선배는 우리가 길드를 결성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다시 합류하지 않겠다는 뜻도 밝힌 상태였어.”
문제혁은 차츰 표정을 굳히더니 사뭇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선배는 아버지 일을 돕고 있는 것 같더라. 본인은 그게 만족스럽다고 했지만, 내가 볼 때 그건 선배의 진심이 아닌 것 같아.”
“그게 무슨 뜻이야?”
그대로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날 보았던 공희찬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기이한 감정이 단순한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말문을 맺은 뒤에도 한참 생각하던 문제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만난 게 아니라서 말을 얹는 게 조심스럽기는 한데, 확실히 좀 이상한 것 같아. 희찬 선배가 계속 자책하는 어조로 말했다는 게 특히 걸려. 우리가 아는 선배는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다행히 문제혁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거기에 공희찬을 만나던 날 김미솔과 통화하면서 했던 말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공희찬이 앞으로 각성자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갈지도 모르겠다는 말까지 겹쳐서 생각해 보니 그를 다시 데려오고 싶다는 의지가 한층 확고해졌다.
“아무래도 희찬 선배를 다시 설득해 봐야겠어.”
“응,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다른 선배들이랑 선일이도 형 얘기 들으면 동의할 테니까 다음 회의에서 같이 얘기해 봐.”
“그럴게.”
이로써 한층 홀가분해진 나는 문제혁의 말에 긍정하면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와 대화하는 동안 쌓여 있던 연락을 살펴보고 있으니 김수호가 남겨 둔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사양의 김수호 헌터입니다. 소식이 늦었습니다. 이틀 뒤, 사양 길드 사무실에서 다시 뵙겠습니다.]공희찬을 설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보다 자세한 건 사양과 관련한 일부터 해결한 뒤에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