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움트는 시간 (4)
시간은 금세 흘러 정수희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회의실에 모여 있던 나와 동료들은 김수호가 알려 주었던 시간보다 일찌감치 출발했다.
마침내 사양 길드 사무실의 건물이 가까워질 무렵 유난히 긴장한 듯한 김미솔이 곁에서 한숨을 흩뜨렸다. 그 모습을 곁눈으로 살피던 나는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정수희 마스터가 우리를 직접 만나겠다고 한 건 자기 눈으로 판단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야. 그만큼 사양 쪽에서 우리와 관련한 사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나 봐.”
그러자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입술을 달싹이던 설연호가 동조했다.
“예전에 누나한테서 사양의 마스터에 대해 들은 적 있어. 정수희 마스터는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 절대로 없대. 오히려 훨씬 일찍 와서 상대를 기다린다고 하더라.”
나와 설연호를 차례로 바라보던 김미솔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깨를 곧게 폈다. 이어서 건물 입구에 다다르기 직전 잠시 걸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우리를 직접 만나 준다고 하니까 괜히 긴장되네. 그래도 다시없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침착하게 임해 볼게.”
그대로 호흡을 고르면서 가볍게 미소 짓던 김미솔이 사양 길드 건물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설연호와 잠시 시선을 나누던 나는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가다듬으면서 그녀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섰다.
잠시 뒤에는 직원의 안내를 따라 이동했다. 김수호를 만났던 카페보다 한 층 위쪽으로 이동해 복도를 거닐고 있으니 사양 특유의 압도적인 분위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감각이 한층 선명해졌다.
“이쪽으로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반듯한 정장 차림의 직원이 미팅용 회의실 쪽으로 안내한 뒤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그에게 가볍게 목례하고선 안쪽으로 들어서자 정수희와 김수호가 천천히 일어났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해 길드의 마스터 도해월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를 소개하는 건 처음이었다. 긴장되는 기색을 자연스레 감추고자 힘주어 발음하고 있으니 한 걸음 다가온 정수희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정주와 비슷한 연배의 정수희와 마주하자 오랫동안 신체를 단련한 사람 특유의 단단한 사지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녀와 손을 맞잡은 순간 엷게 미소를 짓는 얼굴에서 연륜이 배어 나왔다.
가지런하게 빗은 은빛 머리카락을 낮게 틀어 올려 고정한 그녀가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화답했다.
“반가워요. 정수희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소개를 끝으로 손을 놓은 정수희는 자리에 앉아 문간에서 대기하던 직원에게 눈짓했다. 곁에 있던 김수호는 설연호와 김미솔에게 차례로 악수한 뒤 나에게도 눈인사를 전하면서 그녀의 곁에 착석했다.
머지않아 우리를 안내한 직원이 도자기로 빚은 다구와 쟁반을 테이블 가운데 내려놓고 조용히 빠져나갔다. 내 곁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마른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김수호는 능숙한 자세로 차를 우렸다.
“도해월 마스터와 동행한 두 분에 관한 이야기는 한참 전에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향긋한 녹차 내음과 미지근한 열기가 내부에 번져 나갈 무렵 정수희가 김미솔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반사적으로 자세를 가다듬은 김미솔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가로질렀다.
“김미솔 헌터는 달해 길드의 스카우트를 거절했다죠? 그쪽 마스터에게도 금세 소식이 전해졌다는 걸 보면 상당히 아까운 인재였나 봅니다.”
김미솔은 말을 덧붙이는 대신 고개를 반쯤 수그렸다가 들면서 침묵으로 긍정했다. 정수희도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건지 더 묻지 않고 설연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설연호 헌터 또한 리호를 떠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결심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듯한데, 본인의 심정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반가운 사람의 안부를 묻듯 산뜻한 어조였으나 그 안에는 다층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게 느껴졌다. 설연호 또한 김미솔과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응수하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저에게 가장 합당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응까지 지켜보던 정수희의 얼굴에서 만족스러운 기색이 읽혔다. 기억하던 대로 정수희는 이런 상황에서 괜히 말을 바꾸거나 둘러대는 대신 솔직하게 반응하는 것을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쥐어 녹차를 한 모금 마신 정수희가 곁에 있던 김수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우리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일전에 제안해 주셨던 길드끼리의 상호 협업에 관한 건은 길드 내에서 심사숙고하여 상의했습니다.”
김수호의 말을 듣던 두 사람이 은근하게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담담한 기색을 유지하면서 김수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하면서 우리의 반응을 살피던 그가 뒤이어 말을 이었다.
“오래 고민한 끝에 사양에서는 도해 길드와 협업을 통해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동의하기로 했습니다. ”
그가 말문을 맺는 즉시 곁에 앉아 있던 두 사람과 곁눈으로 눈을 맞추면서 남몰래 기쁜 기색을 나눴다. 이내 자세를 가다듬은 나는 정수희와 김수호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신 데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맞은편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정수희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를 향해 시선을 두었던 김수호는 분위기를 살피다가 넌지시 말했다.
“오늘 두 분까지 이 자리에 모신 건 자세한 사항을 조율하기에 앞서 두 길드 사이의 협업 관계에 대한 사항을 한층 상세하게 나눠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 두 분께서는 자리를 이동하셔서 저와 이야기를 마저 나눠 주시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있던 김미솔이 나를 곁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설연호는 앉은 자리에서 뒤척이면서 일어날 채비를 하는 듯했다.
“도해월 마스터는 여기 남아서 저와 마저 이야기하시죠.”
어느새 미지근해진 찻잔을 아랫입술에 대고 기울이던 정수희가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김미솔과 설연호에게 잘 부탁한다는 뜻을 담아 가볍게 눈짓했다.
* * *
정수희와 둘만 남은 회의실 내부에 한참 동안 고요가 이어졌다. 그사이 직원을 소환해 찻물을 다시 우린 정수희는 하얗게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입을 뗐다.
“도해월 마스터가 예사롭지 않은 인재라는 건 김수호 헌터를 통해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몸가짐이나 분위기만 보면 또래의 헌터와 사뭇 다르다는 게 느껴지네요. 다른 곳에서 한참 동안 경력을 쌓은 듯한 느낌도 얼핏 들 정도입니다.”
곧이곧대로 듣는다면 나를 칭찬하는 것이겠으나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닐 터였다.
“과찬이십니다.”
그녀의 말에 간결하게 대꾸한 뒤 찻잔으로 손끝으로 감쌌다. 이윽고 살갗에 열기가 흡수되는 것을 느끼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김수호 헌터를 통해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건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정수희 또한 이현준과 같은 질문을 건네고 있었으나 분위기는 그때와 확연히 달랐다. 잠시 대답을 고민하던 나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건 앞으로의 행보를 통해 알게 되실 겁니다. 도해와의 협업을 약속해 주신 일을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믿고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자신감이 상당한가 보네요. 그런 감정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곧바로 되묻는 말에 비꼬는 의도는 읽히지 않았다. 그저 순전히 궁금해서 묻는 듯했다. 나는 그녀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고민하면서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유능한 동료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자신감의 근원 또한 거기서 비롯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턱을 한차례 까딱이던 정수희가 자신의 손을 깍지로 얽었다. 이어 자연스럽게 스트레칭을 하는 것처럼 손목을 양옆으로 꺾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김수호 헌터에게 두고두고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김수호 헌터가 먼저 관심을 품고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도해월 마스터와 다른 두 헌터가 이곳까지 발을 들이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예의 그 나긋하고 온화한 어조는 여전했으나 그녀의 말마디마다 잘 벼린 날을 품고 있다는 감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길드가 사양에게 협업을 제안하는 용기는 충분히 가치 있지만, 그 제안에 사양이 응답할 의무는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몰아붙이는 말에서 확신했다. 정수희는 지금 나에게 일종의 대련을 청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듣던 대로 그녀는 맞은편에 선 상대를 얕잡아 보지 않고 진심으로 임하고 있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와 직접 대거리하겠다는 뜻을 전해 주신 건 저희 길드에게 사양에서 예상한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로 지금부터는 말씀하셨던 의무에 대해서 논하기보다 앞으로 사양과 도해의 협업에 대해 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 말을 끝으로 달리 대답하지 않은 정수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내 소리 없이 웃음 짓던 정수희가 찻잔으로 시선을 낮추었다.
“모쪼록 나머지 두 헌터를 먼저 내보낸 건 도해월 마스터에게 따로 묻고 싶었던 것이 있어서였습니다.”
“얼마든지 질의하셔도 괜찮습니다.”
내 대답을 듣고도 한참 잠잠하던 정수희는 검지로 찻잔의 테두리를 가볍게 훔친 뒤 느긋하게 고개를 들었다.
“몇 달 전, 도해월 마스터가 차정주 이사장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사장님께서 제안하기 한참 전부터 제 손으로 길드를 세우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한참 전부터 저를 믿고 모여 있던 동료들을 두고 돌아설 수 없었거든요.”
차정주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부터 정수희의 눈빛이 이전과 사뭇 달라졌다. 곧바로 대답하는 말을 듣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던 그녀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드는 건 그저 내 착각일까요? 아니면 기분 탓이라던가?”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희미한 미소로 응수했다. 오랜 시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 왔고, 더불어 감이 유난히 좋은 정수희는 내가 통과해 온 긴 세월의 그림자를 어렴풋하게 감지하고 있는 듯했다.
“이번에도 대답할 생각이 없나 보군요. 좋습니다.”
똑똑―
이어서 내가 무어라 대답하려던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