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개학
정수희와의 만남 이후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동안 여러 번의 회의를 거치고 계획의 윤곽이 뚜렷해졌을 무렵 개학 날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마주한 정건후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방학이 지나면서 학생들은 지난 학기에 있었던 일을 차츰 잊어 가는 듯했다.
그날 회의실의 문을 두드린 건 정수희의 비서였다. 다음 일정으로 인해 더는 머물지 못하게 된 정수희는 간단한 인사를 남긴 뒤 모습을 감췄다.
김수호와 다른 두 사람의 협상 또한 수월하게 마무리되었다. 예측했던 대로 정수희는 나와 동료들을 직접 판별하기 위해 불러낸 듯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대화가 마무리되기 직전, 정수희가 그늘에 감춰 두었던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수희가 했던 이야기 중 가장 걸리는 것을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드는 건 그저 내 착각일까요? 아니면 기분 탓이라던가?’
명백하게 내 의중을 떠보는 말이었다. 차정주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내가 거론한 것 외에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기반에 두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내 가만히 눈을 감고 전생의 사양이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떠올려 보았다. 전생의 나는 사양과 이능청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차정주와 정수희가 대학 동기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무엇보다 부대가 설립된 이후 대다수의 대규모 길드가 이능청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사양 또한 그들과 비슷하리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수희는 이번 생에서 새롭게 발견한 변수였다. 정수희와 차정주는 어떤 관계였을까. 어쩌면 전생의 사양이 이능청에 스파이를 파견한 것도 그 두 사람의 관계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었을까.
당장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으나 김수호에게 협업을 제안할 때까지만 해도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이라는 걸 고려하면 나름의 수확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즈음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꼬리가 긴 바람이 교문을 관통했다. 전날 밤까지 내리던 진눈깨비가 그쳐서인지 물가에 불어오는 것처럼 선선했다. 나는 머릿속이 한층 맑아진 상태로 고요한 교정을 돌아보았다.
십여 년 전, 이곳에 터를 잡고 헌터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로 결심한 차정주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곁에 머무르는 한국마력연구소의 소장 박호재를 떠올렸다. 그 또한 차정주와 대학 동기였으니 어쩌면 정수희와도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 또한 아직은 가정일 뿐이니 잠시 제쳐 두는 게 좋겠어.
졸업식 날에 벌어질 일을 대비하여 회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차진명의 행적을 따라가기 위해선 차정주에 대한 이해 또한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지내면 지낼수록 전생의 내가 알지 못했던 비밀이 더 많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깨닫고 있었다.
지잉―
그 순간 주머니에 보관해 두었던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느지막하게 꺼내 살펴보니 고정인이 남겨 둔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범람의 운영을 재개하기 위한 서버 안정화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내용이었다.
개학을 며칠 앞두었을 무렵 나와 동료들은 몇 번의 회의를 걸친 끝에 안정화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범람의 운영을 재개하자는 쪽으로 계획을 변동했다. 마침내 작업이 마무리되었으니 오늘 밤에는 링크를 다시 배포할 수 있을 듯했다.
그리하여 결정된 시간이 오후 열 시 삼십 분이었다. 한창 운영할 당시 접속자가 급증한 시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졸업식 전까지 여유를 두고 사람들의 반응을 꾸준히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서애란의 의견을 반영했다.
나는 고정인에게 고생했다는 말과 간단한 지시를 메시지로 전달한 뒤 한참 맴돌던 걸음을 멈추고 학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개학식을 마친 뒤에도 이곳에 남아 주위를 거닐던 건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였다.
신촌에서 벌어질 게이트 사고는 용산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뻔했던 사태와 달리 고의성 없이 순전히 우연에 의해 발생한 일이었다. 고로 졸업식 당일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터였다.
그때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 순간 천칭의 심판을 통해 모두를 구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도움 없이 나와 동료들만의 능력으로 일을 해결해 볼 생각이었다. 이윽고 숨을 고른 뒤 눈을 감고 스킬을 전개했다.
* 사용자가 지정한 ‘천리안’ 스킬이 발동됩니다.]
그 순간 오감이 열리면서 물기 어린 바람이 걷히더니 시간의 행렬만이 전신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간지럽히면서 지나치는 바람을 매만지듯 손끝을 접었다가 펼치면서 호흡을 골랐다. 이어서 숨을 들이마시려는 순간 잦아든 바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까지 수백, 수천 가지의 미래의 장면이 들이닥치던 것과 달리 눈앞은 한없이 평화롭고 잠잠하기만 했다. 나는 인적이 사라진 교정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대로 교문을 넘어선 뒤 주변을 둘러보면서 졸업식 당일의 동선을 구상해 보았다. 외부 인사들과 학생들의 가족들까지 몰려든 상황에서 조용히 빠져나가는 것을 목표로 머릿속에 설계를 그려 나갔다.
계속해서 걸어 나가던 걸음을 우뚝 멈춘 건 본관과 별관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였다. 쉴 새 없이 들이닥치던 미래의 장면들 중에서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가만 보니 공희찬이 이쯤에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졸업식에 오려는 건가?
의아해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졸업식이 진행될 예정인 강당의 입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스킬이 보여 준 미래에서 공희찬은 여기에 가만히 서서 강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번 만남과 달리 혼자 있는 것을 보니 몰래 빠져나온 것은 아닐까 싶은데.
연이어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 넘긴 나는 휴대전화를 다시 꺼내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공희찬에게 안부를 묻는 문자를 몇 번 보냈으나 확인조차 하지 않던 그였기에 방금 내다본 미래는 나로서도 의아하게 느껴졌다.
내 문자는 본 척도 안 하는 것 같더니. 모르긴 몰라도 아쉽긴 했나 보네.
공희찬의 성격이나 그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건 이제 나도 잘 아는 것이었다. 그날 공희찬이 학교에 나타난 건 분명 나와 동료들을 지켜보기 위함이었을 테다. 거기에 자신의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으니 겸사겸사 아쉬움을 해소하려는 목적인 듯했다.
이 또한 나에게는 새로운 변수로 다가왔다.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문을 끈질기게 두드린 보람이 생겼으니 계획을 조금 수정해도 좋을 듯했다. 공희찬이 우리의 계획에 가담하게 된다면 그동안 잊었던 생활에 대한 갈망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왜 거기 그러고 서 있어. 졸업식을 코앞에 두고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그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자리에는 손 하나를 휘적거리는 정건후가 서 있었다. 그는 다시 손끝을 주머니에 밀어 넣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그를 보며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들곤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직 퇴근 안 하셨나 보네요.”
“이제 막 퇴근하려고 했는데, 누가 교무실 창문 밖으로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서 있길래 잠깐 내려와 봤다. 괜찮으면 잠깐 가서 얘기나 좀 할까.”
그렇게 대꾸한 그는 내 어깨 너머로 우뚝 선 별관을 턱짓으로 가리켜 보았다.
* * *
정건후와 동아리실에서 대거리하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의 일인지 모르겠네. 어느새 사소한 기억은 희미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실감하던 나는 내부를 거닐던 정건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벽면에 부착된 단체 사진 앞에 멈춰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는 한도일 마스터를 통해 틈틈이 전해 들었다. 상당히 부지런하게 보냈더군.”
어느새 모서리가 조금씩 바래기 시작한 사진에서 눈을 거둔 그가 툭 던지듯 말했다. 나는 그와 서너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서 있다가 입꼬리만 올려 웃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지는 못해도 너희가 평탄한 길을 갈 생각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진작 알아챘다. 뭐, 정확한 때를 가리자면 던전에서 검을 가져왔다고 고백하던 순간부터였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린 정건후가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모쪼록 졸업한 뒤에도 도움이 필요해지면 언제든 얘기해라. 너의 선생님으로서 그냥 두기에는 내 마음도 편치 않을 테니까. 그리고 또……. 방학 동안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
“네,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의 어조만으로도 내게 묻는 말에 숨겨진 함의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먼저 대답한 뒤 한동안 잊은 듯이 지냈던 성물의 존재를 떠올렸다. 강준희가 우리를 떠나간 뒤 그가 성물의 존재를 발설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했으나 아직은 잠잠한 상태였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고로 신규 길드 창설이 완료된 이후에는 언제 나타나게 될지 모를 성물 사냥꾼을 항상 경계해야 할 테다.
“성물 사냥꾼이 자취를 감춘 지 십 년이 넘었다고 해서 안심하긴 일러. 그놈들은 목표물이 생기면 언제라도 다시 뭉칠 수 있는 집단이라는 걸 늘 염두에 두도록 해.”
그 부분에 대해선 정건후도 나와 같은 생각 중인 듯했다. 당연한 사실이었기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다.
정건후는 게니우스의 창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취우의 전 마스터가 그 창을 소지했다는 사실 외에 그가 무엇을 더 알고 있을지 묻고 싶어졌다. 학교에서 역사 과목을 가르칠 정도라면 어느 정도 지식을 소유하고 있을 듯한데.
2014년에 도난당한 게니우스의 창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행방이 오리무중에 빠진 상태였다. 전생에서도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그 창의 존재를 찾아낸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서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스스로 묻는 동시에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정수희와 차정주의 관계부터 행방을 알 수 없는 게니우스의 창까지. 생각지도 못한 변수를 계속해서 맞닥뜨리는 탓에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나한테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물어봐라. 졸업한 이후에도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자주 왕래하지는 못할 거다.”
어느새 몸을 비스듬하게 틀고 나를 바라보던 정건후가 말했다. 그의 말투나 표정을 보아하니 말마따나 졸업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일부러 장소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한 듯했다.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지. 잠시 시선을 틀고 창밖을 내다보면서 시간을 가늠한 뒤 회의용 테이블로 다가가 정건후에게 자리를 권했다.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 얘기해.”
“2014년에 사라진 게니우스의 창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어느새 내 맞은편에 앉은 그를 바라보면서 발화한 뒤 반응을 살폈다. 지금까지는 그의 괴로운 기억을 부러 헤집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묻지 않았으나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었다. 정건후도 그 사실을 아는 건지 생각보다 담담한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