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잃어버린 조각 (1)
졸업식 날을 맞이한 교정은 여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어느새 겨울도 끝자락에 다다르면서 미지근하거나 서늘한 공기가 번갈아 교정을 감돌았다.
걸음을 옮기는 길목마다 꽃다발 포장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웃는 소리 같은 것들이 한데 얽혀 들었다.
본관 건물로 곧장 이어지는 길목의 오른편 잔디밭에서는 졸업 가운을 차려입고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는 이들로 북적였다. 그쪽으로 잠시 시선을 두었던 나는 이내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의 액정을 내려다보면서 범람에 올라오는 게시물을 확인했다.
[아니 오늘 그래서 ㄴㄱ오는데] [졸업식 귀빈 명단 확보함 (어그로 ㄴ)] [근데이사장 오는거맞긴함? 안믿기는데] [그 어제 뭐 올라온 건 어케됨? 사고날거라는데 실화임?]지난 새벽, 오늘 발생할 게이트 사고를 암시하는 게시물을 올렸으나 반응은 미미한 수준에 그친 상태였다. 일 분 내에 게시물을 삭제했음에도 금세 화면을 캡처한 이들에 의해 몇 번씩 언급되기는 했으나 학생들의 관심은 오늘 졸업식에 참석할 외부 인사들에게 몰려 있었다.
잠시 뒤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거둔 나는 반대편으로 이어진 주차장 입구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머지않아 입구를 지나쳐 들어서는 고급 세단 행렬이 눈에 띄었다.
―다들 내 목소리 잘 들려?
이윽고 귓가에서 고정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오의 볕에 눈이 부신 나머지 펼친 손등을 이마에 비스듬하게 얹은 채로 검게 물든 차창을 들여다보던 참이었다.
―네, 잘 들려요.
―나도 괜찮아.
―잘 들려. 원하도 괜찮대.
―여기는 사람이 많아서 내가 대신 대답할게. 이제 건물 근처 배회하면서 상황 지켜보려고. 미솔이랑 선일이 둘 다 잘 들린대.
연이어 전하는 동료들의 음성이 귓가를 스치고 마지막으로 소식을 전한 건 설연호였다. 세 사람은 일찍이 사고 발생 지점 근처를 지켜보면서 계획했던 것 외의 변수가 없는지 살피고 있을 터였다.
“지금부터 한 시간 사십 분 뒤에 사고가 발생할 거야. 오늘 동선은 다들 숙지했지. 마지막으로 보고할 사항 있으면 지금 얘기해.”
나는 보폭을 넓힌 채 느긋하게 교정을 활보하다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기숙사 건물 근처까지 이동한 뒤 주차장이 잘 보이는 길목에 서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외부 인사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난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저도 딱히 없어요. 범람 반응은 어때요?
말을 끝맺는 즉시 홍원하의 목소리가 먼저 들리더니 뒤이어 문제혁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자 고정인이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마우스를 부산스레 움직이는 소음이 함께 들려왔다.
―어제랑 크게 다를 건 없는 것 같아. 이용자 평균 연령대가 높아지니까 확실히 학생들보다 어른들의 이용 빈도가 압도적으로 늘어났어. 게시판을 미리 분리해 두길 잘한 것 같아.
고정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던 나는 대답하는 대신 주차장에서 시선을 거두고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강당으로 집합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또 두 게시판 다 어제처럼 차정주 이사장이 오늘 졸업식에 나타난다는 얘기랑 외부 인사로 누가 오는지 추측하는 글이 대부분이야. 간혹 어제 우리가 올린 글 내용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사장 얘기가 워낙 많아서 댓글이 얼마 없어.
“이따 행사가 시작되면 게시물 빈도를 조정해서 우리가 올린 글이 주목받을 수 있게 분위기를 몰아 줘. 공포를 느낄 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경각심은 가질 수 있게.”
스킬을 통해 예측했던 대로 졸업식에 차정주가 나타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범람에는 그와 관련한 이야기만 만연하게 퍼진 상태였다.
동시에 그간 헌터 아카데미의 숱한 행사 자리에 참석한 적 없던 그가 나타난다는 소식과 함께 한 가지 가설이 기정사실화되었다. 그건 바로 차정주가 내년 총선에 출마하리라는 것이었다.
―나 지금 강당에 미리 들어와서 대기 중인데, 애들 얘기하는 거 들어 보니까 이번에 외부 인사들이 꽤 많이 찾아오나 봐. 평범한 학생들 졸업식에 이관부 고위직이랑 한마연 관계자가 쫓아오다니. 별 희한한 광경을 다 본다, 정말.
홍원하는 중얼거리듯 전하면서 질린다는 목소리를 냈다. 나는 이미 두 번째로 맞닥뜨리는 풍경이기에 그다지 놀라울 건 없었다.
“그 사람들 다 우리 말고 차정주 이사장 때문에 온 거야. 공식 석상에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양반이 학교에 나타났다고 하니 다들 얼굴이라도 한번 비추고 굽신거리고 가겠지.”
그때 졸업 가운을 차려입은 학생 무리가 내 곁을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반쯤 숙인 채 홍원하에게 대답했다. 뒤이어 지선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듣기로는 그 사람들이 공로상부터 해서 이런저런 상 받는 학생들 앞으로 장학금을 잔뜩 걸고 갔다고 그랬어요. 교장 선생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외부 인사로 받아 준 것 같아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세를 곧게 세운 나는 강당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지시 사항을 점검한 뒤 귓가에 손을 짚으면서 말했다.
“행사가 시작된 뒤에는 지시 사항을 전달하기 어려울 거야. 어제까지 계속 점검했던 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만 하면 돼.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변수는 언제든 생길 수 있으니 그런 경우에는 나한테 바로 알려 줘.”
동료들에게 마지막으로 지시하고서 보폭을 넓힌 채 별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번 계획에서 나는 학교에 남은 동료들이 전부 이동한 뒤에도 조금 더 잔류할 예정이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십오 분 정도 지나면 공희찬이 이쪽에 모습을 드러내겠지.
나는 공희찬이 서 있었던 지점에서 걸음을 우뚝 멈췄다. 오늘 계획의 주요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촌 게이트 사고에서 중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게 된 대학생과 여타 부상자들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해월이는 희찬이랑 같이 합류하는 것 맞지? 당장 오늘 아침에 마음이 바뀌었으면 어쩌나 싶어서. 이번 계획에서 희찬이가 반드시 활약해 줘야 한다며.
설연호의 말대로 공희찬과 함께 사고 현장이자 도해 길드의 첫 임무 지점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가 한동안 만나지 않았던 동료들까지 마주치고 나면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노린 작전이었다.
“희찬 선배는 예상했던 대로 졸업생 대표 시상이 진행될 즈음에 나타날 거야. 내가 내다봤던 미래 중에서 그 선배가 나타나지 않는 미래는 없었어. 그동안 내가 보낸 문자에 답장은 없었지만 마음은 계속 흔들렸나 봐.”
그 말을 끝으로 별관 근처에서 걸음을 옮겨 강당으로 향했다. 공희찬을 직접 맞닥뜨린 뒤 설득할 생각을 하니 입술이 자꾸 말라 가는 듯해 호흡을 길게 가다듬었다.
그것도 그렇고 방학 동안 자금도 어느 정도 모였으니 장비부터 새로 들여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귓가에 손을 짚어 블루투스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때까지 길드의 살림을 빠듯하게 꾸린 나머지 아직도 이런 초라한 행색이었으나 이제 슬슬 바꿀 때가 되었다.
부대에서 쓰던 것만큼은 아니어도 발품을 팔다 보면 쓸 만한 게 나오겠지.
더하여 마련해야 하는 것이 동료들의 스탯을 보완할 만한 무기와 아티팩트였다. 그 외 던전을 공략하거나 관리 및 점검 목적으로 입장할 때 소지하고 들어갈 물품도 준비해 두어야 했다. 다른 길드한테 인수 합병을 제안하더라도 손색이 없게 해야겠지.
나는 어느새 고요해진 교정을 느릿하게 가로지르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한국마력연구소에 대한 정보는 서애란이 알아봐 주기로 했다. 위험한 물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보가 쌓인 뒤에 알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나와 설연호, 김미솔은 당분간 다른 길드 사람들을 만나러 다녀야 할 테니 동료들에게 배당할 아티팩트와 무기와 관련한 정보는 고예성과 홍원하에게 맡기는 게 적합할 듯했다.
마지막으로 문제혁과 지선일은 일 년 더 학생 신분으로 지내야 하니 학업에 좀 더 열중할 수 있도록 조치할 생각이었다. 때에 따라 정건후나 학교와 관련한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면 그때 지시하면 될 터였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때 강당 근처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과 그를 보좌하는 젊은 남성이 강당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아, 이관부 사람이구나.
방금 지나친 중년 남성은 전생에서 업무적으로 맞닥뜨린 적 있는 인물이었다. 이능청으로 승격한 뒤 고위직으로 진급했던 걸 생각하면 아마 이맘때부터 차정주에게 빌붙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한 듯했다.
새해를 맞이한 지 두 달이 되면서 총선 또한 한 해 남짓한 시간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동안 길드의 몸집을 불리고 원활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한도일의 조언대로 이능단속‧관리본부에 인맥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터였다.
그즈음에서 마지막 조원 중 하나였던 안지유의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 생에서 그녀는 이능단속‧관리본부에 입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전생의 이능청에서 7급 행정 공무원으로 지내던 안지유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안녕. 오랜만이네.”
안지유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으니 생전 마지막 모습이 그려지는 탓에 눈가를 찡그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불쑥 나타난 안지유가 기억 속의 모습과 달리 앳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왜 아직 여기 있어? 졸업식 이미 시작했는데.”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넌 왜 안 들어가고 여기 서 있어? 홍원하랑 고예성은 한참 전에 들어간 것 아니야?”
안지유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평소라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겠지만, 오늘 그 두 사람은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그 곰돌이는 또 뭐야. 너한테 그런 아기자기한 취향이 있는 줄 몰랐네.”
고개를 반쯤 기울이며 의문하던 것도 잠시였다.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대로 눈길을 떨구자 내내 쥐고 있던 아이보리색 곰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인형 주제에 졸업 가운을 입고 학사모까지 쓰고 있는 이 녀석은 홍원하가 졸업 기념이라며 쥐여 주고 간 것이었다.
“살살 쥐어. 그러다 터지겠다.”
다시 나와 눈을 마주치던 안지유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손등에 핏줄이 불거질 만큼 힘껏 움켰던 인형을 느슨하게 고쳐 잡았다.
“아직도 안 들어가고 버틴 걸 보면 피차 비슷한 사정인 것 같은데. 교장 선생님 훈화 끝나면 그때 들어가는 게 어때.”
나는 교장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면서 새어 나오는 강당 건물을 턱짓해 보였다. 그러자 안지유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개학하고 나서 범람도 다시 열렸던데. 너도 봤어?”
“봤어.”
“운영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작정한 것 같더라. 이용하는 사람도 훨씬 많아진 것 같던데. 아, 그러면 그것도 봤어? 오늘 신촌에서 게이트 사고가 있을 거래.”
졸업 가운을 차려입은 안지유가 주머니에 손을 꽂으면서 말했다.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던 나는 마지막 말에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그건 못 봤어.”
태연하게 대꾸했으나 마주 보고 서 있는 안지유의 얼굴에 미묘한 기색이 스치는 듯했다. 아직 나랑 서애란을 의심하는 건가?
“그나저나 졸업 가운도 안 입었네? 이따 사진 안 찍고 바로 가려고?”
이건 또 뭐지. 범람에 익명으로 사고를 예견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아, 집에 바로 갈 거냐고 물어본 거야. 지난번에 같은 조로 실습 뛰면서 보니까 넌 사람들 많은 장소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안지유는 천리안 스킬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상태이니 그렇게 짐작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다른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면서 입을 열었다.
“시간 되면 사진 정도는 찍을 수 있겠지. 그나저나 졸업하면 더는 못 보겠네.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결정했어?”
그녀와 맞닥뜨린 순간부터 미묘하게 가라앉은 공기 탓일까. 그 질문을 기점으로 나와 안지유 사이의 분위기가 한층 팽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