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잃어버린 조각 (2)
안지유와 대화를 마치고 들어선 강당 내부에는 전교 회장의 말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학사모와 가운을 착용한 그녀는 헌터 아카데미의 연혁을 나긋한 어조로 읽어 내렸다.
그녀와 같은 차림의 졸업생들이 일렬로 서 있는 행렬을 크게 훑어보다가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겨 적당한 자리를 찾아 섰다.
잠시 뒤 조용히 나타난 안지유가 대열의 뒤쪽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졸업 가운의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뒤 무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상으로 2027학년도 헌터 아카데미 학사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졸업생들에게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안지유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울리는 전교 회장의 음성을 따라서 고개를 틀었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는 순간 강당 입구에서 나눴던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적당한 자리를 찾으려고 계속 지켜보고 있어. 때가 되면 움직이겠지?’
그건 앞으로의 행보를 묻는 말에 안지유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어째서 이능단속․관리본부에 입사하지 않느냐고 다시 질문했으나 이번에도 그녀는 모호한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안지유와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면 거슬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전생의 이맘때는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는데.
정수희를 이어 안지유까지 예상치 못한 변수로 부상했다. 생각지 못한 변수들의 등장에 괜히 골치가 지끈거렸다.
“도해월.”
그때 누군가 낮은 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느새 눈앞까지 성큼 다가온 정건후는 졸업 가운을 내게 내밀면서 무대를 턱짓했다.
“곧 있으면 공로상 시상이 시작될 거다. 가서 대기해.”
“네, 감사합니다.”
상념이 길어진 나머지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나는 정건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인형을 교복 재킷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고 가운을 착용했다.
정건후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별다른 대답 없이 나를 이끌고 무대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시상자들 사이에 섞여서 숨을 고르고 있을 즈음 전교 회장이 단상에 고정된 마이크를 느슨하게 붙잡고 목소리를 냈다.
“지금부터 공로상 시상을 진행하겠습니다. 졸업생 대표 도해월 학생은 무대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사고까지 얼마나 남았지. 손끝을 말았다가 펼치면서 시간을 계산한 뒤 지시를 따라 무대에 올라갔다. 환한 조명이 쏟아지는 길목을 가로지르는 동안 귀빈석에 앉은 차정주와 다른 인물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시상을 맡은 교장은 나에게 상장과 꽃다발을 내민 뒤 악수를 권했다. 나는 온기 어린 격려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교장의 어깨 너머로 귀빈석을 넘겨다보았다.
그중 길드와 관련된 인물은 리호 길드의 설연진뿐이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언짢은 기색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해월 학생은 그대로 뒤를 돌아서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전교 회장의 음성을 따라서 표정을 가다듬고 뒤를 돌았다. 이 자리에 서서 환한 빛과 대비되는 어둑한 전경을 내다보는 일이 몇 번째인지.
이제는 수를 세는 것 자체가 무용해졌으나 이 또한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감회는 새로웠다.
이윽고 열화와 같은 박수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서는 곧 학교에 나타날 공희찬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 * *
예상대로 공희찬은 별관 근처에서 서서 강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쾌청한 하늘을 배경 삼아 혼자 서 있던 그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나를 발견한 순간 움찔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 뭐, 뭐냐? 네가 왜 여기 있어?”
“오랜만이야, 선배.”
나는 한달음에 달려오느라 숨이 조금 차오른 상태로 공희찬에게 손을 휘적이면서 대꾸했다.
“야, 오늘 내가 여기 온 건 그냥, 음. 그냥 지나가다가 온 거야.”
믿기지도 않는 변명을 내놓으면서 횡설수설하던 공희찬은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쪽으로 가면 주차장이야. 졸업까지 했으면서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건 아닐 테고.”
잔뜩 당황한 공희찬이 성큼성큼 걷는 사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착용했다. 잠시 잡음이 들리더니 김미솔의 음성이 들려 왔다.
―사고 발생 시간까지 이십 분 정도 남았어. 학교에 남은 사람들도 이제 넘어오는 거지?
―응, 해월이 빼고 다 나왔어. 그쪽으로 얼른 넘어갈게.
공희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거리면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소리로 지시했다.
“이쪽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게이트가 열리면 계획했던 대로 먼저 움직이고 있어. 우리는 나중에 합류할게.”
―방금 취우 소속 헌터들이랑도 합의 끝냈어.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오늘은 우리 계획대로 움직이고, 그쪽에서는 보조로 받쳐 줄 거래.
나는 마지막으로 이어진 설연호의 대답에 간결하게 대답하고 잠시 음 소거로 처리했다. 사고 발생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손이 차갑게 식어 갔다. 나는 식은 손을 말아 쥐면서 공희찬의 뒤를 따라갔다.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한 공희찬은 주차장 가운데서 뒤를 돌아 서 있는 상태였다. 감정이 북받친 건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불규칙하게 들썩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배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있어. 잠깐 얘기 좀 해.”
“난 할 말 없어. 아까도 얘기했던 것처럼 여기까지 온 건 우연이야. 그래도 마주쳤으니 인사는 하는 게 예의겠지. 그럼 간다.”
이내 고개를 두어 번 저은 공희찬이 나를 돌아보면서 빠른 속도로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십 분 뒤에 신촌에서 게이트가 열릴 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 사고를 수습하고 인명 피해를 막을 생각이고.”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데?”
공희찬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그의 자의식이 매끄럽고 단단한 대리석 같다고 느꼈었다. 그리고 나와 함께하려면 그 오만을 꺾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었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난 너희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관심 없어.”
그건 공희찬이 내세울 수 있는 방어 기제일 뿐이라는 걸 이젠 안다. 그 아래 어떤 열망과 결핍이 숨겨져 있는지도.
“이왕 마주친 김에 말하는 건데, 이제 문자도 그만 보내. 헌터인지 뭔지 그 지긋지긋하고 좆같은 거, 다신 안 할 거니까.”
방금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공희찬은 오늘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잠시 눈을 감았다.
[사용자가 지정한 ‘설계’ 스킬이 발동됩니다.]이윽고 얕은 바람이 불거지더니 맞은편에 서 있던 공희찬의 머리카락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너, 너 이게 지금 무슨 짓…….”
말을 다 맺지 못한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전개되는 미래의 모습을 읽는 건지 눈동자를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펼쳐지고 있는 건 그가 작전의 중심이 되어 사고를 막아 내는 미래였다.
“난 선배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잘 모르지만, 지난번에 만났던 선배도 지금 마주친 선배도 지금 처한 상황에 진심으로 만족하고 있진 않다고 생각했어.”
나는 허공을 멀거니 응시하는 공희찬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담담한 나와 달리 그의 눈동자에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다시 돌아오라고 했던 내 제안은 여전히 유효해. 방금 내가 보여 준 미래가 선배가 진정으로 바라던 미래와 조금이라도 근접해 있다면 나랑 같이 가자.”
공희찬은 힘껏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이따위 허접한 장단에 맞춰 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이라고.”
금세 판단을 마친 공희찬은 이내 나를 지나쳐 자신의 눈앞에 그려진 설계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 * *
뒤늦게 다다른 사고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김미솔의 보고에 따르면 노고산 정상 부근에서 열린 게이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끈적하고 습한 늪지대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사십 분 전, 불시에 열린 게이트 안쪽에서 점성이 높은 진흙 덩어리와 기이하게 진화한 식물 형태의 몬스터가 튀어나와 완만한 경사를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게이트 근처에서 대기하던 취우 소속 헌터들이 사태 발생 직후 손을 썼으나 단숨에 처리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산 중턱의 산책로에서 대기하던 나의 동료들 또한 기세에 밀려 초입까지 다다른 채 몬스터와 대치 중이었다.
곳곳에서 불거지는 굉음으로 인해 노고산과 맞닿아 있던 캠퍼스 내부에서도 비명이 난무하기 시작한 지도 한참이었다. 겨울방학인 나머지 근처를 배회하는 인원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각 건물 연구실에 기거하던 대학원생과 교수들 또한 금세 대피할 수 있었다.
사태가 불거질 때부터 고예성이 대피를 맡아 준 덕에 아직까지 나타난 피해는 적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대기하며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고정인과 계속해서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낮은 등급의 몬스터를 처리했다.
나와 공희찬이 현장에 다다랐을 무렵의 그는 맥없이 고꾸라진 철제 쓰레기통에 무릎이 깔린 채 고통스러워하던 대학원생을 구출해 내는 중이었다.
―범람에서도 반응이 오기 시작했어. 차정주 이사장 관련한 글은 다 묻혔고, 우리가 올렸다가 지운 게시물 캡처 화면이 계속 돌아다니는 중이야. 방금 이관부에도 신고가 들어갔대.
탕!
나는 고정인의 보고를 들으면서 산책로 입구를 부산스레 배회하던 거대 도마뱀 몬스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내 정상에서 쏟아져 내려와 어느새 발치를 얕게 적시기 시작한 끈적한 진흙을 가로지르면서 공희찬을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핏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힘껏 움킨 채 눈을 감았다가 뜬 공희찬은 화염을 둥근 구체의 형태로 빚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끈적한 진흙이 메마른 잿더미로 변하면서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금 중턱에서 진흙이 파도처럼 불어나고 있는데 수습이 안 돼. 아래쪽에서 좀 막아 줘!
산책로 초입과 대학교 건물과 맞닿은 작은 광장의 지면을 정돈하며 시민들의 대피로를 확보한 공희찬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친 채 귓가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희찬 선배가 이쪽에서 정리했어. 나랑 선배는 이제 중턱으로 이동할 테니까 예성이는 계속 밑에 있으면서 사람들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혹시 건물에서 못 빠져나온 사람이 있거나 구경하려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저지하고.”
―오케이.
나는 말문을 맺은 뒤 공희찬에게 산 중턱 쪽을 턱짓해 보였다. 공희찬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설계를 점검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가리킨 쪽으로 내달렸다. 잠시 뒤 근처에서 수없이 많은 불꽃이 허공에 치솟더니 이내 유성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