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새로운 국면 (3)
백이현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길드 사무실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먼 길을 향하면서 공희찬이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를 하나씩 곱씹어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길드에 데려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다시 돌아온 그는 예상하지 못한 패로 부상했다. 한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차진명과 강효서의 소식 또한 그를 통해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이능단속관리본부 내에서 인맥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추후에 이능단속관리본부가 이능청으로 승격하는 미래를 대비하여 일찍이 자신의 편을 분리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을 솎는 거겠지.
그들이 부지런히 활개를 치고 다닐 모습을 떠올리니 조소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차창을 내다보니 어느새 약속 장소와 근접한 거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근데 왜 하필 백이현 헌터야? 길드 이름으로 스카우트하는 건 처음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싶어서.’
공희찬이 사무실에 다녀갔던 날 김미솔이 조심스럽게 묻던 것이 생각났다. 내가 백이현을 택한 건 그 또한 게이트 고아로서 아주 잠깐이지만 나와 함께 하늘 보육원에 기거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했다던 그는 보육원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효신 그룹의 장학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어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자취를 감춰 버렸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리호를 비롯한 여러 길드에서 눈여겨보는 인재였다. 전생의 나 또한 부대원으로 데려오고 싶어 했던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상기하고 있으니 문득 감회가 새로워졌다. 길드 소속 헌터로 활동하던 부대원들과 하나씩 접촉하며 설득하던 시절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당시의 내가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내건 조건은 간단하지만 명확했다. 소속된 길드에서 지급하는 연봉의 두 배를 지급하고, 임무마다 생명 수당을 두둑하게 챙겨 주는 것. 거기에 헌터 특수 정예 부대 소속 헌터라는 명예로운 직함과 개개인의 약점을 걸고 짧으면 하루, 길게는 몇 달 동안 설득했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차진명이 사람을 선별하는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약점이었네.
약점을 빌미로 설득한 부대원들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라 하면 단연 설연호와 지선일이었다. 백이현 또한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을 약점으로 두고 설득하려 했으나 애당초 차진명이 허락하지 않은 탓에 그에게 연락조차 취하지 못했었다.
다행히 그때의 아쉬움을 해소할 만한 기회가 찾아와 주었다. 다시 한번 들여다본 백이현은 여전히 함께하고 싶은 재목이었다. 그런 그를 거듭하여 생각하고 있으니 약속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지는 듯했다.
지잉―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한 건물까지 단숨에 도달하려던 걸음을 붙든 건 휴대전화의 진동이었다. 이른 봄의 가로수 밑에서 잠시 멈춘 나는 발신인을 확인한 뒤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무슨 일이야?”
―어디야? 도착했어?
“바로 앞까지 왔어. 약속 시간까지 여유 있으니까 얘기해도 돼.”
그렇게 전하자 휴대전화 너머의 고예성이 자신의 용건을 설명했다.
―사무 직원 이력서 접수는 오늘 정오에 마감했어. 범람에서도 우리 길드에서 구인은 안 하냐는 얘기가 종종 나오는 것 같더니 그게 그냥 하는 소리만은 아니었나 봐. 어제는 설연리 헌터가 잘 안다고 했던 사람도 이력서를 보냈더라고.
나는 고예성이 설연리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눈썹을 치켜뜨면서 대강 호응했다. 설연리가 나와 동료들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는 건 설연호의 의사와 관계없는 일인 듯했다. 이번에도 사정을 대강 눈치챈 그녀가 사람까지 소개해 준 것만 봐도 그러했다.
“설연리 헌터가 보증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쓸 만하겠지. 학교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사무 업무는 다 너한테 일임할 거니까 최종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게 보고만 올려 줘.”
―오케이. 그리고 장비 관련한 건 원하가 알아보고 정리하는 중이라고 했어. 지금 우리 예산에서 적절하게 배분하려고 하니까 일이 좀 까다로워졌나 봐.
“일단 말해 준 대로 기억하고 있을게. 또 다른 건?”
휴대전화를 귓가에 붙인 채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한낮의 거리는 비교적 한적한 편이었다. 어느 방향에서 백이현이 나타날지 가늠하고 있던 찰나 고예성이 말했다.
―오늘은 딱히 없어. 백이현 헌터는 언제 온대?
“시간 맞춰서 오겠지. 자세한 건 다녀와서 마저 얘기해 줄게.”
―그래, 잘 다녀와라.
나는 고예성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전화를 끊고 약속 장소인 프라이빗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기 직전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폈으나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 * *
백이현이 나타난 건 약속 시간인 오후 세 시가 되기 십 분 전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고 구석진 자리로 걸어오던 그는 멀리서부터 내 모습을 발견하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달싹였다.
“반가워요. 도해 길드의 마스터 도해월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생각보다 훨씬 더 일찍 오셨네요.”
나와 눈높이가 엇비슷한 백이현은 생각보다 훨씬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서애란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크고 둥근 눈으로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그와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든 뒤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맞닿은 손바닥은 부드러웠으나 마디마다 딱딱한 굳은살이 불거진 것이 단연 악기를 오래 다룬 사람의 것이었다.
“오늘 백이현 헌터를 뵙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전까지는 길드의 미팅 제안을 거절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이윽고 멀리서 나타난 직원이 정갈한 손짓으로 두 개의 물잔을 채운 뒤 사라졌다. 곁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이현은 직원에게 가벼운 고갯짓을 전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 짧은 응대만 보고도 그의 기질이 생각했던 것보다 예민하지 않은 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침 도해 길드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런 저로서는 상당히 반가운 제안이었습니다.”
우리의 연락을 기다렸다니. 무슨 뜻이지?
나는 먼저 되묻는 대신 의구심 어린 눈길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절반쯤 채운 잔 근처에 남은 물기를 손끝으로 무던하게 훑던 그가 대답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도해월 헌터님을 두고 아이보리라고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제 동생도 헌터님과 다른 분들의 사진과 영상을 계속 찾아보는 터라 지켜보는 저도 헌터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헀어요.”
듣던 중 달가운 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유치한 작명이 이런 식으로 화제를 생성하고 그토록 만나기 어렵다는 백이현을 만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다니. 이래서 사람은 유명해지고 보라는 거구나.
“그렇군요. 좋은 인상을 주었다니 다행입니다.”
선선한 어조로 대답을 전한 나는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오랜 세월 지휘관으로 지내 온 감으로 판단할 때 그는 예상했던 것 이상의 인재인 듯했다.
판단을 마쳤으니 본격적으로 밀어붙일 차례였다. 지난 신촌 게이트 사고로 화두를 열었으니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 백이현에게 가장 먼저 설명한 것은 도해 길드의 지향점에 관한 것이었다. 이때까지 다른 길드의 제안을 전부 거절하고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던 백이현이 듣기로는 다소간 부담스러울지 모르겠으나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백이현의 반응은 시원치 않은 듯했다. 동생의 이야기로 서두를 열었던 것과 달리 무슨 말을 해도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틈틈이 끄덕이며 반응할 뿐이었다.
나는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준비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동안 혼자 활동했던 그의 심정을 가늠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길드 소속 헌터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끝으로 우리 길드에서 백이현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진중하게 전할 무렵에는 그 또한 경청하는 자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계약서를 한 장씩 넘겨 가면서 중요하게 눈여겨볼 만한 지점을 짚어 나갈 즈음에는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상입니다. 신중하게 고민해 보신 후 다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
느릿하게 숨을 고르면서 말한 뒤 소지하고 있던 명함 한 장을 꺼내 백이현의 앞으로 내려놓았다. 나란히 놓인 명함과 계약서를 한참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의사를 전달해도 되는 건가요?”
“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셔도 괜찮습니다.”
설마 고민하는 척도 안 하고 거절하려는 건가. 나이가 어린 편이기는 해도 기본적인 매너를 모를 것 같지는 않았는데.
“우선 조용히 지내던 저에게 제안해 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이건 거절하려고 운을 떼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분명…….
“기쁜 마음으로 도해월 헌터님의 제안에 응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껏 혼자서 활동했던 건 어디까지나 동생 때문이었어요.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던전을 위주로 돌면서 적당히 밥벌이만 해도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에게는 달가운 답변이었고 기뻐하기에 마땅한 일이었으나 어딘가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다시 한번 계약서를 들춰 보는 백이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한층 선명해졌다.
아직 어리고 어떤 길드와도 엮인 적 없는 헌터라고 해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 뒤 백이현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는 틈을 노려 잠시 눈을 감았다.
[스킬 ‘공정한 판별자’가 발동됩니다. 지정한 대상이 지닌 악의를 측정합니다.]이윽고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악의’는 ‘0%’입니다.]그때까지도 고개를 숙인 백이현은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약서를 넘겨 보고 있었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감정’은 ‘익숙함’,‘조금의 의구심과 끝없는 기대’, ‘목표 달성에서 비롯된 성취감’입니다.]나는 일순 의아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머지않아 푸른빛이 감돌던 활자가 부드럽게 흩어졌다. 저게 다 뭘 의미하는 거지?
“제안에 선뜻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드린 계약서는 견본입니다. 조만간 길드 사무실에 방문하셔서 자세한 사항을 조율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아 볼까요.”
“네, 좋습니다.”
당혹스러운 기색을 능숙하게 감추면서 백이현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지막으로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떠난 뒤에도 레스토랑에 남아 있던 나는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증폭 스킬을 시전했다. 지금쯤이면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텐데.
그 순간 건물 내부와 주변부의 소음이 팽창하듯 커지면서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얽혀 들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슬며시 찡그리고 주파수를 맞추는 것처럼 백이현의 행적을 따라갔다. 레스토랑 근처 길목에서 걸음을 멈춘 듯한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저예요. 잘 만나고 왔어요. 생각보다 친절하던데요?
―그렇지?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야. 수고했어.
곧이어 그와 통화 중인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 두 사람은 내일 다시 보자는 인사를 남긴 뒤 통화를 종료했다.
“목소리가 익숙해.”
따라서 눈을 뜬 나는 스킬의 효력을 걷어 내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불쑥 솟았으나 금세 고개를 저었다. 그 목소리는 분명 안지유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