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재점화 (2)
다음 날 아침, 나는 서애란과 함께 일련의 상황을 파악한 뒤 그녀와 고정인을 회의실로 불렀다.
―문제는 없는 거지?
“응, 일단은 잡혀 있는 일정들 각자 처리해 줘. 따로 문제가 생기면 얘기해 줄게. 다른 사람들이 너무 염려한다 싶으면 선배가 잘 다독여 주기만 해.”
―그래, 뭔가 정보 밝혀지면 공유해 주고. 사실 너무 뻔한 패턴이라 웃기지만.
설연호와 전화를 마치고, 돌아보니 마우스를 움킨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고정인이 입을 열었다.
“혹시 다들 주변 사람들한테 지금 일이랑 관련해서 연락받은 것 있어? 아니면 다른 길드 사람들이나.”
나는 곧장 고개를 내저으면서 반응을 기다렸다.
“음, 내 친구들은 범람에 또 어그로 꼬였다고 욕하는 중이네.”
휴대전화 액정을 들여다보던 서애란이 입을 열었다. 그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지금 범람에서 활개를 치는 놈들의 대다수가 어그로인 듯했다.
“범람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간간이 섞여 있길래 물어봤어. 너희 주변 사람들도 같은 생각 중인가 싶어서. 일단 마저 볼게.”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인 고정인이 화면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녀는 지금 한참 전부터 벼르던 대로 어그로성 게시물을 올리는 사람들의 아이피와 고유 주소를 다량으로 확보한 뒤 그들 사이의 공통점을 확보하는 작업 중이었다.
“벌써 인터넷 기사가 몇 개 정도 올라와 있는 상태야. 주요 언론은 아니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얘기들 대충 긁어모아서 조회 수 뻥튀기하는 작은 매체들밖에 없어.”
나는 한동안 같은 자세로 휴대전화 액정을 들여다보다가 자세를 바르게 세우면서 말했다.
“지금 퍼진 어그로가 범람에만 글을 올리는 게 아니라서 오늘 밤이 지나면 파장이 더 커질 것 같아. 방송 뉴스까지는 안 가겠지만 인터넷 기사는 계속 쏟아져 나올 것 같은데. 이대로 괜찮을까?”
이어서 말을 보태는 서애란을 바라보다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이트보드 근처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지금 범람에 잔뜩 꼬인 어그로들이 바라는 건 여론전일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문제가 된 칼럼이 올라온 지 세 시간도 안 지나서 동시다발적으로 우리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되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허공에 둔 손끝끼리 느슨하게 깍지를 끼우면서 이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학교에서부터 수도 없이 겪어 왔어. 그때마다 잘 해결해 왔으니 두려울 것도 없지. 그쪽에서 바라는 대로 제대로 부딪혀 보자.”
짧은 틈을 두고 이어서 말하고 있으니 두 사람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지나간 일을 기억 속에서 되짚어 보고 있을 터였다.
그동안 나는 어둑해진 창가를 내다보았다. 내일 아침에 이른 봄비가 내리려는 건지 드넓은 창문에 희미한 안개가 뒤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그때와 지금 상황을 견주는 것 자체가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지금은 판이 훨씬 커졌고, 우리는 학교 안에 있는 동아리가 아니라 길드로 묶이게 됐으니까. 이제는 그때와 다른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이내 두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얕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인 고정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의 스크린을 내렸다.
“나는 이제 이런 상황이 더는 무섭거나 두렵지 않아. 그리고 지금까지 백 번 정도 말한 것 같은데, 난 이러려고 길드 들어온 거라서 약간 짜릿하기까지 해. 내가 아까 애들한테 얘기하는 거, 둘 다 들었지?”
언제처럼 단단한 어조로 의견을 전달한 고정인이 말문을 맺을 즈음 가볍게 웃어 보였다.
“다들 보면서 느낀 바가 있겠지만 이번에 나타난 놈들도 우리 학교 다닐 때 나타났던 어그로들이랑 패턴이 아주 흡사해.”
어느새 회의실 내부에 어둠이 감돌면서 스크린의 불빛만 형형해졌다. 고정인은 이때까지 모인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화면을 보여 주면서 간단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여기, 제일 자주 보이는 아이피만 따로 모아서 분석한 거야. 게시물을 올리는 시간 간격이나 댓글 내용 그리고 자기들이 필요한 게시물의 조회 수를 끝없이 증폭시키는 패턴이 상당히 익숙해.”
고정인은 재차 마우스를 놀리면서 화면을 넘겼다. 작년 가을에 꼬였던 어그로의 패턴과 이번에 나타난 이들의 행적을 분석해 보니 데칼코마니처럼 흡사했다.
“분명 익명으로 적은 글인데 게시물 작성한 사람의 이름이 보이는 것 같지 않아?”
툭 던지듯 내뱉은 고정인이 다음 화면을 넘겼다. 나는 손끝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범람과 비슷한 시기에 운영을 중단했던 들불이 불과 일주일 전부터 활동을 재개했다는 내용을 담은 슬라이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들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네요. 꽤 오래 잠잠하다 싶더니. 칼럼까지 내서 쇼를 꾸민 걸 보면 이관부 안에서 비빌 언덕을 얻은 듯도 해요.”
한참 지켜보던 서애란이 조소하면서 말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서 피식 웃고 고정인에게 말했다.
“고생했어, 선배. 아무쪼록 상황은 얼추 파악된 것 같네. 우선 우리 쪽에서 문제가 되는 게시물이나 댓글을 지우면 그쪽에서 바로 알아챌 테니 계속 지켜보기만 해 줘. 혹시라도 인신공격이나 도를 넘는 비하 발언이 보이면 그건 지워도 돼.”
“오케이. 그리고 또?”
“그리고 어그로가 너무 전투적이어서 그런 거지 우리를 옹호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니까 판세가 심하게 기울어진다 싶으면 우리한테 유리한 게시물을 꾸준히 노출시켜 줘.”
나는 허리춤에 손 하나를 얹은 채 고정인에게 지시를 마치고 숨을 고르면서 스크린을 마주 보았다.
“애란이는 범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봐 줘. 그리고 말마따나 이원석 헌터가 정말 강효서 선배를 돕고 있는 건지, 두 사람은 어떻게 접촉하게 된 건지 확인해 주고. 정리는 이 정도로 하고, 문제가 됐다던 칼럼부터 다시 보자.”
“그럴게.”
서애란의 대답을 들은 뒤 고정인에게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잽싸게 마우스를 움직이더니 여론전의 신호탄이 되었던 칼럼을 보여 주었다.
[신촌 게이트 사고에 나타난 어린 헌터들, 그들은 영웅인가 시정잡배인가 ― 이원석]시정잡배라니. 살다 살다 이런 불명예스러운 호칭은 또 처음이네.
무의식적으로 비집고 나오는 조소를 굳이 감추지 않고 큰 화면에 뜬 칼럼을 느릿하게 읽어 내렸다.
지난번에 수습한 신촌 게이트 사고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묘사하면서 시작된 글은 일명 ‘베어즈’라고 불리는 어린 헌터들이 누구인지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 동료들은 헌터 아카데미의 졸업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학교를 빠져나와 신촌으로 놀러 나간 철없는 청소년이라고 표현했다.
바라지도 않던 회춘을 시켜 주다니. 이건 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개를 반쯤 기울인 채 화면을 마주하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어진 단락을 읽어 보았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관부는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 대처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어째서 공은 다 우리한테 돌아가고 자기들은 책망받는지 모른다는 거야. 잘못은 쟤네가 했는데 왜 똥물이 자기들한테 튀는 거냐고 악쓰는 중.”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정인이 칼럼의 필자이자 이능단속‧관리본부 소속 헌터인 이원석의 주장을 간단하게 일축했다.
“거기까지만 썼다면 감정적인 호소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 문제는 우리가 범람에 사고를 미리 예견했던 걸 물고 늘어지는 거고.”
나는 고정인이 말문을 맺기를 기다렸다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그는 범람을 통해 누군가 신촌 게이트 사고를 예견한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더불어 누군가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고의로 발생시킨 것처럼 이번 사고 또한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은 아닌지에 관한 의문까지 제시했다.
“저 칼럼 쓴 이원석 헌터, 우리 부모님이랑 아는 사람이라서 어렸을 때 몇 번 마주친 적 있어.”
“그래? 그럼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
팔짱을 끼운 채 화면을 보던 서애란이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고정인의 질문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이원석 헌터는 박호재 연구소장이랑 연결된 사람이야. 정확히는 게이트 시대 직전까지 대학원 지도 제자였대. 박사 과정을 마치기 전부터 한국대에서 강의를 맡았던 걸 보면 박호재가 그만큼 아끼는 제자였나 봐.”
“그러게. 박호재 연구소장, 지금도 한국대에서 인기 엄청 많잖아. 대학생들 수강 신청 시기만 되면 온갖 커뮤니티에 그 사람 수업 광클했다는 얘기 무진장 올라오던데.”
“듣기로는 대학원생들도 좋아한다고 하더라. 지금은 연구소장 일 때문에 지도 제자를 안 받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아직 열 명이 넘는대.”
손등에 턱을 괴고 서애란의 이야기를 듣던 고정인이 말했다. 나는 한숨을 짧게 내쉰 뒤 칼럼 서두에 작은 크기로 삽입된 그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언제쯤 나타나나 했어. 그렇지만 저 인간을 이런 식으로 다시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잠시 뒤 분주하던 머릿속이 차분해지면서 손끝이 서서히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현재는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 행정직 업무를 맡고 있는 이원석은 훗날 이능청 내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전생의 그는 안지유가 차진명의 손에 죽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이번 생의 안지유가 무슨 생각으로 내 주위를 맴도는 건지 모르겠지만, 전생에서처럼 이능단속관리본부에 입사하지 않기로 했으니 그녀가 이원석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는 없을 터였다. 그건 곧 그녀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할 확률도 줄어든다는 뜻이다.
우선은 그걸로 되었다. 강효서가 이원석을 등에 업고 다시 나타난 이상 쉽지 않은 대치가 될 테지만 이번 일을 잘 넘기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길드의 존재를 선명하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이다.
“범람에서 불거진 소란이 점점 더 커지면 주요 언론 기자들도 먹이를 물고 달려들 거야. 사람들은 이게 웬 싸움판인가 싶어서 가까이서 들여다보려고 하겠지.”
고개를 저어 상념을 거둔 나는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네 말대로 저쪽에서 여론전을 노리는 거라면 우리 쪽에 호의적인 기사를 낼 수 있는 기자들을 포섭하는 게 좋을 거야. 사실 이원석 헌터를 데려온 것만 봐도 더 말할 것도 없기는 해. 그 사람이 쓰는 칼럼은 각성자 말고도 비각성자들도 꽤 많이 챙겨 보니까.”
“그러면 그 칼럼을 발표할 수 있게 지면을 내준 신문사는 이미 저 사람 편이겠네. 해월이 넌 이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서애란과 고정인이 연이어 대답했다.
“우리도 이번 일을 기회 삼아 우리랑 뜻이 맞는 신문사나 방송국을 포섭해 보자. 자세한 건 내가 알아볼게.”
그렇게 말한 뒤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연락을 취한 곳은 다름 아닌 설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