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진압 (1)
밤늦게 전한 소식이었으나 설연리는 곧바로 응답해 주었다. 나는 날이 밝는 대로 그녀를 길드 사무실로 초대했다.
평소와 같았다면 내가 리호의 사무실로 넘어가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운 그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설연리에게 길드로서 기틀이 잡힌 사무실을 보여 주고 자연스럽게 상호 간의 신뢰를 쌓아 올릴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설연리를 이끈 곳은 집무실이었다. 그녀는 내 안내를 받고 조금 놀라는 것 같았으나 이내 흥미로운 기색을 보이면서 안쪽을 둘러보았다.
“병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어린 학생 같았는데……. 여기까지 와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이곳까지 초대한 의도를 곧바로 간파한 설연리가 바라던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적당한 호기심을 품은 그녀의 옆모습을 보면서 가볍게 웃어 보였다.
“리호와 설연리 헌터께 늘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기꺼이 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러 리호의 이름을 강조해서 말한 건 우리의 관계성을 재차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전생에서는 설연호를 데려온 일로 리호와 척을 졌지만, 이번 생에서는 설연리와 리호의 도움을 계속 받을 예정이니 짧은 만남에도 정성을 기울여야 했다.
“리호를 떠난 연호가 어떤 곳에서 일하는지 한 번쯤은 보고 싶었으니 나에게도 달가운 기회였어요. 그나저나 바깥에서는 일이 제법 소란해지고 있는 것 같던데, 꽤 침착해 보이네요?”
내부를 간단하게 훑어본 설연리가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맞은편으로 향하면서 입을 열었다.
“사태에 직접 대응하는 소수의 헌터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상적으로 일정을 수행하는 중입니다. 물살이 요동친다고 해서 덩달아 부산해질 이유는 없으니까요.”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맺을 즈음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금세 들어선 고예성은 테이블에 두 잔의 음료가 놓인 쟁반을 내려놓았다.
설연리와 간단한 눈인사를 나눈 고예성이 나에게도 슬쩍 웃어 보인 뒤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부득이하게 고예성에게 이런 잡무를 맡긴 건 설연리가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방금 다녀간 게 고예성 헌터인가요? 신촌 게이트 사고 당시에 찍힌 영상에서 저 헌터가 회색 인형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정확할지 모르겠네요.”
어렴풋하게 가늠했던 대로 설연리 또한 범람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긍정했다. 그러자 설연리가 무릎끼리 겹쳐 앉으면서 문간에서 시선을 거둔 뒤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전날 통화하면서 얼추 전해 들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오늘 아침부터는 인터넷에서 기사가 돌기 시작했더군요. 이관부에서 적극적으로 보도 자료를 뿌리는 듯해요.”
“네, 그건 저희도 확인했습니다.”
“칼럼을 작성한 이원석 헌터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 말을 듣던 나는 잠시 침묵하면서 전날 서애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되짚어 보았다. 그가 한국대학교에서 강사로 재직했다는 사실을 듣고 나니 떠오르는 것이 더 있었다.
박호재와 이원석은 한국대학교에서 서양 고대 철학을 전공했다. 박호재의 경우 스위스로 유학하여 호메로스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바 있다고 들었다.
전날 서애란과 고정인을 보내고 좀 더 찾아보니 박호재는 세상에서 처음 발견된 성물인 아킬레우스의 방패에 관해 연구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건 성물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남다를 것이라는 예측의 방증이었다.
모쪼록 지금 중요한 건 이원석에 대한 것이었다. 짧은 상념에서 빠져나온 나는 이원석에 관해 내가 기억하는 사실 중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들만 이야기했다. 설연리도 딱 그 정도를 예상했던 건지 눈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뒤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원석 헌터가 벌이려는 여론전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짐작하고 있나요?”
나는 눈앞에 놓인 유리잔에 맺힌 물기에 눈길을 고정한 채로 망설이는 듯한 입소리를 냈다. 짐작하는 바가 있었으나 섣불리 내놓고 싶지 않았기에 우선 설연리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신촌 게이트 사고를 기점으로 도해 길드는 단숨에 유명세를 얻었죠. 그리고 그 유명세는 이관부의 고질적인 문제점과 대비를 이루면서 나날이 극명해지고 있다는 걸 도해월 헌터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설연리는 게이트 사고를 막아 낸 일이 치밀하게 설계되었다는 걸 인지한 상태였다. 그즈음에서 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막힘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이원석 헌터는 아주 작은 흠집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건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녀의 말마따나 이원석은 자신의 삶을 공들여 가꾼 정원처럼 철저하게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나와 동료들의 존재는 예고 없이 자라난 잡초 같은 것일 테다.
“그렇다면 이 여론전의 목적은 이원석 헌터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도해 길드의 근간을 뒤흔들어 뿌리를 뽑는 것이겠네요.”
나는 설연리를 올곧게 응시하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게 되면서 나름대로 익힌 처세술이 있다면 그건 쉽게 겁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시 번진 들불을 뒤덮으려면 그만큼 많은 물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번 일을 토대로 언제라도 내가 끌어 쓸 수 있는 물길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이미 이원석이 부리는 개수작이 꽤 익숙했다. 이원석은 작은 길드라고 할지라도 제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면 정성 들여 짓밟는 걸 즐기는 하찮은 작자였다.
나는 입술 틈을 비집고 나오려는 조소를 참으면서 눈을 깊이 감았다가 떴다. 맞은편에 앉은 설연리도 생각이 길어지는 건지 내가 아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설연리 헌터를 여기까지 모신 건 이번 일을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 만한 방안이 있는지, 그 사견을 여쭙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잠시 현재의 상황에 집중하며 감정을 가다듬고 설연리에게 질의했다. 그녀는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시면서 대답했다.
“사실상 여론전은 누가 먼저 발언권을 쥐게 되는지, 그게 아니라면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큰지 겨루는 싸움이에요. 만약 리호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면 우리 쪽의 목소리를 크게 출력해 줄 기자들과 서둘러 접촉했을 겁니다.”
설연리 또한 서애란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나는 한층 신중해진 기색으로 그녀를 마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리호에서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NBS 소속 기자들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아직도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대신 최대한 에둘러 속내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설연리는 테이블에 내려놓은 휴대전화를 힐긋거렸다.
“유지하고 있죠. 나에게 먼저 연락한 건 그것과 관련이 있겠군요.”
“네, 맞습니다.”
일전에 그녀가 말한 대로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우리의 입장을 명확하게 대변해 줄 만한 언론이었다. 그들의 도움이 적재적소에서 발휘되기 위해서는 늦어도 오늘 저녁 내로 그들과 접촉하여 이야기를 나눠야만 했다.
“이미 커뮤니티 내에서는 여론이 한쪽으로 몰린 상태입니다. 이대로 계속 손 놓고 있으면 판세는 금세 뒤집힐 거예요. 저희의 힘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터라 이번에도 실례를 무릅쓰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연락을 드렸습니다.”
잠시 뒤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을 짓던 설연리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의외의 질문을 건넸다.
“다른 방송국이나 신문사를 두고 하필 NBS를 호명한 이유가 궁금하네요.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기억이 교차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전생에서의 리호의 행보와 그 외의 많은 사실을 고려하여 지명한 것이었으나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난처한 상황을 처음 겪는 터라 무척 당황스러웠던 와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분이 설연리 헌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껏 리호와 함께했던 NBS가 떠올랐어요. 그리고 그곳에서라면 저희의 이야기를 성심성의껏 다뤄 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내가 전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이 또한 거짓은 아니었기에 초조한 마음을 애써 삼키면서 설연리의 반응을 기다렸다.
“표정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네요. 나라고 하나뿐인 동생이 속한 길드가 무너지는 걸 두고 보지만은 않았을 테니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될까요?”
나는 그때까지 바짝 마르던 입술을 축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터진 지 하룻밤이 지난 터라 저희에게 여유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간이 늦더라도 괜찮으니 오늘 안에 기자분들을 직접 뵐 수 있었으면 하는데, 혹시 가능할까요?”
“음, 우선 알아볼게요.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설연리가 휴대전화를 들고 잠시 자리를 벗어났다. 혼자 남은 나는 내내 차갑게 식어 있던 손끝을 주먹으로 움키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 * *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다시 돌아온 설연리는 긍정적인 답변을 전해 주었다. 오후 열 시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서 그녀를 배웅한 나는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 안쪽에서는 전날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노트북 앞에 앉은 고정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거 먹고 해, 선배.”
나는 손등으로 안경을 툭 밀어 올리던 고정인에게 말했다. 그녀의 근처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내려놓은 뒤 옆자리 의자를 끌어서 착석했다.
“어, 언제 왔어? 마침 출출했는데 잘됐다. 설연리 헌터는 돌아갔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고정인이 연이어 질의했다. 이내 기지개를 쭉 켜고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벗기면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응, 이따 기자들까지 동행해서 다시 만나기로 했어. 한참 전부터 리호와 두터운 신뢰를 유지하던 사람들이니 설연리 헌터랑 같이 만나면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할 거야.”
“진짜? 그거 듣던 중 다행이다. 안 그래도 상황이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어서 이제 어쩌나 싶었거든.”
고정인은 그제야 안도하면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이윽고 커피로 목을 축인 뒤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잠시만, 이게 뭐지?”
얼마 뒤 냅킨으로 입술을 닦던 그녀가 고개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화면을 마주 보았다. 이내 마우스를 쥐고 몇 번 클릭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주소로 메일이 왔어. 근데 내용이 좀 이상해. 보낸 사람이……. 익명의 후원자라는데? 익명의 후원자면 그때 제혁이 병원비 대신 내줬던 사람 아니야?”
어안이 벙벙한 듯 입술을 벙긋거리던 고정인은 노트북의 각도를 틀고 내가 앉은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나는 느릿하게 숨을 고르면서 그들이 남긴 전언을 확인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