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진압 (2)
[곤욕을 치르는 듯하여 염려스러운 마음입니다. 당신이 필요로 할 법한 적당한 물건을 송부하니 부디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나는 고정인에게 도착한 메일의 내용을 재차 읽어 보았다. 익명의 후원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러운 어투를 구사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막역한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유령 계정으로 보낸 걸 보니까 일회성 메일 같아. 그나저나 적당한 물건이라는 건 뭐지? 메일에 첨부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고정인이 메일함을 연달아 확인하는 듯 마우스를 연신 클릭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통해 확인한 메일의 내용을 곱씹고 있으니 골치가 아파져 왔다. 얼마 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서애란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혹시 뭐 주문한 사람 있어? 택배 왔는데?”
서애란은 작은 상자를 손끝에 쥔 채 허공에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포장이 잘 되어 있는지 덜그럭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택배? 혹시 보낸 사람에 누구라고 돼 있어? 방금 우리 쪽으로 이상한 메일이 하나 왔거든. 보낸 사람이 누군지 한번 봐 주라.”
나와 고정인을 차례로 바라보던 서애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자를 확인했다.
“익명의 후원자라고 되어 있어요. 주소는 안 적혀 있네요. 일단 열어 볼게요?”
서애란은 우리 쪽을 쳐다보고는 바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검은색 유에스비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메일이라면 뭘 말하는 건데요?”
서애란은 검은색 유에스비를 고정인에게 건네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고정인은 유에스비를 쥐고 생김새를 살피더니 노트북에 꽂았다.
고정인이 노트북 화면을 집중해서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서애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가만히 경청하던 그녀는 의아한 듯 고개를 반쯤 기울이면서 나에게 되물었다.
“그게 다 무슨 얘기야? 누가 뭘 보내?”
나와 서애란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고정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어서 서애란에게 옆으로 다가오라는 듯 손짓하면서 말했다.
“직접 와서 보는 게 낫겠어. 자료가 구체적인 걸 보니까 찌라시는 아닌 것 같거든. 그렇다면 누가 왜 이걸 우리한테 보낸 거지?”
익명의 후원자가 보낸 유에스비에는 효신 그룹이 지난 오 년 동안 주가 조작을 감행해 왔다는 정황 증거가 담겨 있었다.
“효신 그룹 관련 찌라시라면……. 작년 겨울에 잠깐 말이 돌았다가 결국에는 밝혀진 것 없이 흐지부지되지 않았어요?”
“어, 애란이도 알고 있네? 맞아, 그때는 그저 단순한 찌라시에 불과했어.”
반면 익명의 후원자가 보낸 자료는 찌라시에서 주장되던 바와 얼개는 비슷하지만 그보다 상세하고 명확한 정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정도 퀄리티의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건 효신 그룹의 내부자이거나 그와 긴밀한 관계에 처한 인물일 텐데.
질문을 거듭하고 있으니 문득 익명의 후원자가 메일의 하단에 남긴 메시지가 떠올랐다.
[추신. 우리에 관한 것을 일부러 헤집지 마시고 차분하게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적당한 때가 도래하면 기별을 전하겠습니다.]익명의 후원자는 나와 동료들의 반응을 일찌감치 예측하고 답변을 남겨 둔 것 같았다. 여기서 걸리는 건 두 가지였다. 자신을 ‘우리’라고 언급한 것과 ‘적당한 때’라는 말.
이번에 보내온 자료를 보니 익명의 후원자가 한 사람이 아닌 다수라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당한 때를 기다린다는 말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생각해 보니 같은 말을 다른 사람한테 직접 들은 것도 같은데.
“그나저나 이런 걸 우리가 봐도 되는 거야? 너무 위험한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상념을 떨친 뒤 고정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유에스비가 담겨 있던 상자를 쥐고 있던 서애란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익명의 후원자 쪽에서도 범람에 어그로를 퍼뜨린 게 들불 쪽이라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나 봐요. 그 자료를 우리한테 보낸 건 들불의 관리자랑 이어진 효신 그룹을 건드려서 위기에서 빠져나가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전한 게 아닐까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가를 찡그리던 고정인이 이어서 대답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 재작년에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도 강효서는 자기 책임을 전부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혼자 빠져나갔잖아. 한동안 조용했던 걸 보면 나름의 타격은 받은 듯하지만. 그걸 다 딛고 멀쩡하게 이관부에 입사까지 했으니 효신 그룹에서 완전히 내쳐진 건 아닌 것 같던데. 그건 그렇고, 이 타이밍에 우리한테 이런 자료를 준다고? 이거 너무 찝찝한 거 아니야? 왜 직접 안 쓰고, 우리한테 넘긴 거지?”
“이 자료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쪽에서 제일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럼에도 이걸 우리한테 보냈다는 건 이 타이밍에 우리한테 꼭 필요했다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나는 고정인에게 근처에 놓여 있던 커피를 밀어 주면서 입을 열었다. 잠시 고민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사이 서애란이 덧붙였다.
“여기 담긴 걸 뉴스로 크게 터뜨려서 강효서 선배는 물론이고 같이 묶인 효신 그룹까지 흔들어 주기를 바라는 거겠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애란이가 방금 말했던 대로 우리가 여론전의 분위기를 잘 주도해서 판도를 뒤집고, 이 자료까지 뉴스로 터뜨리면 강효서 선배를 완전히 보내 버릴 수 있을 거야. 들불로 모자라 이관부 소속 헌터까지 끌어와서 우리한테 시비를 거는 일도 더는 없겠지.”
한참 이어진 설명이 마무리될 즈음 고정인도 차분한 기색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단숨에 들이킨 그녀가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면서 말했다.
“익명의 후원자라는 사람들이 누군지, 우리를 왜 돕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 자료를 냉큼 사용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기는 해. 하지만 해월이 말대로 더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이 자료를 활용하는 게 좋겠지. 일단 이건 최후의 열쇠라고 생각하고 보관해 둘게. 맞다, 기자랑 약속은 잡혔어?”
고정인의 의견에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인 나는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설연리가 전해 준 약속 시간은 오늘 밤 열 시였다.
“오후 열 시에 방송국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어. 남은 시간은 넉넉하니까 앞으로 이 자료를 어떻게 쓰면 좋을지 고민해 보자. 선배, 범람은 지금 어때?”
이어서 말문을 맺은 뒤 휴대전화를 들고 공희찬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길드원 중에서도 언론사 사람들과 교류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난 새벽 동안 우리가 사고 현장에서 활약한 영상을 계속 노출해서 그런지 아침에는 우리 쪽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더 많아진 상태였어. 고작 칼럼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가는 게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제법 늘었고. 그런데 정오가 지나면서부터 변수가 하나 생겼어.”
잠시 머뭇거리던 고정인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서애란을 힐긋 돌아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서애란을 잠시 살핀 뒤 휴대전화를 들고 범람에 접속했다. 이어서 고정인이 설명하는 시간대의 게시물부터 차근차근 확인해 보았다.
[그 칼럼 쓴 헌터가 그렇게 유명해? 뭔데 사람을 저렇게까지 갈구냐] [아니 근데 ㄷㅎ 길드 왜 이렇게 심하게 까이는 거야? 이제 진심 징그러울 정도임] [재작년에 왔던 걔네 같은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린 듯 신촌 영상이나 다시 볼래]고정인이 말한 변수는 마지막으로 눈길이 멎은 게시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전해 들으면서 게시물을 누른 뒤 댓글을 확인했다.
[근데 영상에 나오는 블루는 이름이 뭐임? ㅈㄴ 예쁜데 내가 학교를 안 다녀서 모르겠네] [ㄱㄴㄲ 어그로 병먹금하고 블루 얘기나 하자 얘들아] [그레이랑 블루 얼굴 합 좋은 듯 블루 학교에서도 인기 개많았을 것 같음]“댓글까지 확인했지? 그때부터 범람에 애란이 얘기가 계속 나오기 시작하니까 어그로가 갑자기 타깃을 변경했어.”
[블루=ㅅㅇㄹ 헌터 아카데미 재학 시절 만행 고발 (좋아할 거면 알고 좋아하셈)] [지금 언급 많은 걔 인성 터졌는데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음 이해 불가] [블루 학교 다닐 때 같이 다니던 애들한테 팽당하고 아이보리한테 붙은 거 유명한데] [드디어 터지네 ㅋㅋ 그동안 하고싶은 말 존나 많았는데 잘됐음]그녀의 설명대로 이후 시간대의 게시물을 확인해 보니 게시물의 흐름이 전부 서애란으로 집결된 상태였다.
“처음에는 어그로가 왜 갑자기 이쪽으로 튀어서 애란이를 물고 늘어지는 건가 했는데 이번에도 강효서 짓이라고 생각하니까 답이 나오더라. 걔도 진짜 뒤끝이 만리장성이야. 이관부까지 들어갔으면 됐지, 왜 이렇게 우리를 못 괴롭혀서 안달인지 모르겠다니까.”
그렇게 말하던 고정인은 질린다는 듯 혀를 찼다. 서애란은 달리 대답하지 않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머지않아 시선을 거둔 나는 고정인의 설명을 따라 범람의 흐름을 마저 주시했다. 서애란을 처음 마주했을 무렵 교내에 돌았던 소문보다 한층 원색적인 비방이 담긴 게시물이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ㅅㅂ 난 지금 언급 많은 걔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치가떨림] [헌터 아카데미 안 다녀서 잘 모르는 사람인데 뭔일임? 상황 설명 좀] [ㅅㅇㄹ이 블루였나? 신촌 사고 영상 보는데 헷갈려서] [이번에도 중립 기어 박는다 걍 ㅇㅇ 진실이 모든 걸 해결해 주겠지] [지금 블루 과거가 문제임? 그만 좀 주절거리고 딴 얘기 좀 하자 제발]간단하게 훑어보기만 했으나 서애란을 언급하는 게시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태였다. 이따금 이원석이 작성한 칼럼에 관해 주저리주저리 덧붙이는 게시물도 있는 듯했으나 조회 수도 낮고 댓글의 수도 적었다.
이름의 초성만 바뀌었을 뿐 나를 겨냥한 게시물이 쉴 새 없이 올라오던 때와 분위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흐름을 읽고 있으니 손끝의 온기가 차츰 사라져 갔다.
[드디어 터지네 ㅋㅋ 그동안 하고 싶은 말 존나 많았는데 잘됐음]무의식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눈에 띄는 게시물의 제목을 눌러 보았다.
[저학년 때부터 몇 년만에 나타난 B급 각성 헌터가 어쩌구 하면서 사람들이 띄워 주니까 지가 진심 잘난 줄 알고 나대더니 이제 와서 지 과거 세탁하려는 거 존나 꼴같잖음ㄷㅎㅇ이랑 어울리는 무리에 묻혀서 결백한 척하려나 본데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무슨 짓을 해도 가려지지 않는다는 걸 제발 깨닫길 개과천선 이딴 거 바라지도 않으니까 ㅈㅂ 분수에 맞게 살아]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 많다면 어디 고발 프로그램이라도 나가지그래. 절로 쏟아지는 한숨을 삼키면서 댓글을 확인해 보았다.
[얘는 뭔데 이렇게 화났음? 무지성 어그로 한두 번이냐? 팩트만 가리자 좀] [윗댓 말대로 팩트만 가리면 되지 넌 뭐가 글케 빡치냐?] [ㅅㅇㄹ 걔 ㄷㅎㅇ 동아리 들어가고 얼마 안 지나서 졸업하기 직전까지 자기가 잘못한 애들 한 명씩 찾아가서 사과했어 알 만한 사람들은 알 텐데]수많은 댓글 중에서도 유일하게 눈에 띄는 건 마지막에 달린 댓글이었다. 나는 문득 고개를 들고 서애란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차분한 모습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태블릿을 움킨 손끝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