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39
139화. 진압 (3)
같은 시각, 경기도 파주.
“네, 감사합니다. 저희가 따로 알아야 할 만한 일은 없는 거죠? 뭔가 질문했다던가. 아,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안지유는 천장이 높고 벽이 단단한 공간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잘 도착했대요?”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던 백이현의 질문에 그보다 한참 떨어진 부엌에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안지유가 냉장고를 열고 생수를 꺼내며 대답했다.
“응, 아마 지금쯤이면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했겠지.”
안지유는 비어 있는 유리잔에 물을 한가득 채웠다. 그대로 몇 모금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백이현의 맞은편으로 걸음을 옮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물건을 벌써 넘겨도 되는 걸까. 난 아직 잘 모르겠어. 범람도 고정 이용자가 생겨서 그런지 생각했던 것만큼 쉽게 휩쓸리는 것 같진 않던데.”
그녀는 백이현의 옆에 느슨한 자세로 앉아 근심이 어린 얼굴로 백이현이 보고 있던 화면을 힐긋거렸다.
“개편 이후에 커뮤니티가 커지면서 새로 유입된 이용자가 변수인 것 같아요. 헌터 아카데미에 재학한 적 없는 사람들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이원석 헌터의 발언을 전적으로 옹호하는 중이에요. 어그로는 거기에 힘입어서 온갖 가설을 뿌리고 있고.”
백이현은 안지유의 시선을 알아채고 태블릿을 들어 화면을 보여 주었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던 건 한 게시물의 댓글 부분이었다.
[본문에 동의합니다 칼럼이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게이트 사고가 발생하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죠] [그럼 ㅇㅇㅅ 헌터가 주장하는 대로 (여기는 실명을 언급하면 안 되는 것 같는데 이거 조금 불편하네요^^) 사고를 고의로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건가요?] [윗댓에 대답합니다 아무래도 그런거죠 이제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건지.. 말세네요]그가 들여다보고 있던 건 모두가 모여서 이야기하는 전체 게시판이 아닌 연령대가 높은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게시판인 듯했다. 그녀가 화면에서 눈길을 거두자 백이현이 말을 이었다.
“물건에 대한 건 저도 누나랑 비슷한 생각이기는 한데……. 그래도 선배가 판단한 일이니까 그만한 의미가 있는 거겠죠. 우리 예상대로 일이 풀리기만 한다면 그 사람도 완전히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거만 해도 선방 아니겠어요?”
안지유는 가슴이 답답한 듯 짙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건지 고개를 돌리던 안지유가 허공의 어느 지점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시선 끝에는 창가에 서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대낮부터 어그로가 노리는 타깃이 바뀐 것 같던데.”
백이현은 안지유를 따라서 눈길을 비스듬하게 틀었다. 소녀는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낮게 내려 묶고서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그런 것 같아요. 지금까지 이원석 헌터가 주장하는 억측이나 어그로에는 꿈쩍하지도 않던 사람들이 조금씩 반응하고 있어요. 대놓고 욕할 대상이 특정되니까 내심 하고 싶었던 말을 한두 마디씩 얹는 것 같아요.”
안지유는 어느새 자세를 가다듬고 범람에 접속했다.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게시물을 확인해 보니 백이현이 설명했던 그대로였다.
두 사람의 속닥이는 음성을 듣고 있던 소녀는 고개를 들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전화를 쥐고 있던 손을 떨군 채로 바깥을 내다보니 노을이 여러 갈래의 빛깔로 번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ㅅㅇㄹ 걔 ㄷㅎㅇ 동아리 들어가고 얼마 안 지나서 졸업하기 직전까지 자기가 잘못한 애들 한 명씩 찾아가서 사과했어 알 만한 사람들은 알 텐데]그녀는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방금 보았던 댓글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이윽고 휴대전화를 거머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실리면서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 * *
공희찬이 예약해 두었다던 중식당은 어딘가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서 향한 곳은 식당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예약석이었다.
“어, 왔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찻잔을 쥐고 홀짝이던 공희찬이 나를 반겼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면서 그가 앉은 자리 옆에 착석했다.
공희찬이 주전자를 들고 두 개의 잔을 차례로 채웠다. 이어서 잔 하나를 내 앞으로 건넨 그는 문간을 돌아보았다. 어느덧 약속 시간이 되었으나 기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고마워.”
나는 공희찬이 내어 준 보이차를 마시면서 머릿속으로 계획을 점검해 보았다. 사태가 악화되는 걸 보면서 기자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하기는 했으나 막상 그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생각하면 머릿속에 안개가 드리운 것처럼 막막했었다.
하지만 익명의 후원자가 보내온 자료가 결정적인 패로 부상하면서 판이 뒤집혔다. 자료를 받고 과거의 기억을 되짚다 보니 그물처럼 구멍이 뚫려 있던 계획을 촘촘하게 메꿀 수 있을 만한 힌트도 더러 얻을 수 있었다.
드르륵―
짧은 기다림 끝에 누군가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나와 공희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기까지 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무겁게 늘어진 검은색 가방을 어깨에 걸친 그는 나와 공희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따라서 엉성하게 인사했다.
“예, 안녕하세요.”
이 자리가 그다지 달갑지 않다는 내색을 대놓고 드러내던 그는 내부를 둘러본 뒤 자리에 앉았다.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나는 순간 이상한 지점을 감지했다.
“NBS 오한빈 기자입니다. 두 분에 대한 건 전해 들었으니 소개는 생략하죠.”
자신을 오한빈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면서 명함을 건넸다. 그대로 받아 들고 명함에 적힌 이름과 얼굴을 비교해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달싹였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오한빈.
나는 보이차를 느릿하게 한 모금 삼키면서 전생의 기억과 앞으로의 계획을 바쁘게 되짚어 보았다.
“전후 상황은 전해 들으신 듯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 * *
“음, 뭘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연예인 SNS 포스팅이나 대형 커뮤니티의 게시물을 긁어서 기사로 쓰는 인터넷 뉴스면 몰라도 방송국에서는 이런 사안을 뉴스로 다루지 않습니다. 일반인들은 그런 걸 구분하는 게 어려울 테니 이해는 합니다.”
나와 공희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오한빈의 대답은 이러했다. 오한빈은 우리를 얕잡아 보고 있다는 걸 행동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가 선택하는 단어에서 그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굳이 뉴스를 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해결이 가능한 사안 같아 보입니다. 제삼자로서 보기엔 그쪽에서 너무 과민 반응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인터넷에서 사람들끼리 싸우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요?”
대답을 바라고 건넨 질문이 아니었는지 그는 곧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
“무엇보다 이관부의 이원석 헌터가 멀끔한 척 온갖 곳에 시비 걸고 다니는 건 이미 우리 기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얘기입니다. 무려 헌터씩이나 되시는 분들이 그걸 모르진 않으셨을 것 같은데. 그 사람이 쓴 칼럼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전후 사정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대안을 차례로 언급할 때는 묵묵부답이던 오한빈이 혼자서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전 지금 행정 부서에서 근무하는 중이라 뉴스 리포트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매체를 이용해 보고자 기자를 불러 달라고 부탁한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이 없다는 뜻이에요. 어떻게든 기사를 내는 게 목표라면 다른 쪽에 연락해 보세요. 요새 뉴스만 봐도 기자들 이메일 다 나와 있고, 연락할 방도는 차고 넘치니까.”
그 말을 끝으로 오한빈은 근처에 뒤집어 두었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무척 당황스러웠다.
내가 기억하던 전생의 오한빈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대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 공희찬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달싹이는 모습이 눈에 들었다. 곁눈으로 살펴보니 무릎에 놓인 검은색 수첩을 쥐고 달싹거리는 듯했다.
그의 시선 또한 손아귀에 담긴 수첩을 향해 있었다. 무언가를 망설이거나 고민하는 건지 수첩을 거머쥔 엄지로 모서리를 계속 매만지는 중이었다.
그러던 그가 무언가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예, 경험에서 우러나온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저희 같은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셔서 참 감사하네요. 몰랐던 걸 알게 돼서 어찌나 유익했는지.”
내내 쥐고 있던 수첩은 한 손으로 쥔 채 힘껏 움키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방금 뭐라고 하신 겁니……. .- ”
“어우, 왜 이러시나. 방금까지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죄 쏟아 낸 건 기자님이셨잖아요? 대답할 틈도 안 주고 속사포처럼 읊었으면 우리한테도 순서를 주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죠?”
오한빈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끝을 조금 올리면서 되묻는 소리를 내던 공희찬이 숨을 크게 골랐다. 나는 가만히 앉아 공희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공희찬도 이유 없이 나선 건 아닐 테니까. 그와 함께 기자를 만나기로 생각했던 것도 나 자신인 만큼 우선은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한 재작년 겨울쯤으로. 그때 헌터 아카데미 학생이 만든 걸로 추정되는 익명의 정보 공유 커뮤니티 들불과 성문 길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게 밝혀지면서 큰 파장이 일어난 건 기억하고 계시죠? 모를 리가 없으시겠죠. 그 사건에 대한 뉴스 리포트만 네 번이나 하셨으니까.”
“당시에 제가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느라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하루 종일 뉴스만 찾아봤거든요. 그러면서 일반인답지 않게 모든 매체의 뉴스를 낱낱이 다 분석해 보다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어요.”
오한빈은 이따금 헛숨을 터뜨리거나 인상을 미세하게 찌푸리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던 중 공희찬이 일반인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순간 무어라 입을 떼려 했다.
“들불과 성문 길드의 관계를 파고드는 과정에서 해당 커뮤니티의 관리자였던 강효서에 대한 걸 뉴스에서 파고들 법도 한데, 막상 포커스는 성문 길드 마스터 아들한테 맞춰지고 뉴스에서 강효서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건 기자님밖에 없더라고요?”
“아니, 그건.”
“그게 저 같은 일반인한테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어서 그동안 기자님의 리포트를 쭉 따라가 봤어요. 그런데 그 사건이 있고 몇 달이 지난 뒤부터 연예부로 부서를 이동하신 듯하더니 이제는 행정 부서에 계신다고 해서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네요.”
그 말을 끝으로 공희찬이 나에게 순서를 넘기겠다는 듯 턱짓해 보였다. 이건 되도록 안 쓰려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유에스비를 꺼내 가까운 곳에 내려놓았다.
“앞서 말씀하시기로는 저희가 아무 생각도 없이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큼, 그게 뭡니까?”
“작년 겨울 즈음, 찌라시로만 돌던 효신 그룹의 주가 조작 정황 증거입니다. 이걸 뉴스로 만든다면 기자님께서도 다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을 겁니다.”
공희찬이 은연중에 암시했던 대로 그가 부서 이동을 통해 물러난 건 효신 그룹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인 듯했다. 아니었다면 유에스비를 내려다보는 오한빈의 눈빛이 다른 사람처럼 뒤바뀌지 않았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