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4
14화. 불가항력에 맞서는 (4)
보건실 침상에 홀로 남아 있던 설연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방으로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서둘러 나서는 도해월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설연호는 문밖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즈음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이윽고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면서 시스템 창을 끌어 눈앞에 띄웠다.
[설연호 ― 각성자• 보유 스킬 목록
‣ 아클레피오스의 의지 (S)
‣ 신성한 치유의 손길 (A)
‣ 정화 (B)
‣ 통증 감소 (B)
‣ 공포 저항 (B)
‣ 망각 (C)
‣ 망각의 샘물 (미개방)]
다시 보니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에는 어이없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심정이 섞여 있었다.
설연호는 가장 상단에 자리한 ‘아클레피오스의 의지’를 눌러 보았다.
[‣ 아클레피오스의 의지 (S)의술의 신 아클레피오스의 의지를 전승합니다. 숭고한 뜻을 이어받은 치유자의 의지로 혼수상태인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시전자의 주변 반경을 의술의 권역으로 지정하여 신의 가호가 담긴 치유 필드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설연호는 푸른 빛을 내는 글자를 손끝으로 쓸면서 스킬의 내용을 정독했다.
이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이 스킬은 도해월과 함께 들어간 던전에서 얻은 것이었다.
‘눈앞에 신전이 보이는 순간 바로 꺼내서 마시면 돼. 신전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워낙 강렬해서 저항하기 쉽지 않겠지만, 잘만 하면 움직일 수는 있을 거야.’
포션을 쥐어 주던 그 순간 자신을 보는 도해월의 얼굴은 그를 알고 지낸 시간 동안 처음 보는 것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갈증을 해소하려는 욕망, 믿음과 안도, 오만으로 여겨질 만큼 뚜렷한 확신. 그 모든 것이 나란히 어우러지며 단단한 결의를 빚어냈다.
훈련 기간 동안 도해월이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몸소 절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 봤자 게이트 고아에 등급이 낮은 헌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쟤는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거지. 그러고 나는 왜, 마지막 남은 포션을 걔한테 줬을까.’
도해월이 떠나간 후 설연호는 이미 축 늘어진 조원들을 돌아보며 귀환석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면서도 설연호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도해월이 머릿속으로 어떤 수를 그리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도해월은 물건을 찾으러 간다고 했지만, 뒷배도 없는 그가 특별한 정보를 얻을 순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또, 던전 정보를 알고 있는 걸 보면…….’
‘아흑, 이러다 죽겠어.’
‘제발, 이제 빨리 돌아가요. 진짜 죽을 것 같으니까 제발…….’
그때 늘어져 있던 조원들이 차례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이들을 두고 그나마 의식이 남아 있던 설연호는 떠나려는 도해월을 막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를 불러 세워 귀환석을 가져오라고 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이다.
도해월을 기다리기로 한 건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그러니 책임은 도해월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설연호는 도해월을 기다리는 것을 선택기로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로 결심했다.
한데 모여 쓰러져 있던 조원들의 어깨에 차례로 손을 얹은 설연호가 눈을 감았다.
이내 체내에 남아 있던 모든 마나를 남김없이 소진하여 자신이 가진 치유 스킬을 전부 중첩하여 전개했다. 그는 자신의 해독에 필요한 마나까지 모조리 쏟아 냈다.
십여 분의 시간이 지났을 즈음 실신한 채 쓰러져 있던 조원들의 안색이 차츰 나아졌다.
그 순간 멀리서 돌아오는 도해월의 모습까지 발견한 설연호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덜컥거리는 타격감에 설연호가 반사적으로 눈을 절반쯤 뜬 순간, 눈앞엔 푸른 활자가 떠올라 있었다.
[사용자가 새로운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현 시각부터 ‘아클레피오스의 의지(S)’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얘는 언제쯤 일어나려나.”
중얼거리며 침상으로 다가와 커튼을 살포시 열어젖힌 보건교사와 눈이 마주쳤다.
“어? 일어나 있었네?”
안도하며 반색한 보건교사는 이내 커튼을 활짝 열면서 설연호에게 다가갔다.
“몸은 좀 어때. 마나 수치는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전부 회복했어. 조금만 더 늦게 나왔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나도 장담 못 할 정도였고.”
“아……. 네.”
“대답이 그게 다야? 대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어? 분명 귀환석도 들려서 보냈는데 쓸 생각을 안 했다며. 선생님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도해월 학생한테는 대답을 못 들을 것 같아서 일부러 안 물어봤어. 그래도 연호 너는 대답해 줄 수 있지?”
“그게, 음…….”
설연호는 말라서 버석해진 입술을 말아 물면서 말끝을 늘렸다.
보건교사의 질문은 스스로에게도 묻고 싶은 것이었다.
‘대체 내가 왜 그랬던 거지?’
도해월이 게이트 고아라서? 과거에 그 사실을 알고 도해월을 향한 심리적 거리감이 조금이나마 좁아졌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은 아주 오래전에 설연진의 양자로 입적했으므로 이제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아직도 몸이 안 좋아? 수치만 보면 얼추 나아졌을 텐데.”
엄하게 채근하다가도 염려하며 말을 붙이는 보건교사를 보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조금 어지럽기는 한데 훨씬 괜찮아졌어요.”
“그래, 다행이다. 오늘까지는 경과를 지켜봐야 하니까 답답해도 저녁까지는 여기 있어. 그렇게 해도 괜찮지?”
“네, 괜찮습니다.”
보건교사는 무어라 주의할 상황을 몇 가지 더 전한 뒤 다시 커튼을 닫아 주었다.
다시 혼자가 된 설연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과 마주했다.
‘도해월은 내가 살생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설연호에게는 이미 두 번의 실습 경험이 존재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다른 조원들은 설연호가 살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심했었다.
그중 하나는 아무리 힐러라고 해도 공격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면서 왜 피하는 거냐며 매섭게 다그친 적도 있었다.
‘단순히 그것뿐일까.’
설연호는 잠잠히 고개를 저었다.
실습을 함께한 조원들은 물론 교사들 또한 도해월이 모범적인 조장은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 또한 그 사실에 동의했으나 다시 한번 도해월을 따를 기회가 생긴다면 마다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리어 기회만 된다면 다시 함께하고 싶었다.
‘도해월이 아니었다면 새로운 스킬을 얻지 못했겠지. 무엇보다 처음부터 도해월은 남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었어.’
설연호가 그 던전에서 얻은 건 ‘아클레피오스의 의지’ 스킬만이 아니었다.
아직 해금할 수 없는 미공개 스킬인 ‘망각의 샘물’이 있었으니까.
다시 시스템 창을 띄운 설연호는 미공개 스킬로 표시된 ‘망각의 샘물’을 건드려 보았다.
[‣ 망각의 샘물(SS)미개방 스킬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개방 후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또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미개방 스킬의 존재는 꽤 어린 나이에 각성한 설연호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직 사용할 수 없다면서 왜 시스템 창에 뜨는 거지? 어떻게 개방할 수 있는 건데? 무슨 조건이 따로 있는 건가?’
이름으로 유추해 보건대, 자신이 이미 습득한 스킬인 ‘망각’과는 분명 구분되는 것일 터였다.
그것 말고는 알 수 있는 것이 더 없었지만, 도해월이 아니었으면 두 스킬을 얻지 못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던전을 중간에 포기하고 나가기만 했더라도 얻지 못했을 거니까.
‘망각’ 스킬은 단어 그대로 정신계 공격에 처해 괴로워하는 헌터에게 일시적으로 망각을 부여하여 고통에서 탈피할 때 사용한다.
‘망각의 샘물’은 같은 단어를 공유하고 있었지만 스킬 레벨과 이름을 보니 기능은 전혀 다른 듯했다.
‘도해월의 예상에 이런 결과도 있었던 걸까. 일부러 나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면서 스킬을 얻게 만들었을지도 몰라.’
설연호는 문득 과거의 도해월과 현재의 도해월이 같은 사람인 건 맞는지 궁금해졌다.
혹여 아니라면 자신이 만난 도해월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지도.
* * *
나는 공희찬에게 받은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굳이 헤아려 듣지 않았다.
개중 호기심이 많은 누군가는 조심스레 말을 붙이며 다가오려 해도 모르는 척 지나갔다.
‘지령’을 수행하러 가려면 앞으로 일주일 정도 남았어.
방학식을 진행하고도 사흘을 더 지내야 하니 제법 여유로운 편이고.
쪽지에 적힌 활자를 곱씹으며 4층에 다다를 즈음 누군가 소리쳤다.
“헐, 도해월 선배다!”
“어디? 어디? 누군데? 저 사람이야?”
“어, 저 선배가 들어갔던 던전 등급이 C등급에서 A등급으로 갑자기 상승했다며.”
“그것 때문에 수업하던 쌤들도 갑자기 회의하러 나갔어. 들리는 말로는 길드한테 책임이 있는 문제라 법적 공방까지 갈 수도 있대.”
“나 수업할 때도 그러던데. 우리 담임도 돌아와서까지 엄청 심각한 표정이었어.”
“그러니까 저 선배랑 다른 선배들이 던전에서 죽을 뻔했는데 살아서 돌아왔다는 거지?”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음이 커지더니 이내 구름처럼 부푼 무리가 나에게 다가왔다.
일전에 그러한 것처럼 최대한 모르는 척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나를 둥글게 감싸며 모여든 5학년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런. 하필 4층에서 걸릴 게 뭐야.
5학년이 되어 고학년 대열에 오른 학생들은 유난히 힘이 넘치는 듯 보였다.
한 해만 지나면 현장 실습에 나가게 될 수 있어서인지 시종일관 묘하게 들뜬 상태겠지.
“도해월 선배 맞죠! 선배네 조가 A급 던전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얘기가 지금 학교에 쫙 깔렸어요! A급 몬스터 처치했다고 들었는데 진짜예요?”
무리의 가장 앞쪽에서 밀리지 않으려 힘을 주고 버티던 여학생이 말했다.
“저 진짜 궁금한 게 있었는데……. 살짝 예민한 질문인데 얘기해도 될까요? 누가 A급 몬스터 나타났다는 거 사실 거짓말이라고 하는 걸 들었어요. 그거 진짜예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 질문을 신호탄 삼아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탓에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모든 이들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토씨만 조금씩 다를 뿐 거의 비슷했다.
마음 같아서는 가서 너희 할 일이라 하라며 내쫓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성가시기는 해도 후일을 위해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지금의 나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행보로 나아가기 위한 계획을 구상 중이다.
그 첫발은 나에 대한 소문이나 이미지부터 바꾸는 것. 나중에 나의 세력을 만드려면 지금부터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줘야 한다.
그래, 일단 참자.
“어디서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출처가 불분명한 말은 믿지 말았으면 하는데.”
고심 끝에 내뱉으면서 얕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수많은 인파 사이에 몰려 있으니 두통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뭐야? 진짜인가?”
“야, 진짜겠냐? 누가 목숨 걸고 그런 짓을 해.”
“할 수도 있지! 저 선배 6학년인데 D급밖에 안 된다며. 어떻게든 튀어야 길드 사람들이 보고 스카우트할 것 아니야.”
“선배, 진짜 선배가 일부러 거짓말 퍼뜨린 거예요? 다들 멀쩡하게 돌아왔다던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으면 누가 다쳐서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제발 조용히 하고 너희 교실로 들어가면 안 될까.
나는 그 말을 삼키면서 옹기종기 모인 머리꼭지를 내려다보았다.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싶어 고민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 줄래. 지나가고 싶은데.”
몇 마디 대꾸해 주었더니 그새를 못 참고 이전보다 수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4층과 연결되는 계단의 마지막 칸에서 난간을 쥐고 중심을 잡았다.
고개를 들고 복도를 내다보니 소문이라도 난 건지 구석에 있던 교실 문까지 활짝 열린 것이 보였다.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팻말을 보니 라고 적힌 것이 보였다.
그 앞으로 4, 3, 2, 1 반의 팻말이 순서대로 달린 모양새를 훑어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 교실들 중에 내가 설연호 다음으로 찾고 있는 다른 부대원이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그 녀석을 찾을 수도 있을 텐데. 지금 어디 있으려나.
나는 소란스러운 복도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고개를 더 젖혔다.
근처로 모인 이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더니 이제는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내 시선이 복도 끄트머리로 향할 즈음 발견한 건 의외의 사람이었다.
홍원하? 6학년이 왜 4층에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