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40
140화. 진압 (4)
오한빈 기자와의 만남을 마무리하고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훌쩍 넘어서 있었다. 그는 내가 내민 유에스비와 그 안에 담긴 자료를 확인한 뒤 짧은 고민 끝에 우리를 돕기로 약속했다.
정확히는 우리를 돕는 동시에 한창 성장하던 자신을 주저앉힌 효신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겠다는 결심이 동반된 협업이었다. 그는 방송국으로 돌아가는 대로 믿을 만한 동료들을 모아 취재팀을 결성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
집무실에 도착한 뒤 일과를 마무리하고 범람을 확인하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마저 범람을 확인했다.
[블루가 과거에 무슨 짓을 했든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특] [헌터 아카데미 안 다녀서 모른다는 사람들 위한 요약 정리 (시간 순서대로)] [나 ㅅㅇㄹ이랑 실습 같은 조였던 애랑 친구였는데 개는 그때도 이상했음] [신분 세탁이니 뭐니 말이 심하다는 사람들 존많인데 그럼 니들은 뭐가 중요함?ㅋㅋ] [이때다 싶어서 욕하는 사람들이랑 개인적으로 상종하고 싶지도 않음 다들 왜저래] [솔직히 난 ㄱㅎㅅ 몰릴 때 ㅅㅇㄹ만 잠잠한 게 오히려 이상했음] [지금 블루 옹호하는 애들은 님들 가족이 같은 일 겪었을 때도 중립 운운할 거임?]나는 휴대전화 액정에 얹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게시물의 흐름을 확인해 보았다. 재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출몰한 어그로꾼은 어느 순간부터 지난 게시물들과 화법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뭣도 모르면서 중립이니 뭐니 블루 얘기까지 들어야 한다느니 뭐니 떠드는데 그만 좀 했으면 좋겠음심지어 ㄱㅎㅅ 무리한테 팽당했을 때는 멋대로 지각하고 수업 도중에 뛰쳐나가고 했던 애였음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거야 뭐 지 인과응보지 잘됐다고 본다
암튼 이거 됐고 아직 밝혀진 게 없다고 해도 소문이 괜히 나는 거겠어? 다들 정신 좀 차리고 현실을 직시했으면 난 걔가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어서 이 흐름이 놀랍지 않음 사실]
마지막으로 눈에 띈 게시물의 본문을 읽고 있으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그로꾼들은 이제 특정 대상을 무작정 욕보이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방식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택한 방법은 서애란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까지 동요할 수 있도록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내 말이 바로 이거임 속이 다 시원하네] [걔한테 당한 사람들이 있다는데 다른 게 뭐가 중요함? 재고 따지지 좀 마셈] [난 학교 다닐 때부터 걔가 그냥 이유 없이 싫었음 맨날 무표정으로 다니는데도 주변 사람들이 찬양해 주니까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나대는데 꼴도 보기 싫더라]이윽고 수십 개가 넘는 댓글을 확인하니 사용하는 어휘만 조금씩 다를 뿐 일관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착잡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댓글을 마저 읽어 보았다.
[근데 너는 걔가 그럴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블루가 괴롭힌 적 있어?] [‣ 아니 그런 적 없어 근데 그냥 이렇게 될 줄 알았음 첨 봤을 때부터 존나 쎄했거든]서애란을 욕보이는 사람들의 논리는 대개 비슷했다. 그동안 자신이 지켜본 서애란에 대한 부정적인 감상을 구구절절 나열한 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뉘앙스의 말을 덧붙이면서 주장을 마무리했다.
그러한 감정을 느낀 계기에 관해 물어보는 질문의 답은 전부 똑같았다. 어느 순간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느낌’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소신발언 하나 함난 지금까지 베어즈 편이었거든 칼럼에서 베어즈가 경솔했네 어쨌네 하면서 이관부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했고 그게 엄청 무거운 사안이라고 떠들 때도 걍 늙다리 예민충이 훈수 둔다고 생각했는데 블루 얘기 하나씩 풀리는 거 보니까 생각이 달라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서는 것 보면 진짜 뭔가 있는 거 아니겠어?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말 나오는 것 보면 그중 하나는 진짜겠지
나 진짜 몇 주 동안 블루 때문에 너무 행복했는데… 진심으로 응원하던 사람한테 배신당하니까 너무 괴롭고 슬프다
내가 블루 찐덕이었던 거 갤러리 캡처 화면으로 인증함 이제 다 삭제할 거임]
이런 식으로 여론을 조성하면서 마녀사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다른 것보다도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서애란이 걱정됐다.
그대로 고개를 젖힌 채 느릿하게 숨을 고르고 있으니 문간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내 가까운 곳에서 기척이 선명해졌다.
“해월이 안녕. 아직 집무실에 있을 줄 알았는데. 벌써 넘어왔네?”
“안에 있어 봐야 답답하기만 하더라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면서 인사를 건넨 고정인이 자리에 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따라서 눈가에서 손을 거두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도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쭉 보고 있었어. 예성이한테 잠깐 넘기고 조금이라도 눈 붙일까 했는데 가만히 누워 있자니 가슴이 막 답답해져서 도통 잠들 수가 있어야지.”
고정인은 커다란 가방을 열고 노트북을 비롯한 여러 기기를 꺼낸 뒤 익숙한 모양으로 세팅했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거나 우리를 옹호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더라. 사람 하나를 작정하고 몰아가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순식간에 화력이 두세 배로 늘었어.”
말끝을 흐리면서 내쉬는 한숨에서 허탈한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 역시 그녀와 같은 심정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무슨 방패처럼 세워 놓고 벌 떼처럼 달라붙어서 욕하는 지금 상황 자체가 너무 소름 돋아. 그보다 더 이상한 건 전날부터 지금까지 강효서를 언급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던 고정인은 노트북을 반쯤 틀어 화면을 보여 주었다.
“어제 새벽에는 이런 글도 올라왔고. 아예 애란이를 몰고 가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돌아서니까 여론 몰이 하는 사람들도 다음 작전으로 넘어간 것 같아.”
[나 사실 재작년부터 얘기하고 싶은 게 있었음]나는 고정인이 화면에 띄운 게시물의 제목을 확인한 뒤 본문에 적힌 내용을 읽어 보았다.
[아직도 블루 잘못 인정 안 하고 뺴액거리는 애들은 블루가 잘못한 게 전부 ㄱㅎㅅ랑 그 무리가 시켜서 그런 거고 블루도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면서 참다가 도망치듯 빠져나온 거라고 하던데 그게 말이 되냐?블루가 뭔 미취학 아동도 아니고 ㅋㅋ 심지어 걔는 헌터 아카데미에서도 몇 없다는 B급 각성 헌터인데 그 똑똑한 애가 다른 사람이 자기 조종하려는 걸 몰라서 거기 있었겠냐고 나였으면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순간에 바로 뛰쳐나왔을 거야
글고 왜 블루가 일방적으로 괴롭힘당했을 거라고 생각함? 걔가 ㄱㅎㅅ를 괴롭혔을 가능성도 있는 거 아냐? 작년 ㄷㅂ 이용자 공개처형이나 ㄱㅎㅅ 사촌 ㄱㅎㅇ 쫓아냈을 떄도 그렇고 블루도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스킬로 정신 지배해서 조종하는 것 같던데]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강효서가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감이 잡히는 듯했다. 지금 시점에서 서애란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제시한 뒤 차근차근 반박하는 대목은 너무도 집요해서 조금 섬뜩할 정도였다.
“자기를 이용하는 걸 아는데도 왜 거기서 못 빠져나왔냐고 욕하는 사람까지 나온 걸 보니까 이제는 좀 웃기더라고. 그런 사람들은 본인 세계에만 갇혀 사느라 자기가 얼마나 편협한지도 모르겠지. 뚫린 입이라고 말하면 다인 줄 아나.”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이던 고정인이 씩씩거리면서 메신저로 링크를 보내 줬다. 그녀가 따로 모아 둔 링크를 차례로 접속해 보니 전부 강효서를 옹호하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강효서가 서애란에게 악행을 지시한 것도 문제지만 그의 지시를 직접 실행한 서애란의 잘못이 더욱 크다는 의견도 존재했다.
“이것까지 보니까 익명의 후원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 자료를 보낸 건지 알 것 같아. 그게 왜 우리한테 필요하다고 말했는지도.”
나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이어 나가는 고정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도 마찬가지야. 더해서 이 자료를 우리한테 넘겨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강효서 선배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선배가 웬만한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자료를 일단 터트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문을 열자 고정인이 나와 눈을 마주쳐 왔다. 고정인도 내 의견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이고 대답했다.
“이렇게 이목이 집중됐을 때 이번 일을 기회 삼아서 강효서를 제대로 무너뜨리지 않으면 앞으로 더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겠지? 강효서랑 차진명이 아무 문제 없이 이관부에 입사한 걸로 모자라서 차정주 이사장까지 총선에 출마한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그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졌어.”
고정인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앞으로 그들이 위험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강효서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그녀의 예감은 머지않은 미래에 고스란히 실현될 것이었다.
지잉―
그녀에게 대답할 말을 고르던 중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NBS의 오한빈 기자였다.
“네, 도해월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대로 효신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던 다른 기자와 좀 더 조사해 보니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어요.
“어떤 거죠?”
―주가 조작을 통해 얻은 수입의 일정 수준 이상이 효신 그룹이 운영하는 장학 재단으로 흘러 들어간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그 재단에서 그동안 재능은 출중해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걸로 이미지를 구축해 왔으니 이걸 건드리면 타격이 생각보다 훨씬 클 겁니다. 이걸 구체적인 뉴스로 만들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해서 전화를 먼저 드렸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오한빈은 취재팀의 다른 기자를 통해 신촌 게이트 사고 당시 우리가 구했던 대학생의 인터뷰를 확보했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는 오늘 저녁에 서면으로 업로드된다는 말을 전한 뒤 통화를 종료했다.
“오늘 저녁에 게이트 사고에서 우리가 구했던 대학생의 인터뷰가 공개될 거래. 하지만 선배도 알다시피 그것만 올려서는 기세를 뒤집을 수 없을 거야.”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나는 고정인을 돌아보면서 머릿속으로 계획을 구상해 나갔다. 지금 범람에서 나돌고 있는 서애란의 과거 행적은 대부분 추측이나 과장으로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오한빈 기자가 뉴스를 준비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으니 우리도 여기서 반격을 준비하자. 우선 예성이한테 연락해서 오늘 일정은 다 취소하고 사무실로 출근하라고 전해 줘.”
이제는 서애란과 관련한 사실은 물론 강효서에 관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내가 떠올린 건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을 그들, 보이지 않는 청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