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 마침내 떠오른 (2)
강효서는 투명한 창살처럼 내리꽂히는 빗물을 가르며 걷고 또 걸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제멋대로 휘어 대는 우산은 거리에 내버린 지 오래였다. 온몸을 흠뻑 적신 채 한참을 걷던 그가 다다른 곳은 한국마력연구소였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통로를 통해 연구소에 들어선 그는 마지막으로 숨을 골랐다.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고른 강효서가 표백제를 풀어 놓은 것처럼 환한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미로처럼 굽이진 공간을 능숙하게 가로지르던 강효서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잔뜩 젖은 탓에 주머니를 살피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그의 안쪽에선 모래성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모래성 꼭대기에 꽂혀 있던 깃발을 떠올렸다. 효신의 애물단지에 불과했던 자신을 정상으로 이끌어 준 차진명이 꽂아 넣은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했다. 자신을 직접 택한 뒤 곁에 두었던 차진명이라면 이번에도 빠져나갈 계책을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간신히 카드 키를 꺼낸 강효서는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보안장치에 접촉해 보았다. 어서 이 문을 열고 들어가서 결국 자신을 내친 효신에 대한 분노를 쏟아 내고 싶었으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카드 키를 다시 대 주세요.
경고음과 함께 보안장치에서 여성의 인위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효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카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어서 다시 한번 보안장치와 카드를 접촉했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카드 키를 다시 대 주세요.
“뭐야? 이거 왜 이래?”
그대로 두어 걸음 물러난 강효서가 닫힌 문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문 너머에 분명 차진명과 성민주가 머물러 있을 것이었다. 오늘은 그 두 사람이 이곳에 오는 날이었고, 자신의 연락은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뉴스는 분명 접했을 터였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카드 키를 다시 대 주세요.
―신원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카드 키를 다시 대 주세요.
―신원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카드 키를 다시 대 주세요.
강효서는 계속해서 보안장치와 카드 키를 접촉해 보았으나 여성의 기계적인 음성이 중첩되어 울리면서 복도에 다소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어느새 손을 떨면서 마지막으로 보안장치와 접촉하자 보안장치에 붉은 불이 켜졌다.
위잉―
―침입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침입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침입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체온이 점점 떨어지면서 온몸을 떨던 강효서가 닫힌 문을 힘껏 걷어찼다.
“이런 씨발.”
이윽고 그는 손잡이가 없는 문을 노려보더니 주먹으로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진명아, 나야. 네가 나한테 준 카드 키가 이상한 것 같아. 왜 문이 안 열리지? 와서 좀 열어 줘라. 어? 야, 당장 문 열라고 이 씨발 새끼야!”
쾅! 쾅! 쾅!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한 강효서가 약간의 틈도 보이지 않는 문을 연이어 걷어찼다. 이윽고 사이렌 소리가 뚝 끊기면서 복도가 다시 고요해졌다.
“아니잖아. 네가 나한테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 야, 차진명! 성민주, 너도 안에 있는 것 다 아니까 나오라고! 이 씨발!”
간절하게 외치던 강효서는 닫힌 문에 이마를 처박은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찰에서 조사를 시작할 거라던 기획실장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검찰이 자신의 공간에 들이닥치면 자신은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에 아찔해진 듯 웅크린 어깨를 크게 떨기 시작했다.
“설령 검찰이 수사하러 온다고 해도 나만 죽진 않을 거야.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일을 꾸민 건데. 씨발, 그걸 아는 새끼가 왜 문을 안 열고 버티는 건지는 몰라도 이건 그냥…….”
그때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누군가 주저앉은 강효서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선배,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예요?”
“진명아, 너 왜 문을……. 어, 네가 왜 여기에.”
강효서는 자신과 달리 멀끔한 차림으로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고 서 있는 누군가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속눈썹에 물기가 내려앉은 탓에 시야가 희뿌옇게 변모하면서 그의 모습이 분간이 되지 않았다.
‘도해월인가? 그 자식이 여기 올 리 없는데. 그 씨발 새끼가 아니라 이건…….’
순간 자신도 모르게 도해월을 떠올린 강효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고개를 들었다. 흐릿하던 시야 또한 또렷해지면서 눈앞에 선 사람의 형상이 선명해졌다.
“강준희, 너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강준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뒤를 돌아보는 그의 살갗이 유난히 창백했다.
머지않아 멀리서 보안실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 서넛이 달려왔다. 이내 주저앉은 강효서를 일으켜 억지로 끌고 나갔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나 다 불어 버릴 거야. 내가 아는 거 싹 다 불어 버릴 거라고! 절대 혼자 안 죽어!”
계속되는 발악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짓던 강준희가 고개를 내저었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복도를 둘러보며 숨을 고른 그가 고개를 반쯤 숙였다.
강효서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그가 쏟은 빗물만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일 년, 아니 반년 전만 해도 저 강효서의 아래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크큭.”
강준희는 차진명과 독대하던 순간 그와 마주쳤던 서늘한 눈을 떠올렸다. 이 순간에도 그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차진명의 곁에서 한 계단씩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도해월은 분명 나보다도 등급이 낮았었어. 그 힘이 내 것이 되었다면 그 자리엔 내가 있었겠지.’
순간 강준희의 눈동자에 탐욕의 빛이 선연하게 스쳐 지나갔다.
* * *
오전 시간에 신문사와의 인터뷰를 마무리한 이후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저녁이 깊어질 무렵 길을 나섰다. 내가 다다른 곳은 사양 길드의 사무실이었다. 미팅룸에 앉아 있던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운 김수호를 기다리면서 휴대전화 액정을 주시했다.
[블루 악플 관련 PDF 제보받음 ― 취합해서 ㄷㅎ 길드에 전달 예정] [야 아이보리 인터뷰 봤는데 말 되게 잘한다 그동안 터진 의혹 다해명해줌] [이쯤에서 다시 보는 ㄱㅎㅅ 폭로글 정리 (ㄱㄱㅈㅇ)(스크랩)] [이렇게 되니까 내 속이 다 시원하다 ㅋㅋ 등신새끼 드디어 나락가는구나] [ㅎㅅ에서 ㄱㅎㅅ 손절 친다는 소문 있던데 사실일까? 그쪽에서 고소한다던데] [다들 뉴스 보고 있음? 이번에 진짜 제대로 물었네] [아이보리 인터뷰 떴음 링크 첨부함]오늘 오전에 진행된 인터뷰 기사가 올라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범람에서도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 마지막으로 눈에 띈 게시물을 눌러 보았다.
[클릭하면 바로 인터뷰로 이동됨 내용 좋으니까 시간 내서 읽어봐라]
이어서 첨부된 링크를 눌러 인터뷰가 제대로 게시되었는지 먼저 살펴보았다. 오늘 만났던 기자는 내가 했던 말을 곡해 없이 전부 전달해 준 상태였다.
[하 드디어 뜨는구나 블루맘 안도하고 갑니다] [‣ 며칠 내내 피의 실드 치느라 죽는 줄 ㅠ 블루야 고생했다 진짜] [나 학교 다닐 때부터 얘네 동아리 진짜 들어가고 싶었는데.. 이제라도 방법 없나?] [‣ ㄴㄷ 그레이랑 걔네 누나 들어간 거 보면 등급 차별은 없는 것 같은데] [‣ 듣기로는 얼마 전에 사무직원 뽑았고 소속 헌터는 스카우트 중이래] [인터뷰 내용 진짜 좋다.. 그래서 도해 길드는 사람 안 뽑는대? 나 진지하게 이력서 넣고 싶어서 그럼] [아는 사람한테 들었는데 ㅂㅇㅎ헌터 ㄷㅎ길드 들어갔대 이제 탄탄대로 밟는일만 남았음] [하 씨 인터뷰 개벅차다 ㄱㅎㅅ 드디어 인실좆 된다고 생각하니까 눈물 남]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은 기분 ㅠ 시범 운영 때부터 범람 알던 애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거야]끝도 없이 달린 댓글을 천천히 읽던 나는 마지막 댓글에서 시선을 멈추고 오래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그때 파일철을 손에 쥔 채 미팅 룸으로 되돌아온 김수호가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면서 그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가 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답을 듣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던 김수호는 맞은편에 앉으면서 파일철을 내밀었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더는 수정할 사항이 없을 듯하니 확인해 보시고 궁금한 점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간결하게 인사한 뒤 그가 내민 서류를 차분하게 검토해 보았다. 혹여 사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을까 싶어 면밀히 살펴보았으나 달리 걸리는 지점은 없었다.
“조만간 한국관광공사에서 도해 길드 쪽으로 연락이 갈 겁니다. 절차상 마지막으로 확인할 사항이 있어서 그런 걸 테니 염두에 두면 됩니다.”
내내 침묵하던 김수호는 계약서 하단에 서명을 남기는 내 모습을 보면서 입을 뗐다. 마지막으로 계약서를 점검한 뒤 파일철을 덮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뜻 결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만년필의 뚜껑을 닫아 내려놓은 뒤 김수호를 마주 보았다. 강효서가 몰락하는 상황에서 그와 함께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자신이 대신해서 김수호를 만나겠다는 설연호의 제안을 마다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너만큼은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으니까.’
그때 전생의 김수호가 독주를 마시기 직전에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나에게 어째서 그토록 잘해 주었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김수호의 모습에서 죽은 정건후의 모습을 얼마간 투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어떤 식으로든 떨쳐 낼 수 없었다.
이 정도면 김수호가 기억하던 내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거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죽은 김수호에게 조금은 떳떳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심정을 눈앞에 살아 있는 김수호에게는 영원히 전할 수 없겠지만, 아무렴 어때.
“한동안 곤욕을 치르는 듯하던데. 이제 괜찮은 건가요? 참고로 낮에 올라온 인터뷰도 잘 봤어요.”
“그것까지 보실 줄 몰랐던 터라 조금 민망하네요. 감사합니다.”
“도해 길드의 행보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저와 사양의 구성원들 말고도 제법 많은 것 같던데요.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게 될지 궁금합니다.”
“늦지 않게 소식 전해 드리겠습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였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인 김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배웅해 주었다.
사양 길드 사무실을 벗어난 뒤에도 하늘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귓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연결한 뒤 뉴스를 통해 강효서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순간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문자가 떠올랐다.
[그래서 다음은 어디라고?] [일주일 뒤, 이천.]나는 휴대전화를 들어 천천히 답변을 입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