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48
148화. 명과 암 (2)
한도일이 떠나간 뒤에도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지난 두어 시간 동안 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곱씹으려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삼월에 이르러 내다본 바깥은 겨울의 흔적이 완전히 걷히고 초봄이 완연한 상태였다. 나뭇가지마다 듬성듬성 피어 있는 매화에 눈길을 둔 채로 오래전 한도일이 겪었던 일을 상상해 보았다.
그는 취우의 전 마스터가 사망했던 때의 일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당시의 정황은 정건후에게 전해 들었던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서 더해진 건 S급 헌터인 정건후를 두고 A급 헌터인 한도일이 마스터의 직분을 이어받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의 길드 안팎의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곤혹스러운 시간이었죠. 정건후 선생님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그 자리를 이어받느냐고 눈앞에서 따져 묻는 사람이 하루에 수십 명은 훌쩍 넘었습니다.’
한도일은 내가 가늠했던 것 이상으로 고단한 시간을 견뎌 왔던 듯했다. 그럼에도 그가 마스터 직위를 잇는 것에 불만을 품은 이들의 주장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수밖에 없었다.
‘헌터 아카데미에서 교사로 재직하겠다는 뜻을 밝힌 건 정건후 선생님 본인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내부에서 이런저런 반발이 있었지만……. 특정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려는 사람을 저지하는 건 쉽지 않았어요.’
정건후의 행보에 관해 솔직하게 말하는 걸 보면 한도일 또한 정건후와 내가 졸업식 전에 나눴던 대화에 관해 전해 들은 듯한 눈치였다.
내가 듣고 싶었던 건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진 뒤 나는 그에게 정건후와 만났을 적에 묻지 못했던 질문을 건넸다.
‘취우의 전 마스터가 게니우스의 창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 왔는지 알고 싶습니다. 더하여 그 물건이 가진 위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으실까요.’
사실상 이 질문은 정건후에게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정건후는 내가 게니우스의 창의 행방까지 파고드는 걸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내 질문을 듣고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한도일은 별다른 의심 없이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을 들려주었다. 질문이 꽤 직설적이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내가 성물을 소지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자체를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이미 회의실 안쪽으로 몸을 들인 설연호가 서 있었다.
“방금 다른 직원들도 다 퇴근했어. 미솔이도 삼십 분 내로 정리하고 나갈 거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근처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았다. 설연호에게 자리를 권하자 그 또한 맞은편에 앉으면서 호흡을 정돈했다.
“이 시간에 다른 사람들 없이 나만 부른 거면 그만큼 중요한 얘기겠지. 무슨 일이야?”
미묘하게 굳어 있는 내 표정을 의식한 건지 설연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한도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어서 정건후가 전해 주었던 이야기까지 더해 설명하고 있으니 설연호의 표정 또한 차츰 진지해졌다. 오래전에 사라졌던 게니우스의 창이 한국마력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으로 도달한 순간에는 여과 없이 탄식했다.
“듣고 보니 꽤 그럴듯한 이야기처럼 들리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건후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던 거라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진 상태이셨겠지……. 그런데 그 위험한 물건을 대체 왜 거기 숨겨 둔 거지? 그걸로 무슨 짓을 하려고?”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드문드문 말을 잇던 설연호가 나를 돌아보면서 질문했다. 이어서 그는 고개를 젓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건 따로 있어. 그 물건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직도 혈안이 되어서 찾는 거야? 성물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험한 물건인지는 잘 알려진 상태지만, 그 물건의 파급력이 얼마나 되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나는 그의 질문을 들으면서 한도일에게 전해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도 어느 대목을 설명하는 것이 적합할지 고민해 보았다.
“편의를 위해서 아티팩트나 무기의 등급을 기준으로 설명한다면 성물은 최소 SS급에 달하는 힘을 가졌다고 추정되고 있어.”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고민을 이어 나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뗐다. 설연호는 순간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마른침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편적인 아티팩트나 무기가 헌터 개개인이 가진 힘을 보충하고 스킬의 효력을 강화하거나 혹은 지속 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지만, 성물은 그 물건 자체에 아주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리고 그 힘을 원하는 상황에서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따로 훈련이 필요해.”
그즈음에서 말을 멈추고 설연호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훈련’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무언가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선배가 앞서 했던 질문에 대답해 보자면, 나도 그 물건이 왜 거기에 숨겨져 있는지는 잘 몰라. 그걸로 무슨 짓을 벌일 속셈인지도 알 수 없고. 당장은 그 물건이 정말 거기에 있는 게 확실한지, 그 여부부터 알아보고 있는 상태야.”
나는 순간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가 떼면서 말을 이었다.
“이건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 물건과 차진명 선배 사이에 연관이 있을 수도 있어. 거기다 그 선배랑 가까이 지내던 성민주 선배가 한마연에 들어갔으니 곁에서 뭔가를 전해 들었거나 보게 됐을지도 모르고.”
이어지는 내 말을 묵묵히 듣던 설연호는 어느 순간 시선을 떨구었다. 나 역시 허공에 시선을 둔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성물의 위력이 최소 SS급이라고 말했던 건 그 물건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서야.”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느 순간 미간을 슬며시 좁히던 설연호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눈앞에 앉아 있는 그가 머릿속으로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지 굳이 묻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모쪼록 내가 선배를 부른 건 앞서 말했다시피 성물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한 훈련이 필요해. 그리고 그 훈련을 선배가 도와줄 수 있을까?”
잠시 뒤 고개를 들더니 나와 시선을 마주치던 설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나는 근처에 두었던 태블릿을 가져온 뒤 그와 함께 들여다보면서 앞으로의 일정을 점검했다.
* * *
밤이 깊어질 무렵 취우 길드 사무실로 복귀한 한도일은 집무실에 머무르면서 밀린 업무를 살피는 데 열중했다. 그러다 문득 몇 시간 전에 마주했던 도해월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참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만년필을 내려놓은 한도일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해월은 얼마 전에 만났던 정건후가 짐작했듯이 성물에 관해 여러 가지 질문을 건네 왔다.
한도일은 도해월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으나 그럼에도 그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정건후에게도 전하지 않은 것이었다.
‘좀 더 길들여 봐야 알겠지만, 이 창은 게니우스라는 이름처럼 자신이 주인이라고 점찍은 한 사람을 영원히 수호하는 게 아닐까. 이 창을 손에 쥐고 던전을 활보하다 보면 아주 강력한 힘이 나를 보호해 주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지거든.’
한도일의 귓가에 오래전에 사망한 취우의 전 마스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전 마스터는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게니우스의 창 역시 힘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짐작일 뿐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한도일은 그토록 강한 힘이 깃든 물건이 한순간에 힘을 잃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정건후에게도 전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창을 도난당한 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물건의 행방을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를 써 왔었다. 정건후가 헌터 아카데미의 교사로 재직하게 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 건 맞지만 그래도…….”
한도일은 처음 만났던 순간에도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올곧은 자세로 앉아 있던 도해월의 모습을 떠올렸다.
잃어버린 창을 되찾겠다는 목표는 기나긴 시간 동안 정건후와 한도일이 도맡아 왔던 일종의 과업 같은 것이었다. 한도일은 그 고되고 어려운 여정에 도해월이 함께하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극구 반대했었다.
하지만 정건후는 자신과 달리 그를 믿고 그동안 타인에게 전하지 않았던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 듯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한도일은 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오늘 도해 길드 사무실을 방문하여 직접 대화를 나눠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도해월이 자신이 모르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맞닥뜨리면서부터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만났던 도해월은 정건후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목적을 향해 달려 나가는 사람처럼 매 순간 어딘가 비장해 보이는 상태였다.
“혹시 형도 나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이어서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한도일은 근처에 두었던 휴대전화를 들고 정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무렵 이천 게이트 사고를 언급하던 언론은 어느새 잠잠해졌다. 그사이 크고 굵직한 업무를 얼추 마무리한 나는 설연호와 함께 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일정을 계획했다.
“나오기 전에 미리 전달해 두기는 했는데, 혹시 직원 중에 또 묻는 사람이 있으면 출장이라고만 얘기해 줘. 다른 상황이었으면 둘러댈 것도 없이 그냥 얘기했겠지만, 이번에는 나랑 연호 선배만 들어가는 거니까.”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런데 정말 둘이서만 들어가도 괜찮겠어? 던전 등급이 그다지 높지 않아서 공략은 가능하겠지만, 인원이 둘뿐이라 체력 소모는 클 것 같은데.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괜찮을 거야. 다녀올 동안 무슨 일 있으면 선배 선에서 해결해 줘. 그럼 부탁할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간단한 인사를 전한 뒤 김미솔과의 통화를 마무리했다. 던전으로 입장하는 포털 근처에서 보급품을 점검하던 설연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전부 확인했어.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이제 들어갈까?”
마지막으로 배급받은 귀환석을 인벤토리에 보관해 두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설연호가 뒤를 따라서 포털을 밟았다. 이윽고 눈앞으로 환한 빛이 번지면서 주위의 풍경이 변모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