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낡은 진실이 잠든 호수 (3)
어느덧 숲의 중심부와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떼로 몰려든 몬스터와의 전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유스티티아의 검이 지닌 위력은 이때까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검이 내뿜는 강한 힘을 내 것으로 치환한 뒤 다시 상황에 맞게 배분하며 공격을 이행하니 몬스터와의 대치 또한 이전보다 수월해졌다.
휘익―!
“컥, 컥! 크흡! 켁!”
푹.
가볍게 숨을 고르던 나는 근처에서 달려드는 녀석을 발견한 뒤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러 몬스터의 목덜미를 깊게 베어 버렸다. 녀석이 주춤거리는 사이 곧바로 뒤를 돌아 등허리에 검날을 꽂아 넣자 회색의 살점을 지녔던 몬스터의 형상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쿵, 쿵, 쿵, 쿵.
이어서 몬스터를 처치했다는 시스템의 안내 문구를 확인하기도 전에 달려든 녀석을 향해 몸을 틀었다.
나는 거대한 멧돼지 형태의 몬스터가 송곳니를 세워 다리를 물기 직전 검날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만든 뒤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그러자 머리통이 잘려 나가면서 입을 벌린 그대로 뒤집힌 녀석이 허공에서 잘게 부서져 버렸다.
“해월아, 뒤에!”
곡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사라진 녀석의 잔상에 눈길을 두고 있으니 설연호의 외침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스스슥. 슥.
곧장 돌아본 곳에는 몸통이 굵직한 뱀이 최대한의 속력으로 마른 나뭇잎과 자갈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는 아가리를 힘껏 벌린 채 달려드는 녀석의 머리통 가운데를 겨누고 검날을 일직선으로 휘둘렀다.
머리통이 두 쪽으로 갈리고도 길게 늘어진 꼬리를 파닥이던 녀석이 마침내 연기처럼 흩어지면서 모습을 감췄다. 그 순간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저주받은 안개의 유령 (D)을 처치했습니다.] [저주받은 안개의 유령 (D)을 처치했습니다.] [저주받은 안개의 유령 (D)을 처치했습니다.]어둠 속에서 한층 선명하게 빛을 내는 활자에서 눈을 거두면서 검을 오른손에 옮겨 쥐었다. 그대로 축 늘어지는 어깨를 따라 자세를 숙인 나는 검날로 지면을 짚어 지탱한 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숨을 골랐다.
머릿속으로 이때까지 처치한 몬스터의 수를 헤아리고 있으니 근처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금세 내 곁에서 걸음을 멈춘 설연호는 말없이 보급품을 뒤적이더니 나에게 체력 회복 물약을 꺼내 건넸다.
“고마워, 선배.”
자세를 낮춘 채 그가 건넨 회복 물약을 들고 있다가 칼자루에 힘을 주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내 물약을 한꺼번에 털어 넣으면서 곁눈질로 바라본 검날은 흠집 하나 없이 멀끔한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만화경 안에서 내가 봤던 건 다 뭐였을까?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고 보니 한동안 잠잠했던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템의 상세 설명과 누군가 나에게 남긴 전언의 일부가 가려져 있었던 걸 보면 아이템의 기능이 전부 공개되지 않은 상태일지도 몰랐다.
사용 횟수를 늘리면 감춰져 있던 문장까지 전부 확인할 수 있게 되려나.
상념에 깊이 잠긴 채 시선을 틀고 보니 설연호는 이전처럼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나무 근처에 등을 돌리고 서서 물약을 들이켜는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설연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지금 우리가 선 위치와 최종 보스가 머무는 호숫가 사이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가늠해 보았다. 숲의 초입에서부터 우리의 길을 밝혀 주던 반딧불이의 불빛에 의지해 앞을 내다보고 있으니 설연호가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 움직이려고?”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호숫가가 나올 거야. 선배는 좀 어때? 괜찮아?”
“나도 좀 쉬니까 나아졌어. 방금 물약도 마셨고. 그나저나 처음 들어왔을 때랑 다르게 성물을 다루는 게 훨씬 능숙해진 것 같던데. 어떻게 한 거야?”
내심 염려했던 것과 다르게 설연호는 어둑한 와중에도 선명한 눈매를 부드럽게 휘면서 웃어 보였다. 그를 따라서 맥없이 웃어 보인 나는 고갯짓으로 정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일단 걷자. 가면서 말해 줄게.”
먼저 발걸음을 내디딘 나는 머릿속으로 설연호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해 보았다.
그보다 어느 순간부터 속마음을 읽던 목소리가 잠잠해진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새롭게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반쯤 기울이면서 설연호와 호숫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 뒤 멀지 않은 곳에서 물기 어린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저곳에 잠들어 있을 진실이 무엇일지 가늠해 보면서 검을 오른손에 옮겨 쥐었다.
* * *
호숫가에 진입하여 몬스터와 대치한 지도 벌써 꽤 시간이 지난 듯한데. 수면에 자욱하게 드리운 안개가 짙어질수록 몬스터는 활력을 덧입고 활보해 나갔다. 나는 만화경 내부에서 터득한 대로 검을 휘두르며 녀석들을 처치했다.
쿵. 쿵.
쿵.
치지지직.
조용했던 것도 잠시, 귓가에 맴돌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보스의 페이즈에 돌입했다는 신호였다.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애송이가 여긴 왜 들어왔어? 왜 들어왔어? 왜 들어왔어? 키킥. 킥. 키기긱. 까짓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네 친구 데리고 빨리 꺼져! 빨리 꺼져! 빨리 꺼져!
에코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메아리를 퍼뜨리며 나의 정신을 교란했다. 아무래도 녀석은 이대로 잡다한 몬스터를 계속 내 주위로 보내면서 체력을 소진하게 하려는 생각인 듯했다.
잠시 숨을 고르던 나는 두 손으로 쥔 검을 빠르게 휘둘러 안개로 빚은 불곰의 목덜미를 크게 베었다. 이어서 어느새 무릎과 허벅다리에 들붙어 송곳니를 세우던 멧돼지의 머리통에 검을 꽂았다가 빼내면서 뒤를 돌았다.
―아직도 날 못 찾았어? 날 못 찾았어? 날 못 찾았어? 여기 있잖아! 여기 있잖아! 여기 있잖아!
그 순간 귓가에 익숙한 음성과 옷가지가 젖을 만큼 묵직한 안개 사이로 희미한 빛의 잔상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복부에서 느껴진 타격감으로 인해 휘청거리던 나는 그대로 지면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크흑.”
넘어지기 직전 검을 지면에 내리꽂아 중심을 잡고 한쪽 무릎을 세웠다. 남은 손으로 복부를 감싸고 있으니 내장에 불이 붙은 듯한 통증이 불거졌다.
―뭐야, 너무 약한데? 약한데? 약한데? 이럴 거면 좀 더 빨리 나올 걸 그랬어! 빨리 나올 걸 그랬어! 빨리 나올 걸 그랬어!
어둠 속에서 호쾌한 웃음을 터뜨린 에코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목과 정강이가 안개에 둘러싸인 그녀는 허공을 자유자재로 널뛰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구불구불하게 늘어진 회색 머리카락을 날리며 돌아다니는 녀석을 노려보던 나는 복부를 거머쥔 채 천천히 일어섰다.
―나한테 걸린 이상 넌 이제 끝이야! 이제 끝이야! 이제 끝이야! 죽어! 죽어! 죽어!
등허리를 완전히 세우기도 전에 에코가 다시 한번 메아리를 퍼뜨려 공격했다. 눈에 제대로 띄지 않는 희미한 잔상 같은 것이 살갗에 닿는 순간 검을 쥐고 있던 어깨가 무너져 내렸다.
“윽!”
결국 지면에 납작하게 엎어진 채로 몸을 웅크린 나는 숨을 고르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통증을 견디며 정지해 있으니 에코가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숲의 초입에서 짐작했던 것처럼 녀석은 전생에서보다 훨씬 강해진 듯했다.
―진짜 죽은 건가? 죽은 건가? 죽은 건가? 왜 벌써? 왜 벌써? 왜 벌써? 크하하학! 킥! 끅!
걱정스레 묻는 척 메아리를 퍼뜨려 타격을 입힌 에코가 기이한 소리로 웃으면서 허공을 날아다녔다. 나는 고개를 반쯤 틀고 근처에서 날 바라보고 있던 설연호에게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재빨리 나무 뒤로 모습을 감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숫가에 치유 필드가 전개되면서 사방이 환하게 밝아졌다.
―꺄악! 악!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설연호가 내뿜는 신성한 기운이 맞닿는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에코가 발악하기 시작했다. 나는 바르작거리며 검을 고쳐 쥔 뒤 엎어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휘둘렀다.
푹!
무너진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 검날을 에코의 심장 부근에 밀어 넣자 녀석이 온몸을 뒤틀면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면서 검을 위쪽으로 뻗어 녀석의 머리통까지 한꺼번에 갈라 버렸다.
치이익.
펑!
에코 또한 안개로 빚어진 다른 몬스터처럼 불에 지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갈라지며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검을 쥔 손을 늘어뜨린 채 남은 손으로 젖은 이마를 훔치며 근처를 돌아보았다.
―윽, 끅, 이런다고 내가! 이런다고 내가! 이런다고 내가! 죽을 것 같아? 죽을 것 같아? 죽을 것 같아?
방금까지 이곳에 있던 에코의 형체는 사라졌으나 그녀의 메아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면서 무너진 오른쪽 어깨를 짚어 보았다.
“으윽.”
가볍게 짚었을 뿐이었으나 불에 덴 듯한 통증이 일었다. 에코를 찾아 달려오는 과정에서 몬스터에게 물린 탓에 이전에 생긴 부상이 심화된 듯했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설연호가 내 어깨를 내려다보며 눈을 찡그렸다. 그는 축 늘어진 어깨에 손을 얹은 뒤 눈을 감고 치유 스킬을 전개했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빛이 퍼져 나오더니 이내 상처 부위에 흡수되면서 신체가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틀고 호수의 표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온갖 소란에도 불구하고 잔물결만 맴도는 호숫가는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그 위로 두 개의 달빛이 반사되어 긴 궤적을 남긴 채 어른거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에코를 베었지만 던전의 공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칼자루를 두 손으로 고쳐 잡으면서 고심하고 있으니 문득 만화경 내부에서 보았던 알 수 없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옷차림은 지금과 달랐지만 설연호랑 동행해서 이 던전을 공략했던 장면도 존재했었다.
“에코는 아까 처리한 것 아니었어? 근데 왜 아직도……”
―내가 왜 죽어! 왜 죽어! 왜, 꺽, 끅, 왜, 왜 죽어!
나는 만화경 속에서 보았던 설연호와 똑같은 말을 전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설연호를 향해 희미한 잔상을 날리던 에코의 음성 또한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상태였다.
직전까지 거칠었던 숨을 억지로 삼키며 평정을 되찾고 오른쪽 어깨를 느릿하게 돌리면서 눈을 감았다. 에코의 머리통을 베었음에도 녀석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건 전생에서 들어왔을 때와 공략 방법이 달라졌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다면 서둘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구상하던 나는 느릿하게 눈을 뜨면서 쥐고 있던 검을 내려다보았다. 칼자루를 고쳐 쥐면서 검에 깃들어 있던 강한 힘과 감응하자 검날이 희게 빛을 냈다. 이어서 어둠 속에서 설연호와 눈을 마주친 나는 물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첨벙!
순식간에 호수에 발을 담근 나는 물의 높이가 무릎까지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그 다음에는 최종 보스 에코의 거점이자 알 수 없는 진실이 잠들어 있을 호수의 표면에 검을 깊이 꽂아 넣었다. 던전 공략의 답은 호수였다.
―내가 이대로 죽을 것 같아? 죽을 것 같아? 죽을 것 같아? 절대 아니지! 아니지! 아니지!
촤악―!
이윽고 잔잔하던 수면이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물살의 방향이 일제히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성난 파도처럼 솟아올라 날카롭게 내리꽂는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칼자루를 힘껏 붙들었다.
―거기 답이 있을 리가 없잖아? 없잖아? 없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나랑! 나랑! 나, 아악! 아아악!
다시 나타난 에코가 무엇인가 반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전에 검에 깃들어 있던 강한 힘이 일제히 호수 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물가에 깊이 파묻힌 검이 거세게 진동하면서 하얗고 불투명한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쿵! 쿵! 쿵!
―내 호수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대로 힘을 주어 버티고 있으니 물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며 던전에 균열을 만드는 감각이 손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침내 호수의 가장 깊은 곳에 힘이 다다른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환하고 찬란한 금빛 궤적이 물살을 가르며 저 아래에서부터 솟구치기 시작했다. 검이 생성한 방어막에 몸을 부딪히며 저항하던 에코 또한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을 끝으로 온몸이 불타올라 잿더미로 흩어졌다.
[던전 의 최종 보스를 처치하였습니다.] [던전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주변이 완전히 고요해진 것도 잠시, 거대한 금빛 궤적이 물살을 시원스레 가르며 튀어 올라 어둠 속에 형형하던 두 개의 달을 향해 뻗어 나갔다. 이윽고 그 빛이 던전 전체를 뒤덮기 직전 가장 바라던 안내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